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 지켜줄게(4)
정윤 실장은 오늘도 소현 팀장과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최병섭 감독 건은 걱정하지 말라고 애들한테 말해놔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네, 그래도 애들이 잘 대응한 것 같아서 제가 다 뿌듯하네요.”
“애들도 배우고 있는 거죠. 어떻게 해야 잘 넘어갈 수 있는 건지. 우리 애들 영리하다니까.”
배부른 고양이처럼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는 정윤 실장. 그런 정윤을 바라보던 소현은 속으로 웃었다.
정윤 실장에게 이번 자체 콘텐츠 촬영 중 생긴 일을 보고했을 때, 만년설처럼 냉기 풀풀 날렸던 모습이 떠오른 탓이었다.
애당초 ON 엔터에서 돈을 부어가며 자체 콘텐츠를 만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방송국과 협업으로는 절대 멤버들의 상태를 고려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ON 엔터가 유난을 떤다고도 했다.
하지만 박정균 대표뿐만 아니라 정윤 실장 또한, 아티스트를 제대로 케어해야 그룹도 더 큰 이익을 불러올 수 있다고 믿었다.
회사가 아티스트를 보호해야 팬들도 안심하고 마음 편히 덕질에 몰두하고 지갑을 활짝 열어준다고 생각했다.
특정 멤버 위주가 아니라 모든 멤버가 각자의 특성을 살릴 수 있도록 서포트 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회전문이니, 회전 초밥이니 하는 단어가 생겨난 이유가 있을 테니까.
악플이 판치고 악성 개인 팬이 판치고 사생이 판치면 결국 그 그룹은 망한다.
루머와 찌라시 같은 가짜 뉴스가 나돌 때마다 신규 팬의 유입이 막힌다.
누가 논란만 있고, 같은 팬들끼리 매일같이 싸우는 연예인을 좋아하고 싶어 하겠는가.
덕질의 근본이 무엇인가.
왜 많은 사람이 연예인에게 열광하며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지 생각해야 했다.
박정균 대표는 아이돌 그룹을 만들기로 결심하면서 이 부분을 가장 고민했다.
그래서 정윤 실장을 이번 프로젝트의 선장으로 임명했던 거고.
이후 박정균 대표의 선택은 실제 수익으로 돌아와 현실을 말해줬다.
네가 틀리지 않았다고.
물론 그렇지 않은 그룹 중에도 잘되는 이들도 있을 테고, 모든 상황을 항상 컨트롤할 수는 없었다.
다만, 박 대표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지, 착취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기업인이기 이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과 도덕성을 잃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 마인드가 있었기에 지금의 ON 엔터가 만들어졌고, 한 번 연을 맺은 연예인들은 대부분 끝까지 함께 하게 되었다.
언래블을 지켜나가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멤버들에게는 비밀로 했지만, 숙소에 사생이 잠입했던 사건도 있었다.
지환이 스쳐 지나가듯 우진에게 중얼거렸던 일을 소홀히 여기지 않은 덕에 발견할 수 있었다.
물건이 없어지는 것 같다는 말.
칫솔 하나가 사라지더니 자꾸 물건이 없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일반 가정집이었다면, 어딘가 처박혀 있나 보다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아이돌의 숙소에서 무언가 물건이 없어진다면 즉시 외부의 침입을 고려해야 했다.
기상천외한 방법들로 숙소에 숨어드는 그들은 모기 같았다.
분명히 다 막아두었는데 어딘가 틈으로 들어와 윙윙거리며 주변을 맴돌거나 몰래 피를 빨아먹고 도망가는 모기.
사생의 모습은 모기와 닮아있었다.
우진은 즉시 사생의 무단침입 가능성을 소현에게 전달했고, 소현은 빠르게 움직였다.
회사 내의 언래블 관련 부서를 책임지는 사람들과 이사, 대표까지 모여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사생은 초기에 확실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나중엔 어떻게 대응하기 어려울 만큼 번져버린다.
멤버들의 정신 건강과 상태를 고려해 일단은 비밀로 하고 숙소를 점검하기로 했다.
CCTV를 체크하고 숙소의 방범창을 다시 한번 점검하는 등, 멤버들이 바쁜 만큼 그들도 바쁘게 보냈다.
공식 카페를 통해 숙소 관련 내용도 고지했다.
아티스트의 휴식을 위해 절대 숙소에 침입하거나 주변을 맴돌지 말아 달라는 내용과 적발 시 법적 조치하겠다는 말.
처음 팬카페를 만들 당시에 한꺼번에 공지를 올려두었었지만, 이번에 한 번 더 사생을 저격하는 공지를 올려두었다.
갑자기 올린 공지에 멤버들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팬들의 제보가 있었다는 말에 수긍한 듯했다.
멤버들은 자신들도 이상한 점이 있거나 수상한 사람을 보면 바로 이야기하겠다고 답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생들은 자신들끼리 멤버들의 정보를 공유하거나 서로의 불법 행위를 자랑해댔다.
그런 모습에 폭발한 팬 중 일부가 조직적으로 사생 척결을 외치며 정보를 수집해 회사에 제공하기도 했다.
악질적인 게시글을 기재하거나 악플을 달았던 사람들을 전부 고소했던 ON 엔터.
그 결과가 최근 하나씩 결과가 나오고 있었다.
악플러 중 특히나 악질적이었던 사람을 대상으로는 민사 소송도 함께 진행할 것이라는 내용도 있었고.
ON 엔터는 구체적인 결과가 나오자 다시 한번 팬들에게 공지를 통해 내용을 알렸다.
진척된 사항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할 예정인지를 알리는 글들은 팬들의 마음을 달래기 충분했다.
팬들은 언래블이 겪었던 공포와 충격을 잊지 않고 있었다.
현재 카메라 앞에서 행복한 모습을 보이는 언래블 뿐만 아니라, ‘알려지지 못한 이야기’에서 슬픈 얼굴로 이야기하던 모습까지 전부 다.
팬 사인회까지 쫓아와 난동을 부린 누군가의 이야기도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아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런 사람을 회사에서 어떻게 대처했는지도 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목격했고.
고소하겠다는 말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움직이고 처벌했다는 사실이 회사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주었다.
덕분에 팬들은 회사를 믿고 자신들이 수집한 사생들의 불법 행위 자료를 넘길 수 있었고.
ON 엔터는 멤버들이 없는 낮 동안 숙소 무단침입을 감시하는 직원을 따로 두었고, 숨죽여 기회를 노렸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감시한 지 이주쯤 됐을까.
숙소 현관문 앞에 설치한 CCTV에 누군가 잡혔다.
CCTV를 보고 태연하게 웃는 20대로 보이는 어떤 여성.
심지어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 모습을 확인한 직원은 온몸의 솜털이 바짝 설 만큼 소름 끼치고 무서웠다고.
이윽고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듯, 자연스러운 손길로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원래는 비밀번호를 바꿔두려 했었다.
하지만 정윤 실장은 비밀번호를 바꾸지 말고 지켜보다 확실하게 현장에서 잡자고 했다.
현장 도착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지만, 담당 직원이 계속 감시하고 있었기에 나간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렇게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 직원 덕분에 소현 팀장은 남자 직원들과 경찰을 대동하고 현장을 덮칠 수 있었다.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보인 광경에 경찰들도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어딘가를 뒤지고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들이 마주한 것은 이제 막 씻고 나온 듯 물기에 젖은 사람이었다.
숙소 화장실에서 샤워하고 나온 것.
심지어 처음 CCTV에서 봤던 옷과 다른 옷이었다.
소현은 그 옷이 멤버의 옷이라고 경찰에게 말했다.
이윽고 수색한 가방에서는 멤버들의 물건으로 보이는 것들이 나왔다.
바로 경찰서로 끌려간 후에도 그 사생은 자신이 멤버 중 한 명인 영빈과 사귀는 사이라고 주장했다.
영빈이 비밀번호를 알려주었고, 언제든 오라고 했다고.
소현은 그 자리에서 뺨을 올려 치고 싶은 걸 겨우겨우 참아냈다.
아니, 옆에 있던 직원이 붙들지 않았으면 멱살은 잡았을지도 모르겠다.
치솟는 분노 때문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수사 과정에서 소현이 더 불안해졌던 건, 사생이 이 사람 한 명만 있진 않을 것이라는 현실 때문이었다.
멤버들이 방송과 연습, 개별 공부로 바쁘던 사이 그들이 잘 모르는 현장에서는 이런 일들이 있었다.
이런 소동이 기사로 번지지 않도록 회사는 최대한 조용히 그리고 강력히 대응했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소현은 사생을 잡으러 출동해야 했다.
오죽하면 경찰과 웃으며 인사하는 사이가 됐을까.
다행히 ON 엔터에서 강경하게 대응한다는 소문이 돈 건지, 그 후로는 숙소에 침입하려는 시도가 사라졌다.
이미 한 번 누군가 숙소에 침입하려 했던 경험이 있는 멤버들에게 사생들의 이런 행동은 굉장히 커다란 공포로 다가올 수 있었다.
다행히 주기적인 면담 덕분에 아이들은 눈에 보일 정도로 안정되었고, 이전과 같은 일상으로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그 때문에 회사는 상담 선생님과 현 상황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눴고, 말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던 것.
그렇게 힘들게 사생을 치우고 있었는데 임시 감독이 멤버들 멘탈을 바스러트리려고 했으니 정윤 실장이 분노한 것도 충분히 이해되긴 했다.
한편 포잉은 회사에서 숨긴 일련의 상황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이돌에 대해 잘 모르던 시절, 사생에 대해서도 무지했던 포잉은 안 좋은 사례에 관한 글들을 보고 고민했다.
계약자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적절한 대비와 대응을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그 때문에 휴식을 취할 때도 요정계에 돌아가지 않고 숙소를 지켰다.
그리고 끝내 숙소에 침입한 침입자들을 발견하게 된 날, 포잉은 다른 인간들이 알 수 있도록 조금씩 상황을 만들었다.
무신경한 계약자 놈을 움직이는 건 쉽지 않았지만, 이전 김우빈을 처리했던 때처럼 포잉은 포기하지 않았다.
직접적인 제재를 가할 수 없으니 다른 인간의 힘을 빌려야 했다.
요정의 한계라는 게 이럴 때는 못마땅했지만, 아직 정식 중급 요정이 되지 못한 포잉이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적었다.
게다가 포잉도 ON 엔터의 입장처럼 멤버들이 이번 일을 모르길 바랐다.
가뜩이나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이 또다시 겁에 질린 얼굴이 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언래블이 모르는 곳에서 회사와 팬, 요정이 힘을 합쳐 언래블을 지키고 있었다.
언래블이 지금처럼 웃으며 지낼 수 있는 데는 이처럼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
당장 멤버들부터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텼고, 회사는 울타리가 되기를 거부하지 않았다.
무수한 팬들이 소중한 내 아이돌의 버팀목이 되길 자처했다.
거기에 더해 의지할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언래블을 한없이 약한 생명체 대하듯 보듬어 주었다.
그렇게 모두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다 같이 노력했기 때문은 아닐까.
포잉은 인간은 알면 알수록 어렵다고 생각하며 진지한 얼굴로 회의를 이어나가는 정윤과 소현을 바라보았다.
계약자인 지환은 모르는 포잉의 어느 시간이었다.
* * *
“지환아, 요새는 꿈 안 꾸니?”
“네?”
“아니, 그 플루토 때처럼 조상님이 점지해주지 않을까 해서….”
“조상님 아니고 에단 쌤이 나왔었다니까요!”
“그거나 그거나.”
개인 연습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에게 갑자기 A&R 부서의 주영 팀장님이 찾아왔다.
주영 팀장님은 딱 이거다 싶은 곡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며 나를 붙들고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꿈 타령이라니.
그동안 내 머릿속에 그려져 있던 A&R팀의 멋있는 이미지가 현실을 접할수록 자꾸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거기에 가장 큰 몫을 하는 건 주영 팀장님이었고.
1인용 소파에 널브러진 팀장님의 모습은 건조대에 걸린 털지 않고 널어둔 빨래처럼 구깃구깃했다.
“팀장님,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
“우리 지환이가 또 좋은 거 숨겨놓고 혼자 알고 있을까 해서?”
“숨긴 거 없다니까요?”
“왜 이번에는 너희 셋 다 곡을 안 내놓는 거야!”
“앨범 주제랑 맞는 게 없으니까 그렇죠!”
“으아아! 이대로 가다간 주야장천 야근하게 생겼어!”
평소에도 털털하고 친근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셨던 팀장님이 이제는 옆집 아저씨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외부 모집된 곡 중에는 괜찮은 게 없어요?”
“응. 없어. 평소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이상한 일이긴 했다.
타이틀곡뿐만 아니라 수록곡으로 넣을 곡도 모집하고 있을 텐데.
어딘가 찝찝한 느낌에 버릇처럼 포잉을 바라봤고, 내 시선을 느낀 포잉은 깊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망할 놈의 계약자.’
우리 만능 치트키 요정님이 활약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