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84)화 (284/456)

284. 기억을 걷는 밤(5)

멤버들에게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누나와의 대화.

가족으로 받아들인 사람의 슬픔이기에 가슴이 아렸지만, 정작 당사자는 될 수 없기에 그 슬픔을 내 것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내 자리를 갖는다는 건 이토록 어려운 일이었다.

전처럼 불안하고 초조해지진 않았지만, 그냥.

그래, 그냥 가슴이 묵직하고 저릿해지는 기분.

그래서 누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을 느꼈음에도 캐물을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내 안으로 다시 빠져들 뻔했던 그때, 늘 내 편이 되어 주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사연 보내주신 팬분이 모든 문제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현실로 또렷하게 나를 끌어당긴 건 찬이 목소리였다.

“저도 늘 제가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혼나는 것도, 상황이 나빠지는 것도 전부 제가 무언가 잘못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거든요.”

과거 친부의 학대와 학교에서의 따돌림을 경험했던 찬이가 조금은 덤덤한 말투로 그때의 자신을 꺼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그런 말을 해주셨어요. 너에게 네가 문제라고 했던 그 사람이 나쁜 거라고. 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어깨를 으쓱거리던 찬이가 솜털처럼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멤버들을 쓱 훑어보았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제가 솜뭉치에게 해줄게요. 당신은 잘못하지 않았어요.”

찬이는 누구보다 환하게 웃으며 카메라 너머에서 우리를 지켜볼 소중한 팬을 토닥였다.

이상하게 그 말들이 따끔거렸다.

상처에 소독약이 닿을 때처럼.

“저희 찬이가 많이 기특해졌죠? 우리 솜뭉치들에게 이런 말도 할 줄 알게 되고.”

“난 늘 기특했거든요!”

“방금 조언은 찐빵 형치고는 쫌 괜찮았던 것 같아요.”

준이 형과 세빈이 발언에 안 그런 척하던 찬이 목덜미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평소 뻔뻔한 척은 다 하고 다니면서, 정작 칭찬을 들으면 견디지 못하는 우리 모지리.

걱정했던 것과 달리 예쁘게 마음을 담아 말하는 동생들이 기특했던지, 준이 형이 온화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찬이 말대로 저희는 솜뭉치들이 잘못했을 거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네요. 저희에게 보내주시는 온갖 다정한 말과 사랑을 보면 알 수 있거든요. 우리 솜뭉치들이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

준이 형의 말에 더 신이 난 세빈이가 말을 덧붙였다.

“맞아요! 물론 무작정 남 탓을 하면 안 되겠지만, 무조건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옳지 않은 것 같아요. 우리가 편들어 줄게요. 앞으로 우리랑 같이 고민해봐요!”

이렇게 씩씩한 우리 애들을 보고 있자니 울적해지려던 마음이 따뜻하게 차올랐다.

“세빈이 말처럼 같이 고민해보자, 환아.”

“…네, 형.”

줄곧 상담을 진행하던 셋을 조용히 바라보던 영빈 형이 다른 사람들 몰래 내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누나 일로 걱정하던 내 상황을 준이 형이 이야기한 것 같았다.

언래블은 이전에도 지금도 내가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얽힌 나무뿌리처럼 나를 지탱해주고 있었다.

자꾸만 깊은 곳으로 가라앉으려던 마음이 천천히 떠올라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 * *

JC 엔터에서 프로젝트로 진행하는 그룹의 이름은 ‘Origin’.

누나가 즐겨 하던 어떤 게임이 떠올랐지만, 다행히 겉으로 티 내진 않았다.

처음 식사 자리 후, 한 번 더 모여 대본을 건네받고 간단한 인터뷰 영상을 찍었다.

본격적인 방송을 시작하기 전, 출연 확정된 연습생들의 간단한 프로필을 건네받았다.

데뷔한 지 1년도 안 됐는데, 누군가에게 ‘선배’라고 불리게 된다는 게 무어라 말로 설명하기 힘든 기묘한 느낌이었다.

찬이와 세빈이 눈이 유독 초롱초롱했던 건 아마 기분 탓은 아닌 듯했다.

다행히 각자 스케줄 때문에 멜트와 마주치진 않았지만, 여전히 에드가 걸렸다.

차마 다른 사람들에게 묻기도 애매했던 터라 속으로만 생각했지만, 포잉은 단단히 마음이 상한 듯 보였다.

아주 한 번만 걸려보라는 듯, 못마땅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곧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코앞에 닥쳐왔기에 그 일에 계속 신경 쓸 수가 없었다.

“들어보고 너희 의견을 가감 없이 말해줬으면 좋겠어. 이번 의견을 반영해서 최종 곡을 고를 거니까.”

소현 팀장님과 주영 팀장님, 그리고 멤버들은 소회의실에 모여앉아 있었다.

얼마 전 적당한 곡이 없다며 앓는 소리를 했던 것과 달리 오늘 주영 팀장님의 얼굴은 환해 보였다.

멤버들도 나도 설레는 마음으로 들려오는 멜로디에 집중하며 펜을 고쳐 쥐었다.

첫 곡이 시작되자 도입부부터 텅 빈 복도를 타고 울리는 것 같은 서늘한 느낌이었다.

나는 언제나 노래를 들으면 그 노래의 느낌이 영상처럼 떠올랐다.

그래서일까?

노래를 듣는 동안 ‘폭풍전야’의 뮤직비디오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폭풍전야’의 마지막 장면.

낡은 건물의 보안실로 보이는 공간에 화면 한쪽을 꽉 채우고 있었던 모니터들.

그곳에 CCTV로 우리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비치며 영상이 끝났었다.

이번 노래에선 우리를 지켜보던 누군가가 그 낡은 보안실을 벗어나 삐거덕거리는 철문을 연다.

폐건물? 아니, 오래되고 낡은 병원이나 요양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텅 빈 복도 위.

원래는 새하얀색이었을 듯한 복도가 켜켜이 쌓인 먼지와 빛으로 바래 원래의 색을 알 수 없었다.

얼룩덜룩한 벽과 복도를 울리는 차가운 구두 소리.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건지 손잡이를 잡아 돌리며 천천히 문을 연다.

열린 문 너머에서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빛과 함께 멤버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듯, 이전보다 훨씬 단단한 눈으로 정면을 쏘아보는 멤버들.

어느새 멤버들이 서 있는 곳은 풍화되고 무너져내려 지금은 흔적만 남은 옛 신의 신전이었다.

무성하게 자란 잡초와 허물어져 일부만 남은 어떤 조각상들.

이전의 영광을 누구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파괴된 곳.

그 폐허를 밟고 선 멤버들의 모습은 심판을 위해 준비된 전사들 같았다.

첫 곡부터 흠뻑 빠져있던 나는 문득 이게 내가 아는 노래의 멜로디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어…?

언래블의 노래는 아니었다.

하지만 내 귀에 익숙할 정도면 분명 굉장히 히트쳤을 노래였다.

여태까지는 전생의 언래블과 현재의 언래블이 너무나 다른 행보를 걷고 있기에 내 기억들이 도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잘 됐던 프로라 믿고 열심히 어필했던 ‘무사이’는 데미갓 때문에 말아먹었고, 드라마는 언래블의 일이 아니었으니까.

다른 그룹이 히트쳤던 곡들도 알아보려 하지 않았던 건, 곡에도 주인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인기 있었던 곡이라고 해서 그게 전부 우리에게 맞을 거란 보장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 곡은 달랐다.

듣자마자 뮤직비디오의 뒷부분이 연결되어 상상되는 멜로디라니.

나도 모르게 볼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곡 괜찮지 않음? 왠지 너희랑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포잉이 듣기에도 괜찮지?’

요정인 자신의 촉을 믿으라고, 회의에 함께 들어왔던 포잉이 꼬리를 살랑이며 속삭였다.

‘이대로면 다른 곡은 들으나 마나 아님?’

‘아냐. 그건 모르는 일이니까 끝까지 다 들어봐야지.’

이미 첫 곡에 마음을 빼앗긴 듯한 포잉이 투덜거렸지만, 내 심장은 두근거렸다.

전혀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내 기억을 어쩌면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A&R 부서를 통해 공모로 들어오는 곡을 함께 들어보는 것 정도는 멤버인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잘만 하면 언래블이랑 잘 맞는 미래의 히트작을 거머쥘 수도 있으니까.

이 생각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아직 몇 가지 더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느낌이 좋았다.

이건 정말 괜찮을 것 같았다.

자꾸 벌어지려는 입을 애써 꾹 다물고 이어지는 다음 곡에 집중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어라?

이번엔 고풍스럽고 우아한,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오래되고 귀한 물건, 예를 들면 섬세하게 세공된 은으로 된 잔 같은 것들.

아름답고 귀한 것들의 진가를 아직까지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어느 귀부인이 사랑했을 상아와 보석을 깎아 만든 장신구, 이국적인 무늬로 장식된 새까만 광택의 목함 등.

잘 관리되지 못한 채 어느 공간에 제멋대로 쌓여 존재의 의미를 잊힌 물건들.

우연히 그 장소에 도달한 우리는 안타까운 마음에 탄식을 내뱉는다.

그렇게 널브러진 것들이 꼭 사랑받지 못한 우리의 모습인 것 같아서.

영빈 형이 서글픈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다 매끈한 라인이 아름다운 담뱃대를 집어 드는 모습이 그려졌다.

형은 손가락도 길고 예뻐서 집어 드는 장면을 클로즈업해서 찍어도 무척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두 번째 곡은 그렇게 화려하고 쓸쓸하게 시작해서 점차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이것도 괜찮은데? 좋은 곡 없다고 엄살떨더니.’

‘이건 처음 듣는 멜로디인데도 우리 애들이랑 너무 찰떡이야….’

첫 곡에 내심 많은 점수를 주고 있었던 나는 두 번째 곡이 시작된 후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곡 모두 우리 애들과 너무 잘 어울렸다.

반면 세 번째 곡은 앞에 두 곡에 비하면 아쉬운 점이 많았다.

첫 번째로는 우리 애들과는 어딘가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여러 악기가 사용되었고 그만큼 화려한 곡이었지만, 막상 떠오르는 이미지나 분위기는 없었다.

마치 케이크 위에 장식된 화려한 플라스틱 조각 같았다.

아쉬운 마음을 속으로 감추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다른 곡을 기대했다.

오늘 우리가 들어볼 곡은 총 여섯 곡이었으니까.

* * *

“고생했어. 너희 감상 확인해보고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자, 연습 다녀와.”

“휴… 알겠어요, 팀장님.”

영빈과 하준은 최근 춤 연습 시간을 늘리더니 움직일 때마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모양이었다.

자진해서 더 열심히 연습하는 의욕은 칭찬해줄 만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너무 과한 연습은 때론 독이 되니 트레이너 제영과 이야기를 나누어봐야겠다고 소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제법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눈 멤버들이 모두 떠나자 침묵하던 주영이 입을 열었다.

“내가 애들한테 왜 살살하자고 했는지 이해되지?”

“하아….”

실실 웃으며 속을 긁는 주영의 발언에도 소현은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회의 결과 멤버들의 의견과 회사의 의견이 비슷했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갈렸다.

회사에서는 지환이 자연스럽게 이전 뮤직비디오를 떠올렸던 첫 번째 곡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

두 번째 곡과 네 번째 곡도 괜찮았지만, 성장 스토리에 어울릴 만한 건 첫 번째 곡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반면 멤버들은 두 번째 곡을 더 마음에 들어 했다.

그들도 처음 들었을 때는 첫 번째 곡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두 번째 곡을 듣고 난 후에는 두 번째 곡이 더 앨범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갑자기 튀어나왔던 ‘Pluto’를 제외하면 여태까지 타이틀 곡의 분위기는 하나의 흐름 안에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분명한 대상이 있는 듯한 강렬한 곡.

그런 면에서 첫 번째 곡이 새 앨범 타이틀로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것.

게다가 멤버들이 짜왔던 팀별 스토리와도 어느 정도 엮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환이 걔는 나중에 영상 만들어볼 생각은 없대?”

“안돼, 우리 지환이는 노래해야 해. 연기도 하기 싫다는 거 등 떠민 건데 더 일을 늘려줄 수 없어.”

다만 둘의 마음이 심란해진 건, 지환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였다.

우진은 이전에도 지환이 곡을 듣고 영상을 본 것처럼 이야기한다고 신기해했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렇구나 하고 흘려보냈었는데, 오늘 지환의 설명을 들어보니 꼭 같이 영상을 본 것만 같았다.

심지어 설명에 홀리기라도 한 건지 두 번째 곡이 더 그럴싸해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더 많은 사람의 의견이 필요할 것 같네요.”

“힘내, 소현 팀.”

“어디서 발을 빼려고?”

불길한 예감에 도망치려 했던 주영은 그대로 붙잡혀 실장실로 끌려갔다.

주영은 끌려가는 동안 조만간 카페인에 찌들어 좀비처럼 회사를 배회하고 다닐 자신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만둘까….’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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