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 게릴라(4)
에드에게 전화가 온 건, 그로부터 얼마 후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초조해 보이던 에드가 저를 만날 수 있느냐고 물어오기에 하겸은 일단 약속을 잡았다.
최대한 빨리 만나고 싶다고 조르는 통에 다음 날 점심때 에드를 만난 하겸.
이것저것 하다 보니 몇 시간밖에 못 잔 터라 얼굴이 푸석푸석했다.
“형, 미안해요….”
“아냐. 그냥 요새 잘 못 자서 그래.”
웃으며 손을 휘적인 하겸은 적당히 신뢰감 있는 표정을 만들어냈다.
연장자로서 조언할 때마다 지었던 표정.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사고 쳤어?”
희게 질린 에드의 얼굴과 머뭇거리던 입술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주자 얼마 후 그가 그간의 일을 술술 말하기 시작했다.
에드가 좀 심하다 싶을 만큼 골든아워에게 의지하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이제는 멜트도 자리를 잡았고, 해외 활동도 활발하게 하는 애들이니 괜찮겠지 했고.
하지만 에드는 여전히 코흘리개 연습생 시절의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 자신을 제일 아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 등.
적당하면 귀엽게만 봐줄 수 있는 그런 욕심들.
자기가 던진 말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너 진짜 몰랐어?”
구체적인 것은 신이 아니니 몰랐다 쳐도, 지환이 무척 곤란해질 것이라는 건 알았을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루머가 당사자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보고 자란 애가 몰랐을 리가.
하겸은 눈물범벅이 돼서 말을 잇지 못하는 에드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봤다.
각 잡고 계획해서 PD들에게 속살거리진 않았겠지.
적어도 하겸이 아는 에드는 그 정도까지 썩어 문드러진 쓰레기는 아니었다.
그저 충족되지 않은 욕구, 그 끝을 알 수 없는 애정 결핍으로 원망의 대상이 된 언래블에 대해 불평불만을 늘어놓았을 것.
그러다 옆에서 부추기는 PD들에게 자신이 건너건너 들은 이야기를 흘렸을 것이다.
언래블이 골든아워와 친하게 지내는 건 그들도 알았을 것이다.
골든아워와 멜트가 유달리 사이좋은 건 이미 유명한 이야기였고.
애당초 에드는 흉계를 꾸미고 할 만큼 영악한 애는 아니었으니까.
뒷공작이었다면 차라리 디아나 지환이 더 잘 어울렸을 것.
“저, 저는 진짜로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 몰랐어요….”
방송국의 방만한 운영을 탓하는 기사가 쏟아졌고, 작가는 잠수, PD는 국장실로 불려갔다고 했다.
이것도 ON 엔터의 힘인지 아니면 예능국 국장의 힘인지 모르겠지만, 연관된 사람들은 이미 파악됐다고 했다.
궁둥이 무겁기로 소문난 하겸과 에드의 소속사도 계약서 때문에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계약서에 적힌 내용 때문에 위약금이 상당한 금액이라고 매니저가 한숨을 내쉬었었다.
주영욱 PD는 제일 한직으로 좌천되거나 방송국에서 쫓겨날지도 모를 상황.
이경주 작가는 집에 있는지 없는지도 확인되질 않았고, 외부와 완벽하게 연락을 끊고 있다고 했다.
아마 앞으로 UDTC와는 일하기 힘들 것.
이런 일에 연루되어 있으니 다른 방송국도 마찬가지였다.
메인 작가까지 올라가는 데도 꽤 긴 시간이 걸렸을 텐데, 떨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외부의 다른 PD가 한 명 더 있다고 했지만, 하겸은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다른 기사에 따르면 ON 엔터와 이미 한번 트러블이 있었던 감독이라고.
“몰랐겠지. 애가 쓰러질 줄은. 그래서? 몰랐으니까 네 탓이 아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에드는 마치 데뷔조 연습생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하겸은 종종 다른 연습생들을 돌봐주기도 했지만, 피드백이 칼 같은 사람이었다.
에드도 처음에는 하겸의 피드백을 듣고 많이 울었으니까.
하지만 그 피드백은 모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들이었다.
에드가 그 사실을 깨닫고부터는 하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버렸고.
당황스럽고 무서운 와중에도 하겸에게 혼나는 이 상황이 되려 안심되는 자신이 이상하다는 건 에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에드에게는 의지할 어른이 없었다.
친부모도 늘 에드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덕분에 에드는 아주 어릴 때부터 회사의 연습생으로 생활했고 가족과는 연락 안 하고 지낸 지 오래였다.
그래도 자신에겐 팀이 있었고 골든아워 형들이 있어서 괜찮았다.
부모님이 해야 할 역할을 회사의 사람들이 나눠서 에드에게 해준 셈.
그래서 질투에 눈이 벌게진 상황에서도, 친척 때문에 지환이 곤란해질지언정 쓰러질 줄은 몰랐다.
에드 자신에게 그들은 아무런 감흥 없는 타인이었으니까.
그저 공인이니 그들의 문제가 수면 위로 나오면 여러모로 이미지에 타격이 가겠거니 하는 정도였다.
“너는 나한테 찾아올 게 아니었어.”
“그러면요?”
“네가 피해를 준 사람을 찾아가야지. 가서 빌어야지. 상대방이 용서해줄 때까지.”
“용서 안 해주면요…?”
하겸은 에드의 얼굴이 너무 새삼스러워 보였다.
몸은 다 컸지만, 에드는 14살 연습생에서 하나도 크지 못한 것 같았다.
에드보다 어린 언래블 멤버들이 더 어른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용서하고 말고는 피해자 마음이지. 그걸 왜 네가 생각해? 용서 못 받으면 네가 저지른 죗값을 치러야지.”
“저 욕 먹는 건 괜찮은데, 팀에 피해가 가면 어떡해요….”
“그걸 걱정하는 새끼가 이따위로 행동해?”
차갑게 얼굴을 굳힌 하겸이 일갈하자, 에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ON 엔터가 작정하고 덤비면 개싸움이 될 테니 멜트의 소속사와는 적당히 협의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회사에서 에드뿐만 아니라 멜트의 이미지에 타격이 갈 것은 분명했다.
에드가 직접 이야기를 한 건 최병섭이라는 PD뿐이라고 했다.
예전에 케이블 채널의 촬영 당시 만났었고, 종종 연락을 해왔었다고.
그러다 최근 연락에서 PD가 먼저 언래블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고, 에드는 거기에 낚인 것.
에드가 언래블을 못마땅해한다는 소문이 이미 한바탕 거하게 돌았으니 최병섭은 옳다구나 했을 것이다.
진짜 이야기를 파고 들어갈수록 가관이라 하겸은 다 때려치우고 잠이나 자고 싶어졌다.
“일어나.”
“네?”
“일어나라고. 입 다물고 따라와.”
모자를 깊이 눌러쓴 하겸은 울어서 얼굴이 퉁퉁 부은 에드에게 모자를 툭 던졌다.
미우나 고우나 그래도 여태 같이 지내 온 놈이니 할 수 있는 건 해야지 싶었다.
소속사에서 알기 전에 최대한 수습을 시도해봐야 했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꼬여버린 건지는 몰랐지만, 일단은 ON 엔터에 가보기로 마음을 먹은 하겸.
가서 이실직고하고 약간의 선처를 요청해보는 수밖에.
에드를 위해서가 아니라 멜트를 위해서였다.
가만히 있다가 날벼락 맞게 둘 수는 없으니, 벼락이 칠 거라는 걸 애들도 알아야 했다.
착잡한 얼굴을 한 하겸을 바라보던 에드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벌인 건지 조금 더 제대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는 것도.
퉁퉁 부어 엉망이 된 얼굴이 점점 까맣게 죽어갔다.
* * *
“우리 병아리는 진짜 굿판이라도 벌여야 사고가 없어지려나?”
“실장님….”
픽 웃던 실장님은 내 앞으로 케이크를 밀어주며 어서 먹으라고 했다.
아니, 왜 다 자꾸 나한테 뭘 먹이려고 드는 거야….
분명 쓰러졌던 건 정신적인 충격 탓이라고 알고 있을 텐데.
이상하게 만나는 사람마다 자꾸 뭘 먹이려고 들었다.
새벽 형들뿐만 아니라 만나는 모든 사람이 전부다.
회사에 오자마자 마주한 직원분들도 자꾸 간식을 주머니에 몰래 넣어주셨다.
새 앨범 발매 때문에 다이어트 중이었는데 갑자기 먹을 걸 자꾸 건네주시니 곤란했다.
“저 체중조절 중인데요.”
“너 거울 안 봤어?”
“네? 왜요? 똑같던데.”
“쯧, 너는 그런 데서만 둔하니.”
실장님은 지금 네 얼굴이 무슨 꼴이 난 줄 아느냐면서 주는 대로 먹으라고 하셨다.
얌전히 커다란 딸기가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를 입안으로 밀어 넣으니 온몸의 말초신경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이런 디저트류를 너무 오랜만에 영접했더니 몸에서 격렬하게 환영하고 있었다.
절로 행복한 미소가 머금어지는….
“맛있지? 비싼 거다.”
역시 자본주의의 맛이었다.
홀로 케이크를 퍼먹고 있자니, 숙소에서 쉬고 있을 멤버들이 떠올랐다.
혼자 케이크 한판도 다 먹을 수 있는 우리 막내랑 찬이라든가.
가끔 영빈 형과 디저트 맛집을 검색하는 우리 준이 형이라든가.
경환 형은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렇다 치고.
“우리 준이 형이랑 세빈이도 케이크 좋아하는데….”
“우진이한테 말해뒀으니까 숙소 갈 때 가져가.”
“하, 하하… 티 났어요?”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나를 곱게 흘겨본 실장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가 힘들었으니까 봐주는 거야.”
“넵!”
신나서 케이크를 흡입하던 그때, 실장님 옆에서 조용히 나를 바라보던 팀장님이 입을 열었다.
“지환아, 용서 안 해줘도 괜찮아.”
하겸 형이 에드를 끌고 회사에 왔었다.
그저 소문만으로는 구체적인 내용을 캐기 힘들었을 최병섭 PD에게 이야기를 흘린 게 에드였다고.
오기 전부터 하겸 형에게 잔뜩 혼났는지 얼굴이 엉망이 돼서 온 에드.
숙소에 있던 나를 회사로 데려가던 우진 형도 팀장님과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하겸 형의 얼굴을 봐서 널 데려가기는 할 건데, 굳이 보기 싫으면 안 봐도 괜찮다고.
하겸 형도 그 부분은 이야기했다고 했다.
하지만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에 우진 형을 따라나섰고, 대략적인 전후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다른 것보다 내 옆에서 침묵을 지키는 포잉이 더 무서웠다.
포잉은 내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고 자기가 철저하게 다 부숴버릴 거라고 했다.
포잉에게 위험한 일은 하지 말라고, 상급자에게 혼나면 어떡하냐고 했지만 괜찮다고만 했다.
에드를 바라보는 포잉의 시선이 너무 차가워서 내가 알던 요정님이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이야기를 끝내고 회사로 돌아온 내게 실장님이 이 케이크를 내밀며 말해준 것들.
“저는 에드는 멍청해서 이용당한 거라고 생각해요. 여태까지 싫은 티를 내도 직접 위해를 가한 적은 없잖아요.”
“바보같이 웃지 마, 이놈아! 어휴, 내 새끼는 왜 쓸데없이 착하냐.”
한탄하듯 중얼거리는 팀장님의 말에 같이 고개를 끄덕이는 포잉.
“다른 멜트 형들이 마음에 걸려서 그래요. 골든아워 형들도 그렇고…. 다 좋은 사람들인데 이번 일로 멀어지면 속상할 것 같아요.”
깊은 한숨을 내쉬는 실장님과 팀장님 모습에 미안함을 담아 웃어드렸다.
에드는 그렇다 쳐도 정말 그 두 그룹의 형님들은 계속 알고 지내고 싶었으니까.
내 마음이 굳건한 것을 확인한 실장님은 한숨과 함께 다른 이야기로 주제를 바꿨다.
“연희 씨랑 공정한 건을 어떻게 대응할지 논의 중이야. 여러 의견이 오가고 있는데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실장님은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셨다.
친족에게도 접근 금지 신청을 할 수는 있지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거나 분명한 증거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이 나라 법이 이렇게 개판이라고 중얼거리는 팀장님의 모습에 웃어버렸다.
회사 법무팀에서 누나가 제공한 메시지와 이번 사건을 검토했지만, 법적인 제재는 쉽지 않을 거라 했다.
‘내가 알아서 함. 그 인간은 신경 안 써도 됨.’
포잉이 무언가 하고 있다는 건 알았다.
잠깐잠깐 내 모습을 확인하고 바쁘게 밖으로 돌아다니고 있었고.
지금 상황에 화가 안 나는 건 아니었다.
컴백은 밀리게 생겼고, 쓸데없이 쏟아지는 기사, 인터뷰 요청, 이때다 싶어 늘어나는 카더라 등.
하지만 회사에서 잘 대처해주리란 걸 알았고, 포잉이 응징해줄 것을 믿었다.
그저 나는 내 영역 안의 사람들이 더는 피해 보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의지를 이미 회사에 전달해 둔 상태였다.
처음 깨어났을 때는 상대방에 대한 공포와 피떡이 될 때까지 두들겨 패고 싶다는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그리고 그것들이 떠나버린 지환이 느꼈을 감정이라는 것도 알았다.
다만, 나는 내 모든 행동이 언래블과 누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으면 했다.
직접 내가 폭력을 가하는 건 가장 하수고 언플은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흘러나갈 터.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는 없었다.
이 나라의 법으로 할 수 있는 일도.
하지만 내게는 포잉이 있었다.
세상 모두가 내게 등을 돌려도 내 곁에 있어 줄 요정님이.
포잉은 구체적인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지만, 조만간 그 인간이 자기 발로 기어 나와 내게 빌 것이라 장담했다.
되도록 그 면상은 보고 싶지 않았지만, 누나와 내 다리에 매달려 비는 건 보고 싶었다.
그 후 두 번 다시 우리 인생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더할 나위 없었고.
“그 사람은 그렇다 쳐도 다른 사람들은 진짜 벌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건 걱정하지 마. 이제 이 바닥에 발 딛고 살 수 없을 테니까.”
공정한에게 직접적인 제재를 할 수 없어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던 두 분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었다.
돈이 모든 보상이 될 수는 없지만, 피해 보상을 톡톡히 받아내고 치워버릴 것이라 했다.
역시 이 두 분이 적이 아닌 게 정말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