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 EL DORADO(5)
다 같이 경환 형과 준이 형의 곡을 듣고 나오던 날.
세빈이는 자신이 쓴 파트를 내가 불렀으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경환 형이 만든 멜로디를 들었을 때 딱 떠오른 게 나였다고.
진즉 이야기해 보려 했지만, 왠지 모르게 너무 부끄러워서 말하지 못했다면서 웃었다.
최근에 열심히 공부하는 것 같더니 이런 깜찍한 생각을 하고 있어서, 새삼 우리 막내가 많이 컸구나 싶었다.
대견하고, 예쁘고, 자랑스럽고.
듣자마자 고개를 까딱거리며 리듬을 탈 만큼 마음에 들었던 곡이라 바로 내가 하고 싶다고 말했다.
최근에 작곡에 마음을 많이 쏟지 못했던 내게 멤버들의 이런 모습은 색다른 자극이 되어주었다.
자꾸만 초조하고 불안했던 마음이 고요하게 잠들어버릴 만큼.
누구 하나 빼놓을 것 없이 멤버 모두가 새로운 도전을 통해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그렇게 온전히 우리를 위한 시간이 평소보다 빠르게 흘렀다.
* * *
“결국, 나만 겨우 울었잖아.”
“난 우는 연기는 안 되나 봐.”
“우는 연기만 안 되는 거야? 아닐 텐데?”
“무심코 던진 팩트에 당신의 동료가 신음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무슨 이상한 공익 광고 톤이야.”
연습이 끝나면 늘 몸을 풀었다.
원래도 뻣뻣한 터라 최대한 컨디션을 유지하고 부상이 없으려면 전후로 몸을 풀어주는 게 중요했으니까.
다리를 쭉쭉 뻗으며 스트레칭을 하던 나와 도와주던 찬이.
우리는 얼마 전 촬영을 떠올리며 주거니 받거니 수다를 떨었다.
몸이 고될수록 정신을 분산시키는 데는 대화만큼 좋은 게 없었다.
원체 우리끼리 말을 많이 하기도 했고.
“이상하게 자꾸 나만 불쌍한 역을 맡는 것 같아.”
“음. 현실 폭군이니 연기라도…?”
“내가 어디가 폭군이야!”
지난번 촬영 때 원래는 찬이랑 내가 각자의 자세에서 눈물을 흘려야 했다.
하지만 찬이는 촬영 당시 결국 눈물 연기에 실패했다.
그 전에 연습할 때는 됐는데 촬영에 들어가자 눈물이 쏙 들어가서 좀처럼 흐르지 않는다고.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하던 감독님이 결국 최대한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해보자고 하셨다.
덕분에 나만 여러 번 눈물을 뽑느라 나중에 눈가가 빨갛게 부었다.
경환 형은 기어코 그걸 찍어 무인도 패밀리 채팅방에 올려 형들이 보낸 ‘우냐? 울어?’ 짤방으로 도배되기도 했다.
빌어먹을.
그때만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졌지만, 차마 형들에게 욕을 할 수 없었던 나는 채팅방을 나와버렸다.
그 뒤로 몇 번이나 재초대가 있었지만, 무시한 지 딱 하루 만에 형들이 돌아가면서 전화하기 시작했다.
같은 숙소의 멤버들에게는 돕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상태.
두 번 다시 놀리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낸 후에 복귀했지만, 틈을 보이면 바로 돌아갈 것을 알기에 냉랭한 척했다.
최근에 형들에게 소홀했다며 미안해했던 내 마음은 모두 메말라 사라져버린 건 당연지사.
하지만 세빈이와 경환 형의 졸업 축하 선물이라며 찾아왔던 모습을 가상히 여겨 참기로 했다.
내가 진짜, 건수 하나만 물어봐라.
속으로 한숨을 푹푹 쉬는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찬이는 조잘거리며 내 다리를 찢고 있었다.
“야,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엄청 유연해지긴 했네.”
“여전히 아파 죽겠다, 이 자식아….”
끙끙 앓는 내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우리 찬이.
겨우 몸을 다 풀고 난 후에야 연습실을 벗어날 수 있었던 나는 우진 형과 가희 누나를 따라 이동했다.
부지런히 이동해서 의상을 점검하는 사이, 웅성거림과 함께 사람들 사이로 누군가 우뚝 서 있었다.
“형님, 오셨어요?”
“어. 일찍 왔네.”
오늘 함께 광고 촬영을 할 진성 형님이었다.
오늘도 기다린 기럭지와 차분한 스타일을 뽐내는 우리 형님.
늘 그 키가 부러웠던 나를 알기에 형님은 피식 웃더니 머리를 토닥여주셨다.
“오늘도 잘해보자.”
“넵.”
오늘 형님과 함께 찍는 광고는 오픈 마켓 중 하나인 쇼핑모아의 광고였다.
처음에는 상혁 역의 아역 배우와 내가 물망에 올랐지만, 드라마의 과거사가 밝혀진 후에는 형과 내가 함께 찍게 되었다.
섣부르게 캐스팅 제의를 넣지 않아 아역 배우와의 사이도 틀어지지 않았던 게 천만다행이라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했던 걸 들은 포잉이 내게 들려주었다.
포잉은 이렇게 종종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와 내게 이야기해주었다.
남들은 모를 뒷이야기를 듣는 기분이라 꽤 재미있었다.
오늘 촬영은 드라마에 나온 것과 같은 교복을 입은 채로 시작된다.
무기력하고 지친 얼굴로 방 한구석에 오도카니 앉아있던 나.
잠시 앉아있던 나는 배를 움켜잡고 찬장에 하나 남은 라면을 집어 들며 한숨을 내쉰다.
허름하고 좁은 방안, 낡고 구겨진 교복을 입은 내가 라면을 끓이는 사이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린다.
올 사람이 없었던 터라 갸웃거리다 빼꼼하고 고개를 내밀어 확인하니 문 앞에 놓인 택배 박스.
택배 박스에는 쇼핑모아의 이름이 박혀있고, 받는 사람에는 ‘임지웅’이라고 적혀있다.
주문한 적 없는 물건이 도착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박스를 물끄러미 보다 박스를 뜯는다.
그 안에는 간단한 간식부터 컵밥, 반찬류 등 다양한 음식이 들어있었고.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고맙습니다….”
누군지 모를 이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내가 기쁜 얼굴로 컵밥을 뜯는 동안, 화면 한쪽에서는 구석에서 집을 지켜보는 진성 형이 있었다.
애틋한 얼굴로 빛이 새어 나오는 집을 바라보던 형의 모습과 함께 화면에는 한 줄의 문구가 떠오른다.
‘당신이 외롭지 않도록 언제나 당신 곁에 있겠습니다.’
소위 말하는 감성 광고.
드라마 속 지웅은 세상에 버림받고 비관적인 선택을 하지만, 현실에서는 상혁, 그러니까 쇼핑모아가 함께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광고는 시리즈로 이어질 예정이었다.
곤란한 상황이나 힘든 상황에 빠진 지웅(나)에게 늘 필요한 물건이 담긴 쇼핑모아의 택배 박스가 나타나는 내용이었다.
시리즈의 마지막은 상혁의 회사에 나타난 지웅이 상혁에게 쇼핑모아 택배 박스를 건네주며 웃는 내용.
영상 촬영 외에도 홍보에 쓰일 많은 사진을 찍어야 했기에 촬영은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이제 내 도움 없이도 잘해.”
“네? 무슨 말씀이세요. 형 없으면 안 되죠.”
촬영 중간 쉬는 시간 틈틈이 호흡을 맞춰보던 진성 형이 툭 하고 농을 던졌다.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너스레를 떨자 피식거리는 형의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 미안해요. 우리 진성 씨랑 오래 일했는데 이렇게 농담 많이 하는 거 처음 봐서요.”
“야, 민석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진성 형의 매니저인 최민석.
실제로도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둘은 꼭 친형제처럼 티격태격했다.
민석 씨가 잔소리하면 진성 형이 질색하는.
생각해보니 나와 찬이가 떠오르는 모습이기도 했다.
옆에서 마냥 인자하게 웃고 있는 우진 형을 바라보자 형은 그저 내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뭐지? 말 안 했는데 우진 형이 내 속마음을 읽은 것 같아.
아무래도 우리 우진 형도 멤버들과 나에게 이미 익숙해진 것 같았다.
우리 형도 진성 형님네 매니저처럼 오래오래 가족처럼 같이 지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형을 향해 웃었다.
형, 황희정승 알지?
형에게는 퇴사란 없어.
방긋 웃는 나와 마주 웃는 우진 형.
그 모든 걸 알고 있는 포잉만 오늘도 작게 혀를 찼다.
잠시의 휴식 후 현장으로 복귀한 우리.
촬영은 다행히 큰 실수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런 감성이 아직도 먹히나 싶어 걱정되었지만, 드라마가 한참 인기 있는 지금이 좋은 타이밍인 것 같기도 했다.
출연료가 내 생각보다 훨씬 큰 금액이라서 그만큼 부담이 더 심했다.
소현 팀장님은 많이 부를 때 잘 챙겨놔야 나중에 들어오는 광고 단가도 높아진다며 좋아하셨지만.
누나에게 무언가 새로운 선물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의상을 갈아입었다.
아직은 할 일이 많이 남았다.
* * *
“네, 오늘은 한참 인기몰이하고 있는 무서운 신인이죠? 언래블과 함께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함께 풀어가는 미래. 언래블입니다.”
MC들의 소개에 활짝 웃는 소년들.
하나같이 생기 가득한 얼굴이 화사하게 피어났다.
현장 스태프들이 손뼉 치는 소리와 함께 의자에 앉은 소년들을 향해 MC가 말을 걸었다.
“진즉부터 부르려고 했는데 언래블이 너무 바쁘던데요?”
“아, 정말요? 저희는 언제든 불러만 주셨으면 달려왔을 텐데!”
“최근에는 새 앨범 준비하느라 제정신이 아니었거든요. 저희 다 수면 부족이라 메이크업해 주시는 누님들이 매일 울상이세요.”
가벼운 토크를 빙자한 근황을 하나, 둘 풀어가기 시작했다.
앨범에 대한 이야기, 얼굴을 비쳤던 방송의 흥행 등 소소한 이야기에도 멤버들은 싱글벙글하였다.
“지금 이 얼굴이 안 좋아진 거라고요?”
“방금 발언은 선 씨게 넘었는데?”
“아, 선배님~! 저희 어제 여기 나오려고 팩 좋은 거하고 온 거예요.”
“진짜?”
“그럼요! 효과 괜찮은데 추천해드릴까요?”
제법 능글맞게 받아치는 힘찬과 지환의 모습에 분위기는 더 훈훈해졌다.
‘HEY CHILD’는 아이돌만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이었다.
근황 토크나 소소한 게임을 통해 경품을 주기도 하는.
두 MC의 티키타카가 워낙 좋았고, 기분 나쁠 만한 장난은 배제한 진행이 아이돌 팬들에게도 호응을 얻었다.
덕분에 몇 년째 유지되고 있는 장수 프로그램이었고.
어느 정도 자기 팬덤이 생긴 아이돌 중 곧 새 앨범이 나오는 아이돌과 이슈가 있는 아이돌이 주로 출연했다.
두 MC와 언래블은 잠시 동안 곧 발매될 새 앨범과 근황으로 약간의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소식을 꺼내 들었다.
“내가 최근에 소식을 하나 들었는데.”
“어떤 거요?”
“우리 무슨 일 있어?”
“앨범 말고 뭐가 있다고?”
인기 개그맨인 팽기준이 운을 떼자 언래블 멤버들은 되려 자기들끼리 무슨 일 있느냐며 묻고 있었다.
방송가만큼 소문이 빠른 곳도 없었다.
그런 방송가에 최근 도는 이야기 중 하나가 골든아워, 멜트, 언래블에 대한 이야기였다.
“언래블이 워낙 골든아워한테 예쁨받아서 멜트가 질투한다고 하던데.”
“에이, 저희를요? 말도 안 되죠.”
“멜트 선배님들이 저희 얼마나 잘 챙겨주시는데요! 신인이라고 엄청 배려 많이 해주세요.”
말도 안 된다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을 휘휘 젓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정말 뜬소문인가 싶었다.
하지만 말을 꺼낸 팽기준은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멜트 멤버 중에서도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에드가 최근 더 심해졌다는 이야기.
그게 언래블에 대한 질투 때문이라는 걸 알만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었다.
에드야 워낙 여기저기 적을 잘 만드는 타입이라 처음에는 크게 소문이 돌지 않았다.
언래블에 대한 호기심만 조금 높아지는 정도?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상하게 말이 조금씩 더 붙었다.
보통 카더라는 대충 안에서 돌고 사라지기 마련인데, 이렇게 소문이 새끼 치는 경우는 무언가 있기 마련이었다.
다만 방금 질문은 대본에 없었던 질문이기에 팽기준은 적당히 뭉개고 넘어갔다.
워낙 사이가 좋아 보여서 질투하는 사람들이 소문냈나보다 하면서.
“저희는 아직 관심이 더 고픈 햇병아리니까 많이 예뻐해 주세요!”
“형들, 고마워요!”
신입답지 않게 능청스럽기까지 해서 팽기준도 호기심이 동했다.
“그러고 보니 무인도 패밀리라는 게 있다죠? 우리 시청자들도 엄청 궁금해하던데.”
“거기에는 아주 슬프고 가여운 사연이 있어요.”
특히 환이라는 멤버는 첫인상과 달리 서글서글하고 친근했다.
무인도 끌려가서 밥만 하다 왔다면서, 자기를 밥하는 사람으로 쓰려는 사람들의 모임이 ‘무인도 패밀리’라며 다다다 말을 쏟아내기도 했다.
“이야, 우리 환 군이 쌓인 게 많네. 어떻게 새벽 분들께 영상 편지라도 보낼래요?”
“정말요? 저 그럼 가영 형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래, 이렇게 분량을 잘 받아먹었다.
양손을 허리에 얹은 지환은 스태프가 알려준 카메라를 향해 손가락을 척 내밀었다.
“가영 형! 숙소에서는 제발 바른 생활 좀 해요! 빨래도 자주자주 돌리고! 식사 시간 좀 지키고요! 세비 형이랑 키스 형이 힘들어하잖아요! 어제도 전화 와서 키스 형이 숙소 나갈 거라고 했단 말이에요!”
뜬금없는 폭로에 MC들이고 스태프 들이고 웃느라 바빴다.
언래블 멤버들도 맏형 둘은 이마를 부여잡았고, 나머지는 웃느라 바빴다.
왁자지껄하고 생기가 넘치는 공간.
팽기준은 어쩌면 조만간 재밌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