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 live(2)
“형들은 왜 또 여기 있는 건데요…?”
“오, 병아리 왔어?”
“와서 치킨 먹어라.”
“환아, 형이 아이스크림 사 왔어!”
연기 수업에 많은 시간을 쏟느라 멤버들을 먼저 숙소로 보낸 후, 간신히 작업실에서 조금 시간을 더 보내고 귀가할 수 있었다.
다행히 주말이라 학교 안 가서 망정이지….
평소에는 같이 갈 거라고 칭얼거렸을 찬이나 세빈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게 이상하긴 했는데 이런 꿍꿍이가 있어서 그랬나 보다.
오늘은 우리가 촬영했던 이승 탈출이 방영하는 날이라 다 같이 보기로 하고 최대한 서둘러 숙소로 돌아온 것도 있었다.
그렇게 힘겹게 숙소에 돌아왔더니 파티 중이었다.
이사 후 대표님이 선물해주신 커다란 TV 앞에 익숙한 얼굴들이 한껏 신난 얼굴로 본 적 없는 큰 상에 둘러앉아 있었다.
저 밥상은 갑자기 또 어디서 나온 거야?
“오늘 이승 탈출 촬영한 거 나온다며? 다 같이 축하해 주려고 왔지.”
“축하요? 우리가 구르는 거 실시간으로 놀리려는 게 아니라?”
“에이, 그게 그거지.”
황망한 표정으로 세비 형과 준이 형을 바라보자 둘 다 꼭 닮은 해탈한 듯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저 모습은 아마도 막아보려 했지만 실패했다는 그런 사인인 것 같았다.
하긴, 저 형들이 무슨 죄야….
“일단 저 좀 씻고 올게요….”
“그래, 닭 다리 빼놓을게. 빨리 나와!”
가영 형의 쾌활한 목소리, 닭 다리를 챙기는 진우 형, 손을 팔랑거리는 찬이, 잔뜩 신난 얼굴의 세빈이가 한눈에 들어왔다.
키스 형과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는 영빈 형도.
갑자기 쳐들어오는 거야 이제는 일상 같은 이야기였지만, 의외로 형들은 회사에 꼬박꼬박 미리 방문 예정임을 전달하는 편이었다.
우리 중 누군가에게는 꼭 말을 하기도 했고.
회사로는 무작정 찾아가곤 했지만, 숙소는 우리 생활 공간이라 배려해주는 것 같았다.
물론 형들과 시간을 보내는 건 즐거웠다.
형들과 대화를 나누며 작업 중 막히던 것에 힌트를 얻기도 했고,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다양한 것들을 전해 듣기도 했다.
음악 취향도 포괄적인 편이라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생생한 경험담을 말해주었다.
늘 맛있는 걸 사주려고 했고, 기특하다고 여겨주고.
정말로 좋은 형들이었다.
다만, 체력들이 지나치게 좋아서 형들과 몇 시간 보내고 나면 기를 쪽 빨린 듯 당장 누워야 할 것만 같은 게 문제였다.
어디서 산삼이라도 주워 먹은 건지 도무지 지치질 않았다.
그 한 가지 단점 때문에 형들을 자주 만나는 건 체력적으로 무리였다.
오죽하면 찬이가 가영 형을 슬슬 피할까.
체력으로는 꽤 자신 있었는데 형한테는 어떻게 안 된다고 중얼거리기도 했었다.
상황이 이러니 집에 오자마자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지만, 씻는 동안 마음을 비웠다.
형들이랑 맛있는 거 먹고 놀다 푹 자자고.
그렇게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거실에 나왔더니 가영 형이 수상하게 웃으며 반겼다.
가영 형이 자기 옆에 앉으라는 듯 손짓했지만, 세빈이랑 진우 형이 자기들 사이에 앉으라고 바닥을 팡팡 두드리기에 잽싸게 거기 앉았다.
어림도 없지, 가영 형 옆에 앉았다가 무슨 꼴을 보려고.
포잉은 그런 우리를 아일랜드 식탁 위에 앉아 꼬리를 살랑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구경할 거야?’
‘저 인간들은 재밌으니까.’
눈을 느리게 깜박이던 포잉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하며 식빵 자세를 취하더니, 본격적으로 구경하기 시작했다.
포잉은 사람들을 구경하는 걸 좋아했다.
가끔 내가 숙소에서 쉴 때는, 번화가로 나가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할 만큼.
“환아, 너 왜 형이 사준 잠옷 안 입냐?”
“그걸 어떻게 입어요!”
“왜, 딱 너희 생각나서 산 건데.”
“찬이랑 경환이는 잘 입는데 왜.”
서운하다는 듯 툴툴거리던 가영 형이 하늘색 잠옷을 입은 찬이와 노란색 곰이 그러진 잠옷을 입은 경환 형을 가리켰다.
얼마 전, 숙소로 택배가 도착한다는 문자에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물건을 시킨 적이 없는데 내 핸드폰으로 문자가 왔으니까.
혹시나 해서 우진 형을 대동하고 택배를 뜯었다.
아직 숙소로 사생팬이 찾아온 적은 없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보낸 사람 이름에 ‘한가영’이라고 적혀있었지만, 그마저도 신뢰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뜯어낸 택배 박스 안에는 알록달록한 색상의 잠옷이 들어있었다.
“유치원생이냐고요, 진짜….”
“어허, 얘가 뭘 모르네. 사람이 너무 시꺼먼 색만 가까이하면 마음까지 우울해진다? 예쁜 색 잠옷 입고 좋은 꿈 꾸라는 이 형들의 마음을 뭐로 보고!”
“그러는 형은 분홍색 곰돌이 잠옷 입고 자요?”
“아니, 난 그냥….”
“거기까지. 말하지 마.”
나랑 티격태격하던 가영 형은 세비 형의 음산한 목소리에 입을 꾹 다물었다.
가영 형은 뚱한 얼굴이 되었지만, 세비 형은 무서웠는지 입술만 삐죽거리다 컵에 있던 콜라를 원샷했다.
각 잠옷별로 누구 건지 이름까지 써서 넣은 그 정성을 제발 다른 데 써줬으면 싶었다.
노란색 병아리가 그려진 잠옷이라니, 누가 봐도 놀리는 거잖아.
“오늘도 연기 수업받느라 늦었다며?”
“네. 제가 너무…. 네, 영 그렇더라고요. 큰일이에요.”
“조바심 내지 마, 넌 잘할 거야.”
진우 형은 일말의 걱정도 없는 듯 산뜻한 목소리로 말하며 치킨을 덜어놨던 그릇을 내 앞으로 밀었다.
진우 형은 내가 연기에 도전한다는 걸 알게 됐을 때부터 너라면 잘할 거라며 이해할 수 없는 신뢰를 내비쳤다.
나도 나를 못 믿는데 이 형님은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고마우면서도 신기했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세빈이는 자기가 발라둔 치킨 살을 내 접시에 옮겨 담기 시작했다.
“막둥이 먹지, 왜.”
“난 많이 먹었어요!”
요새 들어 형들을 챙기면서 뿌듯한 얼굴을 하길래 착하다, 착하다 칭찬했더니 맛 들린 모양이었다.
세빈이는 팀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편이라, 막둥이가 뭘 하든 위험한 것만 아니라면 모든 멤버가 우쭈쭈 잘한다 칭찬하고 있었다.
오늘은 치킨 살을 발라주는 것으로 정한 것 같았다.
얼굴에 뿌듯함이 가득하길래 머리를 헝클어주며 한껏 칭찬해주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진우 형이랑 새벽 형들까지 있어서 평소보다 한껏 더 칭찬을 받았는지 어깨가 하늘을 뚫을 것처럼 으쓱거렸다.
귀여운 내 새끼.
“아, 이제 시작하나 보다.”
“어디 우리 병아리들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볼까?”
“완전 열심히 했는데 제대로 나오려나 모르겠어요.”
“DCL이랑 같이 나갔다고 했지?”
세빈이가 발라준 치킨을 포크로 콕콕 집어 먹으며 나도 TV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말만 안 했을 뿐, 우리 활약이 어떻게 편집되어 나올지 궁금한 건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길고 긴 광고가 끝나고, 화면에는 오프닝 장면이 흘러나왔다.
“거기 애들이랑 하준이가 친구라고 그랬나?”
“네. 리우가 저랑 영빈이랑 같이 연습생 생활했거든요.”
“걔네는 언제 데뷔했어?”
“올해 초에 했을 거예요.”
가영 형은 호구조사라도 하듯 준이 형한테 DCL에 대해 이것저것 캐묻고 있었고, 키스 형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화면을 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DCL과 우리가 만나 반가워서 폴짝거리는 장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기도 찬이랑 비슷한 애들이 있네.”
“하, 하하….”
“나이도 비슷해서 금방 친해졌어요!”
안 찍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언제 찍었나 싶었다.
이래서 방송국에서는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하는 거구나 싶어 속으로 다시 한번 조심하자 다짐했다.
고정 멤버인 선배님들께 인사드리고 제비뽑기로 팀을 나눈 뒤, 확정된 팀별로 서는 장면이었다.
“이야, 환이 표정 봐. 세상 울적해 보여.”
“아까 찬이랑 환이 같은 팀 되니까 다들 신나하던데?”
“세빈이는 누가 봐도 좋아하는 것 같네.”
그 후 방송이 진행되는 내내 형들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끊임없이 입을 놀렸다.
찬이도 새삼스럽게 촬영할 때가 생각나는지 키스 형과 세비 형에게 열심히 자기가 어떤 활약을 했는지 자랑하고 있었다.
“와, 저 때 저기 숨어 있었어?”
“네. 원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죠.”
“어쩐지 쎄한 기분이 들더라니.”
방송국 안을 헤매며 미션지를 찾아 나선 멤버들과 그 사이에서 미션지를 모아서 몸을 숨긴 나.
포잉의 도움을 받아 가며 숨어다니던 때를 떠올리고 있었는데, 황당하다는 듯한 준이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면에는 복도를 따라 두리번거리며 지나가는 준이 형 팀원들, 그 바로 뒤 코너에 있는 화분에 몸을 숨긴 내가 보였다.
“지환이가 주장 역할을 톡톡히 했네.”
“오, 진짜 조사 많이 했나 봐?”
“아니, 저기서 후광을 왜 넣은 거야!”
중간에 팀원들을 불러 모아 그림을 그려가면서 설명하는 내 모습, 그리고 그런 내 뒤에 후광 효과를 넣은 제작진.
그 모습에 찬이는 이미 웃느라 숨이 넘어갈 것 같았고, 세비 형과 진우 형은 실룩거리는 입가를 애써 가리고 있었다.
차라리 그냥 웃어요….
저 방송 촬영 때도 자꾸 몰아가는 멤버들 사이에서 설명하느라 힘들었는데, 어째서 지금도 모두가 날 두고 웃느라 바쁜 걸까.
“이야, 세빈이 엄청 날쌔네?”
“에이, 별거 아니에요.”
“아냐, 저 봐봐, 우리 세빈이가 제일 빠르게 잘 치고 빠지네.”
내가 봐도 우리 막내가 참 빠르긴 했다.
쫓아오는 상대 팀 사람들을 따돌리며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에 형들은 세빈이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없이 칭찬에 약한 우리 막내는 양 뺨은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졌지만, 목소리에는 뿌듯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TV 화면에는 서로가 쫓고 쫓기다 방송국을 헤매며 손바닥보다 작은 종이 카드를 찾는 풍경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흘러가는 분위기에 따라 형들의 웃음소리와 감탄이 추임새처럼 흘러나왔고, 멤버들도 생각보다 활약이 잘 나오는 것 같아 만족한 것 같았다.
‘계약자야, 너는 왜 방송 내내 숨어 있거나 바닥을 기는 것만 나오냐.’
‘내 역할이 그거였잖아, 포잉.’
‘매우 하찮아 보이는 건 알고 있음?’
‘….’
포잉의 뼈 때리는 발언에 갑작스럽게 삶의 회의가 느껴졌다.
“어? 저기에 카드가 또 숨겨져 있었네?”
“그러니까. 와, 진짜 지독하다….”
미션지를 찾아서 신나 하는 오수 선배님 바로 뒤에 있던 화분.
제작진은 화분 받침대에 절묘하게 숨겨진 황금 카드를 비추며 자막을 띄웠다.
- 이렇게 놓친 황금 카드 하나가 어떤 의미인지 이때는 몰랐다
자막과 시점의 교묘한 변화, 배경처럼 신나서 사라지는 오수 선배님의 뒷모습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뤘다.
“이렇게 장르가 바뀌나요.”
“다행히 장르는 안 바뀝니다.”
음산한 배경음까지 넣은 덕분에 갑자기 스릴러로 장르가 바뀔 뻔했다. 하지만 이어진 화면은 형들한테 붙들려 간지럽혀지는 세빈이 모습.
“세빈아,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거야.”
“저도 저 날 깨달았어요.”
키스 형이 툴툴거리는 세빈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웃었다.
키스 형은 워낙 피지컬이 좋은 편이라 예능에서도 언제나 상대를 농락하는 쪽이었다. 애당초 예능 자체를 잘 나가지 않았지만.
이왕이면 나도 그런 포지션이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현실은 계속 도망치고 숨고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내 모습이었다.
작전을 짜고 실행할 때는 긴장감 넘치고 힘든 시간이었는데, 이렇게 방송으로 보고 있자니 슬퍼졌다.
누나가 이걸 못 봐야 할 텐데….
그날 방송국을 꽤 오랜 시간 헤매고 다녔을 텐데, 편집을 거쳐 방영된 분량은 40분 남짓이었다.
이래서 영상의 꽃이 편집이라고 하는구나 싶어 새삼스레 신기했다.
화면의 마지막은 급히 차에 올라타는 우리 팀 모습과 희미하게 윤곽만 보이는 메인 미션 장소의 모습이었다.
“두 편으로 나눴나 보네. 다음 편을 봐야 제대로 알겠네. 누가 이긴 거야?”
“비밀이에요. 본방 사수하세요.”
“지환이 너는 우리한테 너무 비밀이 많아.”
“그게 또 우리 환이 매력 아니겠어요?”
처음 숙소에서 형들을 발견했을 땐 당황스러웠지만, 이렇게 다 같이 출연한 프로그램을 보는 건 사실 꽤 재밌었다.
우리 모습을 보면서 생생한 반응을 보여주는 형들이 고맙기도 했고.
“자, 이제 본격적으로 놀아볼까?”
“나 보드게임 가져왔어!”
“집에 안 가요?”
“이제 시작인데 무슨 소리야.”
정정. 그냥 다 빨리 자기 집으로 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