324. 어느날 머리에서 뿔이 자랐다(4)
처음 이야기가 잘 끝난 후, 몇 가지 사연을 더 이야기했다.
세빈이는 타이밍을 잘 맞춰 조곤조곤 예쁘게 말을 해서 꽤 호감을 샀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나도 할 수 있는 만큼 부지런히 입을 놀렸고.
몇 번 등을 떠밀어주니 다른 신인들도 조금씩 마음이 편해졌는지 곧잘 자기 의견을 이야기했다.
늘 이런 상황이 될 수는 없으니 앞으로는 자기 밥그릇을 잘 챙겨야겠지만, 그래도 조금 뿌듯해졌다.
다행히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녹화가 마무리되었고, 민영 배우님과 영진 형님은 또 보자는 말을 남겼다.
민영 배우님은 아쉽다는 듯 마지막까지 세빈이 볼을 조물딱거리고 가셨고.
두 분은 촬영장을 떠나기 전, 세빈이와 재준이라는 신인을 한 번씩 바라보더니 날 보고 씩 웃었다.
마치 애기들의 재롱을 보는 듯한 얼굴이라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싱긋 웃어주었다.
저쪽에서 먼저 때렸는데 맞고만 있는 건 용납 못 하지.
게다가 마침 타이밍 좋게 쥐고 흔들 판도 깔려있었으니 사양하는 건 옳지 않았다.
제작진과 출연진 모두에게 인사를 끝내고 돌아갈 채비를 하던 그때, 우리 곁으로 다른 신인들이 다가왔다.
그들도 우리처럼 다른 분들에게 인사를 끝마치고 온 모양이었다.
세빈이를 옆구리에 끼고, 우진 형이 지켜보는 가운데 활짝 웃으며 그들을 반겼다.
우리 애를 끼고 형이 등 뒤를 지켜주니 어딘지 모르게 굉장히 든든했다.
우진 형은 이전보다 몸이 훨씬 좋아졌다며 틈틈이 운동도 다시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어깨가 전보다 더 넓어진 것도 같고.
자기 팀 옆에서 쭈뼛거리는 재준이라는 놈은 일부러 못 본 척했다.
지은 죄가 있으니 당연히 켕기겠지.
게다가 눈치 빠른 방송국 사람들도 무언가 눈치챈 듯하니,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 할 것.
그쪽 팀에는 조금 미안했지만, 입이 가벼우면 언젠가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차라리 초장부터 잡아서 나중에 큰 문제를 만들지 않는 게 낫다.
아마 저놈은 오늘 회사로 돌아가면 된통 깨질 게 뻔했다.
아까 은근슬쩍 저쪽 매니저 얼굴을 확인하니 안색이 좋지 못했다.
그때, 재준과 같은 팀 멤버가 다가와 고맙다며 나중에 밥이라도 사겠다고 했다.
차마 그런 사람한테 멤버 관리나 잘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서로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야죠.”
“저희도 도울 수 있는 건 언제든 도울게요.”
사람 일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전생을 통해 미래를 안다고 생각했던 나도 무엇하나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으니까.
게다가 내가 개입하면서 많은 것들이 틀어졌다.
가끔은 나랑 연관 없었던 일조차 달라져서 당황스러운 적도 많았으니까.
이들 중 내게 익숙한 이름도 있었고, 처음 보는 이름도 있었다.
비록 데뷔하는 그룹 중 대다수가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진다고 해도 앞으로 일은 모르는 거라고 생각했다.
간절할 때 받는 약간의 도움은 꽤 오래 잊히지 않는 법이니까.
그래서 최대한 많은 사람과 적당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어떤 사람은 도움을 줘도 나중에 나 몰라라 할 수도 있다.
그래도 그건 그때 가서 끊어내면 그만이니까 아쉬울 건 없었다.
다른 연예인들이나 제작진들에게도 좋은 이미지를 남길 수 있으니 일거양득.
순수한 호의가 아닌 어느 정도 계산적인 행동이었지만, 이전처럼 걱정되거나 찔리지 않았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보다 내 사람에게만 좋은 사람이면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다.
그렇게 서로 응원한다는 덕담을 나누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 감히 형을 속인 막내를 닦달했다.
“왜 그런 일이 있는데 형한테 이야기 안 했어!”
“이렇게 걱정할 거 아니까 그래서 그랬죠. 별일 없었어요, 진짜로.”
“그래도 말을 해야지!”
“환이 말이 맞다, 세빈아. 혹시 또 그런 일 있으면 꼭 형이나 다른 형들한테 말해.”
세빈이는 나와 우진 형의 닦달에 그러겠다고 대답하며 한참을 우리에게 시달렸다.
우진 형은 형 대로 혹시나 형이 없는 학교에서 안 좋은 일이 있을까 걱정이었는지 자못 진지한 얼굴이었다.
적어도 세빈이는 너무 빨리 어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다.
우리 보호 아래 좋은 것들만 많이 보고 더 많은 경험을 하면서 단단하게 자라길 바랐는데.
갑자기 훌쩍 큰 것처럼 구는 세빈이 모습에 괜히 마음이 심란해졌다.
이것도 내 탓인가 싶어서.
자꾸 나로 인해 안 좋은 일이 생겨서 막내인 세빈이까지 불안해진 건가 싶었다.
아무리 상담으로 감정을 버리는 법, 비우는 법 등을 배워도 쉽지 않았다.
인이 박이듯 가슴에, 뇌리에 새겨진 상처들은 쉽게 낫지 않았으니까.
당장 당사자인 나도 그것들이 쉽지 않았다.
더 어린 세빈이나 원래도 힘들던 찬이는 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울컥하고 감정이 치솟았다.
내가 멤버들에게 되레 짐을 지우고 있는 건 아닌가?
오랜 고민이 다시 한번 심장 아래서 요동쳤다.
“이제 고등학교도 들어갔으니까 저도 제 앞가림 잘하고 싶어서 그래요.”
“막둥아, 너무 빨리 어른 되려고 하지 마. 형 서운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는 세빈이를 껴안고 일부러 장난치듯 툴툴거렸다.
빨리 크지 말라고 막둥이를 붙들고 흔들었더니, 씩 웃으며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이것들이 형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진짜.”
그런 우리를 보고 우진 형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못 들은 척 해버렸다.
형, 내가 지난 생까지 합치면 대표님보다 많아….
어느새 지금 나이에 익숙해져 버렸지만, 가끔 누군가 나이를 말할 때면 기분이 묘했다.
그러면서 내가 살아보지 못한 서른 살 이후의 삶이 궁금하기도 했고.
“너희는 좀 천천히 커라, 그래야 형이 더 형인 척하지.”
“우진 형은 우리가 형 나이 돼도 형이잖아요.”
“그때 되면 다 컸다고 내 말 안 들을 텐데, 뭐.”
“아닌데! 그때도 형 말 잘 들을 건데!”
다 커서 형 모른척하면 가만 안 둘 거라는 우진 형의 말에 나도 세빈이도 크게 웃어버렸다.
형의 말을 듣고 나니 이전에 살아보지 못한 서른한 살의 삶은 더는 그리워하지 말아야겠다 싶어졌다.
그저 지금부터 차근차근 자라서 나중에도 지금처럼 좋은 사람들과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찼다.
한편으로는 세빈이가 자꾸 혼자 무언가 고민한다 싶었더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게 기분이 묘했다.
날 잡아서 준이 형이랑 이야기해야지, 안 되겠다.
주기적으로 준이 형과 상담하니까 그때 세빈이에 대해서도 말해야겠다고 머릿속에 새겨두었다.
아무래도 그냥 흘려넘기기에는 무언가 찜찜했다.
* * *
그렇게 생각만 했던 준이 형과의 상담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 하게 되었다.
촬영이 있고 얼마 후, 잠시 짬을 내어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던 내게 준이 형이 찾아온 것.
“환아, 지금 바빠?”
“아뇨, 괜찮아요. 무슨 일 있어요?”
평소처럼 부드러운 얼굴이 아닌 어딘가 심란한 분위기를 풍기는 준이 형 모습에 순간 걱정이 차올랐다.
“음, 일은 나한테 있는 게 아니고. 하,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왜요? 뭔데요.”
소파에 털썩 앉은 준이 형은 곤란하다는 얼굴로 뺨을 긁적거렸다.
분위기가 아주 어둡진 않은 것으로 보아 안 좋은 일이라기보다 걱정이 있는 건가 싶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준이 형은 의외의 말을 꺼냈다.
“최근에 찬이나 세빈이 괜찮아?”
“네?”
“아니, 영빈이랑 경환이가….”
준이 형이 꺼낸 두 명의 이름에 최근 둘의 모습이 반사적으로 주르륵 떠올랐다.
“아, 나 형이 무슨 얘기 하려는 지 알 것 같은데.”
“응?”
“둘이 요새 좀. 음, 뭐라고 해야 하지.”
“갑자기 성숙해졌다고 해야 하나?”
“어, 네. 그 비슷한… 근데 좀 어설픈….”
“그래! 내 말이 그거야!”
준이 형은 나와 주거니 받거니 말을 나누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워워, 형, 진정하고 말해요.”
“하아…. 이게 참.”
평소 리액션이 크지 않은 준이 형의 모습에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각보다 답답했던 마음이 컸던 걸까?
자기 행동에 머쓱해 하던 준이 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마른세수를 하던 형은 최근 둘의 모습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둘이 자꾸 무언가 쑥덕거리길래 뭐하냐고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웃기만 한다고.
그러더니 이제는 스스로 자기 일을 챙겨보겠다며 도와주지 말라고 했다고 했다.
예를 들면 아침에 혼자 일어나기, 연습 시간 챙기기, 스케줄 고르기 등.
형의 말을 들은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갑자기? 왜?
하지만 첫 번째, 아침에 혼자 일어나기부터 망했다.
애당초 둘은 팀에서도 가장 잠이 많은 사람이었고, 평소에 형들이 한참을 깨워야 일어나는 잠꾸러기들이었다.
최근 가뜩이나 잘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 탓에 더 잘 일어나지 못했고.
“그래서 알림을 그렇게 무식하게 많이 맞췄던 거예요?”
“어….”
요 며칠 동안 새벽에 알림이 무식하게 많이 울렸었다.
그때마다 나나 준이 형, 영빈 형이 알림이 들리는 방으로 쫓아 들어가야 했을 만큼.
며칠 지나지 않아 알림은 사라졌기에 그저 잘못 맞춘 줄 알았다.
알림을 잘못 맞춰놓고 잊어버렸나보다, 나중에 지우라고 해야지 하는 그런 생각.
둘이 직접 일어나보겠다고 하는 게 기특해서 사정을 아는 두 맏형은 참아보려고 했다고 했다.
하지만 부족한 수면 시간 때문에 날카로워진 경환 형이 둘과 한바탕했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가 없을 때 일이라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마도 영화 세트장에 공부하러 갔을 때 있었던 일인 듯했다.
내가 왔을 때는 이미 수습되어 몰랐던 것 같고.
“그래서 며칠 그러다 알림 다 껐구나.”
“어. 그건 나중에 방음 잘되는 집으로 이사하면 하라고 했어.”
“근데 아마 경환 형이 이야기 안 했으면 내가 이야기했을걸요….”
가장 먼저 일어나 아침을 챙기는 내게도 멤버들을 깨우는 사이 울리는 알림이 무척 거슬리긴 했었다.
이러다 다른 집에서 쫓아오면 어떡하나 싶기도 했고.
그래도 연습 시간은 어느 정도 스스로 챙기게 됐다고 말하는 준이 형의 얼굴이 유난히 핼쑥해 보였다.
“알림이나 연습 시간은 그러려니 하겠는데, 개인 스케줄 고르는 건 문제였어.”
“팀장님이 같이 골라주지 않아요?”
“그때 방송 나가서 스포한 거. 그거 원래 나, 힘찬이, 세빈이, 경환이 중에 두 명 와달라는 거였는데.”
“아, 설마.”
“찬이가 해보겠다고 했고, 같이 갈 멤버 누가 좋냐고 물었는데 경환 형을 고르더래.”
“팀장님은 그 조합을 왜 안 말리셨대요…?”
서글픈 얼굴이 된 준이 형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쪽에서도 찬이랑 경환이 조합을 바라는 기색을 내비쳤대. 그래서 팀장님도 그러마 한 거지. 누가 가더라도 별문제 될 건 없는 건이라, 이왕이면 바라는 조합으로 보내자 하셨대. 팀장님이 따라가면 괜찮겠지, 하면서.”
그때의 사고가 예고된 사고였던 셈.
팀장님, 왜 그러셨어요….
그때 스포 때문에 이후 인터뷰나 촬영에서 컨셉에 관해 집요한 질문이 잠깐 늘어나기도 했었다.
얼버무리느라 진땀을 뺐는데. 하.
점점 그늘지는 준이 형의 얼굴로 보아 이게 다는 아닌 듯했다.
“사실 이런 건 사소한 거라 그냥 애들이 애쓴다고 하고 말았는데.”
“말았는데요…?”
형의 목소리에 불길함을 느낀 내가 조심스럽게 되묻자 깊은 한숨과 함께 형이 대답이 들려왔다.
“자꾸 말을 안 해.”
“네?”
“무슨 일이 있는 티가 나도 말을 안 해. 자기 일은 자기가 할 줄 알아야 한다면서. 제일 걱정되는 애들이 입을 닫아버리니까 미치겠다, 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