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64)화 (264/456)

264. 같이가요(5)

무슨 일만 생기면 서로를 바라보는 게 일상이 돼버린 현실에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아졌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어느 순간부터 준이 형은 자꾸만 나를 쳐다봤고, 그 시선에 마주하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해볼게!

준이 형이 나를 바라볼 때는 보통 수습을 도와달라는 뜻이었다.

세빈이는 도와달라는 뜻보다는 ‘살려주세요’가 더 어울렸고.

나는 어쩔 수 없는 덕후인지라 최애와 차애의 눈빛 공격에는 마음이 약해졌다.

찬이가 징징대는 거였으면 기쁘게 웃으면서 걷어찰 수 있었을 텐데.

민하준, 아니 이제는 형이 된 준이 형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우리 얘기했던 거 기억나지? 그대로만 하면 되니까 괜찮아.”

내 손을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애절하게 붙들고 있는 둘을 다독였다.

신인상을 바라지 않는 사람도 있을까.

가수든, 배우든 누구든 데뷔하고 그해 딱 한 번만 받을 수 있는 상.

뒤늦게 꽃피운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신인상 못 받은 게 그렇게 한으로 남는다고.

우리는 숙소에 모여 앉아 몇 번이나 서로에게 속삭이며 다짐했다.

괜찮다고, 되든 안 되든 우리 정말로 열심히 했다고.

유력한 후보라고는 하지만 상을 꼭 타란 법은 없었다.

종종 시상식에 상을 줄 것처럼 불러놓고 괜히 뺑뺑이만 돌리다 집에 보내는 일도 빈번하게 있었으니까.

그나마 최근에는 상이 팬들의 투표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아서 예전처럼 노골적인 건 아니었지만, 아직도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꼭 표정 관리 잘하자고 몇 번이나 우리끼리 다짐했었다.

기대를 안 할 수가 없었다.

마치 눈앞에 잘 익은 포도를 들고 흔드는 것처럼 다른 가수들에 비해 긴 시간을 배정받았으니까.

누구도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설렘도 기대감도 부풀어가는 풍선처럼 자꾸만 커졌다.

이러다 누가 툭 하고 건드리기만 해도 터져버릴 것처럼.

그렇게 애써 준이 형과 내가 멤버들을 달래는 사이 전년도 신인상 수상자가 환히 웃는 얼굴로 마이크를 쥐었다.

- 안녕하세요, 범희입니다. 과분하게 올해 신인상 수상자를 제가 발표하게 됐네요.

작년, 정말 하늘에서 툭하고 떨어진 것처럼 등장해 솔로 가수 가뭄이었던 가요계에 단비처럼 스며들어준 싱어송라이터.

담담하게 노래하는 목소리가 기억에 없는 첫사랑까지 조작해 낼 정도여서 나도 꽤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단정하고 순하게 생긴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어 그가 지금 저 자리를 얼마나 기뻐하는지 알 수 있었다.

평소라면 요동치는 팬심으로 말이라도 한 번 걸어볼까 하고 손이 드릉드릉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제발, 제발.

차마 밖으로 흘러나오지 못한 간절한 바람이 몇 번이나 새겨넣듯 입안을 맴돌았다.

식은땀이 흥건한 찬이와 세빈이 손, 차마 보지 못하겠는지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영빈 형, 평소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눈을 깜박이고 있는 경환 형.

그리고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괜찮다고, 평소처럼 웃어주는 준이 형.

- 제가 겪어봐서 아는데, 오래 끌면 진짜 심장에 안 좋거든요. 바로 발표하겠습니다!

익살맞은 멘트에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2017 HMA 신인상! 언래블! 축하드려요!

폭죽 터지는 소리, 천장이 무너질 것 같은 환호성, 사방에서 들려오는 축하한다는 인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찬이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멤버들을 보고 있었다.

- 많이 놀랐나 봐요, 괜찮아요!

주먹을 꽉 움켜쥔 경환 형의 눈에는 평소 볼 수 없었던 강렬한 불꽃이 느껴졌다.

벌써부터 눈가가 빨갛게 변해있는 영빈 형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얘들아, 다녀와야지.”

어쩔 줄 몰라 하던 우리는 연수 선배님의 자상한 목소리에 파드득 몸을 떨었다.

그제야 꿈에서 깬 것처럼 준이 형이 우왕좌왕하던 멤버들 등을 떠밀었다.

다들 혼을 쏙 빼놓고 있던 터라 붙들고 있는 걸 놔주지 않아서 곤란했지만, 타박할 수도 없었다.

붙들고 있던 그대로 준이 형과 나에게 매달려 있는 멤버들을 질질 끌고 본 무대로 향했다.

세빈이는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눈을 깜박거려서 손을 꼭 잡아주었다.

길지 않은 그 길을 걷는 동안 몇 번이나 다리에 자꾸 힘이 빠졌다.

자꾸만 손바닥에 식은땀이 고이는 것 같았지만, 그때마다 객석에서 우리 이름이 적힌 슬로건 등을 들고 흔드는 솜뭉치들과 눈이 마주쳤다.

영빈 형만큼이나 흠뻑 젖은 얼굴도 있었고, 세빈이보다 더 활짝 웃는 솜뭉치들도 있었다.

준이 형 뒤로 타박타박 발걸음을 옮기던 우리는 마침내 본무대 중앙에 섰다.

품에 안겨지는 커다란 꽃다발, 악수, 그리고 트로피.

그리고 언제 온 건지 그 바로 아래서 태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포잉.

갑자기 눈물이 울컥 치밀었지만, 혀끝을 깨물어 삼켰다.

정말 좋은 날이니까 울고 싶지 않았다.

- 언래블, 정말 축하드려요. 저도 노래 잘 듣고 있습니다.

범희 선배님의 목소리와 준이 형 손에 쥐어진 마이크.

그 마이크를 잠시 내려다본 준이 형은 점점 꽃이 피어나듯 환하게 웃었다.

늘 부드럽게 웃고만 있던 형의 얼굴이 낯설만큼 해사했다.

“부족한 저희에게 과분한 상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꿈같아서 기분이 정말 이상해요.”

잠시 입술을 꾹 깨문 준이 형이 말을 이었다.

“저희 팬분들, 우리 솜뭉치. 미안하고 고마워요. 여러분이 있어서 언래블이 있을 수 있었어요.”

반짝이는 눈가가 촉촉했지만, 준이 형은 또박또박 감사한 분들께 인사를 읊어갔다.

멤버들의 가족, 회사 대표님, 정윤 실장님, 소현 팀장님, 우진 형과 그 밖의 회사 식구들.

세빈이가 안 운다 했더니 이번엔 찬이가 울고 있었다.

우리 울보 영빈 형과 찬이는 서로 손을 꼭 잡고 경환 형 뒤에 숨어 훌쩍이고 있었고, 경환 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때, 멤버들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나보다 더하고 싶은 말이 많을 멤버들이 내 손에 마이크를 쥐여주었다.

주어진 시간이 짧다는 걸 알기에 뒤로 빼지 않고, 꾹꾹 눌러 담아왔던 마음속 말들을 풀어버렸다.

“언래블이라는 그룹이 이름을 받기도 전부터, 사람들이 저희를 몰랐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늘 함께해준 모든 팬분들께 영광을 돌립니다.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시간을 여러분과 함께 걸어갔으면 좋겠어요.”

오늘이 아니면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꼭 인사하고 싶었던 사람을 떠올리며 빠르게 덧붙였다.

“더 크고 넓은 세상이 있다는 걸 알게 해주신 에단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내게 곡을 빼앗긴 선생님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아 인사를 덧붙였다.

다른 걸 떠나서라도 선생님 덕분에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이 무엇인지를 알아가고 있었다.

에단 쌤은 처음에는 마냥 껄끄럽고 미안했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내 스승님이었다.

회사에서 에단 쌤을 마주치면 기겁하며 부끄러운 짓을 했다고 등을 팡팡 때리시겠지만, 지금은 아무렴 어떤가 싶어 웃었다.

다른 멤버들에게 마이크를 넘기려 했지만 돌아보니 둘은 우느라 바빴다.

경환 형에게 마이크를 넘기려 하자, 형은 세빈이 등을 툭 하고 밀었다.

형 마음을 이해한 세빈이가 마이크를 꼭 쥐고 외쳤다.

“솜뭉치들 사랑해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났고, 메인 MC인 민수 형님이 멘트를 이어갔다.

- 네, 언래블의 진심 듬뿍 담긴 소감 잘 들었습니다! 신인다운 귀여움과 화이팅이 잘 느껴지는 소감이었네요.

물결치던 감동의 순간을 각자 가슴에 꼭 쥐고 자리로 돌아온 우리는 아직도 울고 있는 영빈 형과 찬이를 달래고 있었다.

영빈 형은 울 것 같았는데, 찬이가 이렇게 우는 건 처음이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훌쩍이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이미 다 예상했다는 듯 품에서 티슈를 꺼내주는 연수 형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네고 찬이를 토닥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우리 감동을 와장창 부수는 민수 형님의 목소리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 그러고 보면 선배님은 언래블과 친분이 있었죠?

- 네, 인연이 몇 번 닿아서 사석에서도 보는 친구들인데 굉장히 착하고 순해서 꼭 병아리들 같아요.

그놈의 병아리, 이제 좀 벗어납시다!

“이렇게 큰 병아리가 어딨다고, 형님 진짜…!”

신나서 방긋방긋 웃던 세빈이가 민수 형님 발언에 한껏 억울하다는 얼굴이 되었지만, 그게 더 역효과였다.

“풉!”

“아, 미안해요. 근데 너무 찰떡인데?”

사방에서 다른 선배님들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병아리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우리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미안하면 그만 웃어요…!

아까 대화를 나눴던 미리내 분들도 우리를 힐끔힐끔 보며 입가를 가리고 있었지만, 잘게 경련하는 뺨은 가리지 못했다.

“이게 다 사랑받는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그냥 즐겨요!”

“하, 하하….”

멋진 무대를 보여줬던 핑크밤 선배님들이 씩씩하게 말하며 마음껏 웃었다.

살짝 고개를 돌려보니 자리가 좀 떨어진 DCL 멤버들이 신인이라 눈치 보는지 대놓고 웃지는 못한 채 뺨만 씰룩거리고 있었다.

DCL은 우리가 참석하지 못했던 KAA에서 이미 신인상을 받은 터라 한결 마음이 편해 보였다.

휴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병아리’하고 입 모양으로 중얼거리길래, 나도 모르게 눈썹이 꿈틀했다.

보는 눈이 많은 자리인지라 응징은 나중으로 미뤄야겠지만, 잊지 않기로 했다.

왜 준이 형이 리우 형의 멱살을 잡았었는지 지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새벽 형들이 이 자리에 없다는 게 너무 다행이었다.

* * *

멤버들 몰골이 보기 안쓰러운 꼴이 되자, 준이 형이 잠깐 자리를 비우더니 우리를 불러냈다.

다음 무대가 이어지는 동안 대기실에 빠르게 다녀오자고.

소현 팀장님과 우진 형에게 우리 몰골이 도저히 무대에 서기 힘들 것 같다며 급히 수습을 시도한 것.

우느라 엉망이 된 영빈 형과 찬이가 제일 먼저 끌려가 얼굴을 정리했다.

겨우 다시 멀끔한 얼굴이 된 멤버들을 보며 소현 팀장님은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리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얼른 가, 곧 너희 무대야.”

“팀장님….”

찬이가 소현 팀장님 소매를 붙들고 또 울망울망해지자 희주 누나가 찬이 등짝을 때렸다.

“울지마! 또 수정해야 하잖아!”

“그래, 울지 말고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자리 오래 비우면 안 좋아.”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가희 누나한테 또 잔소리를 듣는 찬이 모습이 낯설었다.

꼭 함께 걸어오던 그 날 같아서 슬쩍 옆에 서서 손을 꼭 잡아줬다.

“다녀올게요!”

“조심히 하고 와!”

지금 우리 모습을 봤으면 정윤 실장님이 봤다면 이산가족 상봉이냐고 한 소리하셨을 것 같았다.

다시 출연자 석으로 돌아가려던 우리는 무대 준비하라는 스태프의 말에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섰다.

상 받은 건 받은 거고, 오늘 무대는 무대였으니까.

우리가 언제 고척돔에서 무대를 해볼 수 있겠냐며 멤버들 모두 이를 악물고 연습했었다.

지금 우리에게는 고척은커녕 올림픽홀도 아직 멀게만 느껴졌다.

큰 무대에 선다는 떨림도 있었지만, 특히 우리가 기를 쓰고 준비했던 건 우리를 향한 시선 때문이기도 했다.

적어도 오늘 무대를 본 사람들은 언래블이 마냥 불쌍한 애들이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했다.

“멋있게 할 거 하고, 마음 편하게 다른 선배님들 무대도 좀 보자.”

“오늘 실수하면 제영 쌤이랑 시영 쌤 개인 레슨이야. 잊지 마.”

“본인 제외 모든 멤버랑 개인 연습 하기로 한 것도 까먹지 말자.”

“어우, 상상만 해도 끔찍해.”

다시 쪼르르 대기실로 돌아가 무대 의상으로 갈아입는 동안, 우리 애들은 쉬지 않고 서로에게 의욕을 불어넣고 있었다.

“조금 창피해지려고 하니까 그쯤 해.”

“우리가 왜 창피해요! 너무해.”

“아냐, 창피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이산가족 상봉마냥 애틋하게 이별했던 우리가 슬그머니 대기실로 돌아왔더니 서포트 팀분들은 전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머쓱해진 건 우리와 소현 팀장님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펑펑 울던 찬이는 이제 완전히 회복했는지 제일 씩씩했다.

겉에 입고 있던 재킷을 무대 의상으로 갈아입고, 악세서리를 챙기고.

동네 똥강아지 같던 멤버들은 어디 가고 천상 아이돌들이 눈앞에 있었다.

크게 숨을 들이켜고 내뱉으며 마음을 진정시킨 영빈 형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피식 웃던 경환 형이 손을 얹고, 한 명씩 서로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We're ‘Unravel’!”

무대에 오르기 전 우리만의 구호를 외친 멤버들 눈동자에는 새파랗게 일렁이는 우주가 담겨 있었다.

Question, 여로(旅路), 그리고 Pluto.

각 앨범에서 골라 하나로 엮어낸 우리 노래를 부르러 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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