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71)화 (271/456)

271. 저 달(1)

“어? 눈 온다!”

“진짜?”

“우와! 나가자!”

방금까지 그렇게 죽어라 연습해놓고 체력도 좋지, 정말….

막내 라인이 회사 창문에 달라붙어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 뒤에 퍼져있는 준이 형과 영빈 형, 나는 그런 막내 라인을 구경하고.

“찬이는 저러니까 진짜 더 강아지 같네.”

“귀엽다는 말로 이해할게요.”

“그게 서로의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 같다.”

시답잖은 이야기로 낄낄거리며 숨을 돌리다 괜히 신기한 기분이 들어 중얼거렸다.

“올해도 이제 끝났네요.”

“진짜 눈 깜박할 사이에 끝나버린 것 같아.”

오늘치 연습이 끝난 후라 한결 여유로운 상황에서, 우리는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시상식을 다니고, 연말 방송국 무대를 마치고.

복잡하고 화려한 모든 시간을 넘기고 나서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매일 매일을 전쟁처럼 달리느라 뒤를 돌아볼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당장 어제도 촬영한다고 새벽부터 바빴고, 결국 오늘 새벽에 졸면서 돌아왔으니까.

연말과 연초는 괜히 더 들뜨고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었지만, 행동이 자유롭지 않은 우리에게는 그림의 떡.

그래도 우리는 2017년의 마지막 날과 2018년의 첫날을 멤버들과 함께 쉬면서 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예전 선배들 같으면 온갖 프로그램 들러리로 불려 다녀야 했을 터.

그에 비하면 우리는 비교적 조용히 보낼 수 있었으니까.

한바탕 꿈같았던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멤버들은 가끔 그 순간을 되새기는 듯, 기억 속 무언가를 더듬는 것처럼 멍해졌다.

또 어떤 때는 생각에 빠진 듯 진지한 얼굴로 무언가 고민하기도 했고.

나쁜 일과 좋은 일이 모두 있었던 올해는 나에게도, 우리 애들에게도 여러 의미로 남을 것 같았다.

다만, 서로에게 부담이 될까 걱정한 건지, 아니면 그저 부끄러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그런다고 해서 못 알아볼 건 아니었지만 그냥 적당히 서로 모른 척 넘어갔다.

이전 같으면 모두가 득달같이 들러붙어 닦달했을 텐데.

내게는 그 모습조차 우리 애들이 조금 더 성숙해진 결과로 보였다.

서로를 아끼지만, 각자의 시간은 존중해준다는 생각이지 않을까 하면서.

그런 내 생각을 들은 포잉은 코웃음 쳤지만 나는 내 감을 믿기로 했다.

내 새끼들, 내가 안 믿으면 누가 믿어주겠어.

춥기는 엄청 추우면서 눈은 내리지 않던 12월 30일.

회사 창문을 내리는 눈을 바라본 막내 라인은 이미 눈에서 레이저를 쏟아낼 것처럼 흥이 올라있었다.

“우리 나가서 눈싸움하자!”

“그러다 감기 걸리면 어떡하려고.”

“밖에 나가기는 조금 위험하지 않아?”

영빈 형은 건강을 염려했고, 준이 형은 혹시 모를 위험을 걱정했다.

“우진 형한테 물어보면 되죠!”

“눈싸움을 안 한다는 선택지는 없는 거야?”

“이게 다 추억 아니겠어?”

“아냐, 그런 추억 없어도 괜찮을 것 같아. 연습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

밖에 나가서 뛰기 싫다고 온몸으로 이야기하는 내 모습이 우리 찬이에겐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신나서 우진 형을 외치며 뛰어나가는 걸 보니.

그런 찬이 뒤를 우리 세빈이가 따라 뛰었다.

‘멤버들을 믿는다며?’

‘조용히 해, 포잉….’

‘이런 걸 두고 인간들은 믿을 사람 하나 없다고 하던가?’

‘제발….’

그 후 어떻게 우진 형에게 허락을 받은 건지, 찬이와 세빈이가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형, 우진 형이 나가도 된대요!”

“으응…. 형은 괜찮아.”

“나가자!”

의외로 영빈 형은 순순히 경환 형과 함께 움직였고, 준이 형과 나만 슬픈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백퍼 감기 걸릴 것 같아.”

“전 내일 앓아누울 것 같은데요….”

처량하게 중얼거리는 우리 목소리는 내리는 눈에 홀린 멤버들 귀에 닿지 않았다.

“형아, 얼른 와여!”

활짝 웃으며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드는 세빈이 얼굴을 본 순간, 준이 형도 나도 결국 포기의 뜻을 담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우리 막내 하고 싶은 거 다 해야지….

* * *

‘님, 아까는 싫다 그러지 않았음?’

‘하다 보니까 이게 또….’

‘…쯧.’

철딱서니 없는 모자란 아들 보듯 날 보는 포잉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차갑게 얼은 손을 주물렀다.

우진 형과 팀장님이 어쩐 일로 밖에서 뛰어노는 걸 허락해주셨나 했더니, 우리가 노는 걸 촬영하셨다.

촬영하면 증거물로 남으니 누군가 허튼짓을 하지 못할 테고, 나중에 채널에도 올릴 수 있으니 확실히 좋은 선택인 것 같았다.

처음엔 아무리 우리 애들이 신났어도 카메라가 있으니까 덜 까불겠지 했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내 희망 사항이었을 뿐.

처음에만 눈치를 보는 척하더니 나중엔 누구도 카메라를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뛰어다녔다.

오죽하면 우진 형이 그러다 몸살 난다고 우릴 말리러 쫓아왔을까.

그렇게 전쟁 같은 눈싸움이 끝나고, 우리는 우진 형에 떠밀려 다 같이 숙소로 쫓겨났다. 다들 땀과 눈에 젖어 있어 공평하게 승자들이 먼저 씻기로 했다.

“또 눈싸움하자고 덤비면 널 눈사람으로 만들 거야….”

“같이 신나서 해놓고?”

“빠져 있는 사람한테도 공격하니까 그렇지!”

“에헤이, 나왔으면 다 같이 하는 거지.”

열심히 고생한 만큼 더 빨갛게 얼어있던 영빈 형과 세빈이가 먼저 씻으러 들어갔다.

거실과 주방 사이에 쪼그려 앉은 나는 찬이와 경환 형에게 으르렁거리며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움직이는 게 싫었던 나는 그저 구경만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준이 형과 나는 지쳤으니 빠지겠다고 말했던 거고.

그저 회사 안에 있기 뭐 했던 터라 멤버들과 조금 떨어져서 구경하겠다고 했을 뿐인데.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노린 건지, 실수인지 알 수 없는 눈덩이들이 자꾸 우리 쪽으로 날아왔다.

불안함을 느끼던 내가 자리를 피하자고 하려던 그 순간, 한 덩이의 눈이 준이 형 옆구리에 꽂혔다.

왜 불안한 예감은 늘 틀리지 않는 건지….

정적과 함께 삐걱거리던 준이 형이 환하게 웃었고, 옆에서 그 모습을 목격한 나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결국 나까지 눈싸움에 끌려갔고 한번 시동이 걸리니 쉽사리 끝내지 못했다.

처음엔 그냥 적당히 시늉만 하다 빠질 생각이었는데. 하….

미친 듯이 회사 앞에서 뛰어다니느라 두 뺨과 손이 빨갛게 어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우진 형이 조금만 더 늦게 나왔더라면, 우리는 전부 내일 병원에 가야 하지 않았을까?

따끈한 물로 씻어서 몽글몽글해진 세빈이와 영빈 형이 나오고 준이 형과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경환 형이 들어갔다.

겨우 찬이와 나까지 다 씻고 나오자, 따끈따끈했던 거실의 온도가 조금 더 올라간 느낌이 들었다.

기운도 쭉 뺐겠다, 뜨끈한 물로 몸도 녹였겠다 한껏 물렁물렁해진 찬이는 경환 형 배 위에 드러누웠다.

“으아아아….”

“찬아, 그냥 눕지 말고 머리 말려야지.”

“구차나….”

웬일로 경환 형이 찬이를 내버려 두었지만, 젖은 머리로 저러고 있으면 감기 걸릴 게 뻔했으니 불러올 수밖에.

경환 형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내자마자 꾸물거리던 찬이가 러그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한껏 구시렁거리며 드라이기를 들어 올리는 찬이.

그러게 그냥 말로 할 때 들을 것이지.

“처음부터 잘 말리고 누웠으면 되잖아요.”

“애초에 내 배가 왜 베개가 된 건지 모르겠는데.”

그걸 지켜보던 세빈이의 핀잔과 만사 포기한 듯한 경환 형의 중얼거림까지.

동생들의 투닥거림에 익숙해진 듯 태평한 얼굴을 한 영빈 형과 피식거리는 준이 형.

윙윙거리는 드라이기 소리를 배경음 삼아 노닥거리는 멤버들 얼굴이 너무 평화로웠다.

처음 우리가 이 거실에 모였던 날과 닮은 점도, 달라진 점도 모두 한눈에 보여서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 평화에 한몫한 것 같아.’

‘평화라고…?’

‘응. 평화롭잖아.’

‘네가 아는 평화와 내가 아는 평화가 다른 단어인 것 같다, 계약자야.’

한숨을 푹 내쉬며 내 허벅지에 있던 포잉이 몸을 일으켰다.

러그에 누울까 하다 모처럼 앉아서 멤버들을 구경하던 중이라 포잉도 내 다리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가끔 내가 예전에 데뷔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

“응?”

“우릴 버리겠다고?”

“우리 말고 다른 멤버를 생각했다는 거예요?”

“우리 리더는 형뿐인데!”

“너무하네!”

준이 형이 대충 말린 찬이 머리를 정돈해주며 입을 열자 득달같이 멤버들 시선이 따라붙었다.

형이 한마디 하면 멤버들이 열 마디를 하는 이 모습도 이제는 익숙했다.

“그게 아니라, 달랐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봤다고, 이놈 자식들아.”

“우리 버릴 생각 하지 마요, 거머리처럼 따라붙을 거야.”

“형은 절대로 우리를 떠나서 살 수 엄씀!”

“옳소!”

잔잔한 분위기 속에서 멤버들과 이야기를 좀 해보려던 준이 형은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면서 찬이 등짝을 툭 쳤다.

“까불지 말고 좀 들어.”

“헤헷.”

뻔히 장난인 걸 알기에 뻔뻔한 얼굴을 들이미는 찬이.

찬이는 예전보다 훨씬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 표현에 적극적이 되었다.

“제논 엔터에서 그대로 데뷔했다면 어땠을까, 지금은 그만둔 다른 연습생들과 데뷔 했었으면 어땠을까 가끔 고민했는데.”

이쯤 되니 막내들도 준이 형이 올해를 마무리하는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고 얌전히 듣기 시작했다.

“데뷔하기 전에는 그런 모습이 대충 상상이 됐거든? 어떤 활동을 하겠구나, 뭘 하겠구나 하는 것들 말이야. 근데 막상 데뷔하니까 너희 외에 다른 사람들이랑 팀이 되는 게 상상이 안 되더라.”

가끔 이렇게 준이 형이 낯부끄러운 이야기를 할 때면 견디지 못해 하던 애들이 오늘따라 얌전했다.

그저 세빈이가 조금 꼬물거리며 영빈 형의 무릎에 드러누웠고, 찬이가 슬며시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내 팀에 너희 외에 다른 사람이 상상이 안 되니까 진짜 기분이 이상하더라. 내가 벌써 익숙해졌나 싶기도 하고.”

쑥스러운지 뺨을 긁적이던 준이 형이 얕은 한숨과 함께 거실 천장을 바라보았다.

“진짜 나는 너희 같은 팀원을 만나서 행복해. 이게 얼마나 다행인지 너희는 모를 거야.”

“끄응….”

“형은 내가 형 같은 사람을 리더로 만나서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를걸?”

“맞아, 형도 모르지.”

우리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은 듯 주저하며 말을 툭툭 꺼내던 준이 형의 눈이 동그래졌다.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준이 형은 이상한 데서 순진하다니까.

부끄러움에 못 이겨 끙끙거리는 찬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내가 찬이 대신 말했다.

형이 생각하는 그것만큼 우리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다고.

옆에서 세빈이 볼을 쿡쿡 찌르던 경환 형도 거들었다.

“준아, 네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많이 고민하는지 우리 애들도 이제 알아. 그러니까 다 숨기려고 하지 말고.”

예전처럼 같이 있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게 아니라 편안하게 여기는 영빈 형의 말이라 기분이 더 싱숭생숭했다.

“딱히 숨긴 거 없어. 그냥 철없긴 해도 우리 애들이 최고라는 거지 뭐.”

“그치? 우리가 최고지?”

“우리 형도 최고예요!”

멋쩍은 듯 픽 웃더니 준이 형이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고, 세빈이와 찬이가 냉큼 한마디씩 보탰다.

방금까지는 얌전히 눈만 굴리고 있더니, 이렇게 약속이나 한 것처럼 외치는 둘의 모습이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자, 그러면 결론은 우리가 팀이라 정말 다행이라는 거고 서로 너무 고맙다는 거네요.”

“와, 저 부끄러운 소리를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어떻게 말하지?”

“아주 가끔이지만 환이 형이 제일 무서운 것 같아.”

부끄러움 때문인지 두서없는 멤버들의 말을 정리해버리자 어느샌가 둘이 찰싹 들러붙어서 쑥덕거렸다.

우리 세빈이, 내가 그렇게 찬이 닮지 말라고 노래를 불렀는데….

“우리 래블이들, 어떨 때는 진짜 다 때려치우고 싶을 만큼 힘들 수도 있고, 또 어떤 날은 세상 다 가진 것처럼 들뜨기도 할 거야. 그 모든 순간에 우리 딱 하나만 생각하자. 우리는 팀이라는 거. 그러면 적어도 실수를 한 번은 줄여줄 수 있을 거야.”

깊이깊이 담아두었던 리더의 무거운 진심이 2017년의 마지막 날 언래블 모두에게 잘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씩 미소 짓는 얼굴, 그것으로 준이 형에게는 이미 충분한 대답이 된 것 같았다.

“어휴, 이 웬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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