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320)화 (320/456)

320. How you like that(7)

메모지가 덕지덕지 붙은 대본과 볼펜, 연습장 등이 어지럽게 회의실 테이블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네.”

“난 당장 누우면 잘 수 있을 것 같아….”

언래블은 늦은 시간까지 출연할 프로그램에 대한 자료 조사와 대본을 확인했다.

늘어지는 목소리와 반쯤 감긴 눈.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무척 피곤해 보였다.

점점 멤버들은 잘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었다.

이번 앨범까지보다 훨씬 많은 수의 섭외 요청이 있었다.

오죽하면 찬이는 팀장님이 보여준 목록을 보고 세빈이에게 자기 좀 때려보라고 했다.

너무 졸려서 꿈꾸는 거 아니냐면서.

찬이는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찬이를 괴롭힐 기회를 호시탐탐 노려오던 세빈이의 눈이 그 순간 번뜩였다.

그리고 이어진 찬이의 비명.

좁은 회의실 의자라 풀스윙을 할 수 없었던 탓일까?

세빈이는 찬이 옆구리를 야무지게 비틀어버렸다.

불의의 습격에 찬이는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며 바닥으로 데굴데굴 굴렀고.

얼마나 아팠는지 눈물까지 찔끔 보이는 찬이에게 세빈이는 산뜻한 얼굴로 ‘형이 해달라며’하고 웃었다.

한편,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맏형들의 한숨이 평소보다 깊었다.

얼마 전 형들은 멤버들이 친해지는 만큼 점점 서로 장난이 과해지는 것 같다는 말을 넌지시 흘렸었다.

한창 놀 때의 남자애들이니 얌전히 있어 달라는 건 무리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처음에 지적받은 후로 근 일 년을 얌전히 있었으니 꽤 오래 참은 셈.

긴장이 어정쩡하게 풀리는 순간이 사고 나기 가장 좋은 순간이라는 것을 알기에 맏형들의 걱정이 이해됐다.

점점 개인 활동이 늘어나니 본인들이 없는 곳에서 사고 칠까 봐 걱정이 태산 같은 듯했다.

“괜찮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요.”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근심이 가득한 준이 형을 달래며 찬이와 세빈이 사이로 자리를 옮겼다.

“자자, 지방방송 끄고 빨리 정하고 집에 가자. 졸려 죽겠어.”

“쟤가!”

“쉿, 질척이는 남자는 매력 없다, 최힘찬아.”

“이게 어딜 봐서 질척이는 거야!”

형들이나 팀장님이 한마디 하기 전에 찬이를 대충 어르고 달래며 시선을 돌렸다.

이미 경환 형은 반쯤 잠든 것 같았고, 나도 죽을 것 같았다.

최근 틈날 때마다 지금 찍고 있는 영화 촬영장을 오가느라 늘 시간이 모자랐다.

내 몸은 왜 한 개지?

그렇다고 본업에 소홀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아이돌이었고 가장 잘하고 싶은 건 노래와 무대였으니까.

노래할 수 있는 무대는 불러주는 곳이 있으면 무조건 달려갔다.

예능이나 다른 방송의 출연 요청도 최대한 다 소화하고 싶었다.

게다가 회사에서 크게 거를 게 없을 정도로 괜찮은 프로그램들이었다.

이전과 달리 언래블 전멤버가 아닌, 개인의 출연 요청이 제법 많았다.

예전에는 늘 억누르고만 살아야 했던 애들이라 그런 걸까?

욕심내도 괜찮다는 걸 조금씩 배워가면서 일에 대한 욕심도 무시무시해졌다.

우진 형도 팀장님도 멤버들에게 그건 잘못된 게 아니라고 해주었다.

욕심 없이 사람이 어떻게 발전하겠냐는 말과 함께.

하지만 그 욕심 때문에 몸에 무리가 갈까 걱정스러워하셨다.

함께 하는 회사가 ON 엔터라서, 늘 지지해주는 이 사람들이 우리 팀이라 얼마나 다행이던지.

그동안 두드러지는 개인 활동을 한 건 나와 준이 형뿐이었다.

종종 다른 멤버들의 출연 요청이 있었지만, 그보다 단체 활동이 더 많았다.

나로서는 그게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나보다 우리 애들이 더 많이 사랑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었으니까.

아니, 어쩌면 이전보다 더 언래블이 소중해진 걸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그저 지켜보고 응원하면서 닮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도 저들처럼 자신을 태워 빛을 낼 수 있을 거라는 걸 믿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직접 부딪히고 경험하고 서로를 배워가면서 알게 되었다.

우리 애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근사하고 멋진 사람들이라는 걸.

그러니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그만큼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고 늘 생각해왔다.

나와 우리가, 서로가 언래블이라는 게 자랑스러울 수 있도록.

이 마음을 들은 포잉은 네가 애들 엄마냐고 질색했지만, 딱히 다르게 표현할 방법이 없는걸.

그렇게 약간의 소란과 선택, 여러 감정이 뒤섞인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 * *

“오늘이지?”

“응. 팀장님이 오늘 방송 꼭 보라고 하셨어.”

“그러고 보면 그때 팀장님이랑 같이 갔다면서?”

“어, 팀장님이 우리 완전 잘했다고 했어.”

얼마 전 우리는 경환 형과 찬이라는 생각지 못한 조합의 섭외 요청에 고민했었다.

과연 큰 사고 없이 무사히 다녀올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둘이서 정말 괜찮겠냐는 걱정.

경환 형과 찬이는 멤버 중에서도 유독 사이가 좋았다.

찬이의 넘치는 에너지를 받아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경환 형이어서일까?

늘 찬이의 장난 대부분은 경환 형과 함께였다.

하지만 그건 우리끼리 있을 때의 이야기였으니.

“낯선 사람이 다가오면 뭐라고 하라고 했어?”

“안 돼요, 싫어요, 하지 마세요!”

“야, 그거 아냐.”

가서 착실하게 인사 잘하고 눈치껏 분량 잘 챙겨보라고 이것저것 일러줬는데 저따구로 대답하고 있었다.

이러니 준이 형 얼굴의 그늘도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그래서 모두가 둘을 보내놓고 엄청 걱정했는데 의외로 잘하고 왔다고 했다.

되려 혼자 촬영장에 있는 내 걱정을 했다고.

기특함과 어이없이 동시에 몰려오는 이상한 기분에 한숨을 푹 쉬기도 했었다.

분명 그때, 우진 형은 소현 팀장님이 둘 걱정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고 했는데?

연락 못 하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우리와 달리 경환 형까지 은근한 자신감을 뽐내고 있었다.

예능에 나가면서 경환 형이 자신 있어 했던 적이 없었기에 신기한 일이네 싶었다.

“시작한다!”

“왜 내가 떨리지?”

“나도 이상하게 긴장되네.”

촬영장에 가는 것 대신 둘의 예능을 선택한 나.

역시 공부보다 덕질이 최고였구나.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준이 형, 영빈 형, 나, 세빈이.

그리고 그 옆에는 마찬가지로 신기하다는 듯 화면에 보고 있는 경환 형과 찬이.

“…? 둘은 왜 그러고 있는 거야?”

직접 촬영하고 온 둘이 더 기대하는 눈으로 저러고 있으니 영빈 형이 어리둥절해 했다.

“어떻게 나오는지 우리도 몰라. 그냥 하라는 거 열심히 했어.”

“사람들이 잘한다고 하길래 잘했나보다 했지.”

“….”

세상 단순한 내 새끼 같으니라고.

잠시 숙소 천장을 아련한 눈으로 바라본 준이 형이 곧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너희가 안 다치고 다른 사람 다치지 않게 하고 왔으면 됐지 뭐.”

그렇게 준이 형은 오늘도 한 가지를 포기한 것 같았다.

짠한 눈으로 형을 봐준 나는 그 후 이어진 오프닝 멘트에 화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둘이 출연한 프로그램은 최근 예능프로 쪽 포텐이 좋은 SCTV의 프로그램.

그 때문에 팀장님은 박세날 PD의 입김이 있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박세날 PD는 ‘무사이’를 시즌제로 바꾸면서 계속해서 프로그램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데미갓이 사고 친 후 방송국 쪽의 대처가 빨라서였을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평을 받았고 그 후로 계속 괜찮은 시청률을 받았다고 했다.

우리 활동과는 상관없이.

그래서 박세날 PD 쪽에서는 우리에게 약간의 부채감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사실 우리는 그쪽에 큰 유감이 없었다.

이번 일처럼 방송국 쪽 사람이 작당한 것도 아니고 출연진 중 하나가 미친놈인 걸 누가 알았을까.

박세날 PD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발휘해 우리를 도왔으니 그것으로 만족했다.

뭐, 본인이 자발적으로 도와주시는 거면 마다할 필요도 없었고.

그런 여러 이유가 겹치면서 출연하기로 결정이 되고 나니 멤버 둘이 걱정됐던 것.

여러 번 다른 방송을 통해 얼굴의 익숙한 사람들과 낯선 사람들이 흘러나왔다.

“긴장한 거 봐.”

새로운 게스트로 소개되자마자 활짝 웃으며 인사하는 찬이와 평소보다 더 그린 듯 웃는 경환 형이 비쳤다.

“그래도 긴장한 게 티가 별로 안 나서 다행이네. 잘했어.”

찬이는 긴장할수록 말이 많아졌고 많이 웃었다.

반면 경환 형은 말이 조금 빨라지지만, 따로 티가 나진 않았고,

그래서 화면으로 보기에는 마냥 신나 보이는 똥강아지 둘이었다.

“별로 긴장 안 했어!”

찬이의 작은 반발이 있었지만, 슬프게도 이젠 아무도 그런 찬이에게 반응해주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다고 하기엔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찬이 귀가 붉은색이었다.

우리 힘찬이는 귀엽게도 긴장을 많이 하거나 부끄러우면 귀가 빨갛게 변하곤 했다.

이 얼마나 정직한 몸인가.

둘이 출연한 프로그램은 흔한 분위기의 방송이었다.

고정 멤버들이 있었고, 매주 다른 게스트를 초대했다.

고정들이 초대된 게스트와 대화를 나누고 소소한 게임을 곁들여 떠도는 소문 등을 이야기하는 그런 줄거리.

초대되는 게스트는 주로 곧 앨범이 나오는 그룹이거나, 드라마 영화 등이 시작하는 연예인들이었다.

우리 애들과 최근 방영을 시작한 드라마의 주인공 둘이 함께 초대되었다.

우리 애들이 들러리 취급받을까 걱정했는데 이제 보니 그건 모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찬이는 이야기 중간중간 생동감 넘치는 리액션을 잘 선보였고, 경환 형은 엉뚱하지만, 상황과 잘 맞는 질문을 곧잘 했다.

그러다 보니 둘이 카메라를 거의 하나씩 끼고 있다시피 한 것 같았다.

생각보다 잘해나가고 있었지만, 팀장님이 꼭 챙겨보라고 할만한 일인가 의문이 들 때쯤.

앨범과 뮤직비디오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고, 그때 우리는 왜 팀장님이 꼭 챙겨보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늘 어느 방송을 하러 가도 사전에 회사와 정한 부분까지만 컨셉을 공개했다.

간혹 전체 스토리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최대한 우리의 해석을 방송으로 풀지 않았다.

앨범마다 포인트가 되는 것들을 팬들이 직접 찾는 재미도 있을 테니까 최대한 오피셜은 자제했다.

헌데 찬이 이 녀석이 나가서 이번 앨범과 뮤직비디오에 관해 이야기하다 유도신문에 넘어가 버린 것.

뮤직비디오에서 등장했던 문이 어떤 의미였는지, 각기 다른 폐허는 뭐였는지 등등

촬영할 때 힘들었던 점 등을 말하다 몇 가지를 홀랑 털어버렸다.

그리고 그걸 뒤늦게 깨달은 경환 형이 찬이 입을 틀어막는 장면까지.

신나서 몸짓까지 곁들여가며 설명하던 그 모습.

- 앗! 저 이거 나가면 멤버들한테 혼나는데….

- 에이, 괜찮아요. 힘찬 씨, 멤버들이 뭐라고 하면 내가 시켰다고 해요.

- 진짜요? 저 그러면 증거물로 영상 찍어도 될까요?

순진무구한 얼굴로 눈을 반짝이며 대선배인 아이돌 출신 MC에게 들러붙는 우리 찬이.

그 후로 이어진 화면에서는 어디선가 본 듯한 꽃과 반짝이가 가득한 배경 사이에 찬이가 있었다.

- 들었지? 얘들아, 내가 그러려고 그런 게 아냐. 나는 늘 언제나 우리 래블이들 사랑한다! 경환 형, 형도 한마디 할래요?

- 히스 형, 형이 사다 둔 포도 내가 먹었어. 미안해

- 예? 갑자기?

- 이 일은 내가 말한 건 아니니까. 대신 나도 잘못했던 걸 고백한 거지.

- 얘들아, 언래블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거 맞아?

혼내지 말라며 영상 편지를 남기는 찬이와 핀트가 어긋난 경환 형.

그걸 지켜보던 다른 아이돌 선배가 당황스러웠는지 우리 안부를 물었다.

그 장면을 두 눈으로 차마 볼 자신이 없었던 듯 하준 형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 우리 팀장님은 우리보고 찬이와 경환 형을 잘 다져놓으라고 꼭 보라고 하신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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