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 저 달(2)
줄곧 내리던 눈송이들이 어느 순간 비가 되어 창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간 이렇게 여유롭게 창밖을 구경할 수 있는 날이 있었나 싶어 괜히 웃음이 나왔다.
“지환아, 산책 갈래?”
“비 오는데?”
“우산도 있고 우비도 있더라.”
“그럼 잠깐 갈까요? 근데 우리만 가요?”
어깨를 톡톡 두드린 준이 형의 제안에 웃음으로 답하며 거실을 둘러봤다.
하나같이 숙소에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자세로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러그 깔렸으면 진짜 똑같을 뻔했네.”
“안 깔려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그래서 님들은 안 나가?”
소파에 기대 책을 읽던 영빈 형은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평소에도 활동이 많지 않던 형이라 그러려니 했다.
“어라, 한 명이 비는데. 세빈이 어디 갔어요?”
“막내 잔다.”
“아아….”
경환 형이 대답하며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온수 풀에서 찬이랑 신나게 놀더니 피곤해진 모양이었다.
물론 우리 찬이는 아직 체력이 남아돌지만.
“비 오는 건 비 안 맞는 장소에서 구경할 때나 좋은 거야. 난 게임 할래.”
“나도 게임 할래!”
“어휴, 그래요. 그럼 둘이 나갔다 올게요.”
한쪽에 널브러진 컨트롤러로 손을 뻗는 모습에 어깨를 으쓱했다.
“제주도까지 와서 저렇게 종일 처박혀 있기는 아깝지 않아?”
“우리가 평소에도 숙소 밖에 잘 안 나가서 그게 더 익숙해진 게 아닐까요?”
여유로운 시간을 만끽하는 멤버들을 뒤로하고 준이 형과 문을 나섰다.
우산을 들고나온 펜션 밖은 고요했다.
“생각보다 더 조용하다. 그치?”
“네. 여기만 똑 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아요.”
오랜만에 소년처럼 웃는 준이 형 모습에 괜히 심장이 간질거렸다.
평소 준이 형이 리더라는 사실을 늘 머리에 박아넣고 사는 것 같았다.
모두가 신나서 낄낄대며 바닥을 구를 때도, 맛있는 걸 먹을 때도.
늘 다음날 있을 스케줄, 연습, 앞으로 해야 할 것들을 고민하느라 온전히 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랬던 하준 형이 바다 건너 놓인 이 섬에서는 한결 가벼운 모습이라 더 기분 좋았다.
아직 다 녹지 못한 눈과 부슬부슬 내리는 비 때문에 바닥이 찰박거렸다.
“난 제주도는 눈도 안 내리는 줄 알았어.”
“저도요. 우리 생각보다 눈이 많이 온다더라고요.”
“선입견 없이 살아야지 해놓고 당장 나만 해도 이렇더라.”
하준 형과 나는 산책로를 따라 걷는 동안 시답잖은 이야기로 웃기도 하고, 아무 말 없는 정적을 즐기기도 하며 천천히 걸었다.
* * *
2018년이 되고 산뜻해진 마음으로 다시 회사에 왔을 때, 팀장님의 부름이 있었다.
멤버들이 평소처럼 팔랑거리며 회의실 문을 열었는데, 그 자리에 실장님과 대표님이 있었다.
문을 활짝 열며 ‘팀장님!’을 외쳤던 찬이는 그대로 굳어버렸고.
기운차고 씩씩한 게 좋은 거라며 인자하게 웃던 대표님과 달리 실장님은 이마를 부여잡았지만.
새 앨범 작업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 잠깐 짬이 나는 이때 쉬는 게 어떻냐는 대표님의 말.
가족들 얼굴을 보고 오고 우리끼리 여행도 다녀오라고 하셨다.
괜찮은 펜션을 잡아줄 테니 편하게 놀고먹고 하다 오라고.
다들 눈이 휘둥그레져서 이게 진짜냐고 되묻자, 옆에서 실장님이 거들었다.
그 말에 신난 찬이와 세빈이는 대표님에게 돌진해 방방 뛰었다. 달려드는 멤버들에 잠시 당황한 듯했던 대표님도 금방 활짝 웃으셨다.
올해 회사도 큰 고비를 넘겼고, 우리도 안 좋은 일을 잘 이겨내 무척 기특하게 생각했다고 하셨다.
우리 잘못이 아닌 일로 긴 시간 고통받게 되어 미안하다고.
게다가 포기하지 않고 더 열심히 노력해서 1위에 신인상까지 받아와 대표님이 무척이나 기뻐했다고 하셨다.
그런 우리가 너무 기특해서 상으로 휴가를 며칠 주자고 대표님이 말씀하셨다는 실장님의 설명.
그 덕분에 우리는 각자의 집에서 가족들과 회포를 풀고 돌아와, 지금은 이렇게 펜션에서 뒹굴고 있었다.
다만, 집에 갔을 때 누나 표정이 평소보다 조금 더 안 좋았던 게 마음이 걸렸다.
혹시 집에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지만, 누나는 역시나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회사 일이 너무 많아서 스트레스받아서 그런 거라고.
속마음을 읽어봐야 하나 고민했지만, 멤버들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는 것처럼 누나에게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말해달라고 당부하자 누나는 너나 조심하라며 평소보다 힘없이 웃었다.
“지환아? 무슨 고민 있어?”
“아, 아뇨. 저 말고 누나가 좀 걱정돼서요. 요새 일이 많아서 피곤한 것 같더라고요.”
“그러면 누님 몸에 좋은 약을 좀 챙겨드리는 건 어때?”
“그러는 게 좋겠죠? 다음에 한번 슬쩍 물어봐야겠어요.”
그사이 내 얼굴을 살핀 건지 준이 형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모처럼의 휴식을 방해한 것 같아 미안해져 황급히 설명했지만, 형의 얼굴에 생긴 걱정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꼭 이야기해야 해. 알지?”
“그럼요. 저는 이제 멤버들한테 다 말한다니까요?”
물론 포잉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제주도까지는 함께 온 포잉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잠시 요정계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동안 내 옆에만 붙어 있느라 통 가보질 못했다면서.
일부러 인적이 드문 곳에 숙소를 잡았기에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했다.
“너무 조용하니까 좀 이상하다.”
“그러게요. 늘 북적대는 소리 속에 살았는데.”
평소처럼 시간에 쫓겨 급히 걷는 게 아니라 천천히 한 걸음씩 움직였다.
급하게만 살아온 몇 달의 시간, 그러다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주어진 휴식.
처음에는 종종 준이 형이나 다른 멤버들이 숙소 주변을 산책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점점 보안에 신경 쓰게 되고 안 좋은 일을 겪다 보니 되도록 외출을 자제했다.
다행히 다들 집에서도 잘 노는 편이라 큰 불편을 느끼진 못했다.
은연중에 다른 아이돌도 다 이렇게 살 텐데 하고 포기해버린 것도 있고.
무수한 사랑과 관심을 받는 대신 개인의 삶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는 것.
처음에는 그런 문제는 생각하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다.
연습할 시간도 부족하고 공부할 시간도 부족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숙소를 벗어난 어디에서도 나를 전부 내려놓고 있을 수 없다는 걸.
사실 지금도 딱히 불편하지 않았다.
어차피 전생에도 집 밖에 잘 안 나가는 삶을 살았으니까.
하지만 가끔 멤버들을 보고 있으면 궁금했다.
우리 애들은 괜찮은 걸까.
“가끔 이렇게 놀러 올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러게. 그냥 산책하고 뒹굴거리기만 해도 좋네.”
“확실히 무인도 때랑은 다르죠?”
“어휴, 그때랑은 비교가 안 되지.”
무인도 때도 나름의 즐거움은 있었다.
걱정했던 것보다는 고생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서 고생은 하고 싶지 않은 게 사람의 마음.
그렇게 천천히 준이 형과 산책하며 앞으로 어떤 것들이 하고 싶은지 이야기를 나눴다.
언래블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일들 등.
“이렇게 걸으니까 갑자기 그날 생각나요, 그….”
“진실의 공원?”
“풉, 네. 그날 형이랑 처음 거기 갔었잖아요.”
“그 사이 우리도 많이 변했다, 그렇지?”
“좋은 쪽으로 변했으니까 좋은 게 아닐까요?”
“그래도 늘 내가 바라는 일만 생기는 게 아니니까. 형은 그게 좀 걱정이야.”
쓸쓸한 옆얼굴에서 책임지는 사람의 무게가 느껴졌다.
“에이, 형 옆에는 우리가 있잖아요. 우리가, 어? 막? 이렇게 저렇게, 응?”
적어도 여기에서만큼은 편하게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옆구리 쿡쿡 찔러가며 장난치자 못 말린다는 듯 형도 웃었다.
“어휴, 이 화상들, 진짜.”
“어허, 화상이라니. 가서 찬이랑 세빈이한테 일러요?”
“야야, 그건 좀 선 넘지.”
언제 어두웠냐는 듯 죽는소리를 하는 준이 형의 얼굴이 아주 조금은 후련해진 것 같았다.
“오늘도 달이 보였으면 참 예뻤을 텐데. 그쵸?”
“그러게. 달이 안 보이는 게 아쉽네.”
흐린 하늘 탓에 별이나 달은 보이지 않았지만, 충분히 운치 있는 밤 산책이었다.
* * *
평소에도 빠르게 흐르던 시간이 쉬는 도중에는 더 빠르게 흘러갔다.
“이야, 그거 며칠 쉬었다고 아주 얼굴들이 뽀얘졌어.”
“더 잘생겨졌죠?”
“러닝머신 더 잘 뛰게 생겼네.”
“아, 팀장님….”
잠깐의 휴식 끝에 현실로 돌아온 우리를 마주한 팀장님.
아주 얼굴이 포동포동해졌다고 찬이와 세빈이를 놀리며 즐거워하셨다.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우리 못지않게, 어쩌면 우리보다 더 고생하는 팀장님이나 우진 형을 빼놓고 우리끼리 놀다 왔다는 게.
선물을 사와 회사 분들께 나눠드리고 특별히 고마운 분들께는 따로 선물을 챙겨드렸다.
그래도 마음이 조금 불편했는데, 팀장님의 한마디에 그 불편함은 모두 사라졌다.
“너희 쉬는 동안 우리는 보너스 받았으니까 괜찮아.”
“그래도요….”
“후후, 우리 병아리들 아직 순진하구나. 어른들은 돈이 최고란다.”
세상만사 돈이 최고라고 외치는 팀장님의 얼굴이 무서웠던지 세빈이가 흠칫했다.
팀장님의 눈가에는 넘실거리는 광기를 닮은 무언가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역시 인간은 알 수 없다.’
‘모든 인간이 그런 건 아니지만, 대다수 인간이 그렇긴 해….’
포잉도 요정계에서 잘 쉬고 온 건지 전보다 털에 윤기가 흘렀다.
적당히 회포를 푼 우리는 다시 진지한 태도로 회의를 시작했다.
예정된 JC 엔터와의 합작 프로그램, 새 앨범의 컨셉 정리 등 앞으로 할 일이 무척 많았으니까.
“아 참, 지환아.”
“네?”
“드라마 모니터링 잘하고 있니?”
“아, 넵. 다른 배우님들께도 연락 잘 드렸어요.”
“그래. 잘했어. 오늘 너 출연분 방영하는 거 알지? 모니터링해놓고. 미연 선생님이 기대한다고 하시더라.”
“아니, 그건 좀….”
당시 촬영과 이후 한 번 더 있었던 촬영을 떠올린 내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런 내 모습에 피식거리던 팀장님은 미연 선생님의 숙제라며 모니터링 후 감상문을 적으라는 말을 전해주셨다.
“학교 다닐 때도 독후감 쓰는 거 싫어했는데. 하아….”
“자기 객관화가 없으면 발전하기 힘들다는 거 알잖아. 힘내라.”
“힘이 안 나는데요, 형….”
회의가 끝난 뒤 경환 형과 함께 형의 작업실로 향했다.
얼마 전, 경환 형이 내게 찾아왔었다.
시상식이 있기 며칠 전, 에단 쌤에게 피드백을 받았던 날.
침울해진 내가 버릇처럼 건반을 톡톡 두드리던 그때, 경환 형이 문을 두드렸다.
평소 같으면 그냥 들어왔을 사람이 문을 두드리기에 의아해했는데….
무슨 고민이 있냐는 직설적인 경환 형의 말에 어리둥절해 하자, 내 어깨가 유독 처져있어서 걱정됐다고 했다.
비록 평소에 표현은 많지 않을지언정 경환 형이 늘 멤버들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는 건 알고 있었다.
나도 멤버들을 형과 비슷한 눈으로 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훅 다가와 내게 힘든 일이 있냐고 물으니 괜히 코끝이 시큰거렸었다.
평소라면 적당히 얼버무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는 한껏 말랑말랑해진 멘탈을 추스르던 타이밍이었고, 형의 걱정이 기폭제가 되었다.
다행히 눈물 콧물 질질 짜며 울지는 않았지만, 거의 울 것처럼 형한테 힘들다고 투정을 부렸다.
지금 생각하면 창피해서 내가 진짜….
그렇게 내 삽질을 묵묵히 들어주던 형은 자신이 작업하는 걸 보는 게 어떻냐는 말을 했다.
자신은 이리저리 주워듣고 독학한 터라, 에단 쌤처럼 체계적인 도움을 주기 어렵다면서.
그래도 몇 년을 나보다 먼저 시작했으니 무어라도 알려줄 수 있는 게 있지 않겠냐는 말을 덧붙였다.
이야기를 들어준 것도 고마웠지만, 어떻게든 내게 도움을 주려는 마음이 너무….
그래, 너무 고맙고 크게 다가와서, 그래서 형에게 미안해졌다.
‘폐라고 생각하지 마. 난 이제야 너한테 밥값 하는 거니까.’
미안해서 거절하려는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바로 덧붙이는 말에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는 늘 막내 라인과 엉겨 붙어 장난치고 노느라 동생 같던 경환 형이 그때는 정말 형처럼 느껴졌다.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가는 응징당할 게 뻔해서 속으로 삼켰지만.
“뭐해, 안 들어오고?”
“아, 잠깐 딴생각했어요.”
“싱겁긴.”
이리저리 엉켰던 생각을 대충 밀어 넣고 웃었다.
우리 경환 형도 정말 형이구나 하고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