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44)화 (244/456)

244. REVEAL(5)

하준은 손안에 쥔 너덜너덜한 수첩을 넘겨가며 멤버들의 상태를 하나하나 점검하고 있었다.

핸드폰이 생긴 후부터는 핸드폰 내의 메모장에 그때 그때 메모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이 수첩을 버리지 않았다.

자기 전, 핸드폰 메모장의 내용을 직접 수첩에 옮겨 적으면서 다시 한번 변한 건 없는지 주의해야 할 건 없는지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이 수첩은 여러모로 하준에게는 행운의 부적 같은 것이었다.

처음 연습생들의 임시 리더로 지목받던 날, 영빈이 그에게 선물해준 것이라 더욱 특별했고.

워낙 천방지축인 연습생들을 모두 붙잡기에는 너무 바빴기에 틈틈이 수첩을 보며 회사와 이야기했고, 부족한 점을 채워갔다.

‘환이는 아직 더 지켜봐야 하고…. 세빈이는 영빈이가 본다고 했고.’

옆에는 찬이가 대짜로 팔다리를 자유분방하게 펼치고 잠들어 있었지만, 희미한 스탠드 조명에 의지한 하준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세빈이가 멤버들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당장 당사자도 느낄 만큼 그 의존도가 높았으니까.

그래도 찬이랑 함께 안무 제작에 참여하면서부터는 조금씩 자존감이 회복되는 것 같아 다행이었는데….

어느 순간 다시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는지 불안해하고 있었다.

세빈이의 고질병 같은 문제라 제대로 낫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힘찬이는 하준과 지환까지 셋이 함께 걸어오던 날이 고비였는지 그 후로는 점점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늘 무언가를 물어뜯던 증세도 많이 나아졌고, 감정 기복에 힘들어하던 것도 대부분 사라졌다.

다만, 아직까지는 멤버들의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이라 그 점을 신경 써 줘야 했다.

경환은 최근 곡 작업이 마음대로 안 되는 건지 조금 예민해진 상태였다.

물론 다른 멤버들은 잘 눈치챌 수 없을 만큼 미미한 변화였지만, 늘 멤버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하준은 알 수 있었다.

본인도 작업이 막히면 막막해서 온갖 허튼짓을 다 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기도 했고.

그 외에는 크게 문제 될 게 없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지환이는 한번 멤버들 심장을 크게 철렁이게 만들고는 그 후로 상태가 되려 좋아진 것 같았다.

그날 너무 울어서 애가 숨이 넘어갈까 봐 경환이가 굉장히 마음 졸이면서 지켜봤다고 했었다.

그 후 전전긍긍하면서 주시하다 느낀 건, 무언가 커다란 것을 하나 털어낸 듯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가족 꿈을 꾸었다는 거로 미루어보아 아마도 돌아가신 부모님을 뵙고 이야기를 잘 나눈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평소에는 그런 내색을 전혀 안 하던 동생이었기에 그 말을 전해 들은 날 하준과 영빈은 크게 자책하며 반성했다.

아무리 오래되었어도 가족을 잃은 슬픔이 그렇게 쉽게 사라질 것들이 아닌데 자신들이 더 챙겨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해졌다.

물론 지환이 알면 펄쩍 뛰면서 아니라고 할 것을 알기에 그저 조금씩 더 마음을 쓰기로 그렇게 영빈과 다짐했다.

영빈과 같은 그룹이 아니었다면 아마 하준은 언래블을 이렇게 잘 지켜내지 못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늘 알게 모르게 자신을 챙겨주고 멤버들을 더 많이 챙기려 노력하는 영빈 덕분에 하준은 버거워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늘 조심하려 애썼다.

영빈이 정말 소중한 친구였기에 자신이 영빈에게 의지하는 걸 당연시 하지 않도록, 그 또한 중요한 멤버라는 걸 잊지 않도록.

공은 공이고 사는 사라고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유독 멤버들에게는 그 선을 긋는 게 어려워 이제는 어느 정도 포기하고 있기도 했고.

그저 친동생들처럼 열심히 아끼고 보듬어서 다 같이 잘 클 수 있도록 모두가 힘내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중에까지 쭉 같이 살자고 말하는 건 조금….

이놈들을 한참 후까지 옆에 끼고 산다는 생각은 잠깐 해보았지만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불길한 상상은 하는 게 아니라고 자신을 다독이면서.

그래도 하준은 처음보다 훨씬 나은 상태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임시 리더였을 때는 인원도 더 많았고, 날뛰는 망아지 같은 애들도 더 많았다.

책임지는 건 싫고 무언가를 누리는 것만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으니까.

그러다 문뜩 김우빈이 생각났다.

처음에는 마냥 안타까웠다.

재능만 놓고 봤을 때는 미래가 기대된다는 이야기까지 듣던 친구였다.

한순간의 유혹에 흔들려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욕심은 많았지만 그렇게까지 나쁜 놈은 아닐 거라고, 같이 한 시간이 있으니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소현을 통해 김우빈의 일을 제대로 듣게 된 하준은 자신의 기억에서 그를 지우기로 했다.

연습생 때 사고 친 것도 그냥 혈기 왕성한 나이니까 라고 넘어갔지만, 쫓겨난 후의 모습은 너무 가관이었다.

SNS 계정을 만들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팬들을 선동질했다고 했다. 그래서 데뷔 초에 김우빈을 언급하는 댓글들이 많았던 거고.

그 후로도 여기저기 기자들과 접촉을 시도했고 우리 곡을 자기가 쓴 걸 뺏겼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고 했다.

김우빈은 단 한 번도 작곡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고 연습생 시절 그 비슷한 걸 본 적도 없었는데.

처음에는 지환이 작업물을 가지고 제 것이라고 장난질을 치려 했던 것도 몰랐다.

그저 타인의 작업물이라고만 하셨으니까.

5실은 공용 작업실 중에도 작은 곳이라 그곳에 있는 누군가의 연습 파일을 자기 거라고 거짓말한 것이려나 생각했다.

지환이 표정이 신경 쓰여서 설마 하는 생각은 했었지만….

나중에 소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김우빈에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여러모로 기가 막혀서 할 말이 없었다.

버젓이 개인 폴더에 있던 것들을 다 빼가서 자기 거라고 내밀었다는 말에서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띵해지기까지 했다.

하준도 곡을 만드는 사람이니까 안다.

하나의 노래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운과 노력이 필요한지.

그래놓고 졸업식을 자신이 만들었다고 언론 플레이까지 하려 하다니. 과하게 선 넘은 일이었다.

제대로 증빙이 불가능했기에 결국 기사 한 줄 제대로 내지 못하고 묻혔지만.

워낙 ON 엔터와 계약 해지 과정에서 지저분하게 굴었던 터라 제대로 된 소속사를 갖지 못했고, 지금은 연습생을 그만두었다고 들었다.

스트리머로 활동을 하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예전 연습생 중 한 명이 김우빈의 일을 폭로해서 지금은 이쪽으로는 쳐다도 못 본다는 것도.

여러모로 소현은 유능한 팀장이었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우리는 김우빈이 그렇게 떠난 후 그에 대해서는 거의 잊고 지냈다.

그를 생각하기에는 우리에게 매번 닥치는 일들이 너무 힘들었고, 정신없었으니까.

하지만 회사는 잊지 않고 있었다.

하준은 다시 한번 손안의 수첩을 만지작거렸다.

멤버들의 일상과 자신의 생각이 빼곡하게 담긴 수첩.

손안에 이 수첩을 꾹 쥐는 것만으로도 조금 힘이 났다.

이 안에 가득한 언래블의 역사가 매일 매일 갱신되고 있다는 게 가장 중요했다.

‘우리는 조금씩 계속 나아가고 있어.’

하준은 다시 한번 마음속에 그 문장을 되새기며 겨우 스탠드의 불을 끌 수 있었다.

다행히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보냈다.

* * *

“안녕하세요, 버둥이들! 여러분의 깜찍이 백수 형이에요!”

개인 방송을 현장에서 직접 본다는 건 꽤 신기한 광경이었다.

눈앞의 스트리머는 익숙한 듯 인사 구호를 외쳤고, 기다렸다는 듯 채팅창에는 무수히 많은 말들이 우르르 올라왔다.

대부분 깜찍이라는 말에 대한 비난이었지만, 스트리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낄낄거리며 태연하게 대꾸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우리보다 더 팬들을 잘 대하는 것 같았다.

“보자, 오늘도 시작 밴 10명 됐으니까 제대로 시작해봅시다.”

싱글벙글한 얼굴로 시청자들과 대화를 주고받는 스트리머 백수 형님을 지켜보다, 세빈이가 눈치를 보며 귓속말로 물어왔다.

“형, 시작 밴이 뭐예요?”

“아 백수 형님 컨셉 같은 건데, 음…. 시작할 때 과격한 발언이나 부적절한 발언 하는 사람 10명 정도 채금 걸고 시작한다고 하시더라고.”

“아하….”

멤버들은 꽤 긴장한 듯했지만, 세빈이는 의외로 호기심이 긴장을 눌렀는지 여기저기 구경하느라 바빴다.

“버둥이들, 오늘은 특별한 분들을 모신다고 말씀드렸었죠. 무려 현직 아이돌이라고요? 제가 이 정돕니다!”

사전 공지했던 덕분인지 평소보다 시청자가 굉장히 많다고 넌지시 PD님이 말을 해주었었다.

백수 형님도 대기업이었지만, 우리 솜뭉치들도 꽤 많이 보러 온 것 같았다.

미리 정해둔 멘트에 우리가 입장했고, 채팅창에는 수많은 물음표와 메시지가 미친 듯이 올라가고 있었다.

“오늘 함께할 손님은 최근 가장 핫한 아이돌이죠, 언래블입니다. 어서 오세요!”

“둘, 셋! 안녕하세요! 함께 풀어나갈 미래, 언래블 입니다.”

“함께 풀어나갈 미래, 언래블 입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여러분!”

“처음 뵙겠습니다!”

다행히 무사히 인사를 넘기고 다들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야, 오늘 갈고리 잘 팔리겠네. 방금 ‘처음 뵙겠습니다’ 한 거 힘찬 씨죠?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네? 저요? 왜요?”

“제가 언래블에 대해 공부를 좀 했거든요. 웃음벨이 힘찬 씨라고 하던데.”

“아닌데요! 저 완전 진지캔데!”

찬이와 스트리머의 티키타카에 채팅창에는 또다시 무수한 물음표가 올라왔다.

아무래도 저 물음표들은 우리 솜뭉치들인 것 같았다.

찬아, 그러게 좀 말이 되는 말을 해야….

“저희 찬이가 진지할 때는 진지한데 오늘은 아닌 것 같네요.”

“네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얘들아, 쉿.”

준이 형의 말 한마디에 찬이도, 나도 입을 다물자 백수 형님은 손뼉까지 쳐가며 준이 형을 치켜세웠다.

“역시 리다님! 저희 버둥이들이 세상이랑 안 친한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자기소개를 먼저 좀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백수 형님, 저분들이 아니라고 하는데요?”

“야, 니네 친구 없잖아! 친구 없어서 맨날 내 방송 보고 있는 거 다 알거든?”

그러자 득달같이 후원 메시지가 날아왔다.

- 형이 친구 없으니까 우리가 놀아주는 거지. 우리 무시함?

그 소리에 세빈이가 놀라 움찔거리자, 백수 형님이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응, 너 밴. 니들이 자꾸 말 끊으니까 진행이 안 되잖아. 좀 기다려봐요, 우리 아직 인사도 제대로 안 했어!”

찬이와 경환 형은 낯선 이 환경이 재밌는지 연신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 후 차례대로 자기소개를 한 우리 모습에 다시 후원 메시지가 날라왔다.

- 전대물…? 그럼 누가 핑크임?

“남자는 핑크죠! 그런 의미로 제일 귀여운 막내에게 양보합니다.”

“?”

잽싸게 받아먹는 찬이 모습에 백수 형님은 감탄한 듯했고, 얼떨결에 한 방 먹은 세빈이는 눈으로 찬이에게 욕했다.

“오늘은 미리 공지한 것처럼 조금 특별한 이야기를 할 거예요. 버둥이들도 다 아는 얘기긴 한데.”

백수 형님이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즐겁게 말을 잘 정리해 주신 덕분에 멤버들 모두 조금씩 긴장을 풀 수 있었다.

한참을 꼼지락거리던 세빈이의 손가락이 멈추었고, 내 옷자락을 슬며시 잡고 있었던 찬이도 손을 놓았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백수 형님에게 신뢰가 생겼다.

“‘Pluto challenge’ 그 시작과 방향, 그리고 언래블이 기대하는 긍정적인 영향 같은 걸 이야기 하는 시간을 가질 거예요. 아니, 거기! 시작도 안 했는데 자지 말고!”

그 스트리머에 그 시청자라더니 시청자들의 드립이나 반응도 마냥 신기하고 재밌었다.

이전 생에도 딱히 인터넷 방송을 보지 않았던 나는 이 모든 것들이 신기하고 즐거웠다.

“저분들 다 자는 거예요? 저희가 재미없어서 주무시는 거예요?”

아직 때 묻지 않은 우리 세빈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자는 이모티콘과 ‘Zzz’로 도배되던 채팅방이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다.

역시 우리 막내 효과는 대단했다.

더불어 나는 오늘 채팅창에 가장 많이 올라올 메시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물음표와 ‘ㅋㅋㅋ’겠지,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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