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 Scream(2)
회사 분들은 나 홀로 공정한과 마주하는 걸 원치 않았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며 정윤 실장님, 소현 팀장님, 우진 형이 옆에 붙었다.
멤버들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다 연습실로 쫓겨났다.
있어 봤자 좋은 꼴 못 본다는 소현 팀장님의 명령이었다.
끌려가는 것처럼 구시렁거리던 멤버들은 자기들끼리 소곤거렸다.
얼굴을 똑똑히 기억한다느니, 나중에 뒤통수를 때릴 거라느니.
순하고 착하기만 했던 멤버들이 세상의 쓴맛을 배운 것 같아 웃기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그 모습을 허허하고 웃는 나를 소현 팀장님이 혀를 차며 지켜보았다.
팀장님이 무어라 중얼거린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팔불출이라니, 이 정도는 보통이잖아?
그렇게 한바탕 작은 소동이 지나고 실장님의 사무실에 실장님과 팀장님, 내가 앉아있었다.
우진 형이 그 사람을 데리고 온다고 나갔고.
“환아, 다시 말하지만, 아무것도 무서워할 필요 없다. 팀장님 믿지?”
“그럼요.”
“여차하면 몇 년 질질 끌면서 어떻게든 소송 걸어주마. 법무팀 놀려서 뭐 해, 그런 데라도 써야지. 그렇게 변호사비 탕진하고 나면 거지꼴로 와서 빌겠지.”
정윤 실장님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무서운 이야기를 하셨다.
세상에.
옆에 있던 포잉은 꽤 만족스러운 듯 괜찮은데? 하고 있었고.
역시 이 요정이나 실장님이나 적으로 두면 안 돼.
그렇게 굳게 다짐을 하며 긴장했던 마음을 다독이고 나니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실장님, 접니다.”
“들어와.”
우진 형의 목소리, 그리고 천천히 열리는 문.
우진 형의 뒤를 따라 들어온 공정한은 촬영 때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거뭇거뭇해진 얼굴, 부르튼 입술, 잔뜩 핏줄 선 눈.
사람인지 좀비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지, 지환아.”
“잠깐. 다가오지 말고 그쪽 자리에 앉으세요. 앉아서 대화하시면 됩니다.”
“지금부터 하는 모든 발언은 녹음할 겁니다.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나가시면 됩니다.”
나를 보자마자 손을 뻗으며 다가오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저 사람이 내게 했던 것들이 생각나서가 아니라 정말 좀비 같아서.
하지만 그런 내 몸짓이 두 분에게는 다른 의미로 해석됐는지, 표정에서 온기가 모조리 사라졌다.
차갑게 내뱉은 후 보란 듯이 테이블 위에 녹음기를 내려놓은 소현 팀장님.
공정한의 바로 뒤에는 우진 형이 서 있었다.
여차하면 들어서 던져버릴 것처럼 매서운 눈을 하고.
모두가 나를 보호하려고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너무 잘 보여서 가슴이 찡해졌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겨우 고개를 끄덕인 공정한은 얌전히 소파에 앉아 무릎 위에 손을 포개 올렸다.
지환의 기억 속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예의 바르고 소극적인 모습.
언제나 다그치고 윽박지르던 정한이 이렇게 볼품없어진 모습을 지환이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
“네가… 그렇게 쓰러지고 난 후에 아주 많은 생각을 했단다. 내가 염치가 없었지?”
더듬거리면서 말을 이어가는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구역감이 치밀었다.
“미안하다.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어. 매일 같이 악몽을 꾸느라 잠도 못 잤어, 지환아. 정욱이가…!”
미안하다는 말보다 자기가 힘들다는 게 몇 배나 더 중요한 사람이지, 그래.
“아버지가요? 꿈에서 큰아버지를 원망이라도 하시던가요? 이제야 죄책감이란 게 생겼어요?”
“나는 너희를 위해서….”
“저희를 위해서라고 하지 마세요. 그냥 솔직하게 돈이 탐났다고 하세요. 우리 엄마, 아빠 목숨값이 탐나서 그랬다고 하시라고요.”
그는 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저, 지금은 궁지에 몰려 힘들고 벗어나고 싶어서 미안하다고 하는 것뿐.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역하고 더럽다는 생각에 말이 점점 빨라졌다.
지환이가 그 긴 시간 동안 고통스러워했고, 누나가 얼마나 오랫동안 아파했는데.
이제 와서 사과라니.
무릎 위에 얹었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욕설을 내뱉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어야 할 만큼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거렸다.
“내가, 내가 다 잘못했다! 내가 돈에 미쳐서! 너희한테 그랬으면 안 되는데. 미안하다, 미안해. 지환아!”
악에 받쳐 쏘아붙이는 내게 무릎을 꿇은 채, 울면서 비는 공정한의 모습이 하나도 기껍지 않았다.
“당신, 어디 가서 내 친척이라고 하지 마세요. 당신도 당신 가족들도 두 번 다시 나랑 누나 앞에 그림자도 보이지 말라고요. 아셨어요?”
다시 보이면 그때는 나도 내가 어떻게 할지 모르니까.
녹음되고 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기에 문제가 될지도 모를 발언은 꾹 눌러 참았다.
포잉이 내 무릎 위에 앉아있지 않았다면, 일어나서 멱살을 잡았을지도 모를 일.
치미는 분노와 억울함, 서러움이 마구 뒤섞여 숨소리가 거칠어지자 양쪽에서 두 분이 내 손을 잡아주셨다.
괜찮다고, 이제는 혼자 참지 않아도 된다고.
꼭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것 같았다.
“지환아, 실장님이 이야기해도 괜찮니?”
“네….”
가빠진 숨을 고르는 사이 실장님이 내 손등을 토닥여주셨다.
이제는 실장님한테 맡기라는 듯이.
“공정한 씨, 앞으로 공지환, 공연희 두 사람에게 일절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연락하지 않고,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겠다는 이행각서입니다. 내용 살펴보시고 서명해주세요.”
실장님은 우리 둘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누구에게도 하지 않는다는 조항과 그 밖의 자세한 내용을 작성해 둔 종이를 내밀었다.
더불어 공증받은 각서는 법적 효력이 미미해도 소송 시 참고 자료로는 충분하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혹시라도 이행하지 않을 경우, ON 엔터는 법적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말도 함께.
실장님의 말이 모두 끝나고 공정한이 내게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정욱이한테 그만 찾아오라고 해줘.”
결국은 살고 싶어서 내게 찾아온 사람이었던 것.
“그건 아버지께서 공정한 씨 행동을 보고 판단하시겠죠. 가세요.”
무어라 입을 벙긋거리던 공정한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우진 형, 실장님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공증 가능한 변호사가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역시 철저한 우리 실장님.
소현 팀장님은 내 손등을 토닥이며 계속 속삭이셨다.
“지환아, 이제 다 괜찮을 거야. 괜찮아.”
다정하고 애틋한 목소리.
한바탕 쏟아내고 나니, 이번엔 서러운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저런 인간 때문에.
저런 보잘것없고 하찮은 인간 때문에 그렇게 아파야 했던 지환이 너무 가여워서.
나도 모르게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에 멍하니 팀장님을 바라보자, 눈가에 물기가 가득한 팀장님 얼굴이 보였다.
“내 새끼, 조그만 게 무슨 짐이 이렇게 많아서는.”
아픈 얼굴을 한 팀장님이 나를 껴안고 한참 동안 등을 다독여주셨고, 품에 안긴 나는 내내 흐르는 눈물을 그냥 두었다.
오늘까지만 실컷 울고 이제는 다 털어버리자고.
그렇게 앞으로는 정말 좋은 일만 있을 거라고 중얼거리며, 아주 작았던 어린 지환을 떠올렸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잘 모르던 그 작은 아이가 안타까웠다.
그래도 저 사람은 이제 우리를 괴롭히지 못하니까 안심하라고.
소현 팀장님과 포잉의 따뜻한 체온에 기대어 두 사람 몫의 슬픔을 모두 털어내듯 한참을 울어야 했다.
* * *
“어휴, 잘생긴 내 새끼 얼굴이 아주 붕어가 다 됐네!”
“소현팀, 소현팀도 만만치 않아.”
눈만 끔뻑거리다 우진 형이 건네준 차가운 아이스팩을 눈 위에 얹었다.
“애들 보면 또 난리 나겠네.”
“하, 하하….”
못마땅한 듯 투덜거리는 목소리에는 걱정이 잔뜩 스며들어있었다.
“이제 지환이 너는 아무 생각 말고 컴백 준비나 착실히 해.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전 진짜 한 게 없는데.”
“한 게 없긴. 두 번 한 거 없으면 회사를 둘로 쪼개겠다, 이놈아!”
타박 아닌 타박에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 사람들의 걱정을 알기에 그저 그러겠노라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는.
그들이 꾸몄던 대로 일이 진행됐다면, 나도 누나도 그리고 우리 애들도 무척 곤란할 뻔했다.
차라리 거기서 내가 쓰러지고 이렇게 마무리되어서 다행이지.
“휴게실에서 조금 쉬다가 붓기 좀 빠지면 애들이랑 숙소 가서 쉬어.”
“네엡.”
기운이 쪽 빠져서 흐물거리는 나를 부축해주며 우진 형은 내 몸이 성한지 계속 확인했다.
“실장님, 팀장님, 우진 형, 고맙습니다.”
“됐어, 이놈아. 네가 멀쩡해야 우리도 돈 벌어.”
“쯧쯧, 소현팀은 그게 문제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 타이밍에 부끄러워한다니까?”
“뭐요? 난 실장님처럼 철면피가 아니라 그렇거든요!”
감사 인사를 하자마자 실장님과 팀장님은 또 투덕거리기 시작했다.
우진 형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평온한 얼굴로 나를 데리고 사무실을 빠져나왔고.
“고생 많았다, 우리 환이.”
“고생은요. 차라리 이렇게 털어낼 수 있어서 다행이죠.”
포잉이 자세히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손을 썼다는 건 공정한의 상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요망한 우리 요정님은 새침을 떨었지만, 그 정도도 모를 내가 아니지.
휴게실 소파에 드러누운 내게 쉬고 있으라는 말을 하고 우진 형이 나가자, 포잉이 내 배 위에 올라왔다.
‘비실비실한 계약자야, 이걸로 만족함?’
포잉의 목소리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더 괴롭힐 거리가 아주아주 많다며 자신이 유능한 요정이라고 어필할 정도로.
‘괜찮아. 그 사람 더 괴롭히면 미쳐가지고 또 나나 누나한테 뛰어올지도 몰라.’
‘쳐다도 못 볼 정도로 무섭게 해주면 됨.’
여전히 불퉁한 포잉의 목소리에 웃으며 천천히 포잉의 몸을 쓰다듬었다.
앞발로 툭툭 나를 두드리며 불만을 표하던 포잉도 얌전히 쓰다듬을 받았고.
‘그냥. 이제 다 정리됐으니까 앞으로 하고 싶은 일 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
‘언제는 아이돌 하기 싫다더니?’
‘그때는 그냥 너무 막막하고 힘들었으니까.’
처음 우리 애들 꽃길을 깔아보자! 하고 마음먹었던 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뒤집혔었다.
연습은 고됐고, 사람들 틈에 끼어 사는 건 생각보다 더 괴로웠다.
내 본진이 성장하는 걸 실시간으로 보는 건 무척 행복한 덕질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장벽은 높아도 너무 높았고, 여태까지의 나와 다른 삶을 사는 건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했다.
정말 포잉이 없었다면, 나를 이해하고 배려해주는 언래블 멤버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이제는 무대의 즐거움을 알고, 작곡이 얼마나 재밌는지 알아버렸다.
내 팬이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렇게 잘 알아버렸는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건 무리였다.
‘포잉, 고마워.’
‘별 시답잖은 소리를.’
부끄럼 많은 내 요정님께 고마운 마음을 듬뿍 담아 말했지만,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부끄러워서 꼬리가 춤을 추는데, 포잉은 모르는 것 같아서 더 귀여웠달까.
풍랑에 흔들리던 조각배 같던 마음이 이제는 고요해졌다.
다행히 모든 것이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듯했다.
* * *
포잉은 실없이 웃으며 자신을 쓰다듬는 계약자를 바라보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쩜 이렇게 한결같이 무른지.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이라면, 용서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
포잉이 공정한에게 걸은 주술에 가까운 암시는 지환이 용서한다고 말하거나 포잉이 풀어줘야만 해결되는 것.
자신의 계약자는 물러터져서 그 말을 할까 봐 노심초사했지만, 다행히 그렇게까지 순두부는 아니었던 모양.
공정한이 오늘 제대로 반성하고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포잉도 용서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꼬락서니로 보건대 아직 덜 혼이 난 것 같았다.
나른하게 웃으며 지환의 배에 몸을 늘어트린 포잉은 정한의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흡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