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83)화 (283/456)

283. 기억을 걷는 밤(4)

“오늘은 라디오처럼 편안하게 우리 솜뭉치들과 대화해 보려고 해요.”

라이브 방송으로 진행되는 상담 코너는 오늘 1부, 이번 주말에 2부로 진행 예정이었다.

미리 준비했던 대본의 흐름을 확인한 준이 형이 카메라를 향해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저희는 처음에 문제가 생기면 각자 어떻게 해보려고 했어요. 서로에게 짐이 된다고 피해를 준다고 생각했거든요.”

“정말 꽁꽁 숨기느라 바빴어요. 특히 저는 형들이 힘든데 거기에 제 짐까지 더해준다고 생각했거든요.”

늘 수줍게 있던 세빈이가 모처럼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봤자 귀여운 찹쌀떡이었지만, 저렇게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기특했다.

“우리 막내가 잘 크고 있어. 그렇지?”

“어휴, 팔불출들.”

“그러는 형은요? 입꼬리가 귀에 걸리겠네.”

영빈 형은 어딘가 아득한 표정으로 셋의 방송을 지켜보고 있었다.

팔불출이라고 질색하는 척했던 경환 형도 웃고 있는 건 똑같았고.

오늘은 사전에 팬들이 보내준 고민을 같이 이야기해보는 시간이었고, 주말에 하는 팀은 즉석에서 받아서 하는 쪽이었다.

처음에는 둘 다 즉석에서 받아서 해볼까 했지만, 소현 팀장님이 위험 부담은 줄이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주셨다.

다른 멤버의 방송 촬영을 지켜보는 건 매번 낯선 기분이 들었다.

내가 낯선 환경에 혼자 있던 것과는 또 다른 기분.

“이런 자리를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우리 솜뭉치들이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저희가 더 고맙죠.”

“저희가 도움이 될까 싶어서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그래도 그냥… 조금이라도 같이 나누고 싶었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었어요.”

“오늘의 첫 번째 사연을 볼까요? 누가 먼저 해볼래?”

하준 형은 걱정과 달리 능숙하게 막내들이 이야기할 수 있도록 편안한 분위기를 잘 이끌어 가주고 있었다.

포근한 멤버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모두가 그 목소리에 집중하던 그때.

나는 얼마 전 누나와 대화를 나누었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 * *

“그날은 유독 눈이 많이 내렸어.”

누나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이어졌다.

“네가 눈 내리는 걸 보더니 나가자고 나한테 막 졸랐거든. 눈싸움하자고.”

누나의 희미한 미소는 과거를 더듬는 눈동자를 가리지 못했다.

“사실 그때 좀 귀찮았어. 나도 성인이라는 그 묘한 기분에 빠져서 조금 삐딱한 생각을 갖고 있기도 했고.”

법적으로 완벽한 성인이 되었다는 해방감,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한 막연한 걱정 때문에 혼자 똥폼 잡느라 바빴다고, 누나는 키득거렸다.

차가운 맥주캔 표면에 서린 물기를 손끝으로 더듬던 누나는 쓰게 웃더니 크게 숨을 내쉬었다.

따뜻한 조명과 부드러운 촉감의 쿠션, 조용하고 아늑한 공간조차 그날의 시린 바람을 잊게 할 수 없는 듯했다.

“네가 하도 칭얼거려서 차라리 놀아주고 쉬어야지 하면서 같이 나갔어.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너도 체력이 별로였거든.”

“아니거든? 요새는 운동해서 체력 좀 붙었어.”

“그래봤자 저질 체력이 어디가? 소현 팀장님이랑 하준이가 너 체력 달린다고 걱정하더라.”

“아, 왜 형은 그런 말을 하고 그래….”

불퉁하게 투덜거리는 내 모습에 비실거리며 웃던 누나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놀다 보니까 너무 신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지. 왜 눈 내리면 묘하게 기분이 들뜨잖아?”

“우리 누나 감성적이네.”

“운전을 안 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봄바람처럼 가볍게 웃던 누나는 천천히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내게 나눠주었다.

“정신 차리니까 네 얼굴이 빨갛게 얼어있더라고. 감기 걸리면 엄마한테 혼나니까, 뜨거운 물에 씻기고 코코아 한 잔 타주고 겨우 숨돌리고 있을 때였어.”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오고, 사람은 본능처럼 그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다.

아마 그때의 누나도 이유 없는 불길함을 느꼈으리라.

“곧 도착한다고 하셨는데 한참 지나도 오질 않는 거야. 그래서… 몇 번 전화를 걸었는데 여섯 번째쯤이었나? 그때 연결이 됐어.”

홀로 감내해야 했을 아픈 이야기를 하나 남은 혈육에게 전해야 하는 지금 누나의 심정을 아마 앞으로도 나는 알지 못할 것 같았다.

심지어 그 혈육은 사라진 지 오래고, 이미 다른 사람의 영혼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지끈거리는 심장의 통증에 품에 안고 있는 쿠션을 만지작거렸다.

“엄마가 아니더라고. 병원… 이라고. 그때부터는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어서 기억이 좀 뒤죽박죽이야.”

눅눅하게 젖어 들어가는 종이처럼 언제나 자신만만했던 누나의 얼굴에 고통스러운 주름이 번졌다.

그런 누나의 곁에는 포잉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었고.

나 외의 타인에게는 체온을 나누어 줄 수 없는 포잉이지만, 적어도 옆에 있어 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우왕좌왕하면서 잠들었던 널 깨우고 급하게 병원에 갔어. 평소라면 졸려서 칭얼댔을 네가 이상하게 얌전하더라.”

“다행이네. 그 순간에 칭얼댔으면 누나 더 힘들었을 텐데.”

병원에 도착한 누나와 어린 지환을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간 심하게 내린 눈 때문에 도로가 모두 얼어버렸고, 미끄러진 차량이 하필 트럭이었으며, 또 하필 부모님의 차량을 덮쳤다는 사실.

불행과 불행이 더해져 누군가의 삶을 지옥으로 바꿔버린 사고.

누나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친가 외가 식구들도 비슷하게 병원에 도착했다고 했다.

우리를 보자마자 달려온 외삼촌들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이미 눈물로 흥건했다고.

그 얼굴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누나는 아픈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중에 도착한 작은 아버지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고.

작은아버지는 원래도 마음이 무척 여린 분이라고, 반대로 작은어머니가 굉장히 박력 있고 멋있는 분이라고 알려주었다.

친가와 연을 끊고 지낸 지 오래인 터라 내가 그들을 잘 모를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지옥의 한복판에 덩그러니 버려진 누나와 어린 지환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상상되었다.

아니, 이게 상상일까?

어쩌면 지환의 기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어떻게 어떻게 장례를 치르면서, 보험사, 병원 관계자들, 경찰 등등 많은 사람이 우리를 찾았어.”

속삭이듯이 작아진 누나의 목소리는 진저리치는 것처럼 우울해졌다.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고, 너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어. 그래도 내가 널 챙겼어야 했는데….”

이후 내용은 나도 조금은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죽음을 제대로 인지하기 어려웠던 어린 지환.

장례식장 한켠에 어두커니 앉아 부모님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사람들이 울고 있는지, 왜 엄마 아빠 사진을 저기에 걸어놓는 건지.

누나는 왜 저 사람과 악을 쓰며 싸우고 있는지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누나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기에 지환은 너무 어렸다.

영영 볼 수 없을 거라는 말의 무게를 누구라 한들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친가 식구들은 그런 지환을 챙긴다는 이유로 온갖 무서운 말들을 늘어놓았다.

이러다 보육원에 가서 누나와 헤어지게 될 거라는 말, 누나도 학교에 다녀야 하니 널 돌볼 수 없을 거라는 말 등.

지환은 그 말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이제는 누나밖에 없다는 건 알았다.

누나에게 짐 덩어리가 될 거고, 그러다 버려지게 될 것이라는 말은 지환을 공포에 질리게 하기 충분했다.

엄마, 아빠, 누나가 세상 전부였던 지환은 이제 누나만 남았는데.

그마저 박탈당한다는 건 너무 무서운 이야기였다.

그런 지환에게 자신이 보호자가 되어 주겠다고 속살거리는 뱀 같은 말들.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넋을 놓고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누나, 연희의 모습은 지환이 보기에도 매우 고통스러워 보였으니까.

누나에게 미움받기보다 큰아빠와 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어쩌면 당연한 것들이었다.

“내가 널 챙겼어야 했는데, 내가 누난데 그러질 못했어. 네가 얼마나… 얼마나.”

아주 오래된 상처지만 누나에게는 어제처럼 생생한 고통이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죄책감과 슬픔이 누나의 눈동자 가득 넘실거렸다.

“…누나 잘못이 아니잖아.”

이 세계의 지환으로 살겠다고 마음을 몇 번이나 다잡았지만, 아직도 누나를 마주하는 건 마음이 아팠다.

전생의 가족도 지금의 누나처럼 오래도록 고통스러워할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어서.

그래서 그 한마디를 하는 게 쉽지 않았다.

“갑자기 네가 눈치를 보고 주변을 맴도는 데도 이상하다는 걸 몰랐어, 그때는. 그러다 겨우 새벽에 잠깐 잠들었다 깼는데 옆구리에 네가 붙어서 자고 있더라.”

그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던지 눈가가 빨갛게 물든 누나는 허리춤을 손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진짜 작았거든. 넌 유난히 또래보다 작았어. 그런 애가 웅크리고 옆구리에 붙어 있는데 그게 얼마나 귀여웠겠어.”

“지금은 어때? 잘생겼지?”

“조용해, 못생긴 병아리야.”

“하, 진짜, 누나까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물기 가득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담요라도 덮어주려고 했는데 네가 내 옷을 꼭 잡고 있더라. 그제야 정신이 좀 돌아오는 것 같았어.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구나, 하고.”

그게 발인하기 전날에 있었던 일이라고 했다.

친가와 외가 식구들이 아직 어린 지환의 거취를 두고 다투던 것도 그때였다.

잠든 지환을 잘 달래놓고 대부분의 손님이 돌아간 새벽 늦은 시간.

작은아버지는 혼이 나간 얼굴로 술잔만 기울이고 있었고, 큰아버지들은 지환을 본인들이 키우겠다고 큰소리를 냈다.

외가 식구들은 애들 선택에 따라야 하지 않겠냐고 하셨다고 했다.

누나는 어린 지환은 직접 키울 거고 어디에도 보내지 않겠다고 하며 친가 식구들을 냉정히 잘랐다.

점점 개싸움이 되던 그때, 어린 지환이 자다 깨서는 울면서 큰아버지를 붙들고 자기가 갈 테니 누나한테 화내지 말라고 했다고.

누나는 중간중간 들어 좋을 것 없는 이야기는 적당히 생략해가며 이야기해 주었다.

하지만 빈 조각들을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 후 어린 지환이 자다 깨서 경기하는 일이 많았던 것, 한동안 몽유병을 앓아 고생했던 일들.

그렇게 과거를 더듬어가며 말하던 누나는 미지근해져 버린 맥주캔을 꽉 쥐었다.

“언젠가는 네게 말해주려고 하긴 했는데, 내 예상보다 좀 빠르네.”

“뭐, 나도 적당히 컸잖아. 모르는 것보다는 알고 있는 게 낫고.”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을 떨었지만, 누나는 그저 저게 또 까부네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누나는 그렇다 쳐도, 포잉 너는 왜 누나랑 똑같은 표정으로 날 보는 거야….

불퉁한 표정으로 앞에 놓은 골드키위와 딸기를 쿡쿡 찌르다가 누나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지자 냉큼 입에 넣었다.

음식 가지고 장난치지 말라고 뭐라고 할 것 같아서.

누나는 내 어릴 적 기억이 온전치 않음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지환의 기억은 뒤죽박죽 섞여 있기도 했고.

갑작스레 그때의 일을 누나에게 물었던 건, 이상한 예감 때문이었다.

잘 모르는 과거의 일이 어느 날 불쑥 튀어나와 지금의 우리를 괴롭히지 않았으면 해서.

과거 치료 기록을 어디선가 구해와 인신공격하던 무리가 있었던 만큼, 더는 모른다고 외면하고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마음 한켠에는 누나와의 거리를 조금이라도 좁히고 싶다는 약간의 욕심도 있었다.

“내일은 같이 엄마 아빠 뵈러 가자.”

“그래. 그러자.”

이전의 지환은 홀로 부모님의 납골당을 찾아간 적은 있어도 중학교 입학 이후로 누나와 함께 찾아간 적이 없었다.

누나와 본격적으로 틀어지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부터였으니까.

앞으로 함께 지낼 내 가족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한 대화는 까맣던 밤하늘이 하얗고 붉은색으로 번져갈 때까지 이어졌다.

유난히 피곤해 보였던 누나의 얼굴이 한결 가벼워진 것도, 지환이 방에서 긴장감 없이 잠들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다행이라고 생각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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