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99)화 (299/456)

299. Labyrinth(4)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는 지환의 곁에 언래블 멤버들이 동그랗게 모여있었다.

몸에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정신적 충격으로 정신을 잃은 거라 깨어나길 기다려야 한다고.

뒤늦게 병원에 도착한 소현이 많이 놀란 멤버들에게 영양제라도 맞으라고 했지만 아무도 침상 곁을 떠나지 않았다.

왜 자꾸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는 못했지만, 머릿속에 가득 찬 분노가 병실 안에 진득하게 고여있었다.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멤버들을 바라보며 하준은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 병원 침대 위에 누운 지환의 모습을 이제는 그만 보고 싶었다.

“금방 일어나겠죠?”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 세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커다란 눈동자가 온갖 감정으로 얼룩져 있었다.

마냥 겁먹고 어찌할 줄 모르던 막내가 이제는 무서워할지언정 물러서지 않게 되었다.

그런 막내를 바라보는 형들의 시선에는 대견함과 착잡함이 녹아들어 있었다.

“그럼. 지환이는 그런 인간한테 질만큼 약한 애가 아니잖아.”

세빈의 어깨를 토닥여준 하준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물론 하준의 속도 말이 아니었다.

얼마나 상대방에 대한 공포가 컸으면 쓰러지기까지 할까.

살면서 꽤 다양한 종류의 사람을 경험했다고 생각했지만, 지환은 너무 극단적이었다.

굳은 얼굴로 지환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경환.

차가워진 지환의 손을 계속 주무르고 있는 영빈.

안절부절못하고 침대 주변을 맴도는 힘찬과 세빈.

모두가 지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전부 이야기하지는 않았을 것.

하지만 들은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괴로운 이야기들이었다.

이제야 모두가 좋아지고 있었는데.

조만간 나올 새 앨범에 모두가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던가.

몇 시간 눈붙이지 못하면서도 앨범 이야기만 하면 다들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특히 지환은 뮤직비디오 스토리와 연출에 참여할 만큼 굉장히 공을 쏟고 있었다.

언제나 자신의 개인적인 인지도보다는 팀을 위해왔던 동생인데.

하준은 자신의 무력함이 너무 분해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병실에 들러 멤버들과 지환의 상태를 확인한 소현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겨우 피어나고 있던 애들의 얼굴이 이렇게 또 까맣게 죽어버렸다.

저 얼굴에 깊이 드리운 그늘을 없애느라 회사에서 얼마나 노력했는데.

꾹꾹 눌러 담은 분노를 아이들 앞에서 티 내지 않기 위해 심호흡까지 해야 했다.

“얘들아, 나 믿지?”

“네?”

“저희야 늘 팀장님을 믿죠.”

뜬금없는 소현의 말에 어리둥절해 하던 멤버들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소현은 그들을 실망하게 한 적이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소현은 이내 싱긋 웃으며 한 자씩 힘주어 말했다.

“너희는 일단 너희 몸만 챙기고 있어. 이 일에 관련된 인간들은 나랑 실장님이 다 뭉개버릴 테니까.”

데미갓과 제논 엔터, 악플러들을 끝까지 물고 늘어졌던 일이 떠오른 멤버들이 그제야 부스스 웃었다.

지환이 정신을 잃은 후 처음 떠오른 미소였다.

적어도 지금의 ON 엔터는 자신들을 최대한 보호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몫도 남겨주세요.”

“지환아!”

“정신이 들어?”

“의사 선생님 불러와!”

그렇게 화들짝 놀란 멤버들 덕분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병실 밖으로 급히 뛰어나가는 우진, 지환의 팔다리를 움켜쥔 멤버들.

내가 어디 도망이라도 가냐고 지환은 어이없어했지만, 멤버들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언래블 멤버들 머릿속에는 눈앞에서 쓰러졌던 지환의 모습이 너무 크게 남아버린 탓이었다.

지환도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별다른 말 없이 그저 웃어버렸다.

평소였다면 들러붙지 말라고 잔소리했을 테지만.

방금 정신을 차렸으면서도 멤버들을 한 명, 한 명 다독이는 모습에 소현은 기가 막혔다.

‘저놈 새끼는 진짜… 아이고.’

그렇게 멤버들이 좋을까 싶기도 하고, 속이 너무 깊은 게 걱정스럽기도 하고.

얼마 후 우진과 함께 돌아온 의사 선생님의 괜찮을 거라는 말에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얘들아, 너희는 숙소 가서 쉬고 있어.”

“지환이랑 같이 있으면 안 돼요?”

“저도 그냥 숙소에 가고 싶어요.”

“그래도 병원에서 하루 상태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소현은 오늘 하루는 병원에 있으라고 지환을 말렸지만, 지환은 고집을 부렸다.

낯선 공간보다 익숙한 숙소가 마음이 더 편하다면서.

그렇게 고집을 부려대니 아픈 애를 붙들고 잔소리할 수 없었던 소현은 마지못해 허락해주었다.

혼자 병실에서 밤을 보내는 것보다는 멤버들과 있는 게 더 안전하기도 할 테니.

그렇게 우진과 소현이 멤버들을 챙기는 사이, 포잉은 냉정하게 상황을 살폈다.

처음에는 놀라서 날 듯이 지환에게 다가갔었다.

하지만 몸에는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는 이 상황을 만든 인간들에게 분노했다.

저들이 자신의 계약자에게 위해를 가한 것으로 판단, 포잉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기로 했다.

포잉은 두 지환 모두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 삶을 이해하고 올바른 도움을 주기 위해 인간들이 만들었다는 트라우마에 관련된 책을 공부했고.

그동안 담당해왔던 계약의 대상들은 지성체가 아니었기에 비교적 단순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와 달리 인간종과 인외종들은 육체의 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병 또한 삶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배웠다.

가끔은 육체가 마음의 병을 이기지 못하고 스러지기도 할 만큼.

두 지환 모두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연약한 인간들이었다.

특히나 육체의 원주인인 지환은 위험할 만큼 내몰려 있었고.

그런 육체에 지금의 지환이 깃들었으니 이렇게 자꾸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는 것.

쓰러져있는 계약자가 몹시 걱정되었지만, 인간들을 믿기로 했다.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외부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저 작은 인간들.

평소에는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물렁물렁하더니 지금은 제법 매서운 눈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라면 포잉이 잠시 없는 동안 계약자를 잘 지켜줄 것이라 믿었다.

창백한 얼굴을 하고 기절해 있는 계약자의 모습에 포잉의 작은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포잉은 자꾸만 자신을 놀라게 하는 계약자가 깨어나면 꼭 한마디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작은 앞발을 들어 가슴을 꾹 눌렀다.

지환이 쓰러지자마자 제일 먼저 현장에서 도망쳤던 건 메인 작가였다.

포잉은 그녀를 따라가 그녀가 목숨줄처럼 부둥켜안은 노트북에 표식을 남겨두었다.

저 인간은 나중이었다.

곧장 현장으로 복귀하자 공정한이 슬금슬금 문밖으로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다.

언래블 멤버들이나 우진이었다면 그들의 어깨나 머리에 앉아 이동했겠지만, 공정한은 생리적 거부감이 들었다.

역한 냄새가 진동해서 코를 틀어막고 싶을 만큼.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그를 쫓자 자신의 차로 도망간 그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포잉은 이제 인간들의 물건을 제법 잘 다루었다.

인간들은 증거라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계약자를 위해 여러 증거를 회사 인간들에게 슬쩍 넘길 만큼.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겁니까! 지금 얼마나 곤란해졌는지 알아요?”

정한은 전화의 상대방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귀를 쫑긋 세우자 휴대폰을 타고 상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 멀쩡하던 사람이 쓰러진 게 왜 제 탓입니까? 기사 보니까 그쪽 보고 쓰러졌다던데! 지금은 사려야 할 때니까 이렇게 연락하면 정말 곤란해집니다.

전에 몰래카메라를 기획했던 병섭이라는 인간의 목소리였다.

‘하나같이 자기들 같은 놈들끼리 뭉쳤네.’

주고받는 대화로 포잉은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영욱, 병섭, 정한, 그리고 작가인 경주가 계약자의 적으로 인식되는 순간이었다.

영욱과 경주는 이전 연습생 하나를 움직여 아이들을 곤란하게 만들려 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사실 소원 요정은 지환이 알고 있는 요정과는 조금 달랐다.

이쪽 세상의 요정은 장난이 심하지만, 인간에게 크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고 알려졌었다.

하지만 소원 요정은 한 생명체의 삶을 함께하는 존재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계약자의 안위와 소원 성취였다.

계약자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는 것으로 판단되면 본격적인 적대 행위도 거리낌 없이 벌였다.

소원 요정은 모든 차원과 모든 세계를 넘나드는 존재.

그만큼 적을 처리하는 방법도 다양하게 알고 있었다.

물론 직접 다른 생명체를 해하진 않았지만, 직접 손을 대지 않을 뿐이었다.

포잉은 새파랗게 빛나는 눈으로 저 인간에게 적합한 벌이 무엇일지 고민하다 씩 웃었다.

직접 위해를 가한 게 아니니 인간의 법으로 처벌하기 어려울 것.

사회적 매장은 ON 엔터에서 진행할 테니 그건 포잉이 지금까지처럼 도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 포잉이 생각하는 것은 포잉이 내리는 벌이었다.

인간의 법으로 직접적인 처벌이 불가능하다면, 자신의 룰대로 하면 될 터.

이 나라에는 원한을 품은 이가 죽으면 귀신이 되어 나타난다고 했다.

죽은 이의 영혼은 모든 세계에서 공통으로 두려워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실제로 눈으로 본 사람도, 보지 못한 사람도 대부분이 두려워했다.

포잉은 공정한이 지환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를 정신의 한계까지 내몰 생각이었다.

한동안 밤에 바쁘겠지만 감수할 만했다.

살려달라는 말이 절로 흘러나올 때까지 피가 바싹 마르도록 몰아붙여 줄 생각이었다.

10년이었다.

이 세계의 지환이 고통받았던 기간이.

거기에 포잉은 자신의 계약자가 기절한 것까지 더해 넉넉히 계산하기로 했다.

앞으로 손쓸 방법은 미리 보고서로 제출해야 했기에 이동하면서도 틈틈이 작성했다.

반성문을 쓸 때는 오만상을 다 찌푸렸던 포잉의 두 눈이 활활 불타올랐다.

공정한에게도 표식을 남긴 포잉은 몸을 돌려 정윤이라는 인간에게 털리고 있는 PD를 찾아 나섰다.

“저희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사전에 공유받은 적이 없어요.”

“조 실장님, 제가 대본 드렸잖아요!”

“어허, 주 PD님. 말은 똑바로 해야지요. 저희에게 준 시나리오에는 언래블의 가족 등장이 빠져 있었잖습니까.”

“현장에서 대본이 수정되는 일이야 PD의 역량 아닙니까?”

“따로 섭외해서 불러들인 게 현장에서 수정했다고 퉁칠 일입니까?”

정윤을 찾은 포잉은 무표정한 얼굴로 JC 엔터 실장과 주영욱 PD가 다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정윤의 뒤를 ON 엔터에서 나온 변호사가 지키고 있었고.

JC 엔터 실장은 계약서에 기재된 위약금이 머릿속을 떠다니는지 안색이 좋지 않았다.

계약 당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조항들이었다.

JC 엔터 측에서도 프로젝트 그룹을 띄울 생각으로 만든 프로그램이었기에 언래블로 논란을 만들 생각이 없었다.

그저 최근 가장 인지도 있는 신인 그룹을 넣어 볼거리를 만들 생각이었다.

UDTC 방송국 측과 계약할 당시에도 전체 스토리에 대한 내용을 넣어두었다.

JC 엔터의 조 실장은 최대한 PD에게 책임을 떠넘겨 위약금을 줄여볼 작정이었다.

그런 인간들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포잉은 ON 엔터의 정윤 실장이 어떻게 나올지 기대하고 있었다.

포잉은 지환이나 다른 인간 아이들 뒤에서 정윤이 어떻게 하는지 꽤 자주 지켜보았다.

당사자인 정윤이나 소현은 모르겠지만, 포잉이 증거물이나 정보를 제공한 적도 있었고.

“두 분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정윤의 입이 열렸다.

어색한 침묵과 긴장이 느껴지는 공기에도 정윤의 표정엔 미동조차 없었다.

“이 자리의 모든 분이 아시다시피 당사는 아티스트의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번 일은 정말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JC엔터에서도 최대한 지환 군의 회복을 도울 생각입니다.”

정윤의 말에 빠르게 답한 JC엔터 실장.

그리고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국장님이 주 PD님을 찾으세요.”

가늘게 떨리는 스태프의 목소리에서 불안을 읽은 주영욱 PD의 얼굴은 이제 까맣게 죽어버렸다.

“두 실장님께도 드릴 말씀이 있다고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셨어요.”

영욱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일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포잉은 영욱을 따라나섰고, 히죽 웃었다.

오늘 밤이 무척이나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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