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73)화 (273/456)

273. 저 달(3)

경환 형의 작업 과정을 이렇게 제대로 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동안은 조언을 구하기 위해 들리거나 형이 신선한 아이디어가 필요하다며 부를 때 방문했던 것이 전부였다.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는 시간이 아니라 배우기 위한 시간이라 내 손에는 익숙한 노트와 펜이 쥐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픽 웃는 경환 형의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손을 휘적거리는 걸 보니 답해줄 마음은 없는 듯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그냥 무조건 다 때려 넣고 보는 편이야. 그래서 랩이 좀 빡세다는 이야기도 듣고.”

“어, 맞아요. 형 거는 따라부르기 너무 어려워요.”

“넌 그냥 랩은 하지 마.”

“아니….”

“아무튼 그냥 무작정 손 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다 만들고 보는 편이야. 그러다 어느 날 꽂히면 기존 거로 쭉 뽑아내기도 하고 아예 이거저거 합쳐버리기도 하고.”

불퉁해진 내 표정이 재밌었는지 슬며시 웃던 형은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의 작업 방식을 설명해나갔다.

주로 어떻게 작업을 하고, 어떤 것들을 하는지. 그리고 뭐가 제일 재밌었고, 어떤 게 하기 싫은지.

준이 형은 감성적인 랩을 자주 써 내려갔지만, 경환 형은 하고 싶은 말을 멜로디에 전부 때려 넣는 느낌이었다.

예전에는, 그러니까 전생에는 믹스테잎을 들으며 언래블 때와 개인 활동은 좀 다르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직접 애들과 부대끼며 살다 보니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의 차이라는 생각이 더 컸다.

언래블의 래퍼 C.I와 백경환은 딱히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꽤 긴 시간 동안 형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걸 듣는 내내 나도 틈틈이 메모하며 궁금했던 것들을 물었다.

내가 아는 한 경환 형이 하루 동안 이렇게 많은 말을 했던 적이 없었는데 말이지.

“고마워요, 나중에 비싼 거 살게요.”

“그래, 애들 빼고 둘이 밥 먹자.”

“와, 들켰을 때 감당되겠어요?”

“난 괜찮은데 넌 힘들 것 같긴 하네.”

“그걸 아는 사람이 지금….”

그동안 종종 내 질문에 답해주고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형이 자신의 가장 민낯을 내게 모조리 보여준 것 같아서 괜히 싱숭생숭했다.

휘갈기듯 가사를 쓰다 막히면 소파에서 뭉개기도 하고, 30분 전에는 괜찮지 않냐고 흡족해하던 곡을 갑자기 쓰레기 같다고 한숨을 쉬기도 했다.

기분 변화가 경환 형치고는 매우 급격했다. 중간중간 하기 싫다고 쓱 밀어놓고 나와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에단 쌤이 이야기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집착하지 말라고 했던 그 말.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우리 형들도 곡 작업을 이렇게 하는구나, 괜찮은 거구나.

그런 생각이 마음 깊은 곳에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한동안은 여태까지의 방식과 새로 고개를 쳐든 생각이 싸우겠지만,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자신은 낯간지러운 말은 못 한다던 형이기에 이런 배려가 새삼 더 고마워졌다.

역시 언래블이어서 다행이다.

* * *

“진우야, 오늘이 지환이 분량 나오는 거 맞아?”

“네, 형. 아까 진성 형한테 확인했어요.”

“드디어 볼 수 있겠네. 으, 긴장된다.”

“네가 왜 긴장하냐.”

“어떻게 긴장이 안 되냐! 지환이가 처음 연기하는 날인데.”

“정확히 따지면 처음은 아니지. 물론 정극 연기는 처음이지만.”

진우는 자기들끼리 투덕거리느라 바쁜 형들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이전 ‘이승탈출’ 때처럼 숙소로 쳐들어가면 가뜩이나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지환이가 기절할까 봐 이 멤버만 모여서 보기로 했었다.

진우는 그게 내심 아까웠다.

아끼는 동생의 첫 연기인 만큼, 함께 보며 연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언래블 멤버들과 새벽 멤버들까지 다 있는 곳에서는 평범한 이야기는 하기 힘들 거라는 걸 진우도 이제는 알고 있었다.

언래블은 워낙 활달한데다 서로에게 관심이 많은 애들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런 점에 있어선 애들뿐만 아니라 새벽 형들도 마찬가지였다.

“곧 시작하려나 봐요.”

“아… 왜 치킨 안 오냐, 진짜.”

“그러게 미리 시키라니까.”

지환이의 배역을 이해하고자 그전 방영분까지 모조리 찾아본 진우였다. 덕분에 오늘 방영분은 치킨과 함께해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동안 주인공 혼자 헤매던 진실에 한 발짝 가까워지는 날이었으니까.

이전 화까지는 상혁이 고등학교 동창들을 하나, 둘 찾아다니며 자신의 기억을 맞춰보는 내용이 주였다.

어느 날부터 잠이 들 때마다 악몽에 시달리던 상혁.

늘 배경은 모교였고, 늦잠을 잔 상혁이 헐레벌떡 학교에 도착하는 게 꿈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교문에도 운동장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고, 교실을 찾아 들어가면 친구들 얼굴은 하얗게 지워져 있었다.

공포에 질려 도망가면 사방에서 얼굴이 하얗게 지워진 사람들이 달려들었고, 결국 상혁은 언제나 옥상으로 내몰렸다.

잠겨있어야 할 옥상 문은 손쉽게 열렸다.

눈앞에는 새까만 하늘과 붉게 물든 옥상 바닥, 그리고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이름을 부르고 도와달라고 하고 싶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소리가 목을 움켜쥐고 한 걸음씩 다가가 바로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

딱 그 거리에 도착하면 내내 뒤를 돌아보지 않던 누군가가 상혁을 한번 쳐다보고, 그대로 난간 아래로 몸을 던졌다.

붙잡기 위해 팔을 허우적거리는 순간 깨는 그 악몽.

꿈은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디테일해졌고, 못 보던 이야기가 붙으며 차츰 길어졌다.

맨 처음엔 그저 텅 빈 교실에 도착하거나 도망치다 깨던 꿈이었으나, 이제 그는 항상 옥상을 향했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옥상에 있던 그 친구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히 상혁이 알고 있는 이름이었는데.

그리고 바로 직전 화에서 꿈이 조금 더 진행되며, 상혁은 드디어 꿈속의 친구가 누구였는지를 알게 된다.

그 친구는 이미 15년 전 사망했다는 것도.

찝찝한 마음을 털기 위해 시작한 조사는 파헤칠수록 더 찝찝하고 알 수 없어진다.

지친 몸으로 잠든 상혁, 그리고 또다시 시작된 꿈.

그게 오늘 화의 시작이었다.

어느새 진지한 얼굴로 화면을 응시하는 네 사람.

커다란 화면에 비친 지환의 얼굴은 내리는 비 탓인지, 아니면 메이크업 탓인지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

타고난 인상이 서늘한 편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에게는 늘 부스스하게 웃거나 툴툴거리던 지환이었기에 무척 낯선 기분이었다.

“저런 게 메이크업으로 가능한 거야? 애가 아주 얼굴이 죽었는데?”

“몰입 깨지니까 말 좀 하지 마, 쫌.”

“애가 너무 안 돼 보이니까 그러지!”

가영이 호들갑을 좀 떨기는 했지만, 정말 지환의 얼굴은 안타까웠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 생기를 빼앗긴 듯 투명하기만 한 유리알 같은 눈동자.

매우 지쳐 보이기도 했고,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저거, 다리 끄는 것도 연기야? 지환이 다리 다쳤단 얘기 못 들었지?”

“어, 못 들었어. 쟤 진짜 처음 해보는 거 맞아? 그, 아창? 그때랑은 너무 다른데.”

오죽하면 조용히 하라고 타박하던 키스가 중얼거렸다.

세비는 매우 흡족한 듯 활짝 웃으며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고, 진우는 미간이 좁혀지는 것도 모른 체 화면에 들어갈 것처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무심한 눈빛이 애타게 부르는 이를 외면하고, 느릿한 손길도 자연스러웠다.

“저렇게 우는 게 가능해…?”

“가능이야 하죠. 지환이 엄청 몰입한 것 같은데.”

화면 가득 찬 지환의 얼굴, 그 얼굴에서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만이 섬세한 감정선을 알리는 유일한 장치였다.

툭 하고 바닥으로 추락한 눈물이 신호였는지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화면 속 둘은 금방 흠뻑 젖어버렸다.

비에 젖어있었지만, 네 명 모두 지환이 계속 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칼을 타고 흘러내린 빗방울이 턱 끝에 맺혔다 추락한다.

그때, 화면이 전환되고 매섭게 내리는 빗속으로 지환이 사라지며 꿈이 끝나버렸다.

주인공인 상혁이 꿈에서 깨고 뒤에 더 많은 이야기가 진행됐지만, 넷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여 입을 뗄 수 없었다.

“혹시 우리 애는 가수가 아니라 배우가 돼야 했던 게 아닐까?”

오랜 침묵을 깬 가영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키스가 등짝을 후려쳤다.

“진짜 애들 앞에서 그런 말 하기만 해봐, 가만 안 둬.”

“악! 농담이지!”

“이번엔 가영이가 잘못했어. 해도 될 말이 있고 안될 말이 있지.”

세비까지 키스 편을 들자 가영은 금방 시무룩해져서 진우를 붙잡고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진우는 지금 가영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우리 애가 이렇게 연기를 잘하다니!

당장 숙소로 달려가 폭풍 칭찬을 해주고 싶어 손이 근질거리는 진우였다.

* * *

포잉은 모처럼 정령계에 들러 밀린 일들을 처리했다.

모자라기 짝이 없는 계약자 때문에 유난히 바쁘지만, 그래도 심성이 착한 아이라 좋았다.

그 작은 것이 아등바등 노력하고 있으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고.

지환은 늘 한없이 작은 모습의 포잉을 아깽이처럼 조심조심 대하지만, 사실 포잉은 지환이보다 살아온 날이 훨씬 길었다.

물론 요정의 기준으로 보자면 아직 어린 요정이 맞지만 지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게다가 무한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이곳의 요정들에게 시간이란 그닥 의미 있는 개념이 아니었다.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들에게 중요한 건 계약자를 얼마나 잘 보호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느냐였으니까.

그토록 긴 시간을 무수한 계약자와 함께 하는 요정들에게는 계약자와 나눈 추억들이 곧 그들의 삶이었다.

작은 꽃, 나비, 동물들뿐만 아니라 긴 시간을 버텨낸 거목, 다양한 종족들이 모두 그들의 동반자였다.

처음으로 인간을 대하는 포잉은 첫 계약자가 지환이라 다행이라고, 최근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지환은 느리지만 조금씩 자라고 있었고, 언제나 뒤틀림 없이 곧았다.

한편으로는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모든 계약자가 절대 선인 것은 아니었으니까.

모처럼 고향인 요정계에 온 포잉은 동기인 요정들과 밀린 수다를 나누기도 했고, 필요한 책을 챙기기도 했다.

“종종 건너와서 쉬어야지. 너무 계약자 옆에만 있는 거 아냐? 그렇게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긴. 계약자 놈이 너무 비실비실해서 마음이 안 놓여서 그래.”

새하얀 토끼 요정인 옥사가 포잉에게 염려 섞인 이야기를 건네왔다.

동기 중에도 유난히 잔정이 많은 요정이라 까칠하기로 유명한 포잉도 옥사의 말은 잘 듣는 편이었다.

“인간 아이는 아무래도 약하니까. 그래도 포잉은 잘 해낼 거야.”

“어찌나 손이 많이 가는지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어. 내가 안 보이면 찾기는 또 얼마나 찾아대는지.”

옥사는 포잉이 투덜거리는 척하고 있지만, 자신의 계약자를 얼마나 애틋하게 여기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계약자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자꾸만 수염이 쫑긋거리는 데 모를 수가 있나.

“좋은 계약자를 만났네, 포잉.”

“뭐어…. 조금 모자란 인간이지만 나쁘지 않아. 노력도 많이 하는 편이고.”

“가끔은 건너와서 이야기해 줘, 네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 인간 아이도 궁금해지네.”

“노력해볼게. 옥사 네가 하는 부탁이니까.”

옥사는 포잉의 말에 방긋 웃었다.

조금 날카로운 편이었던 자신의 벗이 계약자 덕분에 많이 부드러워진 것 같아 기뻤다.

“메시지 보낼게. 잘 지내, 포잉.”

“옥사 너도.”

새침하게 답한 포잉은 옥사를 뒤로하고 게이트를 건너 자신의 계약자 곁으로 돌아왔다.

숙소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계약자는 잠결에도 옆자리를 더듬고 있었다.

그 모습에 흡족하게 웃으며 품에 쏙 들어가자, 무어라 웅얼거리더니 포잉의 털을 쓰다듬었다.

포잉은 잠결에도 자신을 찾는 계약자의 모습에 괜히 꼬리가 들썩였다.

둔하고 순해 빠져서 늘 모자라다고 타박하지만 어찌 되었든 포잉에게는 소중한 계약자.

이번 휴식이 계약자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모처럼 행복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런 계약자의 머리를 톡톡 두드려준 포잉이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계속 있을 테니까 안심해라, 계약자 놈아.’

평화롭고 아늑한 어느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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