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 EL DORADO(2)
언래블 팬들은 오늘 방영된 ‘메인쇼’ 모습에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영원하기를’이라는 곡의 커버 무대라는 건 기사와 홍보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걸그룹 무대인데 애들이 소화하기 힘들지 않을까, 라는 의견이 많았다.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시작된 방송.
여러 아이돌 그룹이 각자 맡은 그룹의 무대를 꾸며나갔다.
‘메인쇼’의 이번 주제가 아이돌 무대여서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눈이 즐거웠다.
특징이라면 몸값이 높은 아이돌이 아닌 신인이라 칭해지는 아이돌들이 나왔다는 것.
후배들이 선배 무대를 커버하는 내용은 포장하기에 따라 여러 이야기로 써먹을 수 있기에 나쁘지 않았다.
언래블은 가장 마지막 순서였다.
17년 데뷔 아이돌 중에 가장 성공한 아이돌이라 칭해지는 만큼 마지막 순서를 배정받은 것 같았다.
익숙한 노래에 손가락을 까딱이기도 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즐기던 솜뭉치들.
그들은 진행자의 소개에 눈을 반짝였다.
‘드디어 내 새끼 차례!’
두근두근한 마음을 누르며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사이,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너의 세계가 끝나는 날까지 내 곁에 있어 줘.]
익숙한 후렴구가 흘러나오고 원곡을 기억하는 이들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애니메이션 OST 느낌의 아련한 멜로디와 몽글몽글했던 가사.
어두워진 무대 위에 여섯 명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
이상했다.
분명히 언래블이라고 했는데, 보이는 실루엣은 치마였다.
“얘들아?”
화면 너머로 지켜보던 솜뭉치들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두웠던 무대 위, 핀 조명이 제일 끝에 있던 멤버를 비췄다.
“약속했던 시간을 세어보고 있어, 매일 매일.”
맑은 목소리와 함께 정면을 향해 몸을 돌린 건 네이비색 루즈핏 브이넥 니트와 무릎길이의 스커트를 입은 세빈이었다.
긴 생머리의 가발을 쓴 세빈이 모습을 확인한 솜뭉치들은 각자 활동하던 커뮤니티로 달려갔다.
- 미친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야????
지금 저 청순가련큐티가 우리 막둥이야? 진짜로??
ㄴ 아닠ㅋㅋㅋ 놀란 와중에 무섭게 정확한 표현 어쩔..
ㄴ 섹시요염카리스마 히스 언니 사랑해!!
ㄴ 이제 하준이 교회 언니야?? 교회 오빠보다 위험해 보이는데...?
ㄴ 절 언니할 수는 없잖아. 우리 애들 머리 지켜줘..
ㄴ 절언니 뭐얔ㅋㅋㅋ 미쳤냐고ㅋㅋ
ㄴ 콜라 뿜었다ㅋㅋ 미쳐 진짴ㅋ
- 우리 애들 뉴 부캐.. 언니.. 내 심장 조사버리셨다..
ㄴ 찬이 양 갈래머리 너무 귀여워......ㅠ 저 머리하고 폴짝폴짝 뛰어다니는데 왤케 사랑스럽지??
ㄴ 아니 왜 애들 다리가 내 팔뚝만 해?? 누가 설명 좀;;
ㄴ 왜 때문에 여장 잘 어울리는데 ㅠㅠㅠㅠㅠㅠ 나보다 예뻐 ㅠㅠㅠ
- 안무 디테일 미쳤다
내가 원래 저 곡 좋아해서 무대도 엄청 많이 봤단 말야. 저거 시간 멈춘다는 의미로 시계태엽 돌리는 동작 넣은 건데 시곗바늘 돌아가는 것처럼 다 같이 안무 각도 착착 맞추는 거 개힘들다고 했거든. 울 애들이 그걸 또 이렇게 해내셨다.......
각기 다른 포인트의 스쿨룩 차림을 한 언래블 멤버들 모습은 시청자와 팬들에게 여러 가지로 충격을 안겨주었다.
경환과 힘찬은 파이팅 넘치는 어깨 탓에 웃음을 자아냈지만, 당사자들 얼굴은 한없이 진지했다.
반면 지환과 세빈은 체구가 작은 편이라 앞선 둘에 비하면 지나치게 어울렸다.
평소 안무할 때도 춤 선이 고운 편이었던 터라 원곡 특유의 아련한 분위기를 잘 살려냈다.
가장 맏형인 하준과 영빈은 웃는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영혼이 반쯤 나간 듯 눈동자에 생기가 없었다.
그 와중에 원곡 멤버들의 헤어 스타일을 가발로 완벽히 재현해낸 점은 기특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 나 지금 방송 못 보는데 ㅠㅠㅠ 누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좀 알려죠 ㅠㅠ
ㄴ 그··· 어, 음. 이건 진짜 영상으로 봐야 해.. 언래블 언니들.. 날 가져요 ㅠ
ㄴ 꼭 영상으로 봐. 이걸 뭐라 표현할 수가 없다.. 진짜 싱크로율 쩌는데 울 애들 왜 이렇게 곱냐..
ㄴ 지금 인터뷰하고 있는데 세빈이ㅋㅋㅋㅋ볼터치가 아니라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진거래.. ㄱㅇㅇㅠㅠㅠ
완벽한 무대를 위해 의상과 헤어스타일까지 재현하고 싶었다는 하준의 인터뷰.
굵은 컬이 들어간 긴 머리를 뒤로 넘기며 답하는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어떻게 이렇게 디테일을 살린 무대를 할 수 있었냐는 질문에 힘찬이 씩씩하게 답했다.
익숙하지 않은 착장에 무대에서 실수할까 봐 걱정돼서 가발과 의상을 착용한 상태로 안무 연습을 했다고.
경환은 평소처럼 큰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미안함을 듬뿍 담아 말했다.
“유어걸 선배님들 죄송합니다. 특히 아람 선배님 죄송합니다!”
자신이 담당했던 포지션 멤버의 이름을 부르며 사과하자, 다른 멤버들도 덩달아 죄송하다며 인사를 했다.
여러모로 충격과 공포, 혼란의 무대였지만 무대 자체가 훌륭했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이보다 더 프로그램의 취지에 부합하는 무대는 없었으니까.
아직 신인이기에 할 수 있는 패기 넘치는 무대에 많은 이들이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그때, 이 무대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었던 언래블은 다행히 다른 스케줄 덕분에 모니터링을 피할 수 있었다.
* * *
이전 앨범에서 멤버들은 두 명씩 짝지어 도망쳤고, 그러면서 각기 다른 상황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때 우리가 마주했던 공간.
그 모습이 세트장으로 구현된 걸 두 눈으로 보는 건 늘 신기한 일이었다.
앨범 재킷 촬영을 위해 모인 우리는 각자 짝꿍과 촬영할 세트장을 꼼꼼히 살폈다.
이번 앨범도 두 가지 버전으로 발매된다고 했다.
“환아, 있다가 우리 울어야 된대!”
“운다고?”
“응. 너랑 나만.”
각자 어떤 포즈를 취해야 할지, 주제가 무엇인지 설명을 듣고 고민을 하던 중 들려온 청천벽력같은 소식.
마냥 해맑은 얼굴의 찬이를 보자 마음이 심란해졌다.
왜 하필 우리가 우는 씬이야···.
“너 울 수 있어?”
“안 해봤는데.”
“난 자신 없어···.”
산뜻하게 안 해봤다고 대답하는 찬이 모습에 어깨를 토닥거리는 것 외에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우리 정말 괜찮은 걸까?
“일단 형들 촬영부터 좀 보자.”
쫄랑쫄랑 돌아다니는 찬이를 붙들고 이제 막 촬영을 시작하려는 영빈 형과 세빈이를 보기 위해 움직였다.
숲처럼 꾸며진 공간에 이질적인 느낌의 문이 하나 서 있었다.
거울의 반대편처럼 영빈 형 쪽에도 세빈이가 서 있는 쪽에도 문이 달려있었다.
양쪽에서 작가님의 신호를 따라 천천히 문을 열었고, 열린 문 사이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영빈 형과 세빈이.
표정 없는 둘의 얼굴이 낯설었지만, 그만큼 몰두하고 있다는 뜻이라 괜히 설레는 기분도 들었다.
마치 서로를 보지 못한 듯 힘없이 문을 닫은 둘은 문을 벽 삼아 등을 기댔다.
잔뜩 풀이 죽은 얼굴을 한 세빈이가 문에 기댄 채로 바닥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뺨에는 이전 영상에서처럼 영빈 형이 붙여준 밴드가 붙어 있었다.
영빈 형은 두 눈 가득 서글픔을 담고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한숨을 내쉬는 듯 살짝 벌려진 입술,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하고 있다는 작가님의 칭찬과 흐뭇한 얼굴을 한 우진 형.
여전히 바쁘게 다음 촬영을 준비하는 스태프분들.
진지한 얼굴로 서로의 촬영을 모니터링해주는 멤버들
현장의 모든 것들이 익숙한 느낌이라 이제는 나도 아이돌 다 됐구나 싶어 웃음이 흘러나왔다.
“왜?”
“아, 그냥 좋아서.”
“응? 갑자기?”
생뚱맞게 웃는 내 모습이 이상해 보였던지 찬이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작가님의 지시에 따라 영빈 형과 세빈이가 움직였고, 세트장의 모습도 조금씩 바뀌었다.
다음 타자는 준이 형과 경환 형.
쓰러진 경환 형을 비교적 안전한 곳에 두고 빛을 향해 움직였던 준이 형.
그런 준이 형과 경환 형이 여기저기 부서진 한 교실에서 만난다.
폐허처럼 변한 교실 한복판에서 등을 맞대고 선 둘의 모습.
우수에 찬 표정 연기 중인 둘을 구경하던 찬이가 내게 속닥거렸다.
“아까 의상 갈아입는데 준이 형이 질색하더라.”
“왜?”
“왜 우리 그 커버 무대 한 거.”
“아···.”
“그거 생각났대.”
“그건 인정.”
메인쇼 무대를 위해 여장을 감수해야 했던 우리는 서로의 모습을 보고 웃지 않기 위해 눈물 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평소 연습하던 복장으로 할 때는 괜찮았지만, 의상에 익숙해지기 위해 입고 맞춰볼 때는 가관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펄럭이는 치마가 부담스러웠고, 구두는 발이 너무 아팠다.
안무 때문에 휙 고개를 돌릴 때마다 긴 머리 가발이 날 때리는 것 같았고.
연습하는 내내, 모든 걸그룹 선배님들을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피어나기도 했다.
어떻게 이런 의상으로 그렇게 멋진 무대를 하는 걸까?
“나도 형들 찍을 때 구경할래요.”
“그래, 이 형이 얼마나 멋있게 찍는지 구경해.”
“세빈이 아까 표정 좋더라. 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졌어.”
“정말요?”
“야, 강세빈! 내 말은 안 들리냐!”
의상을 대충 정리한 세빈이와 영빈 형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둘에게 멋있었다고 한껏 칭찬한 나는 다시 준이 형과 경환 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옆에서 세빈이와 찬이가 다시 투닥거리기 시작했지만, 이럴 때는 끼어들지 않는 게 가장 좋았다.
“아, 잠시만요. 죄송합니다. 다시 할게요.”
우리가 속닥거리고 구경하는 사이 준이 형이 외쳤다.
의자에 기대 경환 형과 마주 보는 장면이었는데 아무래도 웃음이 터진 모양이었다.
“경환 형 얼굴을 보면 왠지 감정 잡기 힘들어.”
“그건 맞지. 저 형은 이상하게 얼굴만 봐도 웃겨.”
사실 숙소에서 제일 떠들썩하게 돌아다니는 건 찬이지만, 멤버들을 제일 많이 웃게 만드는 건 경환 형이었다.
뜬금없는 타이밍에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게 이상하게 웃겼다.
심지어 농담할 때도 무덤덤한 얼굴이라 더.
평소에 대부분 허허 웃으면서 넘기는 준이 형도 경환 형이 그렇게 엉뚱한 말을 할 때면 늘 크게 웃었다.
몇 번의 재촬영 끝에 간신히 작가님 마음에 드는 씬을 건졌는지 촬영이 끝났다.
우리가 제일 마지막이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물 속이라는 느낌을 최대한 살린 세트장을 둘러보던 나는 예전에 본 어떤 뮤직비디오가 떠올랐다.
물속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던 뮤직비디오 속 대선배님의 모습.
그때는 그저 너무 신기했는데, 이제 와 내가 물속에 뛰어들어서 영상을 찍게 될 줄은 몰랐다.
그나마 지금은 물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한여름에 입수는 그러려니 하겠는데 아직은 추웠다.
이전 뮤직비디오 촬영을 떠올리며 묘하게 일렁이는 느낌이 드는 세트장 벽을 바라봤다.
“누가 위에 올라갈래?”
“제가 올라갈게요.”
교복 차림의 찬이와 달리 내 의상은 환자복이었다.
헐렁한 소매를 대충 밀어 올린 내가 세트장에 준비된 이층 침대의 위에 올라앉았다.
“힘찬이는 1층에 걸터앉아서 위에 지환이 올려다보자. 옳지, 조금 더 어깨에 힘 빼고! 한쪽 팔만 지환이한테 뻗어보고….”
촬영에 들어가기 전 구경 온 다른 멤버들을 바라보자, 숙소에서 썼던 이층 침대가 떠올랐는지 다들 표정이 미묘했다.
이층 침대에 걸쳐진 사다리에 다리를 늘어트린 채 앉은 나.
그런 나를 올려다보며 불안한 얼굴을 한 찬이.
하지만 나는 찬이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손가락에 앉은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처럼 무심한 얼굴로 내 손끝을 바라보았다.
나중에 나비를 넣을 거라고 하셨는데 잘 나올지 모르겠네.
이층 침대를 배경으로 몇 컷 더 찍은 우리는 하얀 잠옷으로 의상을 갈아입었다.
이번에는 단체 컷이었다.
이전에도 본 것 같은 하얀 침대 위에 나란히 앉은 나랑 찬이.
찬이와 내 손목이 하나의 족쇄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 우리 주변을 멤버들이 여러 포즈로 둘러싸고 앉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유독 멤버들의 시선이 초롱초롱한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울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