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 I Don't Care (5)
하겸도 골든아워도 대충 어떤 분위기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눈칫밥 먹으면서 구른 게 얼만데 아직도 모를까.
방송국은 자극적인 장면을 위해 악의적인 편집을 마다하지 않을 만큼 시청률에 목을 맨다.
그 과정에서 누가 휘말리고 누가 어떤 욕을 먹어도 그건 그들과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매우 슬프게도 착취당하는 쪽이 되지 않으려면 눈치껏 발을 빼고 피하는 기술을 익혀야 했다.
그게 싫으면 아예 또라이 캐릭터가 되어 사람들이 ‘저 미친놈’ 이러면서 피하게 만들던가.
물론 보통 사람은 고려가 불가능한 영역이다.
이제 막 방송국 분위기를 익히고 있는 언래블의 입장에서는 적응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출연을 회사에 이야기했던 건, 골든아워도 자신들이 몸담은 회사의 영향력을 알기 때문이었다.
출연해서 조금이라도 인지도를 가져갈 수 있다면 그들에게도 나쁜 기회는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 흘러가는 분위기는 그렇게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다.
게다가 선량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눈앞의 연습생이 못마땅하기도 하고.
그로서도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적당히 눈치껏 하라는 사인을 보냈으니 지시받은 연습생도 제작진도 조금쯤은 사리리라.
골든아워가 무엇을 했는지 짐작하지 못한 듯 눈만 깜박거리는 둔해 빠진 언래블 모습에 하겸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휴, 우리 언래블 이제 선배님 됐다고 진지한 척하는 거야?”
“진지한 척이라뇨. 저희는 언제나, always, 늘 진지합니다!”
“병아리가 조금 컸다고 병아리가 아닌 건 아니죠, 지환 씨.”
그나마 지환은 무언가 분위기를 느낀 건지 골든아워가 주도하는 분위기를 잘 받아먹고 있었다.
방금 경고를 이해한 연습생은 긴장했는지 어깨가 잔뜩 굳어 있었다.
그 외에 다른 연습생들은 이해했든 이해하지 못했든 상관없었다.
이해한 놈들은 알아서 눈치껏 움직일 테고, 이해 못한 놈들은 또 나름대로 움직일 테니까.
그나마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한 하준과 영빈만 골든아워를 바라봤다.
‘괜찮아, 병아리들. 형이 알아서 한다.’
괜찮다는 듯 그들을 향해 웃어준 하겸은 아무렇지 않게 연습생과 언래블을 향해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하도 오래 지지고 볶고 했더니 눈빛만 봐도 대충 눈치채는 골든아워 멤버들도 적당히 어울려 주고 있었다.
힐끔 바라본 PD의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저 PD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니 내버려 두었다.
하겸은 관리해야 할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분하는 천부적인 감을 타고났다.
소위 말하는 촉이 좋은 사람.
덕분에 웃으며 서로의 몸에 칼을 박아넣는 일이 비일비재한 이 바닥에서 딱히 적을 만들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고.
새벽 멤버들의 철벽같은 니꺼내꺼와는 또 다른 생존법이었다.
‘그러고 보면 화봉이도 좀 지켜봐야 할 것 같은데.’
화영, 그러니까 에드가 연습생이었던 시절부터 알고 지낸 터라 걱정이 되기도 했다.
워낙 샘이 많고 자기 몫을 악착같이 챙기는 애였다.
하겸은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되려 연예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좋은 마인드라고 생각했다.
그런 성격 덕분에 예능에서 독설가 캐릭터로 이미지 메이킹을 해둘 수 있기도 했고.
하겸은 그저 서로 간의 선을 잘 지키는 게 중요했다.
멜트는 직속 후배이기도 했고 자신들이 겪었던 일을 비슷하게 겪는 후배기에 어느 정도 동질감도 있었다.
덕분에 귀엽다, 귀엽다 하며 많이 챙겨주기도 했고.
다만, 에드는 기이할 정도로 사람 욕심이 많았다.
여태까지의 에드는 위태위태하긴 했어도 그 선을 비교적 잘 지키는 편이었다.
하겸은 부디 에드가 이번에도 그 선을 잘 지키길 바랐다.
에드에게는 미안하지만, 골든아워에게는 에드보다 언래블이 더 재밌고 마음에 드는 동생들이었으니까.
언래블은 자신의 몫을 열심히 챙기려고 바쁘게 뽈뽈대는 게 다람쥐 같을 때가 있었다.
가끔 선망이 담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는 먹이를 물고 오는 어미 새가 된 것 같기도 했고.
실력도 있고 예의도 있고 개념도 있다.
‘마음에 안 드는 게 더 이상하지.’
그러니 그렇게 새벽과 여진우가 애들을 싸고도는구나 싶다.
누가 보면 언래블이 그들이 낳은 병아리인 줄 알지 않을까 할 정도로 좀 과했다.
골든 아워와 새벽은 연령대도 활동 시기도 비슷했지만, 서로 상성이 잘 맞지 않아 적당히 안면만 익힌 비즈니스 관계였다.
그런데 이런 것으로 동질감을 느끼게 되다니.
하겸은 새벽 멤버들을 떠올렸다가 그런 팔불출들이 없다며 속으로 혀를 차며 언래블 멤버들을 바라봤다.
마침, 세빈이가 자신보다 나이 많은 연습생들에게 열심히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일부 연습생들은 차마 선배가 될 이에게 귀엽다고 말은 못 했지만, 눈빛은 이미 귀여워하고 있었다.
그런 세빈이를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 영빈과 지환. 그런 지환에게 무어라 투덜거리는 힘찬.
고개를 돌려보니 다른 한 덩어리는 경환과 하준을 붙들고 작곡에 대해 묻고 있었다.
언래블이 주목받는 이유 중에는 멤버들이 직접 작곡한다는 것도 있었다.
살짝 수저만 얹는 정도가 아니라 작사, 작곡에 직접 프로듀싱도 하는.
하준과 경환은 언더에 있을 때부터 알음알음 찾아 듣는 팬이 있다는 소문도 들었다.
옆에서 무어라 잔소리하는 인하를 대충 무시하고 언래블과 연습생들을 관찰하다 지환에게서 시선이 멈췄다.
마냥 흐뭇한 얼굴로 연습생이 아닌 자기 멤버들을 바라보는 지환.
그래, 언래블 멤버 중 지환이 가장 특이했다.
본인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도 유니크했지만, 자기 그룹이 좋아 어쩔 줄 모르는 저 시선이 가장 신기했다.
사이 좋은 그룹은 많지만, 지환은 조금 달랐다.
“저거 어디서 많이 봤는데···.”
“뭐가?”
병아리들끼리 친해지라고 내버려 두고 연습생들을 속으로 평가하고 있던 골든아워 멤버들이 물어왔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각에 빠진 하겸의 모습에 호기심이 동한 모양이었다.
“환이가 애들 보는 저 얼굴, 어디서 본 거 같은데.”
그때, 손에 들린 메모지에 연습생 평가를 적던 단우가 한마디 보탰다.
“타임들이 우리 볼 때랑 비슷해.”
“아! 맞아! 그래, 그거였어! 역시 우리 실세님.”
“촬영 중이잖아, 정신 좀 차려.”
하겸의 목소리가 커지자 무수한 눈동자가 순간 하겸에게 꽂혔다.
그게 창피했던지 툭 튀어나온 단우의 핀잔에도 하겸은 그저 당당했다.
애당초 하겸은 신경 쓰는 척을 잘하는 사람일 뿐,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니까 계속 대화 나눠.”
히죽 웃는 하겸의 얼굴은 누가 봐도 수상해 보였지만 이 중에선 제일 선배인지라 아무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걸 가장 잘 알고 있는 게 하겸이었고.
찰나의 순간 지환의 시선이 떨떠름했다는 걸 하겸은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했다.
제작진의 농간 때문에 나빠졌던 기분이 다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자기 그룹을 덕질하는 멤버라니, 진짜 귀엽네, 우리 삐약이”
“환이?”
“응. 누가 보면 아빤 줄 알겠어.”
“그만큼 애정이 있으니까 잘 크고 있는 거겠지.”
하겸의 중얼거림에 단우와 얀이 끼어들었다.
연습생과 언래블의 친목 도모를 이유로 골든 아워는 그들과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보는 상태였다.
그 때문에 이들의 목소리는 저들에게 닿지 않았고.
하지만 사방에 있는 카메라에 이 모습들이 잡혔을 거고, 녹음도 됐을 터.
제작진이 편집할 건 하고 살릴 건 살려서 잘 써먹을 테니 하겸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멤버들이 서로를 아끼는 건 써먹기 좋은 이야기라 그들도 적당히 집어 넣을만했다.
- 짝
하겸은 손뼉을 쳐 시선을 모았다.
“자, 대화는 이제 그쯤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팀을 나눠봅시다.”
적당히 친분을 나누는 장면이 만들어졌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서바이벌 미션을 진행할 차례였다.
하겸의 얼굴에는 가끔 단우가 불길하다고 표현하는 미소가 떠올라있었다.
* * *
“지환아, 많이 피곤해?”
“괜찮아요.”
“인터뷰만 하면 되는 거니까 후다닥 끝내고 숙소 가자.”
멍하니 생각에 빠져있느라 표정이 사라졌는지 우진 형이 걱정스레 말을 붙였다.
최근 새 앨범을 앞두고 피치를 올리느라 다 같이 고생하는 상황이라 잠이 모자랐다.
게다가 프로젝트 Origin의 촬영이 어지간히 기 빨리는지 나뿐만 아니라 멤버들이 갈수록 핼쑥해졌고.
조만간 뮤직비디오와 홍보용 사진을 촬영해야 했기에 강도 높은 다이어트까지 겸하고 있어 다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체력으로는 어디 가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경환 형과 찬이까지 흐느적거리고 다니니 다른 멤버들이야 말 다 한 셈.
다른 멤버들은 개인 연습이 한창인 시간, 나는 개인 스케줄 때문에 이동하던 참이었다.
‘별이 잠든 도시’가 내 기대보다 훨씬 큰 인기를 거두면서 사방에서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다.
우진 형과 소현 팀장님이 광고 요청도 몇 군데서 들어왔다고 행복한 얼굴로 내게 알려주었다.
단독 광고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진성 배우님과의 듀엣이었다.
오늘 인터뷰도 마찬가지였고.
조금만 늦어도 어떤 말이 흘러나올지 감당할 수 없기에 최대한 넉넉히 시간을 두고 움직였다.
“어라, 형님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그러는 너도 일찍 왔으면서.”
“저야 막내니까 당연히 먼저 와서 기다려야죠.”
“까분다.”
덤덤한 얼굴 사이로 반가움이 담긴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등장하는 분량은 이미 모두 촬영이 끝난 터라 최근에는 촬영장에는 방문하지 않고 있었다.
앨범 준비와 스케줄 때문에 짬이 안 나기도 했고.
지금처럼 혼이 나갈 정도로 바쁘기 전에는 내 분량이 끝난 후에도 몇 번 간식을 사 들고 방문했었다.
촬영 끝났다고 바로 발걸음을 끊기에는 사람들이 무어라 수군댈지 뻔했으니까.
반쯤은 사전 제작이라 실제 방영되고 있는 스토리는 중반을 지나고 있지만, 촬영은 조만간 마무리된다고 했다.
최종 촬영 후 다 같이 밥을 먹자는 감독님의 제안이 있었고.
“감독님이랑 작가님이 너 보고 싶다더라.”
“절요? 왜요?”
“제일 화사했던 막내가 없어서 슬프대.”
“에이, 저보다 어린 친구들도 있었잖아요. 제가 아니라 제가 들고 갔던 간식이 그리운 건 아니고요?”
처음과 달리 이제는 장난칠 정도로 가까워진 터라 선배님도 이렇게 먼저 농을 던지기도 했다.
드라마로 인해 인지도를 얻게 된 것도 기뻤지만, 이렇게 멋진 배우 형님이 생긴 건 또 다른 기쁨이었다.
“안녕하세요! 두 분이 나란히 오셨네요.”
“네,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언래블 환입니다. 입구에서 선배님을 만났어요.”
도착해있던 사람은 이미 안면이 있는 잡지 Baleine의 이서랑 기자님이었다.
“진성 씨도 우리 지환이도 모두 너무 오랜만이에요.”
진성 형님의 담담한 인사에도 기자님은 쾌활한 목소리로 답했고, 내게는 눈을 찡긋해 보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정윤 실장님과도 친분이 있는 분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이야기를 실어주실 때도 언제나 멋진 내용으로 채워주셨고.
“두 분이 많이 친한가 봐요? 원래 친분이 있었나요?”
“아뇨, 촬영하면서 처음 뵈었는데 제가 엄청 선배님 귀찮게 했어요. 막 달라붙었거든요, 알려달라고.”
“이렇게 열정 넘치는 친구는 정말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캐릭터 분석한다고 저를 아주 못살게 굴었거든요.”
자연스럽게 자리로 안내받은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나갔다.
“지환 군이 그렇게 열정적으로 움직이기도 하는군요? 역시 일할 때는 다르네.”
“앗! 그렇게 말씀하시면 평소에 제가 엄청 게으른 사람 같잖아요···.”
억울하다는 듯 과장되게 어깨를 축 늘어트리자 이서랑 기자님도, 형님도 피식거리며 웃었다.
“정윤 실장님께 평소 지환 군 어떤지 들었는데.”
“쉿! 그건 비밀로 해주세요. 저 형님 앞에서는 엄청 부지런한 동생이란 말이에요.”
“이미 틀린 것 같다, 환아.”
오늘은 사교성 좋은 막내인 것처럼 능청을 떨어가며 열심히 이야기를 꺼냈다.
평소보다 높은 텐션을 끄집어내는 나를 우진 형이 안쓰럽게 바라봤지만, 괜찮다고 웃어주었다.
오늘 열심히 인터뷰 잘 뽑아서 우리 앨범 홍보도 하고 해야 하니까.
‘인간은 역시 먹고살기 힘든 것 같음.’
‘응···. 그러니까 오늘은 포잉 테라피 하게 해줘. 나 너무 힘들어, 포잉.’
‘···조용히 해라, 이 계약자 놈아.’
한숨을 폭 내쉬는 포잉의 태도에서 허락을 읽어낸 나는 조금 더 힘을 내 싱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