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97)화 (297/456)

297. Labyrinth(2)

오래되고 낡은 전구가 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채로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끼익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간간이 깜박거리며 힘겹게 빛을 뿌리고 있는 전구 아래는 쓸쓸하게 먼지를 뒤집어쓴 커다란 천이 있었다.

그 아래 모인,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이들은 하나같이 묘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천장이 제법 높은 탓에 삭은 천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오래된 가구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내부를 울렸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로브를 쓴 이들이 움직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들 중 가장 키가 큰 이가 물건을 덮고 있던 커다란 천을 잡아 내리자 뿌연 먼지가 파도처럼 일었다.

오래된 천 아래는 그 시대를 짐작하기 어려운 오래된 양식의 가구와 여러 물건이 놓여 있었다.

다른 이가 한 발 앞으로 나서 이리저리 쌓여있는 물건 중 매끈하게 세공된 담뱃대를 집어 들었다.

담뱃대를 집어 든 이의 손가락은 유독 하얗고 길었다.

커다란 진주를 작은 보석이 둘러싸고 있는 브로치, 오랜 시간 방치된 듯했지만 여전히 광택을 자랑하는 바이올린 등의 물건을 각자가 하나씩 집어 들었다.

가장 뒤에 있던 체구가 가장 작은 이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때부터 들리는 오르골 소리.

춤곡을 연상시키는 멜로디가 아름다웠지만, 공간을 타고 울리면서 음산하게만 들렸다.

이윽고 가장 뒤에 있던 이가 빛조차 흡수할 것 같은 새까만 색의 목함을 집어 들었다.

그와 함께 오르골 소리는 점점 잦아들었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목함을 열자 오르골 소리는 완전히 사라졌다.

동시에 텅- 하고 전구 안에서 간신히 버티던 필라멘트가 터졌고, 전구 또한 산산조각이 났다.

그와 함께 목함 안에서 쏟아진 어둠.

어둠은 순식간에 안개처럼 퍼져나가 커다란 공간을 뒤덮었다.

화면에 마지막으로 잡힌 것은 웃는 듯 우는 듯 기묘한 가면을 쓴 어떤 얼굴이었다.

* * *

- 나는 오늘도 궁예를 해본다.

새 앨범 힌트라고 이런 영상을 올린 ON 엔터 이 변태놈들ㅠㅠㅠㅠ

담뱃대 – 히스

진주 브로치 - 씨아이

바이올린 - 하준

손거울 - 힘찬

작은 새장 - 세빈

목함 – 작은환

(등장 순서로 적음!)

이 순서로 집은 게 아닐까 싶어. 우리 애들 손 사진이랑 맞춰봤는데 아마도 맞는 듯?

지금까지 뮤비에서 저 검은 로브 입은 게 애들이 극복해야 할 두려움? 같은 거라는 게 가장 많은 추측이라 그걸 토대로 망상을 해봤어ㅎㅎ….

말 그대로 개인적인 망상이니까 심한 말은 참아줘 ㅠ

직전 티저에서 애들이 각자 다 이상한 공간으로 사라졌잖아?

그래서 난 각자 두려움과 직면하는 어떤 공간으로 이동한 거로 생각했어.

Confusion 뮤비에서 보면 막 애들이 길 다 때려 부수고 난장 피우잖아, 그게 처음 마주한 공간을 부순 게 아닐까 함.

순서로 따지자면 I'm OK> 폭풍전야> Confusion> 이번 앨범 이렇게 추측할 수 있음!

한번 부셨는데 그게 1차 시험이었고 이제부터 본게임을 시작하지, 이런 느낌으로ㅋㅋ….

그 후에 애들 단체 컷 사진 그거! (쟈근환 우는 그 사진ㅠㅠㅠㅠㅠ)

‘Pluto’는 아마 가장 마지막 순서거나 별개의 내용인 것 같아!

열심히 궁예 하다 혼자 소름 돋아서 써봤어.ㅠㅠ

진짜 이대로면 언제부터 ON 엔터는 이걸 계획한거야ㄷㄷ….

ㄴ 아니… 아니 선생님, 이게 다 뭐죠? 같은 걸 봤는데 왜 나는 이런 생각을 못하는 거야….

ㄴ 나도 원뷰어 궁예에 한 표!

ㄴ 혹시 저번에 ‘Pluto’ 궁예 한 뷰어니…?

- 분위기 너모 무서운 거 아니냐…. 아니 근데 마냥 무서운 게 아니라 신비롭고 막 다크 판타지? 그런 느낌적 느낌… 그러니까 빨리 풀버전 내놔라 정균찡ㅠㅠㅠ

- 저 오르골 소리 이번 타이틀 멜로디라는데 내 왼손을 건다! (이미 오른손이 없는 뷰어의 글이다)

ㄴ 불법도박 신고는 1301!

ㄴ 도박 중독 상담은 1336!

ㄴ 작은환:도박이라니…(무인도 환멸 짤)

ㄴ (세빈이가 힘찬이 하찮게 보는 짤)

ㄴ 야… 너네 너무해ㅠㅠㅠㅠ

ㄴ 왜 이런 데서만 이렇게 단합 잘 하는뎈ㅋㅋㅋ

컴백이 코앞에 다가왔음을 암시하는 온갖 티저와 사진, 떡밥들은 솜뭉치들을 다시 불타오르게 만들기 충분했다.

한동안 멤버들이 공중파 활동을 자제하는 듯 보여 아쉬웠던 마음이 눈 녹듯 스르륵 사라졌다.

물론 몇몇 방송에 얼굴을 내밀기도 했고, 언래블 스토리는 꾸준히 업데이트되었다.

하지만, 이왕이면 최대한 자주 최애 얼굴을 보고 싶은 건 모든 덕후의 마음.

이제 콘서트를 기대해도 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솔솔 흘러나오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해외 활동에 공들일 시기도 되지 않았냐는 의견도 함께.

그리고 커뮤니티 반응을 살피던 도연은 피식거리며 웃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소현 팀장님이 옳았다.

* * *

‘Origin’의 편집은 생각보다 멋들어지게 되었고, 꽤 즐겁게 볼 수 있었다.

김유원, 이온 연습생의 질문과 우리의 대답, 골든아워 형들의 추임새가 무척이나 화기애애하게 보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강한규 연습생의 발언도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PD가 당장 꼬리 자르기를 하진 않을 모양이었다.

그동안 몇 번의 촬영이 더 있었고, ‘너목들’ 스킬을 사용해서 확인해도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의외의 일이라면 주영욱 PD와 우리에게 몰래카메라를 시도했던 최병섭 PD가 아는 사이라는 것.

그리고 주영욱 PD가 박세날 PD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저들도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인가 보다 하는 생각과 함께 더 조심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최근 앨범 제작을 끝냈고, 3월 초 컴백 일정이 확정된 상태였다.

곧 예약판매를 알리는 공지와 새 앨범에 대한 다양한 공지가 올라갈 터.

회사에서는 이번 앨범의 성공 여부에 따라 소규모 콘서트를 준비해봐도 좋을 것 같다는 말도 나오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눈 깜빡일 때마다 흘러갔고, 이제는 조금 더 잘 다듬는 것만 남았다.

멤버들도 모두 나와 비슷한 심정인 듯했다.

준이 형은 그런 멤버들이 실수하지 않게 고삐를 쥐느라 힘든 것 같았지만.

실실 웃으며 세빈이를 괴롭히던 찬이와 눈이 마주쳤다.

‘왜?’

입 모양으로 벙긋거리며 물어오는 모습에 픽 웃고는 고개를 흔들어 아무것도 아니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멜트의 기존 일정이 생각보다 빠르게 마무리되어 ‘Origin’의 촬영도 오늘 촬영으로 마지막이었다.

다행히 에드도 조용했고.

그동안 그나마 경험치가 쌓인 건지 스무 명의 연습생 중 데뷔할 것 같은 멤버들이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언래블, 오늘 마무리까지 잘 부탁해요.”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오늘은 따로 섭외된 MC와 함께 그동안 연습생들과의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이었다.

질의응답 시간도 있었는데 리얼리티를 위해 답변에 대한 대본은 준비되지 않았다.

골든아워 형들도 멜트 멤버들도 없이 우리와 MC 한 분이 진행하는 촬영.

그동안 무사히 촬영이 흘러갔기에 속마음 확인을 넘길까 했었다.

하지만 흐트러질 뻔했던 마음을 포잉 덕에 다시 붙들 수 있었다.

‘원래 사고는 설마 하는 순간에 생긴다고 했음.’

‘그래, 포잉 말이 맞지.’

순순히 포잉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먼저 작가님을 확인했다.

다행히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그저 시청률과 대본에 대한 불만이 있었을 뿐.

그 후 감독님에게로 고개를 돌린 순간, 감독님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눈이 마주쳤다.

싱긋 웃어주자 그 머리 위에는 한마디가 퐁 하고 떠올랐다.

- 건방진 새끼

‘…징글징글하다, 진짜.’

뒤이어 퐁퐁 떠오르는 말풍선들.

- 도착했나?

- 어디쯤 온 거야?

- 이제 와서 다른 소리 하진 않겠지?

‘안 되겠음. 내가 조금 더 돌아 다녀봐야겠음.’

‘포잉, 무리하지 마. 얼마 전에도 혼났다며.’

평소보다 더 격렬한 감정과 무언가 기다리는 듯한 말풍선이 계속 떠오르자 괜히 불안해졌다.

그건 포잉도 마찬가지였는지, 좀처럼 내 곁을 떠나지 않던 포잉이 한 바퀴 돌고 오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화나! 뭐해?”

“아, 아냐.”

우리 땡글땡글하던 찐빵이 이제는 홀쭉해져서는 맥반석 달걀처럼 매끈했다.

갸우뚱하는 찬이에게 웃어준 나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그때의 불안함을 더 깊이 파고들지 않은 자신을 원망했다.

* * *

“이야, 언래블을 이렇게 또 만나네요.”

팽기준은 얼마 전, ‘HEY CHILD’를 통해 언래블과 인사를 나누었었다.

그리고 불과 며칠 만에 ‘Origin’의 일일 MC로 다시 마주한 것.

이미 대기하던 도중 인사를 나누었지만, 몰랐던 것처럼 능청스럽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초반에는 무난한 질의응답을 주고받으며 평화롭게 흘러갔다.

어떤 연습생에게 가장 눈이 가느냐는 질문부터 예전 생각이 났었냐는 추억팔이 등.

그렇게 하하 호호하며 즐거운 분위기를 이어가던 중, 팽기준은 남은 질문을 가늠해보다 속으로 혀를 찼다.

이 프로그램 혹은 멜트의 에드와 언래블 사이 무언가 일이 있을 거라는 추측을 하기는 했지만, 이런 질문을 섞을 줄이야.

“환 군에게 온 질문이네요. 세빈 군과 환 군은 가족의 반대가 심했던 멤버로 알려져 있었죠.”

이후 지환이 무어라 답하기 전, 팽기준은 질문을 이어갔다.

“그러다 환 군은 일부 가족과 사이가 틀어지기도 하고 일부 가족과는 나아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힐끔 지환의 안색을 살폈지만, 조명 탓인지 평소보다 조금 더 하얘 보이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되려 다른 멤버들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오늘 깜짝 게스트로 환 군의 가족분이 초대되었습니다! 여러분, 환 군의 큰아버지인 공정한 씨입니다.”

의도된 박수 소리와 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사내.

그제야 시종일관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환의 얼굴에 미세한 금이 갔다.

아무래도 절대 좋은 사이는 아닌 듯했다.

‘가족 가지고 이러는 건 조금 그런데.’

팽기준은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잠시 멈춰야 하느냐고 슬쩍 스태프들을 둘러봤다.

하지만 주영욱 PD의 눈이 새파랗게 빛나는 걸 확인하고는 체념했다.

괜히 반기를 들었다가 불똥이 튀면 곤란했다.

“반갑습니다, 반가워요, 언래블. 지환아, 잘 지냈니?”

“…네. 오랜만에 뵈어요, 큰아버지.”

방송국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세트장에 들어오면 주눅 들거나 떨기 마련인데 정한은 태연해 보였다.

어지간히 얼굴이 두껍거나 강심장이 아니면 보일 수 없는 태도였다.

“안녕하세요, 개그맨 팽기준입니다. 어려운 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쿠, 저희 애가 팬입니다. 나중에 사인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제가 더 감사하죠.”

의례적인 말 몇 마디가 오가는 동안 정한의 시선은 집요할 정도로 지환을 향하고 있었다.

그만큼 지환의 얼굴이 점점 색이 빠지는 것처럼 창백해지기 시작했고.

이거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팽기준이 무어라 말하기 전, 공정한이 입을 열었다.

”하하, 좀처럼 보기가 힘들어서 섭외요청이 왔을 때 냉큼 수락했어요. 지환이 누나가 지환이를 너무 꽁꽁 싸매고 지내서.”

누가 대본이라도 써준 것처럼 정한은 줄줄이 자기 할 말을 내뱉었다.

“아주 어릴 때 보고 연락이 끊겨서 무척이나 걱정했는데 TV에서 보고 어찌나 놀랐던지.”

언래블 멤버들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지자 우진을 바라봤고, 우진은 성난 얼굴로 PD에게 무어라 항의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고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것 같다고 팽기준이 속으로 중얼거리던 그때.

정한은 태연한 얼굴로 지환에게 속삭였다.

“지환아, 장례식장에서 큰아빠가 했던 이야기 기억나니?”

정한이 장례식장을 언급하던 그때, 창백했던 지환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고, 하준이 다급한 얼굴로 외쳤다.

“지환아!”

장례식장이라는 말이 트리거였던 걸까.

지환은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 정신을 잃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