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 Labyrinth(3)
공정한을 마주한 순간.
내 의지가 아닌 무언가가 나를 옭아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지금의 내가 아닌 육체의 기억.
공포에 질려 한밤중에 온 집안을 헤매고 다녀야 했던 어린 지환의 기억이었다.
순간, 아득해지는 느낌과 함께 깊고 깊은 구덩이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이한 부유감에 허우적대던 내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건, 추락하던 구덩이의 끝부분에서였다.
어질어질하고 구역감이 치미는 속을 겨우 진정시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집….”
누나와 지환의 집.
그리고 지금은 내 누나의 집인 그곳.
본능적으로 이전의 지환이 나를 부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뻐근해진 팔다리를 주무르고 이제는 익숙한 거실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얼마나, 얼마나 두려웠던 걸까.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단어를 그 사람이 내뱉은 것만으로도 이렇게 겁에 질리다니.
어린 지환은 장례식장 이후로도 몇 번 큰아버지를 만나야만 했고, 그때마다 두려움에 떨었다.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을 옮겨 지환의 방으로 옮겼다.
아마도 저 방 안에….
천천히 다가가 방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들어갈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 후 방문을 천천히 열었다.
침대 위에는 예상대로 어린 모습의 지환이 웅크린 채 앉아있었다.
“안녕?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네.”
“….”
포잉에게 들은 바로는 이 육체의 원주인인 지환은 사후세계로 떠났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눈앞의 지환은 누구일까.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어린 지환에게 다가가 그 앞에 앉았다.
창백한 얼굴, 물어뜯어 엉망이 된 손톱, 음울한 표정.
그때의 너는 이런 얼굴을 했구나.
“지환아, 이제 겁먹지 않아도 괜찮아.”
“….”
불신과 의아함이 뒤섞인 불안한 시선.
“나는 음, 도와주는 요정이 있어. 포잉이라고 고양이 요정인데 굉장히 유능해.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대부분 좋은 사람들이고.”
이 꿈에서 깨려면, 현실로 돌아가 그 큰아버지라는 작자의 얼굴에 한 방 먹여주려면 그를 설득해야 할 것 같았다.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공간으로 나를 불러들인 건, 위험하다고 판단해서겠지.
한동안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어린 지환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내 손가락을 잡았다.
작고 보드라운 손.
이렇게 어린아이에게 그들은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이제는 지환을 나 자신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서일까.
가슴이 서걱거리는 통증과 함께 안쓰러움이 물밀 듯 밀려들어 왔다.
조그만 머리통이 작게 도리질 쳤다.
“괜찮아, 진짜로. 나 힘도 세다?”
무어라 말을 할 수는 없는지 입만 벙긋거리던 어린 지환의 고개가 기우뚱 기울었다.
정말로 괜찮으냐는 듯한 모습이라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손가락을 꼭 쥔 작은 손이 머뭇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러다 이내 결심한 듯 주춤주춤 내 쪽으로 다가왔고, 나는 팔을 벌려 그를 안아주었다.
문득 연희 누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진짜 작았거든. 넌 유난히 또래보다 작았어. 그런 애가 웅크리고 옆구리에 붙어 있는데 그게 얼마나 귀여웠겠어.’
울음기가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 빨갛게 부어오른 누나의 눈가.
그 목소리 안에 가득했던 흘러넘칠 것 같은 애정과 죄책감, 상실감 등.
이렇게 작은 아이를.
안쓰러운 마음에 어린 지환을 품 안 가득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얼마 전, 찬이가 했던 말을 들려주었다.
“지환아, 네가 잘못한 게 아냐. 너한테 나쁜 말을 한 그 사람들이 문제인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가슴팍에 안긴 작은 어깨가 들썩였고, 곧 옷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얼마나 긴 시간 동안 두려움과 절박함을 안고 살아야 했을까.
“괜찮아. 이제 다 괜찮을 거야.”
세상을 떠나기 전의 지환도 나보다 어렸다.
이렇게 마주하니 그가 친동생이라도 된 것처럼 애틋해졌다.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등을 토닥여주자, 지환이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 토닥여주는 사이 어린 지환의 몸이 점점 투명하게 변했다.
“아….”
품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지환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직 물기가 가득한 눈으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조금은 괜찮아진 걸까?
그 순간, 어린 지환의 몸이 백사장의 작고 고운 모래 알갱이처럼 조금씩 일렁이는 빛과 함께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이후 쏟아지는 지환의 온전한 모든 기억, 그리고 감정들.
마음속 깊이 감추어두어 이 몸으로 사는 나조차도 알 수 없었던 것들이 온전히 내 안에 들어찼다.
툭.
나도 모르게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이 눈물을 마지막으로 지환과도 이제는 영원히 이별하게 될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꼭 복수해줄게.”
온전히 받아들이면서 알 수 있었다.
왜 그토록 차가운 성격이 되었고, 사람을 가까이하지 못했는지.
그는 두려웠던 것이었다.
가장 보호받아야 할 어린 시절 겪은 커다란 상실.
그에게 그것은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어느 순간 이렇게 사라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온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도 죽음이라는 폭군에게 빼앗길 것이라는 불안감.
지환은 빨리 오라고 어머니를 재촉했던 자신을 탓했고, 자신 때문에 보호자를 잃은 누나에게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환이 그렇게 휘청이고 제대로 설 수 없게 만든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만든 공정한.
나는 이번 일로 그를 완전히 누나와 내 인생에서 쳐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천천히 침대에 누웠다.
그렇게 해야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꿈속에서 다시 잠이 드는 듯한 기묘한 느낌과 함께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지환이 쓰러진 직후, 현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PD의 멱살을 잡을 것처럼 으르렁대던 우진은 급히 달려와 지환을 부축했고, 언래블 멤버들은 지환을 둘러쌌다.
희게 질린 얼굴, 힘없이 늘어진 작은 몸.
왜 자꾸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멤버들은 지환에게 꽂히던 사람들의 시선을 몸으로 가리며 입술을 깨물기도 하고 주먹을 꾹 말아 쥐기도 했다.
늘 활발하고 생기발랄했던 멤버들의 기세가 날카로운 칼날같이 서늘해지자, 그동안 몇 번이나 웃으며 인사한 스태프들도 놀라서 어찌할 줄 몰랐다.
기사로만 언래블을 접했던 공정한은 불구대천의 원수를 보는 듯한 매서운 시선에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섰고.
“당신, 무슨 낯짝으로 여기에 온 건지 모르겠지만 각오하세요. 그리고 주영욱 PD님, 이건 계약 위반입니다.”
우진은 험악한 분위기를 풍기며 경고하곤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일찍이 악플러에 대한 고소를 진행하면서 정윤, 소현, 우진은 멤버들의 가정사를 제법 상세하게 파악했다.
멤버들의 보호자와도 몇 차례 상담을 진행했고, 상담사인 노찬영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던고.
회사에서 멤버들의 상담과 출연 프로그램에 신경 썼던 것은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 때문에 JC엔터의 출연 요청 시 계약서에도 해당 내용을 기재해 두었다.
멤버들이 원하지 않을 시 과거사를 언급하지 말 것과 필요하다면 반드시 사전 협의할 것.
주영욱 PD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든, 알지 못했든 상관없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건 멤버들에게 위해를 끼쳤고, 계약을 위반했다는 것.
“아니, 가족을 만나게 해준 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지금 쓰러진 게 저희 탓이라는 증거가 있어요?”
영욱은 생각지 못했던 상황에 당황한 상태였다.
사이가 좋지 못한 친척을 불러 곤란할 만한 질문을 조금 던지며 적당한 그림을 만들려 했을 뿐인데.
그 후 친분이 있는 기자들과 입이 가벼운 스태프들을 통해 약간의 소란을 만들 생각이었다.
공지환보다는 그 누나에 초점을 맞추면 JC 엔터든 ON 엔터든 영욱에게 직접 책임을 묻기 어려워질 테니까.
적당히 압박해서 얻어낼 것만 적당히 얻어낸 후 최종 방영분에는 편집할 생각이었다.
기사로 적당히 시끄러워져도 실제 방영분에는 없는 내용이라면 소란은 길어지지 않을 테니까.
대중은 늘 무료해 했고, 적당히 물어뜯고 씹고 맛볼 흥밋거리를 원했다.
다만 ON 엔터의 행보를 알고 있으니, 악플러 사건 때처럼 크게 번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공정한도 영욱에게 대충의 이야기는 들었고, 그에 맞춘 대본도 전달받았다.
여러모로 연희의 상황이 곤란해지면 지환을 데려오는 게 수월해질 터.
게다가 지환을 데리고 있으면 연희를 컨트롤하는 것도 손쉬울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연희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지환이 기절하는 것은 모두의 예상 밖이었다.
상황을 모르는 현장의 스태프들도 웅성거리느라 바빴고, 팽기준도 당황한 눈치였다.
“일단 병원으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요? 이대로 둘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지환이 얼굴이 너무 창백해요. 형, 어떡해요?”
하준과 힘찬이 우진에게 물었다.
그사이 얼마나 놀랐던 건지 세빈과 영빈의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곧 실장님이랑 팀장님 오실 거야. 그때까지만 조금 기다리자. 잠시 지환이 눕힐만한 곳이 있을까요?”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AD가 우진의 말에 정신을 차린 듯 외쳤다.
“이쪽으로 오세요!”
출연진 대기실로 쓰이는 공간의 소파를 떠올린 듯했다.
우진과 언래블의 험악한 분위기에 주춤했던 정한은 이 자리에서 빨리 사라지는 게 좋을 거라고 판단했다.
PD에 힐끔 시선을 돌려보았지만, 당장은 저 사람도 써먹지 못할 것 같았다.
지환을 대기실로 옮기고 얼마 후, 다급한 구둣발 소리와 함께 정윤, 소현이 현장에 도착했다.
“저희 애들은 어디 있죠?”
“실장님! 여깁니다!”
숨이 조금 가쁜 것으로 보아 급히 뛰어온 듯 했다.
타이밍 좋게 등장한 우진 덕분에 둘은 바로 멤버들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영욱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지만 이미 늦은 듯했다.
그 사이 어디까지 연락을 돌린 건지 영욱의 핸드폰으로 불이 날 것처럼 계속 전화와 메시지가 쏟아졌고, 정한은 이미 도망간 후였다.
‘쥐새끼 같은 인간…!’
현장에 들인 몇몇 기자들이 벌써 기사라도 올린 건지 난리였다.
영욱이 머리를 쥐어뜯던 그때, 소현은 미리 부른 구급차에 지환을 실어 보냈다.
우진이 다른 멤버들을 태우고 보호자 자격으로 구급차를 먼저 따라갔다.
소현도 상황을 파악하고 병원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실장님.”
“알아. 소현팀. 하지만 일단은 먼저 듣자.”
꾹꾹 눌러 담긴 분노가 선명한 소현의 목소리에 정윤은 침착하게 답했다.
모두가 이성을 잃으면 정확히 대처할 수 없기에 정윤은 냉정해야 했다.
촬영 현장으로 돌아온 둘은 주변 스태프들에게 화를 내는 주영욱을 바라보며 실소했다.
메인 작가와 공정한은 어디로 갔는지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고.
“JC 엔터에 연락했으니까 그쪽에서도 올 거야. 소현팀, 계약서 챙겨왔지?”
“당연하죠.”
우진에게 연락 온 즉시 소현은 계약서를 챙기고 정윤에게 뛰어갔었다.
그 후 곧장 방송국으로 날아온 것.
둘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영욱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자신의 자리가 날아가게 생겼으니까.
처음 병섭의 이야기를 듣고 계획할 때만 해도 일이 무척 쉽게 풀린다고 생각했는데.
공정한이 보물 상자가 아닌 트랩이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린 걸까?
온갖 생각에 두통까지 일었다.
“주영욱 PD님이시죠? 저희 할 얘기가 제법 길 것 같은데요.”
냉기가 풀풀 흘러나오는 정윤의 말에 영욱은 침을 꿀꺽 삼켰다.
방송가에는 되도록 척지고 살지 말아야 할 사람들의 명단 같은 것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저 정윤 실장.
중소업체인 ON 엔터의 실장이지만, 그가 가진 인맥과 실력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고 했다.
어느 대기업의 오너 일가와도 끈이 닿아있고, 정치인 중에도 아는 이가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오해가, 조금 있는 것 같은데….”
“잠시만요. 곧 JC 엔터의 담당자와 회사 법무팀에서도 사람이 올 겁니다. 그때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죠.”
오싹할 정도로 철저했다.
대체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디까지 손을 뻗어둔 거지?
영욱의 얼굴이 쓰러지기 직전 지환의 얼굴처럼 창백하게 질리자,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정윤은 화사하게 웃었다.
어느새 소란스러웠던 현장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