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 live(3)
‘포잉, 나 잘할 수 있을까?’
‘잘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잘해야지. 무슨 소리임?’
포잉이 언제나처럼 강하게 내 뼈를 후려쳤고, 맞는 말이기에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포잉에게 보란 듯이 괜히 입술을 삐죽여봤지만, 통할 리 없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 중, 최대한 많은 시간을 연기 연습에 투자했다.
처음 작곡 공부를 시작할 때처럼 자는 시간을 줄이고, 곡 작업 시간을 줄이고.
김미연 선생님의 도움으로 기본기를 쌓고 대본을 외우며 캐릭터를 다듬었다.
그러나 노력에도 한없이 초라한 상태창의 연기 숫자가 좀처럼 늘지 않아 불안감이 하늘을 찌르던 그때.
초조해하는 나를 본 선생님이 약간의 꼼수를 부려보자며 웃으셨다.
최대한 배역과 어울리는 연기를 해야 하니, 기초 연기를 배우는 시간과 현 배역을 연습하는 시간을 나누자는 것.
막막하던 내게는 귀가 솔깃해지는 발언이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고, 기초가 부실하면 결국 성공할 수 없다고들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때부터는 선생님과 대본을 분석하고, ‘임지웅’의 모습을 더 세밀하게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퀭해진 나를 곧잘 다독여주시지만, 김미연 선배님은 기본적으로 매우 엄한 호랑이 선생님이었다.
그런 선생님에게 네 연기에서 지웅이가 보인다고 칭찬을 듣던 순간.
[‘스승의 인정’ 달성]
지쳐서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내 눈앞에 정말 오랜만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포잉, 이거 보여?’
‘꽤 오랜만에 보는 메시지네. 고생했음.’
에단 쌤에게 가르침을 받던 때, 전문가에게 인정받았다며 스탯이 상승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포잉이 설명했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지환 군?”
“아, 네!”
“요새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닌가요?”
“아니에요, 선생님. 칭찬 들으니까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요.”
혼자 있는 게 아닌데 나도 모르게 너무 놀라서 얼빠진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덕분에 선생님은 작은 오해를 한 듯 약간은 안쓰럽다는 눈으로 바라보셨고.
“음. 잠깐 이야기하면서 쉴까요?”
“네, 선생님.”
주저앉은 내 앞에 단정한 차림의 선생님이 자리했다.
잠시 말을 고르는 듯 미간을 살풋 찌푸렸던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처음 말했던 것처럼 지환 군이 연기에 재능이 있다고 하긴 어려워요.”
소위 천재라 불리는 이들 같은 그런 재능.
수업 첫날, 선생님은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었다.
천재라고 불리는 그들만큼의 재능은 보이지 않지만 연습하고 노력하면 충분히 잘 해낼 거라고.
그러니 재능이라는 것에 휘둘리지 말라고 하셨다.
혹시라도 어린 제자가 스스로에게 실망하거나 포기할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하지만 지환 군은 더 특별한 재능이 있어요.”
시스템 보상이 무엇일지 들떠있던 나는 선생님의 말씀에 정신을 차렸다.
지금 그런 것으로 신나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평범한 사람인 내게 재능 같은 게 있다고?
“노력하는 재능. 그건 정말 쉽게 가질 수 없는 재능이에요. 하지만 우리 귀여운 제자님은 그걸 가지고 있답니다.”
평소의 단호함이 아닌 푸근한 얼굴을 한 선생님은 내 손위에 본인의 손을 얹어놓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노래도 계속해서 연습하지 않으면 실력이 늘지 않지요? 연기도 마찬가지예요. 편법이 있을 수가 없죠.”
“네… 그렇죠. 대부분 일이 다 그렇겠죠?”
“학교 공부도 계속하지 않으면 잊어버리잖아요. 똑같아요. 그러니까 조급해하지 않았으면 해요. 충분히 잘하고 있답니다.”
지금 선생님이 오해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걸 정정하는 것도 이상했다.
그저 손 위에 얹어진 선생님의 손이 따뜻해서, 전생의 어머니가 문득 생각나서 그냥 웃었다.
“네, 선생님. 열심히 배우고 노력해서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될게요.”
“내가 말년에 이렇게 훤칠한 제자를 얻게 될 줄은 몰랐지. 소현이한테 밥이라도 사야겠어요.”
“밥은 제가 선생님께 사드려야죠. 이렇게 신경 써주시는데.”
그날 나는 연기에 투자할 수 있는 꽤 많은 포인트를 얻었지만, 그것보다 선생님의 손이 더 뚜렷하게 기억에 남았다.
선생님이 전생의 엄마와 비슷한 연배여서 그런 걸까?
그날의 손을 떠올리자 긴장 때문에 쿵쿵거리던 심장이 겨우 평소처럼 가라앉았다.
‘이제 좀 괜찮음?’
‘응. 포잉 말처럼 잘해야지.’
‘당연하지. 내 계약자라면 이 정도는 쉽게 해낼 거임.’
‘어휴, 정말 우리 포잉 님 모시기 힘들다, 힘들어.’
도도하게 턱을 치켜든 작은 고양이 요정님이 거만하게 말하며 타박타박 걸었다.
‘오늘은 우진 형이야?’
‘매일 쫓아다녔더니 정이라도 든 건지 익숙해졌음.’
오늘은 우진 형의 머리 위에서 촬영장을 지켜보겠다고 선언한 포잉.
그 모습이 너무 평소의 모습이라 웃을 수 있었다.
“지환아, 연기 수업 열심히 받고 있다면서?”
“드라마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현장에 홀로 서 있던 내게 다가온 사람은 오늘 나와 호흡을 맞출 이진성 배우님이었다.
새벽 형들이나 진우 형처럼 무한한 애정이 어린 눈이 아니었다.
하지만 냉정하게만 보였던 눈에는 분명한 호감이 서려 있었다.
그간 무수한 질문을 던지며 질척거린 덕분에 진성 배우님과는 꽤 편한 사이가 됐다.
배우님이 나를 후배 배우로 편견 없이 대해주신 덕이 가장 컸다.
극 중에서 서로 합을 맞춰야 하는 사이다 보니 열심히 쫓아다녔고, 이제는 장난도 칠만큼 가까워졌달까?
수없이 현장을 들락거리며 많은 사람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에게 예쁨받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저 전처럼 날 선 시선은 받고 싶지 않았다.
가뜩이나 실수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런 상황에서 악의 담긴 시선을 받으면 더 긴장해서 실수할 것 같아 무서웠다.
차라리 여기 사람들이 길가의 돌멩이 보듯 그렇게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수고스럽게 직접 옆까지 다가와 악담을 쏟아놓고 갔던 걸 보면.
그래서 더 웃는 낯으로 현장 스태프들과 배우들을 대했다.
부디 그동안 공들인 만큼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았으면.
“오늘 잘해보자.”
“진짜 잘 부탁드려요. 전 선배님만 믿을게요.”
“세상에 믿을 사람이 따로 있지, 날 믿냐.”
“이미 진우 형이 선배님에 대해 많이 말해주셔서 다 알아버렸어요!”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평소 자주 하지 않는 농담을 건네며 내 긴장을 풀어주려 하셨다.
그때, 감독님이 다가왔다.
“어이쿠, 언제 이렇게 친해졌어요? 지환 군이 우리랑은 안 놀아주더니 진성 씨랑만 친하게 지냈나 보네.”
“부럽죠? 쌩쌩하고 젊은 친구가 저랑만 친하니까.”
현장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이 다가와 내 몸이 살짝 굳자, 진성 배우님이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자신 쪽으로 당겼다.
누가 봐도 친밀해 보이도록.
“이거이거, 안 되겠어. 진성 씨 오늘 각오해요. 내가 아주 꼼꼼하게 볼 거니까.”
“그러다 우리 지환이 도망가면 감독님 어떡하려고 그래요.”
드라마의 주인공인 이진성 배우와 감독.
이 둘이 날 둘러싸고 장난스럽게 대화하며 농담을 주고받자 주변이 술렁이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그래서 진성 배우님에게 고마웠다.
“자, 그럼 준비합시다.”
감독님은 우리 어깨를 두드려주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진성 배우님 내 손을 한번 꾹 잡았다 놔주었다.
“지환아, 형 믿어도 된다.”
“…네. 고맙습니다.”
“갑자기 막히면 그냥 형 쳐다봐. 형이 알아서 할게.”
늘 담담한 색을 하던 눈동자에 잠깐이지만 따듯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평소에 농담을 주고받은 적은 있어도 오늘처럼 스킨쉽을 나눈 적은 없었다.
식은땀이 날 정도로 긴장한 날 알아서, 다른 배우들의 질시 어린 시선을 알아서.
그래서 친밀한 모습을 과시하듯 주변에 보여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대 위에 올라가기 직전의 긴장과는 다른 초조했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 * *
상혁은 지금 눈앞의 광경이 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꿈이 아니라면 이미 15년 전에 죽은 지웅이가 보일 리 없었으니까.
임지웅.
자신이 과거의 일들을 다시 한번 파헤치게 만든, 그리움과 원망이 뒤섞인 학창 시절의 친구.
자기 몸보다 조금 더 큰 사이즈의 교복이 헐렁했다.
“지웅아.”
꿈속의 상혁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친구를 불렀다.
한쪽 다리를 조금 끄는 듯 걷는 특이한 걸음걸이를 가진 지웅이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 상혁을 바라본다.
“왜?”
“우리 지금 어디가?”
일견 차갑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말투였지만, 상혁은 지웅이 낯을 많이 가리는 것뿐이라는 걸 안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던 지웅이 우뚝 멈춰 섰다.
“윤상혁.”
“어?”
“우리 아직 친구 맞아?”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맞냐고, 친구.”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지 상혁은 지웅과 한걸음 떨어진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당연히 친구라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당황한 상혁이 도와달라고 지웅에게 손을 뻗으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지웅의 하얀 손이 천천히 상혁에게 다가왔다.
햇빛을 많이 받지 못한 지웅의 피부는 유난히 하얀빛을 발했다.
그 하얀 손이 얼굴로 다가와 상혁의 눈을 가렸다.
여전히 입도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근데 상혁아, 우리가 친구면… 네가 나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섬뜩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귓가를 울렸다.
덜컥 겁이 난 상혁은 죽을힘을 다해 몸을 움직이려 애썼고, 겨우 지웅을 밀어내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 발짝 더 뒤로 밀린 지웅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상혁을 내려다보았다.
언제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던 친한 친구였는데 지금 지웅의 눈빛은 읽을 수 없었다.
말갛고 투명한 눈동자가 상혁을 주시하다 툭 하고 굵은 눈물 한 방울을 떨궜다.
상혁은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아 겁에 질린 얼굴이 되었다.
무표정이라는 단어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소름 끼치는 느낌인지도 처음 깨달았다.
유리알 같은 눈동자 밑에 순식간에 물기가 차오르더니 눈꺼풀이 날갯짓하는 순간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하늘에서도 굵은 물방울이 툭 떨어지더니 순식간에 거센 빗줄기가 되었다.
“가. 다시는 날 찾지 마.”
지웅은 처음으로 원망을 가득 담은 눈으로 상혁을 바라보다 그대로 등을 돌려 빗줄기 사이로 사라졌다.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에 지웅을 뒤쫓으려 했지만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가 무거웠다.
상혁은 지웅의 뒷모습조차 아득히 멀어진 후에야 처음 지웅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었다.
“…당연히 친구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지웅아.”
피부가 아릴 만큼 강한 빗줄기에 흠뻑 젖은 상혁은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내려다본 손은 나이를 먹어버린 지금의 손이었다.
* * *
포잉은 내내 지환에게 덤덤하게 굴었지만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처음 ‘임지웅’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지환과 이야기를 나눌 때부터 느낀 불안감 때문이었다.
지환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임지웅은 여러모로 예전의 지환을 닮아있었다.
원래 작가가 구상했던 인물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지환이 이해한 ‘임지웅’은 예전의 지환과 굉장히 비슷했다.
하필 그런 역할을 맡게 되어 자신의 계약자에게 혹여나 악영향이 갈까 매일 매일 불안했다.
외로움에 물들어 주변을 놓아버린 모습.
겨우 마음을 내주었다가 끝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만 결말까지.
영혼이 바뀌었어도 육체에 남은 기억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때문에 포잉은 우진을 살펴달라는 지환의 부탁을 지키기 위해 자리를 비울 때마다 초조했다.
가뜩이나 새끼 고양이보다 방어력이 낮은 계약자였다.
그런 계약자에게 또 누군가 시비를 걸었단 말에 크게 화를 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다행히 그 후로는 우진도 지환과 동행하는 일이 많아져 함께 지켜볼 수 있었지만….
그리고 오늘, 드디어 지환이 연기할 차례가 다가왔다.
내내 불안한 기색을 보이는 지환을 부러 평소처럼 퉁명스럽게 대했다.
절대로 지지 말라고.
초조한 마음 때문인지 꼬리와 귀가 자꾸만 움찔거렸지만, 요정의 품위를 위해 애써 참았다.
이 모습을 지환이 봤다면 놀리려 들게 뻔했으니까.
촬영장에 우두커니 선 지환이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것이 아닌 무언가를 보는 듯한 낯선 모습에 포잉의 미간이 좁혀졌다.
연기인지 아니면 기억에 혼란이 온 건지 파악하기 위해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유난히 헐렁한 교복 탓에 가뜩이나 마른 계약자의 몸이 더 작아 보였다.
신발을 끄는 듯, 혹은 지친 듯이 터벅터벅 느리게 걸음을 옮기는 지환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때, 상대 배우가 반가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지웅아’하고 부르자 지환의 말간 눈이 그를 향했다.
포잉은 계약자의 새로운 모습을 하나도 빼놓지 않으려 진지한 눈으로 현장을 주시했다.
다행히 포잉이 걱정하던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