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 어느날 머리에서 뿔이 자랐다(3)
“저는 왜 그랬을까를 먼저 고민해볼 것 같아요. 화도 나지만 화풀이를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상황은 아닐 것 같거든요.”
“오, 그렇지. 세빈 군은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거죠?”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만큼이나 ‘왜’라는 이유가 중요하다는 걸 세빈이는 알았던 모양이었다.
세상엔 이유 없이 험담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말 친하게 지냈던 사이라면 어떤 오해가 있을 수 있었으니까.
세빈이 발언에 나는 ‘별도시’의 지웅이를 떠올렸다.
“네. 제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요….”
“진짜?”
세빈이 말에 화들짝 놀란 내가 손을 덥석 잡으며 물어보자 다른 출연진분들도 걱정스러운 눈을 했다.
“이렇게 세상 순한 애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랬대.”
“아이고, 오늘 게스트 제대로 초대했네, 안 그래요? 이거 완전 경험자의 조언이잖아.”
민영 선배님과 영진 형님이 너스레를 떨며 MC를 바라보았다.
MC도 안타깝다는 눈을 하더니 조금 더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일이 있었어요? 환 군 반응 보니까 형들도 몰랐던 것 같은데.”
“형들이 알면 걱정하니까요. 근데 별일은 아니었어요!”
사람들의 관심이 몰리는 건 여전히 조금 버거웠는지 우리 막둥이 뺨이 붉게 물들었다.
“전에 저랑 언래블에 관해 안 좋은 이야기하는 걸 우연히 들었어요. 그 안 좋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친구여서 마음이 무척 안 좋았거든요.”
덩치만 컸지 아직 아기 새 같은 우리 막둥이가 조곤조곤 이야기를 이어갔다.
“화가 나서 쫓아가서 뭐라고 할까 하다가 그냥 그 자리를 피해버렸었어요. 속상하고 화도 나고. 친구라고 그래놓고 왜 그랬을까 싶기도 하고. 그래서 저는 혹시라도 나중에 비슷한 상황이 오면 꼭 파헤쳐볼 거라고 다짐했거든요.”
형들한테 피해 줄까 봐 그런 상황조차 속으로 품고 있어야 했던 막내가 안쓰러웠다.
“많이 속상했을 텐데. 앞으로는 혹시라도 그런 일이 있으면 꼭 가까운 어른들에게 이야기해요.”
MC는 자신도 아이가 있다며, 혹시라도 그런 경험을 할까 봐 늘 걱정이라고 하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입술을 꾹 깨물고 참아내던 그때, 포잉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쟨가보다.’
‘응?’
‘뒷말한 새끼.’
‘누구? 세빈이랑 같은 반?’
우리는 일렬로 반원을 그리며 앉아있는 형태라 다른 게스트를 쳐다보면 티가 났다.
하지만 내게는 포잉이 있지.
포잉은 수시로 현장의 모든 사람을 살펴보고 있었고, 세빈이가 이야기하는 도중 이상한 낌새를 느낀 듯했다.
‘쯧, 쟤 표정 변함.’
‘진짜 어설프네. 그걸 또 티 내고 있어?’
‘쟤네 데뷔한 지 반년 정도 됐다고 하지 않았음?’
‘진짜 가관이네.’
카메라가 찍고 있는데 저렇게 티 낼 거면 뒷말은 왜 하는 거야, 도대체.
나중에 따로 응징하리라 다짐하던 나는 심호흡을 하며 우리 막내 손등을 다독거렸다.
잠시 나를 바라보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환하게 웃던 세빈이는 말을 이었다.
“다른 분들 말씀처럼 사실 여부도 파악해야겠지만, 자신을 위해서 나중까지 대비했으면 좋겠어요.”
“대비?”
“네. 홧김에 그 친구에게 달려들었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요.”
무언가를 떠올리듯 힘없이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며 긴 속눈썹을 깜박거리던 세빈이.
그 모습에 주변에 있던 게스트들은 어떤 일을 상상했는지 안타까움을 담아 한숨을 내쉬었다.
세빈이 다쳐서 온 일은 없었는데…?
헐, 우리 애가 지금 연기까지 하는 거야?
등하교를 함께 하는 만큼, 애가 다쳤다면 우리가 모를 수 없었다.
숙소에서도 답답한 게 싫다고 늘 팔다리를 훤히 내놓고 다니는 애라 더욱더.
숨을 한번 고를 만큼 틈을 준 세빈이가 다시 말갛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꼭 본인을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안전장치를 마련했으면 좋겠어요. 요새는 무서운 세상이잖아요.”
그 순간뿐만 아니라 그 후까지 염두에 두라는 세빈이 조언에 현장에 있던 어른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의견들과 세빈 군이 말했던 내용을 종합해봅시다. 쫓아가서 화내기보다는 전해 들은 말이 사실인지 먼저 파악해보는 게 첫 번째. 두 번째로는 상황이 벌어진 이유를 알아보는 것. 세 번째는 상대에게 대응할 때는 반드시 안전장치를 마련할 것 정도겠네요.”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그들을 지켜보다 입술을 달싹이자 눈치 빠른 MC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17세 소년들 이야기를 들어봤으니, 형들 이야기도 들어볼까요?”
말할 수 있도록 타이밍을 마련해준 MC에게 감사의 눈짓을 전하고 입을 열었다.
“사실, 저희가 이성적으로 대처하면 좋을 테지만, 쉽지는 않잖아요?”
“그렇지. 사실 화나면 이거저거 따지기 힘들긴 하지.”
편하게 이야기하라고 맞장구쳐주는 형님에게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사연을 접수하고 방송되기까지 시간이 조금 흘렀을 테니까 지금 본인이 어떤 상황인지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자, 그럴 줄 알고 제작진이 그 뒤에 어떤 상황인지 파악해뒀습니다!”
“진짜요?”
내 말을 듣자마자 찡긋 윙크한 MC는 자료 화면을 요청했다.
이렇게 제작진이 철저하다며 장난스럽게 웃는 걸 보니, 말을 꺼내길 잘했다 싶었다.
신청자 보호를 위해 편지 형태로 보인 자료 화면에는 지금 신청자가 어떤 상황인지 적혀있었다.
“음. 모른 척 넘어갔으면 다시 말을 꺼내기까지 다시 용기가 필요할 거예요. 하지만 회피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환 군도 경험담인가요?”
은연중 눈을 빛내는 MC의 발언에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경험담이라면 경험담인데, ‘별도시’에서 제가 맡았던 역할이 생각이 나서요.”
“아, 맞아. 굉장히 사연 있는 캐릭터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었죠?”
“정말 연기는 처음인 게 맞아?”
슬그머니 연기했던 드라마 이야기를 언급했지만, 다행히 반응이 좋았다.
“네, 처음이었어요. 그리고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게 된 역할이었고요. 스포가 될지 모르니까 최대한 단순하게 말씀드릴게요.”
“스포 방지 중요하죠. 안 그래도 ‘별도시’가 굉장히 인기 있었잖아요?”
대본에는 없던 내용이지만, 조금씩 살을 덧붙였다.
“조금 극단적이지만 제가 맡았던 캐릭터인 임지웅이 친구에게 배신당했다고 믿거든요.”
“그 장면 저도 진짜 충격적이었어요. 너무 불쌍하더라고요.”
“저희 딸은 그거 보고 울었다니까요?”
PD와 우진 형을 살짝 살폈지만, 다행히 평온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오해도 있었고, 상황도 안 좋았던 그런 경우였어요. 그래서 혼자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당사자와 제대로 이야기를 해봤다면 다른 결과를 가져오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요.”
드라마를 본 사람들은 그때의 장면을 떠올리는지 안타까운 얼굴이 되었다.
물론 그런 상황이 생겼을 때 바로 쫓아가서 따질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럴만한 성격이 된다면 사연을 보냈을까?
나는 그 부분이 먼저 걱정되었다.
남에게 싫은 말 하는 게 어려운 사람도 굉장히 많았다.
게다가 화가 치솟는 당시에는 이성적인 판단이나 말을 하는 게 쉽지 않다.
“적어도 딱 한 번만 용기를 냈으면 좋겠어요. 그 친구를 정말로 잃기 싫다면. 시도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때 정말 없는 사람 취급해도 되잖아요.”
“잃어도 아쉽지 않다면 이렇게 사연을 보내지 않았겠죠?”
어린 자녀가 있다던 MC는 어쩐지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 배신감이 엄청 크겠지만, 그 친구를 잃지 않고 싶어서 용기를 내고 싶어서 사연을 보낸 거라고 생각해요. 이미 본인이 답을 알고 있는 거죠.”
“우리가 응원해주길 바란다는 말이네요.”
길게 풀어서 이야기했지만, 결론만 이야기하면 MC의 말이 맞다.
정말 신청자가 방법을 몰라서 사연을 신청한 건 아닌 듯했다.
자기 욕했다는 애를 다시 찾아가는 게, 믿는다는 게 이제는 호구라고 불리는 조금 삭막한 시대가 되어버렸으니까.
그저 그 친구와 대화해보고 싶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게 아닐까?
내가 꺼낸 이야기와 세빈이가 했던 이야기로 몇 마디 말이 더 오갔다.
다른 출연자들에게도 순서대로 한마디씩 의견을 묻고 사연에 대한 답변은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그때, MC인 홍민준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면 환 군, 이번에 새 영화 출연이 확정되었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앗, 그게 벌써 소문이 났어요?”
미리 우진 형이 말해주었던 질문이 나왔다.
은근슬쩍 영화 홍보도 조금 하면 좋을 것 같다는 팀장님 의견이 있었다.
그거 때문에 작가님과 대화를 했다고 하더니 허락받은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능청스럽게 대꾸하자, 민영 배우님이 웃었다.
“우리 환이, 나중에 나랑도 같이 드라마 하자. 미연 선생님이 얼마나 칭찬하던지.”
“김미연 선생님이요? 그분께 연기 수업 듣고 있어요?”
“하, 하하…. 네. 많이 부족하지만, 선생님이 예쁘게 봐주셔서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새로 들어간 영화는 어떤 영화인지, 김미연 선생님과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는지 등 온갖 질문이 쏟아졌다.
적당히 영화 이름을 전하며 진우 형과 함께 촬영하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새벽과 여진우가 우리와 친하다는 건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였으니까.
중간중간 세빈이도 대화에 끼워 넣고, 다른 신인 아이돌도 한 명씩 불러서 대화에 참여시키고.
우리만 다 받아먹으면 배탈 날지도 모르니 적당히 시선을 분산시켰다.
불러놓고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였던 경험은 우리도 충분히 해봤으니까.
조금이라도 먼저 경험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해주고 싶었다.
말 한번 걸어주는 게, 시선 한번 주는 게 처음에는 너무 간절했었다.
우리 애들 좀 봐주세요! 하고 소리치고 싶을 만큼.
보아하니 리더와 막내, 아니면 리더와 말 잘하는 멤버들이 나온 듯했다.
그 때문에 준이 형이 떠오른 것도 있었고.
세빈이 뒤에서 욕한 놈에게는 일부러 더 화사하게 웃어주었다.
저격 아닌 저격으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던 그놈이 더 찔리고 더 흔들리도록.
세빈이랑 같은 학교 친구라고 말하며, 일부러 더 챙기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영진 형님이 알만하다는 듯 웃었고, 민영 배우님의 시선도 오묘해졌다.
사람을 맥이는 방법은 정말 다양하다는 걸 깨달으며, 여러 가르침을 준 새벽 형들에게 고마워졌다.
오늘 이렇게 당사자 앞에서 먹이는 건 세비 형이 알려준 방법이었다.
키스 형도 꽤 잘 먹히는 방법이라고 했다.
형들은 우리를 붙들고 미운 새끼한테는 사람들 많은 곳에서 잘해주라고 했다.
사고 친 건 영원히 묻히기 힘들고 언젠가 터져 나온다고.
그러니 너희가 평소 주변에 보인 행실이 가장 큰 무기이자 방패가 될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괴롭히는 놈들은 명단 적어서 가져오라고 했었다.
자기들이 응징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엉뚱하고 재밌는, 그리고 무척 고마운 사람들.
세빈이 욕했다는 놈 때문에 안 좋았던 기분이 형들을 떠올리니 사라졌다.
나중에 더 다양한 방법을 알려달라고 해야겠다.
그 와중에 우리 막내는 여전히 방긋방긋 웃으며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받았다.
빨갛게 변한 볼을 보고 언제 볼 터치 했냐고 민영 배우님이 놀리기도 했고.
그 후로도 이어진 사연들에서도 똑 부러지게 자기 생각을 말하던 우리 세빈이.
작가님은 세빈이를 뚫어져라 보다가 무언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PD에게 속닥거렸다.
‘다른 방송에 추천해봐야겠다네.’
‘진짜?’
‘수줍음 많이 타는 것 같이 생겨서 야물딱지게 말한다고 마음에 든다고 함.’
‘크, 드디어 사람들이 우리 막내의 진가를 알아보는구나.’
하지만 나에겐 만능요정 포잉 님이 있다.
포잉은 다른 사람들의 소곤거림을 확인하며 우리에게 필요하다 싶으면 곧장 내게 전해주었다.
조금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던 포잉이 혀를 찼지만, 세빈이를 좋게 봤다는 점에서 충분히 기뻤다.
‘쟤네는 좀 힘들게 될 듯.’
‘누구?’
‘토끼 같은 놈 같은 반.’
‘아.’
역시 사람은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