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75)화 (275/456)

275. 저 달(5)

한숨을 폭 내쉰 찬이가 자기 머리를 마구 헤집더니 연습실 거울을 한번 힐끔 보았다.

자기 표정을 확인한 듯했다.

“듣고 웃으면 안 돼요? 진짜 그냥 잠깐 서운해서 그런 거니까.”

“알았어. 안 놀릴게. 그러니까 마음 편하게 이야기해 봐.”

심란함을 가득 담은 시선이 멤버들 얼굴을 하나하나 훑더니 내 얼굴에 멈췄다.

“그냥, 왜 다른 그룹 보면 개인 활동하면서 좀… 그런 경우들이 있잖아요.”

“아.”

주저하던 찬이 입에서 흘러나온 내용에 경환 형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앓는 소리를 냈다.

나도 그간 많이 봐온 여러 그룹의 재계약 시즌 풍경을 찬이가 떠올렸던 모양이었다.

오죽하면 마의 7년이라고 할까.

“나중에 환이가 연기가 더 좋다고 가버리면 어떡하지 싶었어요. 우리는 6명이 한 팀인데, 계속 같이 있기로 약속했는데….”

사춘기가 온 건지 평소보다 유독 감성적이고 몰랑한 소리를 하는 찬이 모습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 안 웃는다며!”

“미안, 근데 내가 웃으려고 했던 건 아니야. 그냥, 우리 찬이 기특하다 싶어서?”

“야, 우리 동갑이거든….”

“그랬지, 아마.”

“어휴….”

평소라면 으르렁거렸을 찬이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애꿎은 연습실 바닥을 꾹꾹 눌렀다.

혼자 그런 것까지 고민했나 싶어서 기특하기도 하고, 내가 아직 믿음을 주지 못한 건가 하는 씁쓸함이 교차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어?”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영빈 형이 차분하게 물었다.

“…화 안 낼 거죠?”

“누가 들으면 우리가 맨날 화만 낸 줄 알겠다.”

“거의 맨날이잖아요.”

“형이 왜 화를 냈었는지 다시 집어줄까? 어제 일부터 거슬러 올라가 볼까.”

담담하게 사실만 나열하는 영빈 형 이야기에 찬이는 결국 항복을 외치며 불퉁하게 말했다.

“레노랑 가영 형이랑 통화를 했는데 둘 다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해서 걱정돼서….”

“하….”

찬이 입에서 나온 두 명의 이름에 맏형 둘과 내 입에서는 깊고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인간들이 작정하고 찬이를 놀렸거나, 놀리다 보니 이야기가 그쪽으로 흘렀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직 순박하다 못해 세상에 큰 관심이 없는 우리 찬이.

그만큼 관심 있고 호감 있는 사람의 말은 너무 잘 믿어서 문제였다.

덕분에 DCL의 장난꾸러기들이나 새벽의 가영 형, 그리고 몇몇 지인들은 찬이에게 장난을 자주 쳤다.

하루 이틀 있는 일은 아니었다. 다만, 찬이가 은연중에 가지고 있던 실체 없는 불안감이 이번 일로 합쳐져 묵직하게 찬이 마음에 내려앉은 듯했다.

“음,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말해둘게요. 연기, 재밌어요. 신기해요.”

한 박자 끊고 멤버들을 둘러보니 찬이와 세빈이 어깨는 이미 축 처져 있었고, 형들은 흥미롭다는 얼굴이었다.

경환 형만 시종일관 무덤덤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마치 경환 형은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에겐 언제나 언래블이 가장 중요해요.”

단호하게 말하며 찬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릴 때의 일들로 늘 눈치 보는 게 일상이었던 착해빠진 내 친구.

전생의 언래블이 아닌, 나와 함께 새롭게 시작하게 된 찬이에게는 언제나 다른 멤버들과는 조금 결이 다른 애정을 품고 있었다.

준이 형, 빈이 형, 경환 형이나 세빈이에겐 동경, 선망, 호기심 등 온갖 마음이 뒤섞인 묵직한 애정을 품고 있었지만, 찬이는 조금 더 가벼운 만큼 편했다.

찬이랑 연습하거나 이야기할 때는 정말 10대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래, 정말 딱 친구.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웃었다 시무룩해졌다 하는 착한 내 친구.

“찬이는 모지리라 내가 안 챙겨주면 큰일 나서 안 돼.”

“그놈의 모지리, 진짜 안 바꿀 거야?”

“모지리 졸업하면 바꿔줄게.”

“아, 야!”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입술을 삐죽대면서도 얼굴엔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쟤는 진짜 어디 가서 거짓말하고 그런 거 하지 말아야 할 텐데.”

“그러게. 그러니까 환이 네가 잘 좀 챙겨 다녀.”

“우리 화니 형, 고생이 많아요.”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며 연습실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사이 찬이에게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걸 잊지 않았고.

덕분에 얼굴이 빨갛게 익어버린 찬이는 때마침 들어온 제영 쌤에게 맥반석 달걀이냐는 놀림을 들어야 했다.

병아리에서 다시 달걀이 되다니.

우리 찬이는 언제쯤 다 크려나.

* * *

기본 연습이 끝난 우리는 다시 회의실에 모였다.

“생각 많이 해봤어?”

“잘 모르겠어요. 그냥 열심히 끄적거리기는 했는데….”

“부디 오늘은 무사히 넘어갔으면 좋겠다….”

첫 앨범부터 우리가 참여한 덕분일까.

앨범을 만들 때마다 회사에서는 당연하다는 듯 우리를 불렀고, 우리도 이제는 그 상황이 익숙해졌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눈치만 보면 세빈이까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만큼 우리는 존중받고 있었다.

“얘들아, 오늘은 좀 살살하자.”

“엄살은. 애들한테 부담 주지 말랬지?”

“안녕하세요!”

먼저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던 건지, A&R 부서의 건욱 실장님과 주영 팀장님, 그리고 우리 소현 팀장님이 회의실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이미 꽤 긴 시간 회의를 진행했는지 소현 팀장님은 조금 지쳐 보였다.

“우리 병아리들 왔어? 우진이가 마실 거 사 올 거야. 잠깐 쉬고 있어.”

“우와! 역시 우리 팀장님밖에 없어요!”

물이 아니라 다른 음료를 마셔도 된다는 허락의 말에 찬이 눈이 다시 반짝반짝해졌다.

“지환아, 생각해둔 거 있어?”

“어… 이번에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머리가 복잡하기만 하다고 해야 하나?”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얼굴을 하자 주영 팀장님은 코웃음을 쳤다.

“지환이, 쟤는 말은 저렇게 해놓고 나중에 얘기하다 보면 다 저놈이 꺼낸 이야기야.”

“에이, 아니거든요? 오해가 심하신데!”

주영 팀장님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지만 나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여태까지는 그냥 우리 애들이 하면 좋을 것 같은 이야기와 내가 봤던 여러 컨셉을 종합해 가장 보고 싶은 내용으로 말했을 뿐.

“저는 늘 그냥 말만 하고 결국 우리 A&R 부서분들이 다 만들어 주신 거죠. 전 재료만 구해왔달까…?”

능청스러운 내 말에 실장님도, 팀장님들도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으셨다.

“역시 최종 흑막은 쟨가 봐….”

“환이 말 잘 들어야 해. 옛날부터 밥 주는 사람 말은 잘 들어야 된댔어.”

뒤에서 찬이와 경환 형이 이상한 이야기를 쑥덕거렸지만, 모른 척했다.

괜히 여기서 말을 보탰다가는 낚싯대에 걸린 물고기처럼 실컷 파닥거리기나 할 테니 침묵이 최선이다.

곧이어 정윤 실장님도 들어오셨고, 우리는 본격적인 회의에 들어갔다.

“그다음으로 어떤 이야기를 할지 어느 정도 방향은 잡아둬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수북이 쌓인 종이 더미를 보며 한숨 섞인 말을 흘리는 정윤 실장님의 얼굴에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앉았다.

새해부터 이리저리 불려 다니느라 굉장히 바쁘셨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퀭한 얼굴일 줄은 몰랐는데.

평소 소현 팀장님과 함께 밤을 새워도 늘 멀쩡한 모습을 보여주시던 정윤 실장님이었다.

그런 분이 이렇게까지 퀭해진 걸 보니 감사한 마음과 죄송한 마음이 같이 올라왔다.

새삼스레 회의실 안에서 진지한 얼굴로 함께 고민하는 모든 사람이 고마워서 애꿎은 종이 위의 글자만 만지작거렸다.

‘극복(반격).’

각자가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고 회피하려다 결국 그 실체와 마주한다는 것이 우리 정규 1집 ‘Question’의 내용이었다.

앨범명이 ‘Question’인 것 자체가 우리의 두려움을 내보이며, 지켜보는 사람들은 어떤 것을 두려워하는지 묻는다는 뜻이었고.

미니 앨범 ‘여로’에서는 극에 다다른 우리가 폭발해서 맞서 싸우는 모습.

실체와 마주한 우리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그러면 이후 이어질 이야기는 어느 정도 뻔한 내용이긴 했다.

‘싸웠으니 이겨야지. 난 지는 싸움은 안 한다.’

어느 날, 정윤 실장님이 회의 중에 툭 내뱉었던 이야기.

그 말이 유난히 기억에 선명했다.

“일단은 각자 흩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게 마지막 그림이긴 할 텐데, 세부 내용 고민해온 거 각자 말해보자.”

“정리해보긴 했는데, 좀 두서없는 것 같아서….”

“괜찮아, 힘찬아. 늘 그랬는걸?”

“하하, 제가 그렇죠!”

나랑 짝꿍인 찬이는 회의 때마다 사용하는 노트 외에도 직접 프린트해온 종이 뭉치가 제법 많았다.

“너희는 각자 생각해본 거야?”

“네. 처음엔 같이 고민해볼까 했는데 각자 이야기하면 더 다양한 얘기가 나올 것 같아서요.”

찬이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정리한 종이를 나눠주는 사이, 팀장님이 묘한 웃음을 머금고 물었다.

뭐지, 팀장님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약간의 불안함이 치밀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린 듯 반듯한 미소를 지었다.

“저희는 같이 고민했어요!”

“세빈이가 굉장히 많이 고민하더라고요.”

세빈이와 짝꿍인 영빈 형은 씩씩하게 참고 자료를 배포하는 막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없이 포근한 얼굴이 되었다.

“저희도 같이 머리 싸매긴 했는데 의견이 좀 갈려서 둘 다 정리했어요.”

“아무래도 경환이는 좀 과격하던데요?”

덤덤한 얼굴을 한 경환 형이 한없이 기특했는지 준이 형의 얼굴도 뿌듯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확실히 그때 글씨체 교정하고 나서부터는 다들 예뻐졌어. 그 뒤로도 계속 연습하는 거니?”

“글씨체만 예뻐요?”

“저 주접, 진짜.”

“틈날 때마다 조금씩요. 한동안 바빠서 많이 하진 못했어요.”

“잘했네. 뭐든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하니까.”

정윤 실장님은 이전보다 훨씬 깔끔해진 우리 글씨체와 돌아온 답변에 만족하신 건지 눈매가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잠시의 틈도 놓치지 않고 짓궂게 구는 찬이에게는 소현 팀장님이 한마디 했지만.

한편 다른 분들은 평소에는 한 덩어리처럼 붙어서 흐물거리던 우리가 회의 때는 여러 의견을 내는 게 재밌었는지 다들 싱글벙글했다.

“크, 우리가 진짜 멤버는 잘 골랐다니까요. 애들이 이렇게 적극적이고 씩씩하고.”

“내 새끼들한테 눈독 들이지 마요, 주영 팀장님.”

“언래블은 저희도 지분 있거든요? 우리가 얼마나 갈려 나가면서 일하고 있는데.”

“둘 다 제발 채신머리없이 그러지 좀 마.”

다들 기특해하고 좋아하긴 하셨지만, 소현 팀장님과 주영 팀장님은 여전히 사이가 애매했다.

가끔은 좋은 것 같지만, 대부분은 나빠 보였달까.

아니, 정확히 하자면 소현 팀장님이 주영 팀장님만 보면 질색했다.

언젠가 이 이야기를 우진 형에게 물었지만, 우진 형은 곤란한 듯 웃으며 그냥 두 분은 상성이 안 맞는 거라고 했었다.

“애들 앞에서 창피하게 진짜.”

건욱 실장님이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지만, 정윤 실장님은 팀장님들에게는 관심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저 우리가 건네드린 자료를 빠른 속도로 읽어나갈 뿐.

“평소대로 진행하자.”

다행히 정윤 실장님의 한마디에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세빈이부턴가?”

“네. 이번엔 세빈이 차례에요.”

정윤 실장님은 우리도 회의에 참석하는 만큼 최대한 자유롭게 의견을 말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눈치 보거나 빼지 않기를 바란다며 의견을 제시할 때는 모든 멤버가 한마디씩 하도록 했다.

의견이 없다면 의견이 없다는 말이라도 하라고.

그 후부터 우리는 발언 순서를 아예 정해놨다.

소회의 때는 순서 상관없이 각자 의견을 제시했지만, 이렇게 본격적인 큰 회의 때는 늘 우리끼리 정한 순서대로 진행했다.

“저랑 영빈 형은 실패하는 쪽이 되는 게 어떨까 했어요.”

“실패?”

“넵. 모든 사람이 싸워서 이기면 속 시원할 순 있는데 긴장감이 없을 것 같더라고요. 차라리 한 팀이나 두 팀은 이기고 다른 팀은 실패하면, 이긴 팀에서 실패한 팀을 구하는 그림이 더 극적일 것 같았어요.”

우리 애가 이제 이렇게 똑 부러지게 말도 잘하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열심히 고민했을 내용을 이야기하는 세빈이 모습이 왜인지 모르게 가슴 뭉클했다.

기특하고 고맙고 예쁘고 장하고 온갖 긍정적인 감정들이 뭉클뭉클 올라왔다.

“그래서 임팩트를 위해 적어도 한 팀 이상은 실패해야 할 것 같았고 일단 저희 팀이 실패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았어요.”

“왜?”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이는 소현 팀장님의 시선에 세빈이 귓가가 빨갛게 물들었다.

우리 막둥이는 아직 이렇게 시선이 집중되는 게 부끄러운 듯했다.

‘…왜 여기 인간들은 멀쩡한 인간이 하나도 없음?’

‘응?’

회의 때는 대부분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포잉이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왜 그러나 싶어서 회의실 내부를 살짝 둘러보니 다들 나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세빈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포잉의 한숨이 나날이 깊어가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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