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 지켜줄게(3)
식사도 세부 사항 조율도 모두 끝난 후, 우리는 제법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찝찝하게 굴었던 한 명을 제외하면 나머지 멤버들은 걱정했던 것들이 허탈해질 만큼 소탈했다.
그동안 도대체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듣고 온 건지 멤버들에게 궁금한 게 다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듯했다.
오죽하면 단우 형이 쟤네 왜 저러냐고 신기해했을까.
멜트의 루 선배님 말에 따르면, 간혹 예능에서 마주한 사람들 사이에서 한 번씩은 언래블의 이름이 오르내렸다고 했다.
호기심에 자기들끼리 기사도 조금 찾아보고 ‘알려지지 못한 이야기’도 봤다고.
덕분에 멜트 멤버들은 ‘상상 속의 생물이 아니라 실존 인물이었어!’ 하는 기분으로 언래블의 이야기를 마음껏 즐겼다고 했다.
어딘가 저 사람들도 정상은 아니라는 예감에 잘 피해 다녀야겠다고 남몰래 속으로 다짐했다.
‘쟤 쫓아가 봐?’
‘아냐, 아까 잠깐 속마음 읽어봤어.’
‘무리하지 마라, 계약자 놈아.’
‘진짜 잠깐이어서 괜찮아. 그리고 나올 때, 멜트 사람들한테도 내적 친분 스킬 써놨어.’
예전처럼 스킬을 쓰는 걸 거북하게 여기지 않아서일까?
포잉은 조금 복잡한 감정이 묻어나는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포잉을 잘 다독인 나는 아까 봤던 문장들을 곱씹었다.
- 내가 더 잘하는데
- 내가 더 오래 알고 지냈는데
- 내가 훨씬 잘할 수 있는데
밑도 끝도 없는 질투가 덕지덕지 묻어나는 비슷한 내용의 말풍선들.
잠깐 지켜보다 껐을 만큼 ‘에드‘라는 멤버의 생각은 단순했다.
자기한테 더 관심 달라는, 그냥 투정 같은 생각이 생겼다 없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 진짜 애도 아니고.
왜 우리한테 이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에드에게는 골든아워 형들이 꽤 커다란 의미가 있는 듯했다.
형들이 우리 팀 멤버들을 예뻐하는 것 같을 때마다 중간에 툭툭 끼어들었던 걸 보면.
한편으로는 생소한 기분도 들었다.
아직 햇병아리 같은 우리 애들을 저렇게 잘나가는 사람이 질투한다는 게 신기했고.
그냥 저렇게 틱틱대고 말 거면 그냥 신경을 꺼도 될 것 같았다.
다른 멤버들은 언래블에게 호의적이었으니, 에드 혼자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망둥이에 비하면 에드는 귀엽게 봐줄 수 있는 정도.
JC 엔터 실장에게도 ‘내적 친분’스킬을 걸어두었으니 적어도 악질적인 장난질은 하지 않을 것.
걱정했던 것보다 무난하게 촬영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꼭 말해라, 계약자야.’
‘에이, 뭐 별일 있겠어? 그냥 틱틱거리는 게 전부인 것 같더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포잉을 달랜 나는 찝찝했던 마음을 애써 털어냈다.
저런 깔짝거리는 사람 말고도 고민하고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 * *
“최근에 새로 생긴 취미가 있을까요?”
“새로 생긴… 은 아니고 시간 날 때마다 위캠에서 요리 영상을 찾아보는 편이에요. 보고 있으면 정말 시간 가는 걸 모르겠어요.”
“요리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특별히 자신 있는 음식이 있을까요? 혹은 좋아하는 음식이라든가.”
“최근에는 고기반찬을 많이 찾아보고 있어요. 저희 멤버들이 고기반찬 없으면 밥을 잘 안 먹으려고 해서요.”
진지한 얼굴로 ‘내 새끼들 편식 때문에 반찬이 고민이에요’하고 말하는 게 이제 막 19살 된 소년이라는 게 아이러니.
“아하, 언래블은 육식파군요?”
“네. 너무 강경 고기파들이라 가끔은 조금 곤란해요.”
좋아하는 분야에 관한 이야기를 해서 기분이 좋았는지 지환은 해사하게 웃었다.
단체 인터뷰 후 개별 인터뷰가 진행되었는데, 어쩌다 보니 지환이 마지막 순서가 되었다.
하준은 그런 지환의 인터뷰를 우진과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멤버들은 최근 통 잠을 못 자는 것 같아 억지로 등 떠밀었던 참이었다.
잠깐 눈이라도 감고 있으라고.
같이 기다리겠다고 버티던 고집쟁이 동생들은 다행히 영빈이 잘 챙겨갔다.
하얀 셔츠를 입은 단정한 얼굴의 지환이 인터뷰 내내 바른 자세를 유지하며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저 모습만 본 사람들은, 지환이 숙소에서 어떻게 굴러다니는지 알면 꽤 놀라리라.
문득 떠오른 숙소 거실 풍경에 하준은 고개를 내저었다.
밖에서는 꽤 멀쩡한 멤버들이 꼭 숙소에만 돌아가면 슬라임 덩어리 같아졌다.
특히나 지환은 러그를 몹시 아껴서 씻지 않은 멤버는 그 위로 올라오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하준은 멤버들이 숙소에서 연체동물처럼 뒹굴거리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했다.
종일 사람의 시선과 카메라 앞에서 버텨야 하는 애들이었다. 적어도 집에서는 마음 편하게 있고 싶겠지, 하고.
게다가 늘 그런 분위기가 유지되다 보니 생각지 못한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다투는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멤버들도 사람인 이상 날카로울 때가 가끔 있었다.
다만 사소한 말다툼, 혹은 오해 등 여러 이유로 감정이 상해도 숙소에 도착해 러그에 몸을 누이면 어느 정도 풀어지곤 했다.
버릇이 무섭다고 늘 러그에 누워 노닥거린 탓에 다들 자기도 모르게 일단 몸이 먼저 누워버리곤 했다.
그 후 뒤늦게 돌아오는 정신.
그 상태에서 서먹해진 상대랑 눈이라도 마주치면 꽤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잠깐 서먹해졌어도 서로 눈치만 보다 바보같이 웃어버리기 일쑤였다.
멤버들을 떠올리며 은은하게 미소 짓던 하준의 얼굴이 잠깐 흐려졌다.
얼마 전, 몰래카메라가 떠오른 탓.
최근에 몰래카메라 일이 있고 난 후 하준은 계속 마음이 불편했다.
목적이 있어서 한 행동이라 한들 동생들에게 칼날같이 새파랗게 날이 선 말을 했다.
본심이 아니었다는 걸 하준도, 지환이나 다른 동생들도 모두 알았다.
하지만 그놈의 말이 무엇인지 이미 들어서 뇌리에 박힌 것들이 쉽사리 사라지진 않는 것 같았다.
동생들을 다독이며 잘했다고, 더 생각하지 말라고 했지만 당장 하준도 쉽게 기억이 사라지진 않았다.
시무룩해져서 눈치를 보던 힘찬의 얼굴이 내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한겨울 눈보라보다 차가웠던 지환의 목소리가 자꾸 맴돌았다.
늘 매사 태평하고 무덤덤했던 경환까지 살짝 날이 서 있는 듯했다.
영빈이는 골똘히 생각에 빠지는 시간이 늘어났고, 세빈이는 다시 사람들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외부의 반응에 가뜩이나 민감한 멤버들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지 암담해졌다.
일 년 가까이 상담을 받았고, 덕분에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한 게 바로 얼마 전이다.
밤잠을 못 이루던 영빈이가 점차 편하게 잠들기 시작했고, 경환이는 더 많이 살가워졌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꺼리지 않게 되었고.
힘찬이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마주하는 걸 배웠다. 이제는 그 감정을 멤버들에게 숨기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세빈이는 좋고 싫음에 대해 자기 의사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
불안한 듯 사람들 눈치를 보던 작은 소동물 같던 막내가 한 뼘 더 자란 듯해서 무척 기뻤었다.
지환이는 가끔 느껴지던 막연한 불안감이 꽤 많이 사라졌다.
데뷔 직후 어느 날, 경환이 하준을 찾아왔었다.
이상하게 불안하다면서.
그때 경환은 지환이 자신이 알던 지환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허깨비나 환상 혹은 그림자 같을 때가 있다고.
분명 같이 종일 연습하고 밤늦게까지 노닥거리다 잠이 드는데도 눈 떴을 때 지환이 없을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경환에게 실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지 못했던 건, 하준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 있기 때문이었다.
지환은 누구보다 멤버들을 아끼는 것 같으면서도 가끔 자신들이 아닌 다른 곳을 보는 것 같았다.
문득 어느 날 자고 일어나면 지금까지가 다 꿈이고, 지환이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그때일 것 같았다.
새까맣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았던 무력감과 공포.
겁에 질린 얼굴을 한 동생들의 표정과 그때의 섬뜩한 느낌은 지금도 종종 악몽으로 나타나곤 했다.
지환의 사고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멤버들 모두에게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그 교통사고를 기점으로 너무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그렇게 붕 뜬 것처럼 희미했던 지환이 점점 무게감을 갖게 되었을 때 하준은 크게 안도했다.
상담을 받자고 했던 지난날의 자신을 칭찬하기도 했고.
그런데 그 몰래카메라가 다시 멤버들에게 불안을 안겨준 것.
그나마 지환이 빠르게 눈치채고, 과감한 결단을 내려 멤버들이 더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평소에는 멤버들 하자는 대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흐느적거리는 지환이었지만 가끔 중요한 순간에 굉장히 단호했다.
제일 큰 형인 하준과 영빈조차 당황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지환은 멤버 중 덩치도 제일 작고 가늘었다.
게다가 몇 번 다치기도 해서 멤버들은 은연중 지환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덕분에 막내인 세빈까지 지환을 챙기겠다고 꼬물거렸는데, 형으로서는 그런 모습이 기특했다.
다만 이렇게 무언가 곤란한 상황이 생길 때마다 지환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번에도 멤버들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으려 악역을 자처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당사자는 자기가 그래도 연기도 좀 배우고 했으니 다른 사람보단 낫지 않겠냐고 했지만 그걸 믿는 멤버는 없었다.
물론 멤버들의 연기 실력이 썩 훌륭하지 못하다는 건 서로 알았지만.
마침 인터뷰를 하던 지환이 대답하기 조금 곤란한 질문이었는지 느리게 눈을 깜박거리다 배시시 웃었다.
마치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하고 온몸으로 자신의 무해함을 어필하듯.
‘날이 갈수록 능청스러워지는 것 같단 말이지.’
하준은 방금까지 고민하던 것들을 머리 한구석으로 던져버리고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이런 고민이 부질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늘 가정을 하고 고민하고 최대한 많은 변수를 고려하지만, 언제나 그걸 비웃듯 새로운 상황이 생겼다.
그럼에도 하준이 이런 고민을 멈출 수 없는 건,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라는 강박 때문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때마침 영빈이 동생들과 함께 나왔고, 다들 밝은 얼굴로 인사를 끝마쳤다.
“배고프다….”
“오늘 점심 뭐 먹어요? 맛있는 거 먹고 싶다.”
힘찬과 세빈이 우진의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어 맛있는 걸 먹고 싶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어필했다.
그런 둘의 행동에 못 말리겠다는 듯 웃던 우진은 둘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주며 입을 열었다.
“저번에 초밥 먹고 싶다고 했잖아. 초밥 먹을래? 너희는 어때.”
“우와! 진짜요?”
“찬성!”
“저도 좋아요.”
“전 아무거나 좋으니까 빨리 나오는 거요.”
어지간히 배고팠던지 경환은 뭐든 좋으니 빨리 입에 먹을 걸 넣어달라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 모습이 꿀단지를 빼앗긴 곰 같았다.
지환이 웃음을 터트리며 그런 경환의 입에 소포장 된 초코바를 넣어주었다.
“아까 인터뷰할 때 주신 건데 형 줄게요.”
“뭐야, 나는? 왜 경환 형만 줘?”
“그러게 평소에 환이한테 잘했어야지.”
“한 개밖에 없었는걸. 형이 더 배고픈 것 같으니까 어쩔 수 없어.”
초코바 하나 먹어놓고 금세 의기양양해진 경환의 모습에 하준과 영빈은 한숨을 내쉬었고, 지환은 웃었다.
익숙한 손길로 세빈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지환은 슬며시 대화에서 한발 몸을 뺐다.
약이 오른 힘찬이만 경환과 아웅다웅했지만, 그마저도 우진이 밥 먹으러 가자는 말에 금방 멈추었다.
“이게 최후의 만찬이겠죠?”
“애잔하게 그렇게 말하지 마…. 우리 너무 불쌍해 보이잖아.”
“하지만 이제 곧….”
“쉿, 안돼. 거기까지 해. 입 밖으로 꺼내면 슬프니까.”
“오늘 많이 먹어도 돼요?”
“그래, 아주 실컷 먹어라. 내일부터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우진 형, 너무해…. 더 슬퍼졌어. 흑흑.”
놀리듯 말하는 우진 형에게 울상을 지어 보인 힘찬이 우진 형의 등에 폴짝 매달려 칭얼거렸다.
툭하면 형들에게 매달리는 힘찬.
그게 나름의 애정 표시인 걸 아는 우진은 꽤 묵직할 텐데도 싱글벙글 웃으며 받아주었다.
이번에 실컷 먹고 나면 다시 체중감량에 들어가야 했다.
이제 새 앨범 준비에 들어가야 했으니까.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멤버들은 오늘 원 없이 먹을 거라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런 멤버들을 바라보며 평소처럼 웃던 지환이 한마디 툭 내뱉었다.
“나중에 우리 멤버들 누가 데려갈지 모르겠지만, 먹여 살리려면 돈 많이 벌어야겠네요.”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든 멤버들의 시선이 지환을 향했다.
밥 주는 사람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집념이 서린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