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305)화 (305/456)

305. Scream(1)

정윤은 이번 사건을 처리하면서 누군가 돕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당장 눈앞의 작가는 갑자기 메일을 보내왔고, 누군가 작가와 PD의 대화 내용을 보내왔다.

메일 주소가 눈에 익었다.

이전부터 늘 무언가를 제보하던 메일이었다.

‘애들 팬 중에 해커라도 있는 걸까?’

어떻게 아는 건지 이렇게 늘 필요한 타이밍에 적절한 제보가 있었다.

빼도 박도 못할 증거물과 함께.

이경주 작가에게 이야기하고 싶다고 연락했더니 회사로 곧바로 찾아왔다.

메일 보내주신 것 잘 확인했다고 말하자마자, 갑자기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돼서는 울기 시작했다.

“흐어엉…! 제가 진짜 그러려고 그런 게, 히끅!”

“일단 좀 진정하시죠.”

다 큰 어른이 이렇게 추하게 우는 건 또 오랜만이라 정윤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아는 이경주 작가는 이렇게 심지가 약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어딘가 지독하게 정신적으로 몰린 듯 시선이 내내 불안했다.

늘 깔끔하고 도도한 분위기를 풍기던 사람이 지금은 몇 년 은둔했던 사람처럼 퀭했다.

그 일이 있고 불과 일주일도 안 됐는데.

두서없이 묻지도 않은 일까지 주절주절 말하면서도 끊임없이 주변을 살폈다.

“제, 제가 다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인제 그만해달라고 해주세요…!”

무엇을?

울먹이던 경주가 숫제 매달릴 것처럼 정윤에게 달려들었다.

제발 자신 좀 살려달라고, 잠을 잘 수가 없다고 차라리 감방에 보내면 가겠다고 했다.

앞뒤 사정은 모르지만, 정윤은 냉정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본인이 잘못했던 일은 모두 밝히세요. 그리고 죗값을 치르면 될 겁니다.”

“네, 네! 꼭 그렇게 할게요!”

그렇게 경주는 몇 번이나 고개 숙여 고맙다고 말하고 회사를 떠났다.

그리고 그 광경을 포잉은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별다른 설명을 해주지 않고 증거물만 보냈는데도 잘 대응한 정윤의 모습이 흡족했다.

역시 계약자보다는 똑똑하다고 생각하며 이후 이어질 일들을 떠올렸다.

포잉은 공정한에게 한 것보다 훨씬 약한 처벌을 이경주에게 행했다.

잠들만하면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책이 찢어지고.

호텔이나 다른 곳에 가도 비슷한 경험이 계속됐다.

겨우 잠이 들면 여태까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벌인 일들이 모두 돌아와 목을 졸랐다.

포잉은 망둥이 때 일을 근거로 장로회를 설득했다.

개입하지 않고 놔뒀더니 계약자의 목숨이 위험했다고.

이번에 계약자가 혼절했던 일을 적었다. 거기에 유사한 일이 반복될 경우 계약 이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상처 입은 영혼인 점을 들었다.

장로회는 직접 해를 가하지 않는 것만 아니라면 포잉의 능력을 모두 사용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차라리 한번 화끈하게 처리하고 그 후로는 조용히 가는 게 낫지 않느냐고 설득한 결과였다.

여차하면 또 반성문 쓰고 말지 했던 포잉은 만족스럽게 웃었고, 장로인 포포에게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았다.

그가 힘써주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가장 잔챙이인 이경주는 치웠다.

주영욱의 실토로 최병섭은 더는 PD로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20년 경력을 잃었으니 그에게는 그보다 큰 벌은 없을 것.

이후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죽기 직전까지 갔었다는 소식을 확인했다.

이 일에 연루된 사람들의 소식을 듣고 불안이 극에 달했던 모양이었다.

포잉은 따로 손대지 않아도 알아서 처리되어 일을 줄었다고 생각했다.

기분이 좋아진 포잉은 꼬리를 살랑거리며 주영욱과 공정한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지 고민했다.

* * *

연희는 큰어머니인 화영의 연락을 피하지 않았다.

자신이 어설프게 대처해서 하나뿐인 동생이 쓰러졌다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약한 애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미어지는 심장을 부둥켜안고 ON 엔터에 방문했다.

지환의 얼굴을 보면 이성을 잃을 것 같아 일부러 찾지 않았다.

지금은 감정보다 이성의 외침을 따라야 할 시간이라는 걸 알았다.

전후 사정과 회사가 대처할 방향에 대해 들은 연희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늘 맹하고 어리바리하던 동생이 데뷔할 회사 하나는 잘 고른 듯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회사는 늘 아이들의 편을 들었고, 적절한 대처를 해주었다.

정윤 실장과 우진 매니저는 연희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주는 내내 분노를 꾹 억누르는 듯 보였다.

그리고 며칠 뒤.

큰어머니인 화영은 연희의 집으로 찾아와 무릎 꿇고 빌었다.

자신보다 어른인 사람이 갑자기 무릎을 꿇어 당황했던 것도 잠시.

이어진 화영의 고백과 정한의 현 상태를 들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조부모님의 유산에 얽힌 이야기, 지환에게 벌였던 수작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했던 일들.

알고 있었던 일도, 모르고 있었던 일도 있었다.

한참을 연희에게 미안하다고 죽을죄를 지었다고 빌던 화영은 제발 살려달라고 했다.

하다못해 자신과 정한은 벌을 받아도 사촌들만은 제발 살려달라고.

그들은 죄가 없지 않으냐는 말에 연희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우리는 죄가 있어서 그렇게 괴롭혔어요?”

슬픔을 갈무리할 틈도 없이 벌어진 일들로 연희가 얼마나 힘들었던가.

하루가 멀다고 찾아오던 정한이 연희와 지환에게 얼마나 매서운 말을 했던가.

모두 돈 때문이었다.

그 알량한 돈, 부모님 목숨값이 탐나서 그렇게 자신의 형제가 남긴 아이들을 핍박했다.

그랬던 주제에 자기 자식은 귀한 모양이었다.

“가세요. 살면서 두 번 다시 마주치지 말아요, 우리.”

매섭게 내쫓는 연희 모습에 화영은 울면서 미안하다고, 두 번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고 하며 돌아갔다.

불덩이가 목구멍을 태우는 것 같았다.

앞이 아찔해질 만큼 분노가 치밀었고, 연희는 비틀거리며 겨우 소파에 앉았다.

화영은 공정한에게 계속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고 했다.

얼마나 억울하셨으면.

가족밖에 모르던 그 다정한 아버지가 그랬을까.

이를 악물고 버티던 눈물이 그제야 주룩 흘러내렸다.

이제 저들은 연희와 지환의 인생에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을 누르던 돌 하나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 가슴을 억누르던 것들이라 시원함보다는 공허함이 밀려들었다.

이렇게 보잘것없는 인간들 때문에 고통받았던 그 시간이 억울했다.

다 큰 자신도 이렇게 억울하고 분해서 미치겠는데, 더 어릴 때 괴롭힘당한 동생은 어떨까.

연희는 10년 만에 처음으로 소리 내 한참을 울었다.

속에 쌓여 까맣게 썩어가던 감정이 눈물에 녹아 한참 동안 흘러나왔다.

* * *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을 때, 멤버들도 소식을 전해준 우진 형도 모두 반대했다.

이미 한번 큰 충격을 받았는데 다시 그 사람을 만날 이유가 있느냐고.

결국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고, 그 사이 포잉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포잉은 어떻게 생각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계약자야. 그 인간은 더는 네게 아무런 위협을 할 수 없음.’

‘포잉이 무언가 했다더니, 아주 혼쭐을 내줬어?’

‘흥.’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는 내 요정님.

하지만 포잉은 자신이 알아서 다 해놨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떨리는 내 팔에 자신의 앞발을 얹었다.

내가 괜찮은 것과 달리 몸은 아직도 그 사람이 두려운 것 같았다.

“만날래요.”

“지환아….”

걱정이 가득한 준이 형의 얼굴.

“이제 그만 그 사람 그림자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그래. 형이 같이 있을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

더는 무력했던 어릴 때처럼 겁에 질려 떨고 싶지 않다는 내 다짐에 우진 형이 답했다.

“진짜 우리 멤버들이랑 우진 형 때문에 웃어요, 내가.”

“당연한 소릴.”

걱정돼서 어쩔 줄 모르는 주제에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고 애쓰는 찬이나 세빈이.

내 팔을 꼭 쥐고 있는 경환 형이나 손을 잡아준 영빈 형.

이제 괜찮다고 말해도 멤버들은 은근히 옆에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침에 눈 떠서 밥을 챙기려고 하면, 어떻게 알고 영빈 형과 준이 형이 뛰어나왔다.

당분간은 푹 쉬는 것만 생각하라며 배달 도시락을 먹자고.

그렇게 멤버들의 과보호 속에서 정말 오랜만에 양껏 잘 수 있었다.

지난 시간 동안 모든 활동을 접고 회사에서 연습하거나 숙소에서 쉬기만 했다.

일정에 차질이 생긴 만큼 막대한 손해가 발생할 것을 우려했지만, 팀장님은 손을 내저었다.

우리 잘못이 아닌 일 때문에 우리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다른 데서 톡톡히 받아낼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새벽 형들과 골든아워 형들, 멜트 멤버들이 연락을 해왔다.

진우 형은 새 영화 크랭크 인에 들어가서 바쁠 텐데도 틈날 때마다 영상 통화를 했다.

오죽하면 내가 형들한테 이럴 시간에 애인이나 만들라고 했을까.

더불어 다른 멤버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하겸 형과 따로 만나기도 했다.

회사 근처, 정윤 실장님이 준비해준 장소에서 하겸 형과 에드를 만났다.

근처에 우진 형과 회사 분이 대기하고 있었지만 이야기가 들릴 거리는 아니었다.

하겸 형의 간략한 설명, 몸을 부들부들 떨며 더듬더듬 말하던 에드의 목소리.

그리고 허공을 가득 채울 기세로 떠오르던 에드의 속마음들.

- 이러려던 게 아닌데

- 미안해….

- 다치게 하려던 게 아닌데

- 어떡하지?

- 우리 형들한테 피해가….

미안하다는 말과 팀에 피해 가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하는 말들.

에드는 이번 일로 인해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사람들을 잃게 될 것이다.

이미 하겸 형의 시선에는 희미하지만, 경멸이 묻어났다.

이 자리까지 끌고 온 것도 책임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쉬쉬한다 해도 회사에는 에드가 연관되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나올 테고.

아마 멜트 형들도 알게 되겠지.

맥이 탁 풀릴 만큼 하찮았다.

나이보다 더 어리고 철없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하찮은 인간이었나.

“먼저 이야기해주셔서 고마워요. 누군가를 질투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죠. 저도 그럴 때가 있으니까요.”

내가 하는 말은 에드를 위한 말이 아니었다.

괜히 에드 때문에 고생한 하겸 형에게 더 예쁨 받는 것.

그게 내가 에드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복수가 아닐까?

이제 에드는 갖지 못하게 될 것들이니까.

“악의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앞으로는 개인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늘 뾰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사람이 이제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너는 쓸데없이 사람이 좋아서는.”

못마땅한 듯 혀를 차는 하겸 형과 그럴 때마다 흠칫거리는 에드.

늘 그렇듯 형들에게 약한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에이, 사람 좋기는요. 그보다 형, 한우 사주신다면서요? 언제 사줄 거에요?”

“이놈 봐라? 아주 멀쩡하구만?”

에드는 없는 사람 취급받았다.

그렇게 잠깐 하겸 형과 평소처럼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고, 오래지 않아 헤어졌다.

그 후부터 하겸 형은 더 자주 내게 연락했고, 어떻게 알았는지 얀 형은 전복을 택배로 보내오기도 했다.

해산물 비려서 별로 안 좋아하는데…. 하하….

내가 무언가 해보기도 전에 일이 착착 진행되어 조금 허탈하기도 했다.

연루된 작가는 갑자기 여태까지 저지른 죄를 고백하는 기자회견을 하질 않나.

최병섭은 죽다 살아났다고 했고.

주영욱은 방송국에서 제일 한직으로 쫓겨나 잡부 취급을 받는다고 들었다.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이 강했던 만큼 지금의 취급이 그에게는 엄청난 벌이 될 것.

그리고 이번에는 공정한이었다.

그 뻔뻔한 얼굴로 무슨 말을 할지 두 눈 뜨고 똑똑히 봐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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