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76)화 (276/456)

276. 지켜줄게(1)

무수한 의견이 오간 덕에 회의는 단시간에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도 않을 테고.

자세한 세부 사항은 어차피 전문가들의 손에 맡길 것이고, 사실 우리는 의견을 첨언하는 정도에 그친다.

하지만 결국 가장 커다란 틀은 같이 만들어 가야 했기에 이런 회의에 들어가기 전에는 우리 모두 공부한다고 머리를 싸매곤 했다.

아직 어설프고 전문적이지 못해도 최소한 말이 되는 의견을 내놓고자 멤버들 모두가 애쓰는 것.

그것만으로도 괜히 흐뭇해지고 어깨가 으쓱해졌다.

우리 애들이 이렇게 열심히 해요. 자기 일을 사랑하는 멋진 사람들이에요.

세상에 외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얘들아, 다 왔다.”

여러 생각들을 정리하다 우진 형의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와, 가게 되게 크다.”

“두리번거리지 마요,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그건 우리가 잘생겨서 쳐다보는 게 아닐까?”

“요새 형 때문에 거울을 가지고 다녀야겠다 싶은 거 알아요?”

“왜, 형이 너무 잘생겨서 자꾸 거울에 비춰줘야 할 것 같아?”

“와… 진짜 양심 어디 갔어요?”

찬이랑 세빈이가 투닥거리는 사이 준이 형의 눈짓으로 지령을 받은 경환 형이 둘 사이에 쓱 끼어들었다.

“둘이 계속하면 리더님이 개인 면담한대.”

“헙!”

“이제 막 협박해!”

경환 형의 속삭임에 막내들은 목소리를 낮춰 항의했다.

이사한 탓에 진실의 공원에는 갈 수 없었지만, 준이 형은 가끔 멤버 개개인과 따로 이야기를 나눴다.

여전히 서로의 일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과 별개로, 개인적인 문제는 보통 준이 형과 따로 이야기했다.

나도 그렇게 형이랑 둘이 이야기하기도 했었고.

우리끼리 뭉쳐서 소곤거리는 게 제법 하찮아 보였는지 지켜보던 우진 형이 푸근한 얼굴로 웃었다.

어딘가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여기 직원분이신가, 제발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다….

앞장선 정윤 실장님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쉰 것 같았지만, 그 모습은 나만 본 것 같았다.

실장님, 힘내세요….

동그랗게 모인 멤버들 앞뒤로 웃음소리와 한숨 소리가 흘러나오는 통에 막내 라인 셋을 제외한 맏형과 내 시선은 허공을 더듬었다.

일행 아닌 척하고 싶다, 진짜로.

오늘은 JC 엔터에서 기획한다는 프로젝트 아이돌 그룹의 사전 미팅 자리였다.

그동안은 회사 간의 회의였다면, 오늘은 당사자들이 모이는 자리랄까.

대본이 주어질 거고 골든아워와 멜트를 만나게 될 거라고 했다.

사실 이 자리는 회사 분들을 위해 준비된 자리였고, 우리는 그저 얼굴이나 서로 한번 보자는 의미로 이해했다.

처음에는 한두 번 출연하고 끝나는 줄 알았는데 더 많이 출연하게 됐다고.

원래는 멜트 멤버들이 나와야 할 분량이지만, 기존의 스케줄을 도저히 조정할 수 없어서 우리가 땜빵하게 된 듯했다.

생각보다 분량도 늘어난 데다 촬영 중에 자주 마주쳐야 하니 미리미리 얼굴 익히고 친한 척하라는 거겠지.

어차피 골든아워 형님들이랑은 진즉부터 연락하고 지냈고, 두어 번 형님들과 밥도 먹고 했었다.

골든아워 쪽이 자신들 회사에 우리를 추천할 만큼 이미 꽤 친한 사이니까.

하지만 멜트는 스치면서 한 번 얼굴을 본 게 전부였다.

근래에 가장 핫한 그룹 중 하나다 보니 해외 투어를 도느라 국내에 잘 없는 탓이었다.

문득 멜트 멤버 중 한 명을 방송국에서 마주했던 날이 떠올랐다.

인터뷰 때였나, 특별 MC로 출연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얼굴을 보게 됐다며 웃었다.

하겸 형이 칭찬 많이 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래놓고 우리 준이 형을 향해 웃는 눈에는 희미한 적대감이 서려 있었다.

‘포잉, 혹시 카메라 있는지 미리 확인해 줄 수 있어?’

‘…어쩐지 한동안 조용하다 했지.’

‘하하, 늘 고마워. 포잉.’

처음에는 자기를 감시 카메라처럼 쓴다고 투덜거리던 포잉도, 요새는 포기한 듯 순순히 도와주었다.

물론 늘 툴툴거리긴 했지만.

그 모습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하다고 하면 포잉이 싫어하니까.

‘그런 건 나한테 숨 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니까 그렇게 비 맞은 고양이같이 보지 말고.’

‘네엡.’

‘나 오기 전까지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계약자 놈아.’

‘그럼요, 얌전히 숨만 쉬고 있을게요.’

흥 하는 콧소리와 함께 녹아들 듯 사라진 포잉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세빈이 손을 잡고 룸에 들어갔다.

남자들끼리 스킨쉽은 질색하는 게 대부분이라지만, 우리 애들은 자기들끼리 뒤엉켜 있는 날이 많았다.

유난히 붙어있고 손잡는 걸 좋아하고 그런 걸 보면 애정 결핍인가 싶어 안쓰럽기도 하고.

문득 애잔한 마음이 들어 세빈이 머리를 쓰다듬자 동그란 눈 가득 내가 담겼다.

마주 웃는 사이 작고 온순한 얼굴 가득 행복이 차오른다.

예쁘다, 내 동생.

우리 막내의 웃는 얼굴을 마주하자 멜트와의 관계를 고민하던 복잡한 머리가 깨끗하게 비워졌다.

그래, 굳이 벌써 머리 싸맬 필요는 없겠지.

옆에서 왜 둘만 웃냐고 쿡쿡 찔러대는 찬이 머리를 꾹 눌러줬다.

“우리가 조금 일찍 오긴 했네. 우진 매니저, 잠깐 나갈까요?”

“금방 올 테니까 쉬고 있어, 얘들아.”

우리가 자리에 앉아 옷을 정돈하는 사이, 실장님과 우진 형은 잠시 볼일 보고 온다며 나가셨다.

곧이어 교대라도 하듯 하겸 형이 룸 안으로 등장했고.

“요, 병아리들 잘 지냈어?”

“형, 진짜 제발요….”

“하하, 왜, 잘 어울리는데. 아주 딱이야.”

준이 형은 라디오 개편에도 무사히 살아남아 아직 주 3회씩 겸이 형 라디오에 출연했다.

몇 달 후면 1년이라고 기뻐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한편, 우리는 하겸 형의 얼굴을 보는 게 오랜만이라 반가운 마음에 활짝 웃었다.

준이 형은 하겸 형의 놀림에 얼굴을 감싸 쥐며 흡사 애원하듯 중얼거렸다.

종종 이렇게 형들 사이에 있는 우리 맏형들을 보는 건 꽤 즐거웠다.

그리고 그때마다 다시 깨달았다.

우리 형들도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행복하도록, 자기 나이를 잊지 않도록 내가 더 노력해야지 하고 마음을 다잡는다.

“올해 신인들도 많을 텐데, 유독 저희만 자꾸 그렇게 불리는 것 같아서 민망해요.”

“오, 히스가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는 건 또 오랜만이네.”

“….”

침착하게 형의 놀림을 넘기려 시도했던 영빈 형도 결국 침묵을 택했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하겸 형을 이기기엔 우리 영빈 형은 말과 그리 친하지 않았다.

그런 우리 맏형들을 구하기라도 하듯 골든아워의 다른 형들도 룸 안으로 들어왔다.

골든아워의 래퍼 얀 형이 들어오자마자 하겸 형에게 한마디 했다.

“왜 가만있는 애들 괴롭혀, 형은. 우리한테 그러는 거로 부족해?”

“너네는 뭐 한다고 이제 들어와. 그리고 괴롭히다니. 그만큼 애정이 넘치니까 그러는 거 아니냐.”

“입이 귀에 걸리려고 하거든? 거울이나 보고 말해.”

“뀨?”

“미친? 님 올해 춘추가요.”

“확실한 건 발랑 까져서 형아한테 대드는 너보단 많지.”

자기 팀 멤버한테 귀여운 척하며 공격하는 하겸 형의 모습이 참 낯설다.

우리 앞에서는 늘 여유만만한 선배 포스 풀풀 풍기던 사람이었는데….

멱살만 안 잡았지, 거의 싸움이 나기 직전처럼 서로 때려 넣는 딜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주먹으로 때리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말로 때리는 게 더 아플 때가 있다.

지금 저 형님들이 서로 공격하는 게 딱 그런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이 형님들도 정상은 아닌 것 같다.

왜 우리 주변 선배님들은 정상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것인가.

조금 울적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아 진짜 창피하게 밖에서 쫌.”

“앗! 실세님이다! 조용해야겠다.”

“실세님 기분 상하면 안 되니까 조용하자.”

한참 푸닥거리하듯 서로 공격력을 가늠해보던 하겸 형과 얀 형은 팀 막내인 단우 형이 한마디 하자 약속이나 한 것처럼 타깃을 바꿨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우리 찬이가 생각났다.

물끄러미 바라보자 왜라고 입 모양으로 물어오기에 그냥이라고 답해줬다.

저 형들을 보고 있자니, 우리 미래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아마 경환 형, 찬이, 세빈이는 지금처럼 늘 투닥거리느라 바쁘겠지.

나는 말리느라 쫓아다니고 영빈 형은 자포자기, 준이 형은 허허롭게 웃고 있고.

갑자기 미래를 보고 온 듯한 기분이 들어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한편 그런 형들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던 단우 형이 우리를 향해 상큼하게 웃었다.

“얘들아, 오랜만이지? 저 사람들은 신경 쓰지 말고 이리 와. 옮는다.”

“하, 하하….”

언제나 우리에겐 유쾌하고 활기찬 분위기를 보여줬던 단우 형이지만, 멤버들과 있으니 조금 더 본연의 모습이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함께한 시간이 긴 만큼 서로 볼 장 다 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답게 서로를 향해 폭풍 딜을 넣고 있지만 형들은 이미 재계약까지 한 사이니까.

꽤 많은 그룹이 재계약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흩어지는 걸 생각하면 말은 저렇게 해도 사이가 좋다는 게 물씬 느껴졌다.

사실 친하지 않으면 저런 장난도 못 치겠지.

긴장을 다 놓을 수 없던 탓에 바른 자세로 앉아있는 우리들과 달리 골든아워 형들의 자세는 편해 보였다.

이게 바로 선배의 연륜인가 하는 생각을 하는 사이 인하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멜트 애들은 스케줄 갔다 오느라 좀 늦을 거야.”

“어차피 와서 얼굴만 비추고 갈 것 같으니까 우리끼리 먼저 먹으면 될 듯?”

“너희는 멜트 애들이랑 아직 친분 없던가?”

대화 주제가 갑자기 멜트로 훅 건너뛰었다.

“예전에 에드 선배님은 방송국에서 한번 뵈었어요.”

“아, 화봉이.”

“그렇게 부르지 마. 화영이 삐진다?”

하겸 형이 픽 웃으며 ‘화봉이’라는 별명을 입에 담았지만 우리는 눈치껏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형들이야 후배 그룹이니 친하게 지낼 수도 있고 편히 대하지만, 우리에겐 멜트도 선배님이니까.

“화봉이는 내가 이렇게 부르는 거 좋아해. 친하니까 가능한 거라고 그랬거든.”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은데 하겸 형은 뻔뻔한 얼굴로 말했고, 인하 형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그렇게 불러도 밖에선 그러지 마, 좀.”

“화영이 가뜩이나 자기 이름이 여자 이름 같다고 싫어하는데 놀리지 말고.”

인하 형과 얀 형이 하겸 형을 혼냈고, 우리는 그런 형들의 모습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새벽 형들과 골든아워 형들은 나이대가 비슷해도 분위기는 꽤 달랐다.

새벽 형들은 모든 멤버가 자유로운 영혼 같은 느낌이라면, 골든아워는 혼돈의 구덩이 같달까.

골든아워 형들 사이에 있다 보면 흘러나오는 대화들 사이에서 정신이 아찔해진다.

만날 때마다 늘 서로 공격하고 노느라 바쁜 형들과 시니컬한 막내 단우 형.

일할 때는 그렇게 멋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모아놓으니 가끔 동네 바보 형처럼 보이기도 하고.

“진짜 내가 어쩌다 저 인간들이랑 이 긴 시간을 버텼는지.”

단우 형의 한탄에는 유독 깊은 진심이 묻어났다.

“자자, 이제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멜트 애들 얘기나 좀 해보자, 병아리들도 알아야 할 거 아냐.”

“저희는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 일하러 왔으니까 일해야지.”

방금까지 동네 바보 형 같았던 하겸 형은 능숙하게 분위기를 정리하더니 우리를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다.

응? 갑자기? 왜?

“이번에 원래 우리랑 멜트 애들이 메인으로 진행하기로 했는데, 알다시피 걔네가 좀 바빠. 그래서 도와줄 사람을 찾다 보니까 너희가 도와주면 좋을 것 같더라고.”

낄낄대던 사람들이 갑자기 자세를 가다듬고 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어리둥절할 틈도 없이 이어지는 말에 집중하며 질문하기도 하는 사이, 룸 문이 열렸다.

“아, 이런 식사라도 먼저 시작하고 있으라고 할 걸 그랬네. 많이 기다렸죠?”

“아, 실장님. 너무해요. 배고파죽겠네.”

“다들 편하게 있어도 되는데, 벌써 일 얘기하고 있었네요, 허허.”

“언래블 이 친구들도 아주 열정 넘치는 친구들이네요.”

형들이 일 얘기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양쪽 회사 분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골든아워 형들이 듬직하다는 듯 어깨를 두드려주는 JC쪽 사람들.

열심히 이야기를 듣던 우리에게도 꽤 호의적인 얼굴을 했다.

사람들 태도를 보아하니 문 앞에서 잠시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것 같았다.

흔들리는 내 눈동자를 본 건지 하겸 형이 씩 웃었다.

저 정도 연차가 쌓이면 사람 기척을 감지하는 센서라도 생기는 걸까?

갑자기 선배님에 대한 존경심이 무럭무럭 자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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