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49)화 (249/456)

249. live(4)

“히스는 평소에도 요리를 자주 하나 봐요? 자세가 되게 익숙하네.”

“연습생 생활하기 전에 동생 밥을 제가 자주 챙겨줬었거든요.”

“오, 동생이랑 친한가 봐요?”

“워낙 잘 따르고 예뻐서….”

영빈은 자신이 나서서 대화하는 건 여전히 어려워했지만, 이렇게 주고받는 대화엔 이제 조금 적응한 것 같았다.

이전까지의 프로그램과 다르게 ‘밥 먹고 합시다’는 촬영 분위기 자체가 평화로웠다.

삶에 치여서 밥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잊고 있던 밥 한 끼의 포근함을 다시 알려주자는 마음.

그 취지에 맞게 다양한 게스트를 섭외해 밥을 나눠 먹으며, 사는 이야기를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덕분에 음식을 하는 도중에도 지인들과 나눌 법한 편한 대화들이 오갔다.

“영주 씨도 아침밥 잘 못 챙기는 편이죠?”

“아침은커녕 점심도 잘 못 먹는 날이 허다해요. 김밥 한 줄, 샌드위치 이런 거로 때우니까.”

오늘 영빈과 함께 출연한 게스트는 최근 많은 사랑을 받는 배우인 이영주였다.

발랄하고 활기찬 여주인공으로 인기몰이를 시작했고, 이번 드라마에서 이미지 변신을 꾀하고 있었다.

“그래도 촬영하다 보면 밥차도 오고 그러지 않아요?”

“많이들 보내주시죠. 그런데 제가 촬영 직전에는 긴장해서 잘 못 먹어요.”

촬영장 안에는 고슬고슬하게 볶아지는 볶음밥 냄새가 가득했다.

들어간 재료는 달걀과 밥.

고작 이 두 가지였지만, 이 조합이 어떤 시너지를 내는지 이미 알고 있는 이들의 입엔 침이 고였다.

“아무래도 긴장한 상태에서 먹으면 체하죠. 오늘은 어때요? 괜찮아요?”

“저 지금 저 냄비 채로 주셔도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초롱초롱한 눈으로 영빈의 손목 스냅에 맞춰 춤추는 밥알들을 바라보는 이영주.

히스는 밥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는 그 모습에 미소로 화답했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두 개의 웍에서 한쪽엔 황금 볶음밥이 신나게 흔들리고 있었고, 다른 한쪽엔 매콤한 두루치기가 완성되어 있었다.

“히스는 왠지 스테이크 썰어야 할 것처럼 생겼는데.”

“그런 소리 종종 들었어요. 근데 전 양식보다 한식을 더 좋아하거든요.”

처음 회사를 통해 출연 제의가 들어왔을 때 영빈은 고민했다.

요리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 자체는 좋지만 정말 말없이 밥만 하다 올 것 같아서.

여태까지는 그래도 동생들과 함께 출연했기에 분량에 걱정하진 않았다.

토크와 재미는 동생들이 챙겨주었고 영빈은 밥만 하면 됐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단독 출연이었기에 근심, 걱정이 가득했었다.

그런 영빈에게 소현은 프로그램이 지향하는 방향과 최근 방영분 내용 등을 알려주었다.

토크에 그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팀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영빈은 결국 출연을 결심했고.

다행히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편안한 분위기였다.

“히스는 평소에도 음식을 자주 해요?”

“예전에는 동생 밥을 자주 해줬지만, 지금 숙소에서는 그렇게 자주 하진 않아요.”

늘 멤버들 먹일 밥을 챙기면서도 힘든 내색 한번 하지 않던 지환이 떠올랐다.

사 먹거나 회사에서 먹자고 해도, 그렇게 먹으면 식단 조절 어렵다며 멤버들에게 직접 밥을 해 먹였다.

편식이 심한 멤버들 때문에 밥할 때마다 푸념 아닌 푸념하는 동생이 떠올라 영빈은 살풋 웃었다.

“어머, 히스 방금 엄청 설레게 웃은 거 알아요?”

촬영 내내 활짝 웃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영빈이었다.

그런 영빈이 숙소 이야기를 하며 조용히 피어난 꽃처럼 미소 짓자, 이영주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 확실 웃으니까 엄청 얼굴이 사네. 히스, 방금 무슨 생각 했어요?”

이영주의 멘트를 진행자인 윤후가 받았다.

갑자기 요리가 아닌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당황한 영빈의 눈동자가 방황했다.

“그게….”

“동생 생각했어요?”

아마 옆에 힘찬이가 있었으면 신나게 놀렸을 만큼 당황했지만, 다행히 겉으로는 크게 티 나지 않았다.

그 순간 영빈은 다시 한번 멤버들을 떠올렸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이 드물고 감정을 티 내지 않는 자신을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보는 그들을.

때로는 그들이 가족들보다 자신을 더 빨리 파악하는 것 같을 때도 있었다.

각자 스케줄을 하고 있을 멤버들을 떠올리며, 영빈은 다시 한번 웃을 수 있었다.

“저희 멤버들을 생각했어요. 애들이 워낙 활기차서 밥 먹자고 부르면 왁자지껄하거든요.”

“멤버들이요?”

잠깐 사이 어느 정도 당황했던 마음을 갈무리한 영빈은 잘 볶아낸 볶음밥을 그릇에 옮겨 담으며 말했다.

“저희가 숙소에서 밥을 정말 많이 해 먹는 편이거든요.”

“남자들끼리 살면서 쉽지 않을 텐데.”

“연습 끝나고 뭐하고 나면 지치지 않아요?”

“네. 그래서 저도 처음엔 밥해 먹는 걸 포기했었어요. 각자 집에서 반찬 보내주셔도 잘 안 먹고 그랬거든요.”

둥글고 새하얀 도자기 접시에 두루치기를 깔끔하게 담은 영빈이 계속 손을 놀리며 말했다.

“그러다 저희 멤버 중에 환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나서기 시작했어요.”

“아, 환 군. 나 그 사진 봤어요!”

“패션쇼 사진 말씀하시는 거죠?”

여러모로 이름이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렸던 지환이었다.

다행히 이영주와 윤후가 좋은 이야기를 꺼내준 덕에 영빈은 더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네. 저희 환이가 음식을 잘해요. 제가 그럭저럭 집밥을 할 수 있는 정도면, 환이는 가리지 않고 다 잘한다고 해야 하나?”

“히스가 맏형이라고 했으니까 환 군은 더 어릴 텐데 기특하네….”

“사실 환 군은 요리사로 대성할 싹인 게 아닐까요?”

“그러기엔 얼굴이 아깝지! 목소리도 엄청 좋던데.”

영빈은 조리한 음식을 깔끔하게 담아내 둘 앞으로 밀어주면서 흐뭇하게 웃었다.

자신이 칭찬을 듣는 건 눈앞에 사람이 있으니 인사치레로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누군가 같은 팀 동생을 칭찬하자 이상하게 더 뿌듯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자, 이제 드셔도 돼요. 음, 저희는 환이 덕분에 아침을 꼭 챙겨 먹고 있어요.”

“아침을요? 아직 학생이니까 학교 가야 하잖아요. 보통 일이 아닐 텐데.”

“잘 먹겠습니다! 어휴, 진짜 냄새가 어찌나 끝내주던지 위장에서 밥 달라고 난리였어요.”

이영주는 연신 수저 가득 밥을 떠먹으며 행복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아니, 안 뺏어 먹으니까 좀 천천히 먹어요, 영주 씨.”

윤후가 홀로 온갖 감탄사를 쏟아내며 먹방을 찍고 있는 이영주를 달래보았지만,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이게, 진짜 딱 그 느낌이에요. 왜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그때 엄청 배고프잖아요. 그래서 엄마한테 배고프다고 징징대면 엄마가 등짝 스매싱 때리면서 해주는.”

“네? 아니 등짝 맞으면서 먹는 볶음밥이 뭡니까, 도대체.”

“다른 집은 안 그랬어요? 난 옷도 안 갈아입고 채근한다고 엄마한테 혼났는데!”

이영주는 황금 볶음밥과 두루치기를 야무지게 챙겨 먹으며 엄마가 해준 밥 같다며 기뻐했다.

그 모습에 영빈도 뿌듯해하며 이번 주말에는 멤버들에게 이 메뉴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숙소 얘기 좀 더 해주면 안 돼요? 아이돌 숙소는 왠지 다른 세상 얘기 같고 궁금하잖아.”

이영주 못지않게 야무진 수저질을 하던 윤후는 본분을 잊지 않고 영빈에게 질문을 던졌다.

“사실 숙소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지는 않아서 별 건 없어요. 아침에는 다들 졸면서 밥 먹거나 샐러드랑 주스 마시고….”

“세상에, 난 아침은 사서도 잘 안 먹는데.”

이영주는 영빈의 말에 감탄하면서도 웍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 눈빛을 확인한 영빈은 남아있던 볶음밥을 전부 이영주 그릇에 담아주며 말을 이었다.

“지환이가 밥에 굉장히 민감해요. 음… 입맛이 까다롭고 그런 게 아니라 다 같이 먹는 밥을 좋아한다고 해야 할까요?”

“그 친구 딱 한국 사람이네. 한국 사람은 같이 밥 먹어야 친해지잖아.”

“네, 좀 그런 것 같아요. 적어도 하루 한 끼는 꼭 멤버들과 다 같이 밥을 먹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거든요.”

영빈의 말에 이영주는 조금 아련한 얼굴이 되었다.

“그 말이 진짜 맞아요. 지금은 혼자 살긴 하는데 가끔 그때가 생각나요. 아빠가 퇴근할 때면 엄마가 된장찌개 끓이고 반찬하고, 전 소시지 볶아달라고 엄마한테 칭얼거리고. 그렇게 가족 다 같이 먹는 밥.”

이영주의 말에 윤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다 같이 먹는 밥이 그 시절에는 몰랐는데 굉장히 소중한 시간이더라고요. 그러면서 서로 하루 있었던 일도 얘기하고. 그런데 요새는 그냥 ‘혼자 때운다’라고 많이들 말하잖아요.”

“진짜. 그 때운다는 말 너무 슬프지 않아요?”

‘한 끼 때운다’라는 말에 담긴 감정은 대부분 부정적인 느낌이었다.

어쩔 수 없이, 여의치 않아서, 먹고 살아야 하니까, 이거라도 등.

어느샌가 밥 한 끼 맛있게 먹는 게 너무나 힘든 세상이 돼버렸다고 이영주는 한숨을 폭 내쉬며 말했다.

“이왕이면 모두가 맛있게 밥 먹었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영빈은 연습생 시절을 떠올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체중 관리는 가장 기본적인 일이었다.

여자 아이돌에 비하면 남자 아이돌이 조금 더 느슨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남에게 내 모습을 보이는 직업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어쩔 수 없다고.

그렇게 자신을 억지로 납득시키고, 힘들어하는 동생들을 다독이면서.

하지만 지환이가 나서면서부터 많은 점이 달라졌다.

언제 그렇게 공부를 한 건지 식단표를 짜서 트레이너 선생님께 1차로 확인받고 팀장님에게 최종 결재를 받아왔다.

그 덕분에 밥 다운 밥을 먹을 수 있었고, 극단적인 체중조절도 사라졌다.

“내가 오늘 히스 덕분에 진짜 많이 배우고 가요. 나도 이제 때운다고 안 하고 잘 먹었다고 해야겠어요.”

“영주 씨, 오늘 나오길 잘했죠? 어디 가서 히스 같은 사람이 해주는 밥 먹어보겠어요. 밥도 잘해, 얼굴도 잘생겨, 말도 예쁘게 해.”

“아니, 잘한 건 히슨데 왜 윤후 씨가 뿌듯해해요? 이상하네.”

둘이 원래도 친분이 있었던 건지 방송용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툴툴거리며 대화하는 모습이 친근해 보였고, 영빈에게 말을 건네는 타이밍이 절묘했다.

그 덕분에 방송 촬영 내내 편안하고 즐거운 분위기가 유지되어 영빈도 부담을 내려놓고 녹아들 수 있었다.

깨끗하게 그릇을 비워내는 둘의 모습에 영빈은 더욱더 멤버들이 보고 싶어졌다.

* * *

처음 촬영장 한가운데 선 순간, 어딘가 기묘한 느낌이 들어 당황했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숨 쉬는 것만큼 익숙한 내 손이 내 것이 아닌 듯한 느낌.

그러나 눈 깜박하는 순간 낯선 느낌은 금방 사라졌고, 바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배역에 너무 몰입하면 현실에서 힘든 경우가 있다고 들었는데, 나에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이게 첫 출연이니까.

다행히 그 후에는 큰 문제 없이 촬영을 이어갈 수 있었다.

진성 배우님은 큐 사인이 들어오자마자 순식간에 윤상혁이 되었고, 나는 끊임없이 지웅이를 떠올렸다.

유일하게 친구라고 생각했던 상혁의 배신.

그러면서도 그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기억에서 지워버린 그.

잠시 나를 잊고 머릿속에 내내 그려온 지웅이만을 떠올렸다.

맡은 캐릭터의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그동안 최대한 비슷한 상황과 감정들을 떠올리며 연습했었다.

그 덕분인지, 아니면 수많은 시뮬레이션 덕분인지 NG 한번 없이 단번에 촬영을 끝낼 수 있었다.

“연습을 얼마나 한 거야, 죽는소리하더니 잘하잖아?”

“제가 잘했어요?”

“NG 한번 안 내고 끝냈는데, 그럼 못했겠어?”

“선배님이 워낙 잘 이끌어주셔서 그렇죠.”

“목소리도, 눈빛도 진짜 잘했어.”

기쁜 듯 칭찬해오는 진성 배우님과 달라진 눈빛의 스태프들,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감독님.

우진 형이 후다닥 달려와 커다란 수건으로 몸을 감싸주었고, 다들 칭찬해주었다.

하지만 아직도 얼떨떨했다.

연기라는 게 다 이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길지 않은 그 시간 동안 정말 ‘임지웅’이 된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왜 그렇게 진성 배우님이 원망스러웠을까.

아니, 진성 배우님이 원망스러운 게 아니었다.

자신에게 이런 결말을 선택하게 한 모든 것들이 원망스러웠다.

이상한 생각을 애써 머릿속에서 털어내며 웃었다.

아무래도 포잉과 이야기하거나 김미연 선생님과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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