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304)화 (304/456)

304. 게릴라(5)

“정 실장, 오늘 내가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알아?”

“글쎄요. 저야 모르죠.”

정윤은 특유의 시큰둥한 얼굴로 박정균 대표를 마주하고 있었다.

박 대표는 평소 다른 직원들 앞에서는 본인의 성격을 많이 감추는 편이었다.

감수성 풍부하고 호불호가 분명하며 뒤끝이 조금 긴 그런 성격.

회사 내에서도 박 대표와 오랜 시간 함께해온 신뢰 대상들만 알고 있는 점이었다.

그중에서도 정윤은 박정균 대표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박 대표는 일을 벌일 때 소위 말하는 ‘촉’에 의해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정윤 실장은 철저하게 분석하고 이성적인, 논리적인 근거에 의해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박 대표가 일을 벌이면 정윤 실장이 수습하는 게 보통의 그림.

박 대표는 다른 대표들이나 업계 관계자들과의 대화에서 종종 정 실장을 얻은 게 자신의 가장 큰 자산이라고 할 정도였다.

“아니, 글쎄! 우리 지환이가 귀한 분이래!”

“네?”

뜬금없는 이야기에 정윤은 박 대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전부터 그랬잖아. 굿이라도 한번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네. 그러셨죠.”

정윤은 이야기가 조금 길어지려나 싶었지만,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박정균 대표는 지인을 통해 업계에서 아주 용하다는 무속인을 소개받았다.

평소 이런 류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지만, 워낙 다사다난하니 마음의 위안이라도 받고자 했던 것.

여태까지 언래블이 승승장구한 것은 무척 기쁜 일이지만, 짧은 기간 동안 지나치게 일이 많았다.

정말 굿이라도 해서 무사 평탄하게 흘러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소개해준 지인과 함께 찾아간 그곳에서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무속인을 마주했다.

박정균 대표의 얼굴을 본 그 무속인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손을 휘휘 저었다.

영문 모를 행동에 박 대표가 일행을 쳐다보자 무속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가. 넌 이런 데 기웃거리지 말고.”

“아니, 왜 그러시는….”

“네가 데리고 있는 애 중에 죽다 살아난 애 있지?”

“네?”

“아주 귀한 분이 보호하는 애니까 그냥 둬. 원래 갔어야 할 애를 끌어다 놨으니 사건 사고가 안 생기면 이상하지.”

영문 모를 이야기에 가만히 듣고 있던 박 대표는 ‘갔어야 할 애’라는 부분에서 울컥했다.

“말이 좀 심하십니다! 갔어야 할 애라뇨!”

“쯧쯧, 아둔한 것아. 갔어야 할 애를 이승에 붙잡아 둘 정도로 아주 귀한 분이 붙어있다는 게 중요한 거야. 무슨 일을 하든 넌 그냥 돕기만 해. 그렇게만 해도 돈을 갈퀴로 긁어모을 거다.”

“그래도 몸이 상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어차피 있었어야 할 일이야. 애는 괜찮을 것이다.”

무속인은 그 후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 넌 절대 이름 지어주지 말고.”

“네?”

“명 짓는 재주는 없는데 꼬는 재주가 있으니 함부로 지어주면 험한 꼴 생긴다.”

영문 모를 소리만 하던 무속인은 복채도 받지 않고 손을 휘적이더니 얼른 가버리라는 말만 하고 등을 돌려 앉았다.

지인은 박 대표에게 정말 용한 분이니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을 남겼다.

기분이 상하기도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냥 애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면 된다는 얘기 아닌가?

이름을 짓지 말라는 말은 조금 걸렸지만, 박정균 대표는 자신이 이름 짓는 데는 재주가 없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자신이 겪은 일을 신나게 정윤에게 말하던 박 대표는 ‘갔어야 할 애’가 혹시 지환이가 아닌가 한다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지환의 교통사고 후 많은 것들이 변했다.

가장 크게 일이 생기는 것도 지환이었고.

그러면서 박 대표는 지환이 무언가 하겠다고 하면 다 해주라는 말을 몇 번이나 당부했다.

“지환이가 복덩이라고 소현팀이 그러던데 그 말이 딱 맞나 봐. 아픈 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더라고.”

“…휴. 점집 찾아갈 시간에 일이나 하세요, 대표님.”

“크흠, 그래도 괜찮다니까 다행이지 뭐.”

정윤은 무속인의 말은 믿지 않았지만, 가끔 별거 아닌 것 같은 말 한마디가 주는 위안은 알았다.

불안해하던 대표님이나 팀장이 마음의 위안을 가질 수 있다면 이것도 나쁘지 않겠지 싶었다.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깊은 한숨을 내쉰 정윤은 자신이 조사한 보고서를 내밀었다.

무당은 무당이고 자신은 일해야 했다.

* * *

공정한은 그날 이후로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어디선가 끊임없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겨우겨우 잠이 들어도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났다.

점점 잠드는 게 두려워진 정한.

여행을 마치고 온 아내가 정한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랄 정도로 사람이 상해있었다.

정한의 아내는 그를 닦달하여 대략의 상황을 듣고는 당장 용하다는 만신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녀는 신당의 문턱도 넘지 못하고 쫓겨나야 했다.

심지어 황망한 얼굴로 쫓겨난 그녀 앞에 만신은 굵디굵은 소금을 뿌려대며 험한 말을 쏟아냈다.

그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유명하다고 소문난 곳은 전부 입구부터 거부당했다.

간신히 매달린 마지막 무당을 통해 그저 어떻게 해야 화를 피할지만 들을 수 있었다.

그마저도 신당에 들어가지 못하고 마당에서 한 가닥 이야기를 듣고 쫓겨날 뿐이었다.

“아이고! 이 미친 인간아!”

“당신 미쳤어? 뭐 하는 거야!”

그 길로 당장 집에 뛰어온 정한의 아내, 화영이 악을 쓰며 정한을 때렸다.

“미친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지!”

“뭐, 뭐?”

“내가 지금 무슨 소릴 듣고 온 줄 알아!”

정한은 아내의 양팔을 부여잡고 자세히 이야기하라고 다그치기 시작했다.

남편이라는 작자가 인두겁 쓴 귀신인 줄도 모르고 같이 산다며 험한 말을 하던 만신.

그녀는 화영에게 어디 할 짓이 없어 동생 자식새끼들까지 잡아먹으려고 드느냐며, 짐승만도 못한 것이라 했다.

어느 정도 정한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던 화영은 발밑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빌었고.

깊은 한숨을 내쉰 만신은 당장 달려가서 그들에게 살려달라고 빌라고 했다.

무조건 바짝 엎드려서 살려달라 빌어도 죄가 깊어 다 갚기 힘들다고.

빌고 빌어서 조금이라도 죄를 덜어야지, 안 그러면 네 자식까지 험한 꼴 당할 거라는 말에 화영은 눈이 뒤집혔다.

화영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냐며 정한에게 소리쳤지만, 악에 받친 정한은 되레 큰소리를 냈다.

“어디 구신 나부랭이 가지고 사람한테! 어? 내가 이렇게 안 살았으면 당신이나 애새끼들이 밥이나 먹고 살았을 줄 알아?!”

희번덕거리는 정한의 눈빛에 화영은 벌떡 일어나 짐을 싸 들고 나와버렸다.

그때, 돈에 욕심내는 게 아니었다고.

그 불쌍한 것들을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다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더 늦기 전에 자신이라도 빌어서 자식들은 지켜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화영은 연희에게 조심스럽게 연락을 했다.

한편 집안에 홀로 남은 정한은 한참을 씩씩거리다 제풀에 지쳐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며칠째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정한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불조차 제대로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집안.

넋이 나간 듯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정한에게 다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꺼져! 당장 꺼지라고!”

머리를 감싸 쥐고 발버둥을 치던 정한 앞에는 다시 정욱의 모습.

정한은 공허한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말을 해!”

그동안 몇 번 정욱의 형상을 보았지만, 그 귀신은 언제나 원망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욕을 하고 저주를 했으면 답답하지라도 않았을 텐데.

한계에 도달한 정한은 그렇게 악을 쓰다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다.

그때 나타난 포잉.

지환이 그렇게나 좋아하던 우주를 담은 포잉의 눈동자에는 스산한 한기가 돌았다.

고작 열흘도 안 되는 시간이었는데 이렇게 추해졌다.

지환은 10여 년의 시간 동안 고통받았는데.

마음 같아서는 더 긴 시간 동안 괴롭혀주고 싶었지만, 오래 엮여봤자 좋을 게 없다는 것을 포잉도 알았다.

“두 번 다시 계약자 앞에 나타나지 마라, 인간.”

포잉은 앞발을 들어 정한의 이마에 얹었다.

잠깐 닿는 것조차 역겨웠지만, 꿈속에서 건네야 할 말들이 있어 어쩔 수 없었다.

평소 지환이나 다른 멤버들에게 얹을 때와는 달리 어둡고 짙은 보라색 기운이 정한의 머릿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정한은 꿈속에서 꽤 긴 시간 동안 시달릴 것.

그리고 깨어나면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터.

그동안 패악을 부리고 산 만큼 타인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도록 할 참이었다.

정한에 대한 처치가 대충 끝난 포잉은 화영이 뛰쳐나간 현관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인간에게도 응징이 필요하지만, 정한 만큼은 아니니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다.

전혀 몰랐다면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그날 장례식장에는 화영도 함께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쉰 포잉은 마지막으로 만신이라 불리는 무속인들을 떠올렸다.

여러 세계에는 샤머니즘에 가까운 여러 신앙이 존재했다.

그렇기에 무속신앙이 이 세계에 있는 것은 그다지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소원 요정을 알고 있는 것은 조금 신기했다.

모든 차원을 넘나드는 소원 요정들은 보통 다른 존재들에게 존중받았다.

언제 자신이 소원 요정을 마주하게 될지 모르는 데다, 그들의 삶이 무한에 가깝게 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천 년이라는 시간은 소원 요정에게는 긴 시간이 아니었다.

긴 세월을 산다고 알려진 드래곤보다 오랜 삶을 살아가는 요정들이 수두룩하니까.

덕분에 조금 편하게 일이 진행된 듯하니 나중에 인사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포잉은 계약자에게 향했다.

한바탕 난장을 피워놨더니 그동안 답답했던 속이 조금은 편해지는 것 같아진 포잉이 방긋 웃었다.

* * *

‘포잉! 왜 그렇게 바빠, 요새.’

포잉은 작업실에 있는 계약자를 찾아갔다.

뚫어져라 모니터를 바라보며 바쁘게 손을 놀리던 계약자는 포잉을 발견하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어이구, 저 푼수 같은 놈.

포잉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자신이 무슨 고생을 하고 다니는지 잘 모르는 계약자는 마냥 찡찡거렸다.

어찌나 손이 많이 가는지.

하지만 포잉은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늘 강한 척하지만 속이 물렁물렁해 빠진 지환은 포잉이 한 처리를 무서워할 수도 있었다.

망둥이 새끼 때 포잉이 제대로 그놈을 응징하지 못했던 걸 얼마나 후회했던가.

너덜너덜해진 정한의 모습이 그간 쌓여있던 스트레스를 조금이나마 사라지게 해주었다.

‘계약자 놈아, 너는 언제 큼?’

‘나? 나름대로 잘 크고 있는데…?’

계약자의 맹한 얼굴이 조금 더 맹해지자 포잉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약하고 작은 인간이 크기는 하는 걸까.

지환은 포잉을 안아 들더니 무릎에 올려두고 쓰다듬기 시작했다.

포잉의 털을 쓰다듬을 때면 지환은 늘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장 거슬리던 정한은 포잉이 직접 손을 댔다.

조만간 그 인간은 정리될 터.

그 외 나머지 인간들은 다른 인간의 손에 대부분 맡길 참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냉정하고 무서운 요정인 걸 모르는 계약자는 되려 포잉을 걱정하고 있었다.

‘포잉, 너무 무리하지 마. 회사에서도 나름대로 잘 진행하고 있대. 보안에도 더 신경 쓴다고 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계약자가 포잉을 걱정하며 잔소리를 해댔다.

자신이 정한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 놀라겠지만.

말간 눈으로 잔소리하는 지환을 바라보던 포잉은 피식 웃었다.

어린 계약자를 지키는 건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어설픈 잔소리에 맞춰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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