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77)화 (277/456)

277. 지켜줄게(2)

하겸은 아직 순박하기 짝이 없는 언래블 멤버들 모습에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ON 엔터에서 여러모로 싸고돈다는 말이 이 바닥에 자자했다.

신인 주제에 비싸게 군다는 말부터 부럽다는 말까지.

시작부터 사건 사고에 휘말려서 그런지 회사에서도 꽤 신경 쓰는 티가 났다.

덕분에 하겸은 가끔 하준과 이야기할 때면 자신의 데뷔 때가 떠올랐다.

그때 자신과 골든아워의 모습과 지금 하준, 언래블의 모습.

골든아워도 ON 엔터에서 데뷔했다면 훨씬 나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하겸과 멤버들이 JC 엔터에서 데뷔하게 됐을 때, 주변에서 얼마나 질투 가득한 시선을 보냈던가.

당장 자신도 데뷔하면 바로 1위하고 콘서트하고 해외 투어할 줄 알았다.

리더 역을 떠맡는 바람에 멤버들과 싸우기도 징글징글하게 싸웠었다.

한창때의 남자애들한테 숙소에 있으라고 한다고 그 말을 들을 리가.

그때 비하면 지금은 정말 사람 구실하고 있다는 생각에 실소가 흘러나왔다.

한편으로는 그때 동생들이 이해됐다.

놀고 싶고 쇼핑도 하고 싶고 친구도 보고 싶었겠지.

당장 하겸도 몇 번이나 도망가고 싶었다.

그놈의 책임감이 뭔지.

처음 얀이 가출했던 날이 떠올랐다.

개인 연습 끝나고 왔는데 애가 없어져서 얼마나 놀랐던가.

당시 매니저랑 치고받고 싸우더니 짐을 싸서 숙소를 뛰쳐나갔다고 했다.

그래놓고 숙소에서 멀리 가지도 못하고 옥상에 숨어서 울고 있는 걸 인하가 찾아왔었다.

처음에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서 멱살 잡고 싸웠고, 그 와중에도 얼굴에는 서로 손대지 않은 게 용했다.

말리는 멤버들까지 들러붙어서 개싸움도 그런 개싸움이 없을 만큼 크게 싸웠다.

나중에 얀에게 전후 사정을 듣고 처음으로 회사에 항의했다.

매니저라는 사람이 얼마나 그동안 멤버들을 학대했는지, 왜 그런 사람을 방치하는지.

하겸은 정말 몰랐었다.

다른 동생들이 매니저에게 어떤 대우를 받고 있었는지.

얌전하기만 했던 막내 단우가 형이 뭘 아냐고 소리 지르지 않았으면 영영 몰랐을 일들.

사실 당시에는 어느 정도 계산하고 한 행동이긴 했다.

이제 와서 우리를 자르진 못할 거라는, 지금 생각하면 어설프기 짝이 없는 생각.

처음 언래블과 마주하고 여러 일을 보고 듣고 겪으면서 하겸은 그만큼 속이 복잡했었다.

질투도 나고, 안쓰럽고, 후회도 되고.

지금이야 착하고 좋은 동생들이라 예뻐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마음 때문에 쉽사리 곁을 주기는 힘들었다.

대다수의 연예계 지인들처럼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고 지낼 생각이었는데.

책임자들이 프로그램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에 집중하는 언래블 멤버들 모습에 슬며시 웃었다.

언래블은 무언가 열심히 메모하면서도 서로를 틈틈이 챙겼고, 가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ON 엔터 사람들은 질문에 자연스럽게 답했고.

그래, 저런 모습들이 마음에 들어서 예뻐하게 됐다.

그 난장판을 헤쳐오면서도 유난히 눈빛이 반듯해서.

처음 골든아워 멤버들끼리 속을 터놓고 이야기했던 날이 떠올라서.

“왜 그렇게 음흉하게 웃어?”

무대 위에서 죽고 싶다고 말하며 엉망이 된 얼굴로 울던 과거의 모습이 심드렁한 지금 얼굴 위에 오버랩됐다.

그때는 이 자식도 귀여운 구석이 있었는데 하는 생각을 하며 얀에게 속삭였다.

“니꺼 아이스크림 누가 먹었는지 궁금하지?”

“형 새끼세요?”

차마 회사 사람들 앞이라 화를 낼 수 없었는지 왈칵 일그러지는 얼굴과 달리 목소리는 한껏 줄어들어 있었다.

얀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그걸 봤는지 지환의 눈썹이 처량할 정도로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눈빛에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러니 예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왕이면 더 챙겨주고 싶었고.

아직도 그림자 한구석에 매달려있는 과거를 잘 눌러놓은 하겸은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겸은 리더였으니까.

* * *

“죄송합니다, 차가 막혀서 더 늦었어요.”

“아닙니다. 멜트 바쁜 거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죄송합니다.”

어느 정도 대화와 식사가 진행되던 도중,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멜트 매니저인 듯한 사람이 연신 룸 안의 사람들을 향해 고개 숙여 사과했고, 정윤 실장님이 유하게 받아넘겼다.

멜트 멤버들이 꾸벅 인사를 하며 안에 들어서자 커다란 방이 꽉 차는 것 같았다.

방금 스케줄 끝나고 달려왔다는 게 한눈에 보일 만큼 풀 메이크업한 상태였다.

잠시 간단히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고, 대화는 프로그램에 관한 내용으로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포잉, 저 사람이 그때 그 사람이야.’

그사이 나는 포잉에게 속삭였다.

날 괴롭힌 친구 가족을 길에서 마주친 후 엄마한테 이르는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포잉은 내 편을 들어줄 테니까.

‘너는 다른 건 별로지만 촉은 좋은 편이니 조심하셈.’

‘다른 건 별로라니… 너무해, 포잉.’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일에나 집중해.’

언제나처럼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포잉.

이미 건물 내부에 다른 카메라가 없다는 걸 확인한 터라 마음은 조금 편했다.

지난번 몰래카메라 이후 신경이 조금 더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카메라에 여러 번 데이니 이제는 어디 가도 주변에 숨겨진 카메라가 있는지부터 확인하게 됐고.

포잉이 없었다면 이런 환경에서 버티는 게 불가능했을 터.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다시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이번에 형들이랑 같이한다고 해서 엄청 기대했는데.”

“어차피 지금 꺼 끝나면 합류할 거잖아.”

“그래도요. 처음부터 쭉 같이하는 줄 알고 좋아했단 말이에요.”

포잉과 내가 예의주시하고 있는 멜트의 에드가 하겸 형에게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 다른 멤버들은 질린다는 얼굴로 한마디씩 더했고.

“쟤 또 저런다.”

“형들 앞에서만 저렇게 가증을 떨어요, 어휴.”

“형, 속지 마요. 저 가증스러운 새끼.”

멜트 멤버들은 전반적으로 활달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정신이 없었고.

“안 그래도 꼭 만나고 싶었어요. 다들 워낙 칭찬을 많이 해서 궁금했거든요.”

“맞아, 만나고 싶었는데 어떻게 타이밍이 그렇게 안 맞더라고요.”

“HMA 때 무대 잘 봤어요. 이리저리 쫓겨 다니느라 제대로 인사도 못 했네.”

편하게 또래들끼리 이야기하라고 우리 옆에 멜트 멤버들을 붙여줬더니, 다섯 명의 입이 한꺼번에 온갖 이야기를 꺼냈다.

분명 멤버수는 우리가 한 명 더 많은데 이상하게 멜트 쪽이 훨씬 사람이 많은 것 같았다.

네 명의 멤버들은 우리 애들을 호기심 가득 담은 얼굴로 지켜보고 있다면, 에드는 골든아워 쪽으로만 말을 걸고 있었다.

“저희도 선배님들 뵙는 거 엄청 기대했어요.”

“아, 닭살 돋게 선배님은. 그냥 편하게 불러요. 말도 편하게 할까요, 우리?”

“우리 서로 나이 깔까요? 그럼 호칭 정리되지 않나.”

우리가 한마디 하면 저쪽에서 세, 네 마디가 쏟아지니 대외적인 대응 담당인 하준 형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준이 형은 다른 대응은 잘하는 편이지만, 이런 상황에는 유독 약했다.

아마, 곧 내게 도와달라고 할 것 같… 은데 라고 생각한 순간, 예상은 이렇게 벗어나질 않았다.

준이 형과 멤버들의 눈동자가 내게 꽂혔다.

한결같은 모습이라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저희가 먼저 선배님들께 자기소개해도 될까요?”

“아, 그러네. 우리 제대로 자기소개도 안 하고 있었네. 먼저 이야기해 줄래요?”

처음 새벽 형들을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라 웃음이 자꾸 흘러나왔다.

아, 우리 형님들 뭐 하고 지내나, 괜히 궁금해지네.

소개를 좀 하자는 뉘앙스로 조심스럽게 말하자, 어딘가 모르게 준이 형이 연상되는 분위기를 가진 멤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각자 이름과 나이, 포지션을 소개했고 이어서 멜트 멤버들도 자기소개를 끝냈다.

“뭐야, 우리도 해야 하나? 우린 다 알지?”

“몰라도 딱히 너에 대해 알고 싶진 않을 것 같은데.”

“진짜 낄끼빠빠해라, 형님아.”

“이상한 줄임말 쓰지 말라니까.”

각자 소개하고 있는 우리를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던 골든아워 형들이 대화에 끼어들자 분위기는 조금 더 편해졌다.

“그 뭐야, 병아리? 그걸로 기사도 났던데 봤어요?”

“아, 선배님 제발….”

“으하, 아 진짜 재밌네. 그래도 뭔가 딱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되는 건 좋은 거예요. 어쨌든 이름을 알아야 노래를 듣든 뭘 하든 하니까.”

그동안은 주변 지인분들만 병아리라고 놀리듯 말했었다. 하지만 HMA 신인상 수상 후 나민수 형님의 발언이 기사로 나오니 주변에서 심심하면 병아리라고 놀리는 상황이었다.

물론 저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지만, 여러 타이틀 중에 왜 하필….

“히스 씨, 예전에 고인수 선생님께 레슨받았었죠?”

“어? 네. 선생님은 어떻게….”

“인수 쌤 학원 차리셨거든요. 저희 레슨도 종종 해주시는데 히스 씨 얘기했었어요. 아끼는 제자였다고.”

“혹시 선생님 연락처 알 수 있을까요? 아, 그리고 이름 편히 불러주세요….”

“그럴까? 그럼 히스도 편하게 말해요. 인수 쌤이 엄청 얘기 많이 해서 그런가? 오늘 처음 보는데 괜히 반갑네요.”

옆에서 멜트의 메인 보컬 사피 선배가 영빈 형에게 말을 붙이고 있었다.

내가 잘 모르는 어떤 인연이 또 있었는지 사피는 산책 나가는 강아지처럼 신나있었다.

“처음에는 탄생석에서 이름 따왔다고 우리도 엄청 놀림당했는데, 지금은 우리 팬들도 좋아하니까.”

“헐, 진짜요? 보석에서 따와서 그런가? 되게 고급져 보이는데요!”

“크, 이 친구는 크게 될 사람이네, 이렇게 사회생활을 잘해. 좋아, 좋아.”

경환 형, 왜 거기서 형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어….

내가 걱정했던 것과는 반대로 멜트 멤버들은 성격이 좋은 것 같았다.

루와 페리는 벌써 우리 막내 라인과 쿵짝이 맞아서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 골든아워의 인하 형과 얀 형이 한마디씩 끼어들고 있었고.

전체적으로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지환 씨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플루토 되게 잘 듣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플루토는 멤버들이랑 다 같이 만든 거라 온전히 제 곡은 아니에요.”

“배운지 얼마 안 됐다면서요, 이미 충분히 훌륭한데 뭐. 하준 씨가 만든 곡이 컨퓨전이었죠? 그것도 통통 튀는 멜로디가 인상적이었어요. 제 플리에 두 곡 다 있어요.”

“저도 멜트 노래 자주 들어요. 매번 곡이 세련되서 감탄한다니까요.”

디아는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직접 앱을 켜 보여주는 정성을 보였다.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괜찮은데, 허허.

리더들이 서로 얼굴에 금칠해주는 사이에 끼어버린 나는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졌다.

이게 웬 직장생활 같은 분위기야.

“대장 병아리야, 부끄러워?”

“아, 형. 그만 좀 놀려요….”

“겸이 형도 병아리 시절 있었잖아요!”

멜트의 리더 디아와 우리 준이 형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하겸 형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툭 뱉었다.

“와, 환이 너 나한테 ‘형 진짜 멋있어요!’ 해놓고 너네 리더라고 하준이 챙기는 거야?”

“형은 좋은 형이지만 준이 형은 우리 소중한 리더거든요?”

“엇, 저도 좋은 형 될 수 있는데.”

“고운아, 고운아, 지환이한테 사랑받으려면 대기표 뽑고 기다려야 된다. 쟤 비싸.”

“으아, 진짜! 이름 말하지 말랬죠!”

방금까지 준이 형이랑 서로 얼굴에 금칠해주던 사람이 능글맞게 끼어들었다가 하겸 형의 한마디에 발끈했다.

멜트 리더 이름은 장고운, 우리에게 날을 세우던 사람은 박화영.

본인들은 여성스럽다고 이름을 말하는 걸 부끄러워해서, 보통 예명으로 불리길 원한다고 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로 먹고 먹히는 정글의 한복판에 있는 것 같은 피로감이 차올랐다.

집에 가고 싶어….

“지환 씨는 좋겠다. 선배들한테 예쁨받잖아요. 전 다들 어려워하더라고요. 내가 좀 대인관계가 칼 같아서 그런가.”

“전 그저 감사하죠. 제가 별로 잘해드린 것도 없는데 좋게만 봐주셔서.”

“사회생활도 능력이라잖아요. 하준 씨가 잘 가르쳐 줬나 봐요. 부러워요. 전 사회성이 좀 떨어져서 친구 사귀기가 힘든데.”

“저희 애들이 다들 착해서 다른 분들도 좋게 봐주시나 봐요. 저 안 닮아서 다행이죠.”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서로 칭찬하던 우리 사이에 여태까지 지켜만 보던 에드가 툭 끼어들었다.

‘포잉, 나만 지금 저 말 되게 거슬려?’

‘아님. 저 인간 눈에서 레이저 나올 것 같아.’

‘왜 우리 준이 형 후려치지? 뭐야, 저 새끼.’

‘진정하고 일단 티 내지 마셈.’

나를 툭툭 건드리는 척하면서 준이 형을 돌려까고 있었다.

“화봉아, 내가 말할 때 조심하랬잖아. 너는 말투 때문에 오해 사기 쉽다고.”

울컥하는 마음을 꾸역꾸역 삼키는 데 하겸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더 나긋나긋한 말투였지만, 은연중에 에드를 질책하는 것 같았다.

“아, 제가 또 오해하게 말했어요? 이놈의 입, 이게 쉽게 고쳐지지 않네요.”

우리에게 말할 때는 미묘하게 거슬리던 말투가 하겸 형에게 말할 때는 세상 서글서글했다.

이 새끼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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