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 live(6)
멤버들의 핸드폰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기에 어떻게 저장했는지 알 수 없었다.
딱히 남의 핸드폰을 볼 필요성도 느낀 적 없었고.
어차피 각자 다 핸드폰이 있어서 평소에도 다른 멤버의 핸드폰을 보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웃긴 영상이나 글, 팬카페 게시물을 서로 보여줄 때면 모를까.
사실 이 게임에서 누가 이길지는 크게 상관없었다.
몇 번 게임을 하면서 느낀 거지만 팀장 해봤자 좋은 게 하나도 없었다.
그냥 지나가는 팀원 1 이런 거 하고 싶다….
내가 걱정되는 건 그저, 멤버들을 저장해 둔 이름이었다.
예전에 힘찬이와 진지한 대화를 했던 날, 힘찬이가 자신을 무어라 저장했냐고 물었던 일이 있었다.
당시 분위기상 ‘모지리’라고 저장했다고 말할 수 없어 그냥 얼버무리고 잊었었다.
그 후 바꿔볼까도 했지만, ‘모지리’라고 저장된 이름이 찬이랑 너무 찰떡이라 딱히 바꿀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오늘 그걸 들키면 한참 동안 들들 볶일 게 뻔해서 앞이 캄캄해졌다.
찬이는 한번 삐지면 꽤 오래갔다.
감정 변화가 들쑥날쑥하던 때처럼 종잡을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소심한 면이 있으니까.
세빈이는 씩씩하게 이미 적고 있었고, 영빈 형은 고심하는 얼굴이었다.
준이 형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진지한 얼굴이 됐다.
경환 형은 평소처럼 무덤덤한 얼굴이었고, 찬이는 신난 것 같았다.
뭐야, 나만 그렇게 저장했나?
불길한 느낌을 애써 억누르며 스케치북에 멤버들을 떠올리며 하나씩 적기 시작했다.
모든 멤버가 다 적은 것 같자, 감독님이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그럼 누구부터 할까요? 역시 리더부터?”
“저부터 할래요!”
“우리 세빈이부터 할까요? 역순으로 갑시다!”
“네!”
싱글벙글한 세빈이가 노트북을 들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준이 형이랑 히스 형은 이름으로 저장했을 것 같아요. 씨아이 형은 막내라고 적었을 것 같고, 힘찬 형은 토깽이요.”
“토깽이?”
“네. 솜뭉치들이 저보고 토끼 닮았다고 해서 형이 자꾸 토깽이라고 불러요.”
불만 어린 표정이 된 세빈이가 투덜거리자 찬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의 무해함을 어필했다.
물론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지만.
“환이 형은… 내 동생이나 막둥이라고 저장했을 것 같아요.”
“평소에 그렇게 불러서요?”
“네. 왠지 그럴 것 같아요.”
만개한 해바라기가 저 미소보다 환할까 싶을 만큼 세빈이 얼굴은 활짝 피어났다.
말하는 것도 어려워하고 형들 뒤에 숨기 바빴던 우리 막내가 이렇게 자랐다니.
왠지 가슴이 찡해지는 기분이었다.
“좋습니다. 경험에 근거한 답변은 좋은 거죠. 다음으로 힘찬이 적은 걸 볼까요?”
“좋아요! 준이 형은 사고뭉치, 히스 형은 성 붙여서 정자로 저장했을 거 같아요. 경환 형은 힘찬 이렇게 저장했을 것 같고요.”
“평소에 힘찬이는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네요.”
찬이가 자신이 적은 걸 설명하자 경환 형이 옆에서 한마디 보탰다.
“내가 뭐! 나 정도면 양호하지.”
“‘양호하다’의 뜻을 우리 찬이가 알고 있는 게 가장 의왼데.”
답변하다 말고 금세 투닥거리는 둘의 모습에 준이 형은 버릇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둘 다 그만 해요. 진행해, 진행. 밥 안 먹을 거야?”
중재에 나서자 경환 형은 씩 웃고 말았지만, 찬이는 입술이 댓 발은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래서 나랑 세빈이는 뭐라고 저장했을 것 같은데.”
“아, 맞아. 환이는 좀 고민되긴 했는데 찬이라고 저장했을 것 같아요. 세빈이는 최찐빵이라고 저장한 것 같고.”
무인도 다녀오던 날, SNS에 찬이 뒷모습 사진을 올린 세빈이가 붙인 찐빵이라는 별명.
그 별명이 팬들의 마음에 들었는지 종종 팬레터에도 찐빵이라고 적혀있다고 했다.
그걸 본 찬이가 세빈이를 들들 볶은 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유난히 초롱초롱하게 느껴지는 멤버들의 시선에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준이 형은 환이, 히스 형은 지환, 씨아이 형은 콩, 찬이는 화니, 세빈이는 우리 형이지 않을까 싶어요.”
“뭐지? 막내한테만 사심이 느껴지는데 이거 착각이야?”
“아니, 현실 반응에 입각한 내 추측이야.”
“씨아이는 왜 콩이라고 저장했을 것 같아요?”
찬이가 종알거리는 사이에 감독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슬며시 원망스러운 눈으로 경환 형을 바라봤지만, 형은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하아… 그게, 형이 저 놀릴 때 콩만 한 게 까분다고 그러거든요. 이름도 바꿔놓을 거라고 전에 그랬어서.”
“풉, 콩만 하대! 와, 팩트 미쳤다!”
“너 진짜 조용히 안 할래?”
“나도 바꿔야겠다, 콩만 한 화니로.”
“어휴, 유치해서 진짜.”
유독 찬이가 크게 웃긴 했지만, 준이 형도 영빈 형도 피식거리며 웃고 있었다.
아, 왠지 슬픈 예감이 든다.
솜뭉치들이 나보고 콩만 하다고 하는 모습이….
이렇게 큰 콩이 어딨냐고, 진짜!
그렇게 내 순서가 끝나고 경환 형이 스케치북을 펼치며 입을 열었다.
“하준 형은 몽실이라고 저장했을 것 같아요. 영빈 형은 백경환이라고 저장했을 것 같고요.”
“몽실이?”
세빈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경환 형을 바라보자 씩 웃은 형이 답했다.
“예명을 ‘crowd into’에서 따왔는데, 처음에 하준 형이 잘못 알아들었었거든요.”
“맞아요. 처음에 ‘crowd’가 아니라 구름을 뜻하는 ‘cloud’인 줄 알았어요.”
“그때 저 형이 의식의 흐름으로 말하다 저한테 몽실이라고 했거든요.”
이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팬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둘만의 에피소드인 것 같았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눈을 빛내며 이어질 둘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웠다.
“C.I라고 지었던 게, 사람들이 제 음악을 듣고 몰려들 만큼 사랑받고 싶어서, 거기서 따온 거거든요. 그런데 저 형은 구름처럼 몰려든다고 잘못 알아들었더라고요.”
“네, 맞아요. 그래서 구름? 몽실몽실하니까 넌 몽실이 하자. 그렇게 말해버렸어요.”
경환 형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은 죄가 없다는 듯이 굴었고, 찬이 얼굴은 해괴해졌다.
저 덩치에 저 얼굴에 몽실이라니. 그건 꼭 꼭 강아지 같았으니까.
그 시선을 느꼈는지 준이 형은 항변하듯 덧붙였다.
“그냥 동생이니까 좀 귀엽게 보고 싶어서… 처음에 씨아이는 야생마처럼 날카로워 보였거든요. 별명이라도 순둥하게 지어주려는 형의 깊은 마음을 몰라보고?”
“몽실이, 몽실이 형?”
“야, 넌 하지 마. 안돼.”
“아, 왜요! 나도 해볼래! 몽실이 형!”
몽실이라는 단어 하나에 찾아왔던 어정쩡한 분위기가 찬이 장난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음,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또 들으니까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찬이뿐만 아니라 영빈 형, 세빈이도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걸 보니 숙소에서가 기대되었다.
“큼, 굉장히 뜻깊은 별명이네요. 계속 이어서 해볼까요?”
“네. 환이랑 막내는 경환 형, 힘찬이는 백경환 형 이렇게 저장했을 것 같네요.”
몽실이의 여파가 컸던지 다들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오죽하면 영빈 형이 웃으면서 자기 차례를 이어나갈까.
우리 영빈 형도 많이 좋아졌다, 진짜.
예전 같았으면 시선이 집중되자마자 어색해서 동공이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을 텐데.
흐뭇한 얼굴로 형을 바라보며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하준이는 BF라고 저장했을 거예요. 씨아이는 김영빈 형일 것 같고. 환이랑 찬이, 세빈이는 영빈 형이지 않을까 싶어요.”
“역시 하준이랑 히스는 절친이다, 이거죠?”
“아마 예전에 장난처럼 저장한 걸 그대로 쓰고 있지 않을까 해서요.”
영빈 형은 감독님의 놀림 같은 질문에도 흐트러짐 없는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하준 형과 영빈 형 둘이 함께 헤쳐온 많은 시간이 목소리에 한가득 묻어나왔다.
괜히 내가 가슴이 벅차고 자랑스러워서 코끝이 찡했다.
역시 우리 형들이구나.
“이제 저만 남았네요.”
“두구두구두구!”
“그 이상한 효과음 뭐야!”
“왜, 리더 형을 위한 특별 효과음인데!”
아, 내 감동.
언래블 맏형들의 관계를 떠올리며 뭉클했던 내 감동은 찬이와 세빈이의 투닥거림에 와장창하고 말았다.
그래, 우리 애들이 그렇지, 뭐. 하하.
준이 형의 눈짓에 경환 형이 찬이를 붙들고 세빈이는 내가 끌어당겼다.
“크, 역시 리다! 눈빛으로 동생들을 제압하네요.”
“워낙 저희 애들이 한시도 가만있지를 않아서요. 하하.”
싱그럽게 웃던 준이 형은 스케치북을 펼치며 말을 이었다.
“히스도 아마 절 베프라고 저장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씨아이는 리더 형이라고 했을 것 같고…. 환이는 준이 형, 찬이랑 우리 막내는 하준 형일 것 같네요.”
“언래블 멤버들이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렇게 적은 내용만으로도 어느 정도 알 것 같네요.”
감독님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싱글벙글하더니 앞에 놓여있던 판넬의 겉면을 한 겹 떼어냈다.
거기에는 우리 핸드폰에 각자 멤버들을 어떻게 저장해 두었는지 적나라하게 적혀있었다.
“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나도 모르게 속에 있던 말을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세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지리? 야, 지환이 너!”
“형1, 형2 뭔데….”
“그냥 콩도 아니고 완두콩이었네. 하, 하하….”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 일치하는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다 틀렸다.
[하준]
히스 – BF
C.I – 몽실몽실
환 – 환이
힘찬 – 사고뭉치
세빈 – 우리 막내
[히스]
하준 – 베프
C.I – 백경환
환 – 환이
힘찬 – 최힘찬
세빈 – 막둥이
[C.I]
하준 – 형1
히스 – 형2
환 – 완두콩
힘찬 – 아우
세빈 - 막내
[환]
하준 – 우리 준이형
히스 – 우리 빈이형
C.I – 우리 경환형
힘찬 – 모지리
세빈 – 내동생
[힘찬]
하준 – 리더 형
히스 – 영빈 형
C.I – 백경환 형
환 - 내친구
세빈 - 깽깽이
[세빈]
하준 – 준이 형
히스 – 영빈 형
C.I – 경환 형
환 – 우리 형
힘찬 - 최찐빵
“이거 점수 내기가 힘들어지겠는데요?”
“하하, 그러게요….”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준이 형.
영빈 형과 하준 형은 경환 형이 자신들을 저장한 이름을 보고 충격받았다.
사실 나도 보고 놀라긴 했는데 왠지 경환 형답기도 해서, 이상하게 납득이 됐달까.
아무리 그래도 형1, 형2는 여러모로 충격적이긴 했다.
“전 하준 형도 히스 형이 가족 같거든요. 그래서 친형이라고 생각하니까 저게 제일 좋더라고요.”
산뜻한 목소리로 말하는 경환 형.
하지만 두 맏형은 적지 않은 내상을 입은 듯했다.
“씨아이는 숙소 가서 저희와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할 것 같네.”
온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미소로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든 준이 형.
하지만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저 미소 아래 감춰진 응징의 뜻을.
오죽하면 경환 형이 흠칫하고 준이 형을 돌아봤을까.
“원래는 딱 맞추는 것만 정답으로 취합하려고 했는데 그러면 너무 점수가 중구난방일 것 같네요.”
“비슷하게라도 맞췄으면 점수를 주는 건 어떨까요!”
“저희도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올게요. 언래블도 잠깐 간식 타임을 갖도록 하죠.”
감독님의 손짓에 다른 스태프분들이 두 개의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우와! 진짜 군고구마다!”
“헐, 군밤이네. 요새 보기 힘든 건데.”
두 개의 커다란 접시에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군밤과 군고구마가 잔뜩 담겨있었다.
음료는 오렌지 주스와 우유가 준비되어 있었기에 난 우유를 들었다.
“세빈이는 우유고 다른 사람들은?”
“나도 우유.”
“난 주스 마실래!”
준이 형과 영빈 형은 자연스럽게 고구마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고, 경환 형과 찬이는 밤껍질을 벗겨냈다.
이미 칼집이 나 있는 밤은 조금만 힘을 줘도 툭 하고 겉껍질이 벗겨졌다.
세빈이는 내가 따라주는 음료를 멤버들 앞에 옮기기 시작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각자 알아서 포지션을 찾아가는 걸 보니, 그동안의 교육이 빛을 발하는 것 같아 흐뭇했다.
한편으로는 방금까지 이름 가지고 아웅다웅했던 멤버들이 먹을 것 앞에서 이렇게 대통합을 이루는 게 재밌기도 했고.
한결같이 투명한 내 새끼들 같으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