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 How you like that(1)
단조로운 멜로디가 물 흐르듯 부드럽게 화면을 감싸 안는 사이, 폭발하듯 하얀빛이 뿌려졌다.
눈 부신 빛이 터져 나온 후 눈에 남은 잔상처럼 화면은 온통 빛의 흔적이었다.
꽃망울처럼 퍼지던 빛이 한 꺼풀 잦아들 때쯤, 새하얀 공간에 덩그러니 문이 서 있었다.
새까맣고 반질거리는 윤이 나는 무거워 보이는 문.
그리고 그 앞에 선 언래블 멤버들.
신나게 섬에서 놀던 복장이 아닌 바래고 너덜너덜해진 옷이었다.
화려했던 머리카락 색은 모두 까만 머리로 변해있었다.
문 앞에 선 여섯 명이 서로를 바라본 후 제일 앞에 선 하준이 문을 열었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모두 문 너머로 사라지고 곧 문마저 소리 없이 닫히며 허공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텅 비어버린 공간은 순식간에 위에서부터 어둠이 내려와 온통 새카맣게 물들었다.
어둠에 먹힌 화면에 ‘El Dorado - Samsara(輪廻)’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깜박이다 스르륵 녹아버린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바람 소리.
그리고 폐허같이 부서진 건물들이 즐비한 곳에 경환이 홀로 서 있었다.
지저분해진 셔츠에는 핏자국과 찢어진 흔적이 가득했고, 입고 있는 청바지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마른 바람이 부는 그 한가운데 선 경환은 눈물 자국이 말라붙은 엉망인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쩌다 태어나 이렇게 살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주지 않아서.]
여태까지의 곡에 비해 잔잔하게 흘러가는 멜로디와 읊조리듯 흘러나오는 랩.
아릿한 느낌을 주는 자조 섞인 경환의 목소리에 하준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노이즈 낀 화면처럼 터덜거리는 경환의 모습 위에 사막 위를 걷는 하준의 모습이 겹쳤다 사라졌다.
[해봐, 보다 하지 마, 가 많아서,
손 하나 까딱하기 어려워서.
가진 게 없어서 욕심까지 도려내져서.]
아직 포기하지 않은 굳건한 눈이 폐허 너머 어딘가로 시선을 던지며 걸음을 옮겼다.
목에 걸려있는 가죽 목걸이만 새것처럼 반짝거렸다.
답답한 듯 미간을 찡그린 경환이 목줄 같은 목걸이를 당겨보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허탈한 몸짓으로 터덜터덜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는 경환.
카메라는 그런 뒷모습을 잠시 잡았다가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허밍 같은 멜로디가 어디선가 들려오고 천천히 시선은 노랫소리를 찾아 헤맨다.
이윽고 멜로디가 들려온 곳을 찾아낸 시선.
경환이 먼지와 무너진 건물들 사이에 있었다면, 세빈은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폐허에 있었다.
무너진 건물 더미에 걸터앉은 세빈의 목에도 경환의 것과 같은 가죽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아아, 당신이 그리워 하염없이 걸었어요.]
이전보다 훨씬 풍부해진 감성을 가득 담아 호소하듯 세빈은 노래했다.
홀로 남겨진 세빈은 애처롭게 허공으로 손을 뻗다 멈칫하고는 주먹을 꾹 쥐었다.
[이 걸음 끝에 당신이 있길 바라며,
무수히 많은 길을 걸었죠.]
세빈의 호소에 힘찬이 동조했다.
[내 정답이 당신이길 긴 시간 바라왔어요.]
사랑하는 누군가를 부르는 게 아닌 간절히 무언가 답을 갈구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빽빽한 나무들 사이에 있는 폐허.
이전보다 훌쩍 자란 듯한 세빈의 뺨에는 여전히 캐릭터 밴드가 붙어있었다.
낡은 밴드를 조심스럽게 만지던 세빈.
목적지가 이곳이 아니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무심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선이 문득 세빈의 발에 시선을 멈췄다.
신발도 없는 세빈의 발은 이리저리 상처투성이였다.
보는 이는 절로 안쓰러워할 모습이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타박타박 걸음을 옮기는 세빈의 등을 잠시 지켜보던 시선이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낡은 사무실이었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모니터에는 6명의 멤버들이 담겨있었다.
각자의 폐허를 힘겹게 걸어가던 그들.
누군가는 사막을, 누군가는 우거진 정글을, 또 어떤 이는 부서진 건물 사이를 위태롭게 걸었다.
그때, 멤버들 모두가 등을 돌려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제는 꿈꾸는 법을 알아요.]
카메라를 응시하는 시선에는 이전과 다른 굳센 각오가 엿보였다.
[어쩌다 태어나 이렇게 살았던 내가,
욕심조차 가질 수 없던 내가.]
누군가는 피식 웃기도 했고, 또 누구는 카메라를 향해 주먹을 흔들기도 했다.
영상을 타고 흐르는 멜로디는 그런 멤버들의 행동을 따라 증폭되듯 다채로운 화음을 뽐냈다.
[손 뻗어 움켜쥐라고, 뺏기지 말라고.
거짓 속삭임에 지지 말라.]
무력하게 끌려가지 않겠다는 단단한 다짐을 담은 영빈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며 하이라이트를 예고했다.
[당신이 알려준 소중한 삶을 알아요.]
터져 나오듯 공간을 가득 채우는 영빈의 간절한 목소리와 그 뒤를 받쳐주는 멤버들의 화음.
여섯 분할된 화면에는 험난한 길 끝에 단단한 벽을 마주한 여섯 명의 모습이 비쳤다.
창백한 얼굴의 지환이 카메라를 바라보며 씩 웃더니 목줄을 잡아 뜯어 던져버렸다.
[말했잖아, 혁명은 가장 밑에서 시작된다고.]
그와 동시에 모든 멤버들이 목줄을 잡아 뜯어 던져버렸다.
눈앞의 벽에 주먹과 발로 내려치기 시작하자 쾅! 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벽은 무너져 내렸다.
[밟으려 애쓰는 모습이 얼마나 재밌던지.
목줄로 안심했을 얼굴을 봐.]
지환이 자신들에게 목줄을 채운 사람들을 악당 같은 얼굴로 비웃었고.
[승리는 필요 없어, 자유롭고 싶을 뿐]
힘찬이 시원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무너져내린 벽 위에 당당히 섰다.
하나, 둘 돌덩어리를 밀어내고 벽 너머에 발을 내디뎠다.
곧게 뻗어진 하얀 빛을 뿜는 길.
각자의 위치에서 모두가 빛나는 길 위를 뛰었고 그 끝에 있는 무너진 신전을 보았다.
옛 신의 위엄을 나타내던 신상은 바스러지고 없었지만, 신전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나둘 그 자리에 도착한 멤버들은 서로를 확인하고 기쁜 얼굴을 했다.
아직 어린 태가 남아있던 첫 앨범의 얼굴 위로 조금 더 자란 지금의 얼굴이 겹쳤다.
서로의 몸을 툭툭 치기도 하고 하이파이브하며 무사함을 기뻐했다.
각자의 고통을 이겨내고 최후의 전장에 도착한 멤버들.
너덜너덜했던 옷들은 어디 가고 금박 장식이 달린 새까만 제복을 입고 있었다.
멀끔하게 넘겨 단정히 빗어 내린 머리와 가슴 쪽에 달린 메달들.
그들이 많은 것을 이겨냈다는 걸 시사하는 듯했다.
[어때, 이제 좀 달라 보여?
그때와 달라진 건 없는데 말이야.]
언제 지쳤냐는 듯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 된 언래블은 무너진 신전을 배경 삼아 힘차게 발을 굴렀다.
카메라 밖에서 언래블을 지켜보던 낡은 방의 벽이 흔들거리며, 가득 채웠던 화면들이 조금씩 부서졌다.
무너져 내리던 방에 있던 누군가가 주춤거리듯 뒤로 물러나다 방문을 열고 나갔다.
긴 복도,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지고 거미줄이 쳐진 오래된 건물이었다.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와 복도를 걷던 이는 그 끝에 있는 문을 급히 열었다.
그리고 다시 터져 나오는 빛.
[찬란하게 빛나던 당신과
빛무리를 삼킨 내가 만나,
거칠 것 없이 달릴 수 있었고.]
세상이 일그러지고 과자 부스러기처럼 투둑, 하고 조각나 떨어졌다.
언래블이 갇혀 있던 공간과 지켜보던 사람들의 공간이 연결되었다.
[이것 봐요,
쉬지 않고 달린 덕에 도착했어요]
숙련된 군인들처럼 한 몸처럼 맞아떨어지는 대형과 춤.
멤버들이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감춰져 있던 카메라가 요란한 소릴 내며 터져나갔다.
[이젠 내가 손잡아줄게.
함께 가요, 당신이 알려준 세상으로.]
그렇게 앞으로 뻗어진 손.
잦아드는 멜로디 사이로 언래블의 반대편이 카메라에 잡혔다.
여태까지 멤버들을 괴롭혀온 하얀 가면을 쓴 새카만 로브들.
그들이 주춤거리다 포기한 듯 가면을 내리며 로브를 벗어던지는 순간 암전되듯 뮤직비디오가 끝났다.
* * *
뮤직비디오와 타이틀 곡, 수록곡 두 개의 무대를 연달아 보인 우리는 숨을 돌리자마자 기자들을 상대해야 했다.
기자들의 질문은 이전보다 조금 더 매서워졌고, 눈빛에도 욕심이 묻어났다.
뭐 하나 잘 건지면 좋겠다는 욕망이 훤히 보여서 딱히 좋은 풍경은 아니었다.
그동안 열심히 연습한 터라 이번에는 세빈이도, 찬이도 꽤 많은 질문에 성실히 답했다.
하지만.
“가사가 의미심장한데 이건 지환 군 경험을 넣은 건가요?”
늘 그렇듯 어그로와 아슬아슬한 경계에 있는 질문은 쳐내도 계속 계속 나왔다.
“가사는 저희 작곡가님과 멤버들이 함께 만들었고, 너무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미리 회사를 통해 주의해야 할 기자님들 이름과 사진을 받았다.
물어뜯는 걸 삶의 낙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피하라는 의도였다.
스킬을 활성화한 터라 의도가 흉흉한 사람들의 속마음도 훤히 보여서 피하는 게 어렵진 않았다.
“첫 앨범부터 지금까지 시리즈로 엮어진 것 같은데 데뷔 때부터 의도했나요?”
어린 모습에서 지금의 모습으로 넘어오는 씬과 가사 중간에 들어있던 이전 앨범의 가사.
과거 앨범에서 나왔던 풍경들이 짧게 지나가는 것들을 놓치지 않은 날카로운 질문도 있었다.
‘이진아 기자님이다.’
‘너희 팬이라는 그 기자 아님?’
‘맞아. 이번 사건 때도 바로 공정한이랑 방송국 놈들 패는 기사 쓰셨더라.’
가끔 우리 솜뭉치들 이름과 겹치는 사람들을 만나면 이유 없이 반가웠다.
이전 팬 사인회 때 와줬던 팬 중에도 ‘이진아’라는 분이 계셨다.
저 기자님은 우리 팬인 것도 감사해서 금방 외우긴 했지만.
되도록 많은 팬의 이름을 외우고 싶었으나 기억력의 한계 탓에 쉽지는 않았다.
그렇게 무사히 기자님들과 만남을 끝내고 잠깐 휴식을 거쳐 이제는 팬들을 만날 시간이었다.
“솜뭉치들이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좋아해 줄 거예요.”
한바탕 움직이고 나서 데친 부추같이 늘어진 형 라인과 달리 찬이는 더 팔팔해졌다.
세빈이도 잔뜩 들뜬 덕분인지 평소보다 찬이 말에 답을 잘해주고 있었고.
찬이는 알까? 세빈이가 이제 자기를 말 안 듣는 동생 보듯 돌보려고 한다는 걸.
마음대로 뻗친 찬이 머리를 대충 넘겨주는 세빈이.
그 모습을 지켜보는 형들은 웃지 않기 위해 입꼬리를 실룩거리고 난리도 아니었다.
“내 새끼들, 이제 팀장님 없어도 다들 대답도 잘하고.”
“팀장님이 열심히 알려주신 덕분이죠!”
“크, 이제 찬이가 입바른 말도 할 줄 알고 말이야.”
“아앗…! 티나요?”
열심히 현장을 뛰어다니던 팀장님도 활짝 웃으며 멤버들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지환아, 혹시라도 컨디션 급격히 안 좋아지면 말해야 한다? 무리하면 안 돼. 너희도 마찬가지야. 너무 무리하지 마.”
팀장님은 칭찬 한 번 잔소리 한 번 공평하게 늘어놓고 다시 바쁘게 사라졌다.
곧 이어질, 팬들을 대상으로 한 쇼케이스를 위해 다시 한번 안무를 점검하는 사이.
우진 형과 현장 스태프분들의 부름에 서포트 팀분들이 달려들어 우리를 다시 예쁘게 만들어 주셨고.
“자자, 오늘도 사고 없이 무사히 멋지게 잘하고 오자.”
데쳐진 부추에서 다시 언래블 리더 하준으로 돌아온 형이 손을 내밀며 어김없이 잔소리 한마디를 얹었다.
그 위에 하나씩 더해지는 멤버들의 손.
다사다난했던 모든 것들을 넘기고 우리는 다시 앨범을 낼 수 있었고, 이렇게 다시 무대 위에 오른다.
“We`re Unravel!”
언제나처럼 무대를 오르기 전 서로를 응원하는 구호를 힘차게 외친 우리.
솜뭉치들이 기다리고 있는 무대에 오를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