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 I Don‘t Care(4)
“그럼 연습생 자기소개부터 시작할까요?”
웃는 얼굴, 상냥한 목소리와 달리 어딘가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하겸 형.
이유가 있겠지 하는 생각과 함께 슬며시 걱정스러운 마음이 차올랐다.
혹시나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거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싶기도 했고.
하겸 형의 말에 미리 순서가 정해진 건지 한 명, 한 명 자신의 이름과 특기를 말해주었다.
찬이와 세빈이뿐만 아니라 우리 애들은 모두 연습생들의 소개를 진지하게 듣고 있었고, 골든아워 형들은 자본주의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끼리 놀 때 보이는 미소와는 느낌부터 다른 얼굴들이라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우리도 그렇지만 형들도 고생이 참 많다 싶기도 하고.
“자기소개도 끝났으니, 첫날이니만큼 질문을 주고받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 같은데. 어때요, 언래블?”
“저희야 좋죠. 아직 햇병아리지만 아는 한도 내에서는 전부 알려드릴게요.”
“이야, 이제 공식적으로 병아리라는 걸 인정하는 건가요?”
“아니, 선배님? 그게 아니잖아요….”
대답을 들은 얀 형이 짓궂게 질문을 던지자 준이 형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시무룩한 척했고, 연습생들 얼굴에는 조금 더 편안해진 미소가 떠올랐다.
사전에 조율한 대본 외에 중간중간 분위기를 띄우는 골든아워 형들의 애드립 덕분에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려갔다.
“자, 질문 있는 사람?”
하겸 형의 질문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던 연습생들이 하나둘 손을 들기 시작했고 내 옆에 있던 세빈이가 주먹을 꼭 쥐는 게 보였다.
이 프로그램 촬영 전, 연습 중간 중간 쉬는 시간에도 자기들끼리 ‘우리 이제 선배님이야!’하던 둘을 기억하는 터라 못 본 척해주기로 했다.
대충 보아도 앉아있는 사람 중에는 세빈이보다 어린 연습생은 없는 것 같았다.
작정하고 뽑은 건지 하나같이 얼굴들이 자기주장이 강했다.
다양한 장르의 미남을 모두 뽑아둔 것 같달까.
하지만 먼저 건네받았던 연습생들의 프로필을 더듬어보던 나는, 이 중에 세빈이와 동갑이 있다는 걸 깨닫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요새 애들은 발육상태가 좋구나….
찹쌀떡같이 말랑하고 뽀얀 애기 같은 막둥이만 봤던 내가 잠시 큰 오해를 했다.
잘 크면 좋은 거지 뭐. 하하.
“데뷔하시고 얼마 안 돼서 1위와 신인상 둘 다 받으셨잖아요. 비결을 알 수 있을까요? 저희도 꼭 데뷔해서 선배님들처럼 잘 크고 싶어요.”
단정하게 생긴 김유원이라는 연습생이 눈에서 레이저를 뿜을 것 같은 얼굴로 물었다.
아마 다들 큰 기대와 희망을 품고 이 프로그램에 도전했을 테니 진지하게 대답해주고 싶었다.
“사실 저희는 여러모로 운이 좋았어요.”
“맞아요, 정말 다행이죠.”
잠시 고민하다 먼저 말문을 연 건 하준 형과 찬이었다.
상투적인 대답에 미약한 실망의 기색을 보인 유원을 위해 부수적인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어느 기사에서 본 내용인데 한해 데뷔하는 아이돌 그룹이 보통 50~80그룹 정도 된대요. 인원수는 300명 정도고. 하지만 당장 같은 일을 하는 우리도 모든 그룹을 다 알지는 못하잖아요?”
“아…. 네. 맞아요.”
“내 생각보다 더 많네.”
차근차근 설명해나가는 이야기에 어느새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많은 사람이 모두 노력이 부족했을까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희가 간절했던 만큼 모두가 간절했을 거고 그만큼 연습했을 거예요.”
우리는 예상 질문을 몇 개 건네받았고, 그 답변에 대해 우리끼리 고민하기도 했다.
그것 때문에 기사를 찾아보기도 했고.
방송으로는 어떻게 편집되어 나갈지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문제의 소지가 없을 만큼 조심스러워야 했다.
“여기서 하루에 8시간씩 자는 사람 있어요?”
조용히 있던 영빈 형의 질문에 연습생 중 한 명인 이온이 답했다.
“저는 잠자는 시간이 아까워서 못 그래요.”
작은 목소리였지만 모두에게 들릴 정도는 되었다.
그 대답에 희미하게 웃던 영빈 형이 말을 이었다.
“아마 이 자리에 있는 연습생분들도, 저희도, 선배님들도 다 그럴 거예요.”
“우리는 그래도 이제 좀 잘 자.”
“제발, 말투 좀!”
얀 형의 중얼거림에 인하 형이 옆구리를 꼬집는 것 같았다.
이런 자유분방한 모습조차 서로 합의된 이야기라는 게 무섭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모두가 자신을 갈아가면서 연습하고 자는 시간을 아까워하고 정말 죽을 둥 살 둥 노력해요. 물론 저희도 그랬고요. 그럼 아까 이야기로 돌아가 볼게요.”
연습생들이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 건지 침을 삼키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준이 형이 이어 우리에게 피드백할 때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현실을 이야기했다.
“데뷔 조와 회사가 열심히 준비하겠죠? 방송국과 인터넷에도 열심히 홍보를 하고. 사람들에게 우리를 알려야 하잖아요. 저희가 정말 운이 좋았다고 하는 건,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은 애당초 데뷔조차 하기 어렵기 때문이에요. 모두가 열심히 노력할 테니, 그 후에는 약간의 운도 필요하다는 이야기였어요.”
물론 방송에서 말할 수 없는 소속사와 방송국의 물밑 로비와 자신이 속한 소속사의 영업력, 크기 등 많은 내용들이 더 크게 작용한다.
하지만 그건 방송 중에 말할 수 없는 내용이니까.
더불어 저들도 그런 내용을 모르지 않을 터.
연습생 생활을 하다 보면 점점 주변에서 다양한 이야기가 들리기 마련이었다.
“물론 전부 다 운이면 좀 억울하겠죠? 그래서 저희가 곰곰이 생각을 해봤어요. 모두가 노력한다는 전제와 어떻게 좌우할 수 없는 운을 배제하면 우리가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하고요.”
익살스러운 얼굴의 찬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실수할까 봐 조금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매끄럽게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속으로 웃었다.
우리 찬이가 이렇게 기특하게 잘 컸네.
“저희는 팀워크랑 진솔함인 것 같아요.”
앞에 이야기가 많았지만, 결국 우리가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었다.
네 옆에 있는 동료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말.
“여러분 솔로 데뷔할 거 아니잖아요? 아이돌 그룹 데뷔가 목표인 거 맞죠?”
“네.”
“맞아요!”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연습생들의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보며 웃었다.
기억해둬야 할 사람들인 것 같았다.
“팬분들은 저희가 연기하거나 억지로 꾸미는 거 다 알아요. 저희가 숨긴다고 해도 얼굴에서 티가 나나 봐요.”
“그건 인정. 전에 얀이랑 내가 싸웠는데 팬싸에서 타임들이 귀신같이 알아보더라.”
“아, 그거.”
하겸 형은 결국 경어를 포기하기로 한 건지 점점 말을 편하게 하기 시작했다.
인하 형이 속이 터진다는 듯 바라봤지만, 모른 척하는 것까지 딱 하겸 형이었다.
옆에서 기억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얀 형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고.
“이 중에 몇 명이나 데뷔할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저희가 여러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이거에요. 옆에 사람이 경쟁자이기도 하지만 파트너이기도 하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해요.”
우리가 하려던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다행히 좋은 분위기에서 너무 무겁지 않게 흘러나왔다.
예비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떤 방향의 답변을 할지 미리 확인받았지만 말로 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
그리고 정말, 결국 의지할 건 서로밖에 없다는 걸 그들도 알았으면 했다.
경쟁에서 이기거나 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서는 건 언젠가 알려지기 마련이다.
전생에서 아이돌 그룹 사이의 왕따 문제가 잊을만하면 한 번씩 터져 나왔던 걸 기억했다.
그렇게 논란이 생기면 결국 끝이 좋지 않았던 것도.
그리고 팬 입장에서 생각해도 사이좋은 그룹이 더 좋았다.
적어도 내가 덕질할 때는 그랬으니까.
‘저 인간은 그럼 확정 멤버인 거임?’
‘아마 그럴 거야.’
오늘은 경환 형 머리 위에서 우리를 바라보던 포잉이 물었다.
공개적으로 진행하는 서바이벌 프로젝트다 보니 팬들의 의견도 분명 영향력을 가진다.
하지만 이 중 몇 명은 이미 내정되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당장 우리 데뷔 프로그램 자체도 하준 형과 영빈 형은 확정 멤버였으니까.
이것도 늘 그들이 말하던 어른의 사정이라는 거겠지.
질문을 주고받는 사이 ‘너의 목소리가 들려’ 스킬을 활성화해두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인원을 확인하기는 어려웠기에 미리 전달받은 신경 써야 하는 멤버와 질문하는 멤버만 대상으로 지목했었다.
‘진짜 가끔은 그냥 스킬이 없었으면 좋겠다 싶기도 해, 포잉.’
‘미련한 계약자 놈아, 그러니 내가 굳이 보지 말라고 했잖냐.’
‘그래도 조심해야 하니까.’
서글픈 내 눈빛을 이해한 포잉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연습생을 대상으로 스킬을 활성화했던 건, 총괄 PD와 작가의 이야기를 들은 포잉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포잉은 평소처럼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혹시라도 우리에게 위험이 될만한 것들이 있는지 확인하고 다녔다.
숨겨진 카메라가 있는지, 현장 스태프들의 분위기는 어떤지 등등
안전한 장소라고 판단되지 않는 곳에 도착하면 늘 하는 행동이었다.
그런 포잉이 나는 늘 고마웠고.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일찍 현장에 도착한 우리는 메이크업과 헤어를 손보고 오늘 의상을 점검했다.
그렇게 시간이 난 덕분에 포잉은 더 꼼꼼히 확인 후 내용을 내게 전달해 줄 수 있었다.
제작진 쪽에서 꿍꿍이가 있는 것 같으니 조심하라고.
자세한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지만, 제작진이 몇 명의 연습생들에게 분량을 빌미로 특정 행동이나 발언을 요구한 것 같다고 했다.
왜 이런 뒷공작이 없으면 프로그램이 진행이 안 되는지 이제는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다시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속으로 꾸역꾸역 삼킨 나는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마주 웃었다.
내가 시청자였다면, 이런 상황도 대화도 대부분 대본이라는 걸 알 수 있었을까 싶었다.
오늘 대화는 주로 하준 형과 찬이가 전담했기에 조금 더 편하게 사람들을 살필 수 있었다.
- 이렇게 해도 괜찮은 거 맞겠지?
- 지금 해야 하나? 조금 더 있다가?
망설이는 듯하던 그 연습생이 몇 마디 대화가 오가던 사이 발언권을 얻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는 그래도 운보다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어요. 선배님들도 실력이 있었으니까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해요.”
사슴 같은 눈망울이라는 게 저런 건가 싶을 만큼 커다랗고 순하게 생긴 연습생이 부끄럽다는 듯 이야기했다.
속마음을 보지 못했다면 의심하지 못할 만큼 순수한 얼굴이었다.
무심코 우리 막내가 생각날 만큼.
악의가 없다는 걸 온몸으로 어필하는 그 모습에 골든아워 형들이 멈칫했고, 우리 애들은 못 느낀 듯했다.
저런 대사를 써서 연습생에게 건네면서 우리에게는 칭찬을 퍼붓던 사람들이 무서웠다.
운이 좋았다는 우리 앞에서 굳이 자기는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말.
뒤에 덧붙인 말이 무색할 만큼 그 연습생 머리 위의 말풍선이 내 눈에는 너무 선명했다.
- 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어차피 이 바닥이 인맥빨인 거 서로 다 알면서.
- 지들도 인맥 잘 타서 떴던데 가식 미쳤네.
혹시라도 애들이 실수해서 답변하지 않도록 내가 먼저 답하려던 그때, 하겸이 형이 툭 말을 내뱉었다.
“시율 선배님이 그러셨는데.”
“네?”
“운도 실력이라고.”
“그건 맞지.”
대선배인 윤시율 이름 앞에 연습생은 당황한 듯했다.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치는 단우 형.
세빈이가 움찔할 만큼 평소보다 서늘한 목소리에 말을 꺼냈던 연습생의 눈동자가 순간 도로록 굴러갔다.
“이야, 옛날에는 막 선배 말에 토 달고 못했는데. 세월 좋아졌어, 응?”
“진짜 영감님 같으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애기들이 진짠 줄 알잖아.”
얀 형이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건들거리며 말하자, 인하 형이 옆에서 말리는 것처럼 말했다.
“한규 연습생 말대로 실력으로 인정받는 게 정말 좋지. 하지만 본인이 말했던 대로 실력이 없었다면 운이 다가와도 못 잡으니까 열심히 연습합시다.”
언제 싸늘하게 대했냐는 듯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하는 하겸 형의 시선이 강한규라는 연습생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도 조용히 그냥 흘러가기는 그른 것 같았다.
인생…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