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319)화 (319/456)

319. How you like that(6)

오늘 촬영하는 장소는 낡은 아파트였다.

운 좋게 버려진 아파트를 촬영 장소로 섭외할 수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근처에는 폐광이 있고, 이 아파트는 당시 직원들이 살던 숙소로 지었던 건물이라고.

폐광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동했지만 옆에 찰싹 붙어 따라온 포잉이 눈을 부라렸다.

촬영 전 둘러본 아파트는 폐가를 간신히 사람이 살 만한 상태로 돌려놓은 모습이었다.

정면에 보이는 낡은 싱크대와 나무가 뒤틀린 건지 제대로 닫히지 않는 수납장.

여기저기 녹이 잔뜩 끼어있는 경첩의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밖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창문까지.

여기저기 뒤적거리는 형의 모습이 마치 자기 집을 돌아다니는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이윽고 싱크대에서 과자 봉지 하나를 꺼내 들고 터덜터덜 소파로 향하는 진우 형.

가만히 있어도 먼지 냄새가 올라올 것 같은 소파였지만, 형은 아무렇지 않게 걸터앉았다.

저번 영화에서는 복수를 위해 자기 삶을 내던진 역할이더니, 이번에는 국정원 소속 블랙 요원 역.

그리고 오늘 촬영하는 장면은 형과 같은 조직을 쫓고 있던 광수대 형사와 마주하는 장면이었다.

블랙 요원의 특성상 가짜 신분을 내밀어야 하는데, 하필 광수대 형사라 긴장감이 흐르는 장면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대본을 한 번 더 확인하고 구석에 앉아 얌전히 메모장을 펼쳤다.

아까까지만 해도 멋진 모습 잘 구경하라던 장난스러운 모습은 어디 가고, 인물 설명에 있던 ‘설종현’이 앉아있었다.

까치집이 된 머리, 늘어진 흰 반팔 티에 츄리닝 바지를 입고 소파에 기댄 모습까지.

손에 리모컨만 쥐여주면 영락없는 백수였다.

하지만 얼굴에 드러난 표정은 동네 백수의 얼굴이 아니었다.

무언가 일이 잘 안 풀린 건지 눈에는 짜증이 서려 있었고, 얼굴 가득 피로가 묻어나고 있었다.

‘방금까지 나랑 웃고 떠들던 사람인데 지금은 다른 사람 같다….’

‘확실히 배우는 배우였네.’

오늘은 내 머리 위에 올라간 포잉과 속닥거리며 순간순간 떠오르는 느낌을 적어 내렸다.

내가 맡은 ‘도한겸’과 ‘설종현’이 처음으로 마주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얕잡아보듯 가벼운 목소리로 ‘뭐야, 애기네?’하고 중얼거리는 종현과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한겸.

바람 불면 날아갈 듯 가벼운 태도와 목소리였지만, 한겸은 도망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신을 키워준 양부를 떠올리고.

그만큼 설종현이 내보이는 태도와 달리 일말의 빈틈도 내어주지 않은 상대라는 뜻이었다.

지웅이를 연기할 때처럼 ‘도한겸’이 부딪혀야 하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싶었다.

상대가 어떻게 연기를 하는지, 어떤 버릇이 있는지 알아야 조금이라도 더 잘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우 형은 ‘설종현’이 되면서 걷는 모습이 조금 달라졌다.

진우 형은 평소에 굉장히 반듯한 자세로 걸었지만, ‘설종현’은 터덜거리는 모습이었다.

만사 귀찮고 피곤해 죽겠다는 듯.

‘저런 게 되네.’

익숙한 모습은 사라지고 낯선 타인이 눈앞에 있는 기분이었다.

그 모습에 감탄하며 내가 과연 저렇게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형이랑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같이 합을 맞춰보고 싶었다.

마침 영화도 나쁘지 않은 성적을 냈던 영화였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다 냉큼 받아들인 거였는데, 안일했던 내 생각에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어쩌면 나라는 존재가 이 영화의 유일한 오점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에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혹시라도 한숨 소리가 다른 사람에 들릴까, 오디오에 잡힐까 그마저도 조심스러웠다.

‘넌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초보니까 너한테 거창한 걸 기대하진 않았을 거임.’

‘응, 그렇겠지?’

‘걱정할 시간에 열심히 공부나 하셈.’

‘넵! 열심히 하겠슴다!’

내 기분 변화에 민감한 포잉은 속으로 삼킨 한숨마저 알아차렸는지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마치 위로하는 듯한 어설픈 토닥임.

한없이 가벼운 그 앞발이 너무 다정해서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후회 따위를 하고 있기에는 내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 * *

“수영 씨, 어때?”

김찬성 감독은 어딘가 의기양양해 보이는 얼굴로 수영에게 말을 걸었다.

수영의 시선이 지환과 진우에게 고정된 것을 본 것.

“뭐가요.”

그런 찬성이 못마땅했던 수영은 삐뚜름하게 대꾸했지만, 찬성의 얼굴에는 승리한 자의 미소가 머물고 있었다.

“제법 괜찮지 않아?”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괜찮기는.”

찬성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았지만, 수영은 그 의도대로 흘러 가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지환을 데려오자고 꼬드긴 것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게 눈에 훤했다.

배역을 만드네, 마네로도 한참을 투덕거렸는데, 이제는 배우 가지고도 그러게 생겼으니.

콧방귀를 뀐 수영은 조금 전 여진우의 연기와 그걸 지켜보던 지환을 떠올렸다.

진우의 연기를 꽤 많이 봐온 수영은 오늘따라 진우가 기합이 단단히 들어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마도 동생 앞이라고 평소보다 더 잘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한편으로는 사람을 대할 때, 늘 대충 흘려넘기던 진우에게 이런 면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진지한 얼굴로 카메라가 돌아가는 내내 숨소리도 죽여가며 메모하던 지환도 신기했고.

지환은 얼마나 집중한 건지 옆에 다가가도 알아채지 못했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노트와 그 밑에 깔린 대본.

두 개를 겹쳐놓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써 내려가는 모습이 재밌기도 했다.

한미영 작가가 왜 지환을 마음에 들어 했는지 조금을 알 것도 같았다.

그 ‘이진성’ 배우에게 달라붙어 질문 폭탄을 던졌다고 했을 때는 어찌나 놀랍던지.

이진성 배우는 평소 무뚝뚝하고 말이 없기로 유명했다.

현장에서 다른 배우들과 친분을 나누기보다는 자신의 역에 몰두하느라 바빴고.

그랬던 이진성이 옆에 조그만 신인 배우를 끼고 다니며 이런저런 설명을 해준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는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단순히 열심히 한다고 해서 모든 배우가 예뻐 보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환은 자신이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에게 녹아들 수 있는지 아는 듯했다.

‘어릴 때 눈치 많이 보고 자랐겠네.’

그래서 수영은 지환이 조금 안쓰러웠다.

태생적으로 사람을 좋아하고 곰살맞게 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미움받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

지환은 아마도 후자인 듯싶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이라고 보기에는 새로운 얼굴들을 어려워하고, 지나치게 깍듯했다.

한없이 풀어지고 활짝 웃는 얼굴을 보이는 것은 진우와 대화할 때뿐이었다.

옆에서 김 감독이 자꾸 무어라 말을 걸어대서 귀찮았지만, 애써 무시하며 둘을 관찰했다.

진우는 지환을 옆에 끼고 다니며 현장의 모든 사람에게 내보였다.

‘쯧, 쟤도 은근히 성격 나쁘다니까.’

진우가 지금 하는 행동은 지환을 무시하거나 괴롭히지 말라고 시위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별도시’ 촬영 초반에 지환을 함부로 대하는 이들이 몇 명 있었다고 들은 게 기억났다.

김 감독이 나사 빠진 것처럼 굴긴 해도 촬영장 기강은 무섭게 잡는 사람이라 괜찮을 텐데도 굳이 저러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지환에게는 이 사람 저 사람 소개해주는 척을 하고 있었고.

“아주 여진우도 여우야, 여우.”

옆에서 쫑알대던 김 감독은 그 모습에 기가 찬다는 듯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진우가 들으면 감독님이랑 일 안 한다고 삐질걸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놀리듯 툭 던진 말에 활어처럼 파드득거리던 김찬성은 저 둘에게 말하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하고는 멀어졌다.

잠깐의 휴식이 끝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이번 촬영은 여러모로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에 수영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 * *

“우리 화니 잘하고 있겠지?”

“걔 오늘 촬영 없는데?”

힘찬이 불안한 듯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경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했다.

“공부하러 갔잖아! 누가 막 괴롭히고 그러진 않겠지?”

“진우 형 있는데 별걱정을 다한다.”

“진우 형도 바쁠 거 아냐. 우진 형이 잘 챙겨주겠지?”

“당연하지. 우진 형보다 더 잘 챙겨줄 사람이 어딨어.”

불안한 듯 무의식중에 손을 입으로 가지고 가던 힘찬은 경환이 옆구리를 툭 치자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렸다.

그래도 전에 비하면 불안해하는 모습이 많이 줄어든 힘찬.

경환은 잠시 그런 동생을 바라보다 조금이나마 달래주기 위해 한마디 툭 던졌다.

“지환이는 잘할 거야. 너는 그쪽 걱정이 아니라 우리 걱정을 해야지.”

“우리도 잘하면 되지!”

경환은 불안한 기색을 다 떨쳐내지 못한 힘찬의 머리를 헝클었다.

하지 말라고 툴툴거리는 힘찬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가볍게 무시했고.

경환은 지환도 지환이지만 힘찬도 늘 걱정됐다.

지금이야 힘찬도 많이 나아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제는 혼자 있을 때도 무언가 공부하거나 연습, 혹은 게임을 하며 바쁘게 보내고 있다.

하지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혼자 있는 힘찬은 전원이 내려간 로봇 같았다.

텅 빈 눈으로 방구석의 어딘가를 응시하는 모습은 종종 무서울 정도였으니까.

그랬던 힘찬이 상담을 받으며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아픔을 모두 잘 다스리고 있었다.

경환은 종종 동생들이 너무 훌쩍 커버리는 것 같아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렇다고 너무 빨리 커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지환이는 처음부터 동생인 듯 동생 아닌 듯한 포지션이었다.

하지만 힘찬과 세빈이는 한참 어린 동생이 생긴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예전에는 말도 잘 못 붙이던 세빈이가 이제는 스스럼없이 경환의 몸 위에 올라타고 장난을 친다.

그러면서도 경환이 조금만 상대해 주지 않으면 화났냐고 주변을 맴도는 게 제법 귀여웠다.

대충 힘찬의 머리를 만져준 경환은 힘찬을 끌고 다른 스태프들과 출연진들에게 인사하러 가자고 등을 두드렸다.

“우리가 언래블 대표로 여기에 온 거니까 잘하자.”

“형이나 조심해, 난 늘 잘하거든?”

“어이구, 어련하겠어?”

그 몇 걸음 걷는 동안에도 투덕거리던 둘은 다른 스태프 앞에서는 예의 바르게 굴었다.

소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둘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예능 게스트로 경환과 힘찬, 둘에게 섭외가 들어왔다.

이렇게 단둘이서만 보내본 적이 없었던 터라 걱정을 태산같이 하던 소현이 직접 둘을 데리고 나왔다.

정윤은 늘 소현에게 걱정이 너무 많다고 타박했지만, 언래블 멤버들을 보고 있자면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얘네는 앞으로 넘어져도 어째서인지 뒤통수가 깨지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니까.

소현이라고 극성맞은 학부모처럼 애들을 쫓아다니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차라리 극성맞은 쪽이 나았으니까.

프로그램을 신중하게 고르고 늘 하나하나 조심한다고 했지만 사건·사고가 빈번했다.

오죽하면 박 대표가 무속인을 찾아갔을까.

조그맣게 한숨을 내쉰 소현은 일정 앱을 열어 오늘 있을 언래블 멤버들의 일정을 다시 확인했다.

하준이, 영빈이, 세빈이는 라디오.

경환과 힘찬은 예능.

지환은 영화 촬영장.

게다가 당장 내일은 아침부터 다른 일정이 있었다.

바쁜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여럿으로 쪼개져 일정을 하는 건 영 불안했다.

생각해보면 언래블의 첫 공식 스케쥴이었던 라디오에서 사고를 친 게 저 둘이었다.

그때 크게 혼이 나고 얌전해지긴 했지만,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제발 무사히 돌아가자, 얘들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