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 EL DORADO(4)
세빈이와 경환 형의 졸업식을 연달아 치른 우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들뜬 분위기를 감출 수 없었다.
새 교복을 보고 좋아하는 우리 막내 병아리나 이제는 교복 따위 입지 않아도 된다고 좋아하던 경환 형의 모습은 무척이나 대조적이었고.
거기에 더해 졸업식 때마다 함께 있던 우리 모습이 공식 계정에 올라가자 팬들도 함께 즐거워했다.
팬들에게 한껏 귀염받은 세빈이 얼굴이 빨갛게 익어버린 건 두말할 필요 없는 일이고.
GIVE 앱을 통해 중간중간 팬들과 소통하면서 새 앨범에 대한 스포일러를 하지 않기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최근 하는 연습이나 일정이 주로 앨범 관련된 일들이다 보니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그 내용을 모두 빼는 건 쉽지 않았다.
“너 진짜 또 실수하면 너 빼고 방송할 거야.”
“아니, 내가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고….”
기분이 업되면 주체못하는 우리 힘찬이가 결국 이번 앨범 이야기를 아주 조금 흘렸다.
덕분에 준이 형한테 이렇게 또 혼나고 있고.
다행히 말이 나오자마자 재빠르게 입을 막아버린 경환 형 덕분에 문제가 생기진 않았다.
솜뭉치들은 조금만 알려달라며 아우성쳤지만, 이미 정신무장을 단단히 한 우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선물은 되도록 모르는 상태에서 포장을 뜯어야 더 기쁜 것 아니겠어?
한참 준이 형에게 혼난 찬이는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이미 전적이 있는 터라 얌전해졌다.
“어때? 너희 듣기에는?”
GIVE 앱 라이브를 끝낸 우리는 경환 형의 작업실에 모였다.
좁은 공간이라 다들 한껏 짜부라져서 앉아있긴 했지만, 형이 들려준 음원은 불편함을 잊기에 충분했다.
연달아 세 곡의 노래를 들은 우리는 끝나자마자 각자 소감을 읊어댔다.
“엄청 신나는데 좀 달달한 느낌도 나요.”
“두 번째 곡은 술 먹고 녹음한 거 아니죠? 우리 형이 이렇게 거칠다고?”
“원래 형이 개인 작업하는 곡은 좀 거칠어요. 경환 형 옛날 곡 안 들어봤어요?”
각 곡이 전부 다른 느낌이었는데, 덕분에 세 곡 모두 누구와 작업한 곡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신기했다.
“첫 번째 꺼 준이 형이랑 작업하고 영빈 형이 멜로디 라인 가사 썼어요?
”어? 어떻게 알았어?“
”세 번째는 세빈이가 멜로디 가사 쓴 거죠?“
”뭐야, 너 어디서 지켜봤어?“
내 질문에 준이 형과 영빈 형의 눈이 동그래졌고, 경환 형은 약간 멍청한 얼굴이 됐다.
세빈이는 우리 형은 알아볼 줄 알았어! 하는 눈으로 초롱초롱해져서는 지켜보고 있었다.
아냐, 세빈아. 그거 아냐.
전생에 그렇게 죽어라 들었던 애들 노래다.
전생의 언래블은 개인 작업도 꾸준했고, 멤버들끼리는 물론 다른 뮤지션들과의 협업도 많았다.
그러니 내가 모를 수가 있나.
덕질 좀 해본 사람들은 그림자만 봐도 내 새끼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림자도 아니고 멤버들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는 노래는 오죽할까.
”그냥 감이에요, 감. 내가 우리 멤버들을 이렇게 잘 아네.“
”와, 나 소름 돋았어. 얘 뭐야.“
”평소에 그만큼 멤버들을 많이 생각한다는 뜻 아니겠어요?“
상큼하게 웃어줬지만, 찬이는 질색한 얼굴을 했다.
진짠데?
”사운드 웨이브에 올릴 생각이야. 정규 앨범이 아닌 그냥 우리 개인의 창작물로. 어때?“
”전 좋을 것 같아요. 형이 하고 싶은 음악이 어떤 건지 더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서 우리 솜뭉치들도 좋아할 것 같아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자, 기다렸다는 듯 세빈이도 입을 열었다.
”꼭 거창할 필요 없잖아요. 형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될 거 같아요. 팀장님도 기대한다고 하셨고.“
”팀장님이?“
내가 연기를 배우고는 등 개인 활동의 폭을 넓히는 동안 다른 멤버들도 바빴었다.
여러 예능에 잠깐씩이지만 얼굴을 비췄고, 꽤 좋은 평을 받았다.
지금이야 시상식과 연말 연초를 지나며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조만간 또 바빠질 것.
이렇게 각자 활동을 하게 된 것 자체도 회사에서 여러 활동을 경험해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생각보다 더 긍정적인 결과를 도출하기도 했고.
가장 단적인 예로는 이번 드라마가 잘 된 내가 있었다.
당장 내일도 진성 형님과 둘이서 광고 촬영이 있었다.
그 외에도 각 멤버들을 원하는 수요는 꾸준하다고 했다.
그저 새 앨범 준비와 우리 체력을 생각해 빽빽하게 스케줄을 잡지 않았을 뿐.
멤버들의 칭찬에 한껏 기분이 좋아진 건지 경환 형의 어깨가 평소보다 더 들썩거렸다.
우리 형, 아직 귀엽네, 귀여워.
* * *
언래블의 새 앨범의 티저가 공개되면서 여러 기사가 하나, 둘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처음 앨범의 기획단계부터 예고했던 시리즈 물이라는 점이 많은 호응을 이끌었다.
팬들이 언래블의 새 앨범에 대한 호기심을 무럭무럭 키워가고 있던 그때, 공식 계정을 통해 한 장의 사진이 공개되었다.
새하얀 침대 위에 마찬가지로 하얀 잠옷을 입고 앉아있는 두 소년.
헝클어진 이불 사이로 비죽 보이는 족쇄는 소년들의 손목에 연결되어 있었다.
네 명의 멤버는 두 소년을 지키려는 듯, 침대에 기대어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네 명 모두 행복한 꿈을 꾸는 듯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체.
무척이나 폭신해 보이는 베개가 주변에 흩어져 있었고, 침대 주변에 기댄 멤버들의 잠옷은 다양한 색이었다.
하지만 정면을 응시하는 소년, 지환의 얼굴만 유독 어두웠다.
침대 주변을 둘러싼 분위기는 아늑하고 포근한 따뜻한 빛이 맴돌았지만, 쏟아지는 햇볕이 지환만 비껴간 듯했다.
긴 속눈썹이 그늘을 만들어낸 탓일까?
희미한 음영이 진 얼굴에는 체념 혹은 슬픔이라 부를 법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투명한 눈물이 눈가에 가득 고여 금방이라도 후드득 떨어질 것 같은 애처로움을 자아냈다.
한편, 바로 옆에 앉은 힘찬은 평소의 장난기 가득한 미소는 어디 갔는지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얼굴이었다.
힘찬의 시선이 닿은 곳은 눈물이 가득 고인 지환의 얼굴.
이불과 족쇄 사이로 지환이 힘찬의 손을 꽉 쥐고 있는 모습이 살짝 보였다.
가장 평화로워야 할 공간에 홀로 슬픔에 빠진 지환과 온기를 잊은 힘찬.
그런 그들을 둘러싼, 행복한 꿈에 빠진듯한 네 명의 멤버들.
이질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사진의 하단에는 새 앨범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EL DORADO’
온몸에 사금을 두른 남자가 다스리는 도시, 도시 전체가 황금으로 둘러싸여 발치에 치이는 게 보석이고 황금이라는 곳.
인간의 광기를 먹고 자라 점령과 학살을 낳았던 그 소문.
그러나 모두가 찾지 못해 결국 상상 속의 존재로 치부된 그곳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유토피아만큼이나 허황되고 거짓으로 둘러싸인 그 전설이 이번 앨범의 이름이었다.
공개된 티저 영상과 컨셉 포토는 팬들을 흥분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 전체 사진에서 공개된 침대랑 저 잠옷, 플루토 때 나왔던 그거 아님?
그럼 이 앨범은 플루토 때의 행복이 부정당하는 거야?? 궁예님 나와주세요. 나 매우 혼란스러우뮤ㅠㅠㅠ
ㄴ 우리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만들어 버리는 ON 엔터…. 그들은 대체????
ㄴ 궁예 : 안돼, 돌아가. 관심법으로도 안 보여.
ㄴ 아니, 궁예님. 너무하네! 거, 시도라도 해보시던가!
ㄴ 너네 뭐 하는 거얔ㅋㅋㅋㅋ 아 근데 진짜 매번 티저 때마다 너무 심장이 빤스빤스ㅜ
ㄴ 숭하다 숭해 빤스라니
- 누가 우리 자근화니 자꾸 울리냐,
어느 방향에 계신지 좀 알려줘, 내가 절하게 ㅠㅠㅠ 자근환은 왜 이런 컨셉이 잘 어울리는 거야.. 지웅이때도 진짜 개쩔었는데ㅠㅠㅠ
하..우리 화니 조심해. 누나는 이미 한 마리의 포악한 솜인형이야.
ㄴ 내 안의 흐격룡이…!
ㄴ ㅠㅠㅠㅠ 내 안에 눈떠선 안 될 무언가가 눈뜨는 기분임. 안대.. 우리애 지켜..ㅠ
ㄴ 경찰 아저씨 여기에요!
ㄴ 삑. 정상입니다. 당신은 정상적인 변태입니다.
팬들의 기대와 관심을 먹고 새 앨범에 대한 기대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 * *
“아니, 이건 말이 안 되지!”
“선배님 말이 맞습니다. 점점 개판이에요.”
소란스러운 실내 포장마차 안.
취객들의 요란한 목소리와 인기곡이 흘러나오는 소리가 맞물려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흥겹기만 했다.
누군가를 탓하는 듯한 욕설, 자신을 포장하는 과시하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곳 한복판에서 두 PD 또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최병섭과 주영욱은 울분이 가득한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이건 진짜 선 넘는 거야. 왜 아이돌이 연출에 간섭을 해?”
“시건방진 새끼들, 진짜.”
각자 원망의 대상은 달랐지만, 공통의 적을 두었기 때문인지 옆에 쌓여가는 술병만큼 이야기는 과격해졌다.
“저 저번에 관영 선배 대타 뛴 거 아시죠?”
“어. 그때 얘기했잖아.”
“진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들이 저 엿먹인다고, 하. 진짜.”
“ON 엔터에서도 지랄했다며?”
“말도 마세요! 실장이 선배한테 뭐라고 말했는지 선배한테까지 욕 처먹었어요!”
잔뜩 흥분한 최병섭은 일전 언래블 스토리 촬영 당시 있었던 일들을 주영욱에게 털어놓았다.
호의에서 몰래카메라를 기획했는데 반대로 자신에게 몰래카메라를 시전한 일, 소속사와 윤관영 PD가 자신에게 어떻게 했는지 등.
특히나 뻔뻔한 얼굴을 했던 공지환에 대한 불만은 끝이 없었다.
주영욱은 일을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하는 최병섭의 실력을 비웃으면서도 겉으로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부추겼다.
주영욱이 현재 촬영 중인 ‘Origin’에도 언래블이 출연 중이었고, 골든아워의 훼방으로 계획했던 신을 몇 개 나려야 했기에 정보가 필요했다.
답지 않게 착실하고 사람 좋다는 평이 자자한 언래블은 이상할 정도로 같은 연예인들까지 그들을 케어하려 했다.
보호 본능이라도 자극한 것인지 회사고 연예인들이고 싸고돌면서 우쭈쭈해대는 게 영욱에게는 못마땅했고.
재밌는 영상을 뽑으려면 적당한 양념이 필요했고, 그걸 만들어내는 게 PD와 작가의 영역.
영욱은 연예인들이 PD의 영역을 빈번하게 침범하는 최근의 작태에 불만이 많았다.
“더러워서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진짜.”
“야, 니가 참아. 카메라 던지면 뭐 먹고 살래?”
“선배는 억울하지도 않아요?”
이미 취기가 잔뜩 오른 병섭의 얼굴이 시뻘겋게 익어있었다.
자신이 창피를 당했던 날의 감정이 다시 올라온 모양이었다.
“다 방법이 있을 거다. 우리가 이 바닥에서 하루 이틀 사냐?”
“하아… 제가 속이 타서 그래요, 속이 타서!”
영욱은 병섭을 이용하면 더 많은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욱하는 성질 때문에 말이 많은 후배지만 병섭은 나름대로 쓸만한 패였다.
“병섭아, 형이랑 일 하나 해볼래?”
“네? 뭔데요?”
“이거 잘되면 내가 너 다시 불러줄게.”
흥미가 동한 듯 눈을 번뜩이는 병섭의 모습에 영욱은 잔에 남은 소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처음 이 프로젝트를 맡을 때가 떠올랐다.
이번 프로젝트만 잘 해내면 박세날도 더는 자신 앞에서 건방 떨지 못하리라.
어정쩡한 시청률은 커다란 이슈를 먹고 더 견고히 자랄 것.
영욱은 병섭에게 자신의 계획을 소곤거렸다.
쉭쉭 거리는 뱀의 속삭임 같은 목소리에 병섭은 본능적으로 부르르 떨었지만, 이미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죽도 밥도 안되는 상태로 있다가는 자신은 손가락만 빨게 될 것이라는 걸 얼큰하게 취한 와중에도 알고 있었다.
“진짜 약속하신 거예요?”
“야, 형 못 믿냐?”
가장 못 믿을 말을 하는 영욱의 눈동자가 기분 나쁜 열기를 품고 번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