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43)화 (243/456)

243. REVEAL(4)

촬영장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숙소에 돌아오니 영빈 형이 끙끙거리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형?”

“어…? 왔어?”

“왜 몰골이….”

“몰골이라니 말이 심하네!”

“맞아! 영빈 형은 열심히 연습해서 그런 건데!”

온몸이 쑤시는지 러그 위에 널브러져 있는 힘없는 맏형의 모습은 참 안쓰러워 보였다.

공사판에서 노가다라도 뛰고 온 건가 싶을 정도로 상태가 별로였지만, 당사자는 ‘허허’하고 노승처럼 웃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 물론 비틀거려서 지켜보기 조마조마했지만.

그 모습에 찬이는 웃느라 바빴고, 세빈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영빈 형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역시 우리 막내, 착하기도 하지.

“오늘부터 춤 연습에 신경 쓰느라 몸살이 났나 봐. 약 먹었으니까 내일은 더 낫겠지.”

“아, 좀 무리했나 보네.”

“세빈이랑 했거든.”

“아하….”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내게 준이 형이 상황을 설명해줬고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 세빈이는 귀엽고 착하지만, 연습할 때는….

그래, 연습할 때는 인격이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뭐랄까, PT 끊은 헬스장 트레이너 같달까?

웃으면서 옆에서 ‘회원님! 한 개만 더하면 돼요!’라고 해서 낑낑거리고 한 개 더하면 잘했다고 마구 칭찬해준다. 그런데 그 후 ‘자, 이제 한 개만 더하면 정말 끝!’이라는 말을 열 번쯤 더 하는.

그렇게 사람을 웃으면서 몰아치는데 이게 또 막내가 그렇게 하다 보니 다들 그 연습을 못 하겠다고 포기하지도 못하는 그런 상황.

덕분에 세빈이랑 연습하면 실력은 확실하게 늘었다.

다만, 부작용이 있다면 그저 몸이 내 몸이 아니게 되는 것…?

우리 형, 뼈에 좋은 거라도 사다 줘야겠다.

“영빈 형, 마음 독하게 먹었네.”

“에이, 그렇게 말하면 제가 심한 것 같잖아요.”

“응. 너 심함. 좀 많이 심함.”

“형이 나보다 더하거든?”

멤버들의 춤 실력 평균을 올려주는 조교 둘이 서로가 심하다고 투닥거리고 있었다.

그 옆에서 준이 형도, 경환 형도, 나도 그저 그들을 외면하는 게 전부였다.

우리가 보기엔 세빈이나 찬이나 춤 가르쳐 줄 때는 그냥 악마 같았다.

귀여운 악마도 악마는 악마니까.

오죽하면 우리가 제영 쌤보다 저 둘을 무서워할까.

피곤한 몸을 러그 위에 누이고 메모했던 대본을 주섬주섬 꺼내자 경환 형이 슬쩍 옆에 와 앉았다.

“공부 잘하고 왔어? 사람들이 안 괴롭히고?”

“형, 지금 학교 다녀온 아들한테 하는 말 같은 거 알아요?”

“걱정되니까 그러지, 인마.”

“저야 구석에 짱박혀서 공부만 하다 오는 건데요, 뭐.”

“지환이 네가 좀 순해 빠졌어야지.”

“쟤는 얼굴이라도 차가워서 다행이라니까. 아니었으면 진즉에 사기당했을 것 같아.”

비실비실 웃으며 경환 형에게 말을 던지자 조금 뚱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옆에서 찬이랑 준이 형이 냉큼 맞장구치길래 그냥 웃고 넘겼다.

아니라고 해봤자 안 듣는다는 걸 그동안 많은 실패를 경험하면서 알아버렸다.

얘들아, 도대체 날 뭐로 보고 있는 거니…?

멤버들은 홀로 촬영장에 가는 나를 무척이나 걱정했다.

워낙 다양한 사람이 모이는 곳이니 혹시라도 괴롭힘당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늘 이렇게 촬영장을 다녀온 날에는 내 상태를 살폈다.

쏟아지는 멤버들의 시선과 관심이 이제는 부담스럽지 않아서 이건 이것 나름대로 꽤 뿌듯한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멤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늘 전전긍긍하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느라 바빴으니까.

“아, 참. 오늘 우연히 메인 작가님 만났어요.”

“오, 뭐라고 하시디?”

“제가 연기할 지웅이가 기대된다고, 열심히 해달라고 하셨어요.”

“좋네, 좋아. 작가님이 우리 화니를 제대로 봤네!”

“당연하죠. 그러니까 형한테 캐스팅 제의도 들어왔겠지!”

좋은 말을 들었다고 전해 들은 찬이랑 세빈이는 자기들끼리 투닥거리던 것도 멈추고 옆에 들러붙어 신나했다.

다만, 신난 게 과했는지 양쪽에서 붙잡고 흔들어 대는 통에 기운이 없었던 나는 종잇장처럼 팔랑거리며 형들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경환 형은 느긋하게 바닥에 엎드린 그대로 턱을 괴고 재밌다는 듯 구경했지만, 다행히 준이 형이 둘을 떨궈주었다.

공부하는 거 방해하지 말라면서.

오늘 영빈 형은 어린 자식들 부양하느라 공사판에서 노가다 뛰고 온 가장의 모습이었다면, 준이 형은 까부는 자식놈들 뒤치다꺼리에 지친 엄마 같았다.

이 광경이 익숙한 스스로가 신기하기도 하고, 무언가 간질거리기도 해서 정확히 무어라 정의 내릴 수는 없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은 게 맞지.

멤버들은 늘 서로에게 따뜻하고 포근해서 밖에서 느꼈던 여러 감정이 어느새 모두 녹아내려 사라져 버렸다.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숙소가 평소와 같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다시 대본으로 눈길을 돌려 천천히 읽고 있던 그때, 포잉이 한마디 툭 던졌다.

‘쯧, 하여튼 너희 애들은 너무 물렁해.’

‘착한 거지. 그래도 마냥 순진하지 않아, 괜찮아.’

‘그렇다고 쳐주마, 계약자 놈아.’

아무래도 아까 촬영장에서의 일이 포잉의 심기를 거슬렀던 것 같았다.

우진 형을 살펴달라는 내 부탁 때문에 포잉은 종종 나와 떨어져 있었고, 그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포잉이 오자마자 푸념하듯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건데 이야기를 듣자마자 포잉은 크게 화를 냈었다.

가만 안 둔다고 길길이 날뛰는 포잉은 무섭기보다 귀여워서 오구오구 하며 달래주었지만, 아무래도 그 둘을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요정들이 직접적으로 개입하면 그 책임을 크게 묻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포잉이 혼나는 건 싫다고 열심히 달래야 했다.

사실 지금도 대본을 꼭 쥐고는 있었지만, 글자가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았다.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촬영장에서 작가님과 잠깐의 대화를 나눴고, 궁금했던 ‘임지웅‘이라는 인물에 대해 몇 가지 여쭤볼 기회도 얻었다.

덕분에 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고.

그동안 열심히 공부한 보람이 있다고, 속으로 뿌듯해하던 찰나 흘러가듯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다 된 드라마에 아이돌 뿌리기가 아직도 있네, 이 PD님도 이제 옛날 같지 않은가 봐.”

“소속사에서 돈 좀 찔러 넣었나 보죠. 제작비가 어디 한두 푼이에요?”

“후려치기도 정도껏이지 연기 한 번도 안 해본 애라잖아요.”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는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누가 봐도 내가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 구석까지 와서 저렇게 티 나게 중얼대지는 않을 테니까.

사실 크게 화가 나거나 그러진 않았다.

이전부터 뮤지컬, 드라마, 영화 등 여러 장르로 퍼져나가는 아이돌에게 늘 따라붙는 꼬리표였다.

게다가 어차피 그것도 곧 사라질 말들이라 대수롭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깎아내리려는 저치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단역들이었고, 힐끔 바라보자 거리를 벌리는 겁쟁이들이었다.

조주연급이나 인지도가 있는 사람들이 나를 적대시 했다면 꽤 피곤한 일이 생겼을지도 모르겠지만.

문득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벌써 급 따지는 그런 속물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아 씁쓸해졌다.

적어도 멤버들에게, 팬들에게 부끄러운 사람은 되지 말자고 그렇게 늘 마음을 다잡곤 했는데.

어쨌든 그들이 무시하고 질투하는 아이돌들은 점점 더 무시할 수 없을 실력을 쌓아가고 있었고, 앞으로는 그 수가 무섭게 늘어날 거였다.

어떤 일이든 도태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적어도 내가 본 연예계는 그랬다.

대중은 자극에 금방 익숙해졌고, 얼굴을 계속 비추지 않으면 잊어버렸다.

배우냐 아이돌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저 개개인이 얼마나 자기가 맡은 역할을 잘해나가냐의 차이일 뿐인데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얼굴과 이름을 기억했기에 스킬을 써서 속마음을 읽어볼까 했지만, 결국 시도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지독하게 역겨운 말들만 가득할 것 같았고, 작가님과의 대화로 기분이 좋았던 걸 망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시기 질투에 찌들어 자기 앞길도 못 보는 사람들과 괜히 드잡이질할 필요 없다고 자신을 다독인 나는 촬영이 한창인 배우들을 바라봤다.

시선에 들어온 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자 자신과 호흡을 맞출 주연 배우였다.

몇 번 이름을 들어봤던 사람이었지만 잘 알지는 못했다.

이번 생을 살면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이 ‘이럴 줄 알았으면 기사 좀 챙겨보고 연예계에 더 관심을 가질걸’이었지만, 다 부질없었다.

어차피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싶기도 했고.

다만, 나와 합을 맞출 배우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었다.

진우 형한테 물어볼까 하다 너무 귀찮게 하는 게 아닌가 했는데 다행히 진우 형이 먼저 이야기를 해줬다.

- 진성이 형이 좀 깐깐하긴 한데 나쁜 사람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일에 좀 철저한 타입이라 너랑도 잘 맞을 거야.

함께 뮤지컬을 본 날이었다.

난 전혀 철저한 타입이 아닌데 아무래도 우리 진우 형은 또 커다란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해를 풀려고 시도했었지만, 평소처럼 ‘형은 다 알아’라고 글자로 써 붙인 듯한 얼굴로 인자하게 웃어서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옆에 있던 키스 형과 세비 형도 고개를 끄덕이는데 가영 형만 혼자 피식거리고 웃었다.

도대체 이 형님들을 왜 내 말을 안 믿는 거지…?

여태까지는 지인의 지인으로 소개받으면 대부분 웃으면서 친절히 대해주던 사람이 더 많았다.

하지만 이진성 배우는 달랐다.

딱 처음 본 신인 배우를 대하듯 선배로서의 모습으로만 대해주었다.

내가 어디에 누구고 뭘 했던 사람이고 그런 것들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속으로 조금 놀라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우리 그룹명이나 내 이름을 들으면 데미갓과의 이야기를 떠올리거나 악플러와 싸우는 모습만 떠올렸다.

우리는 그런 일들을 무수히 겪은 후에야 처음 팀장님이 해주셨던 이야기를 이해했다.

불쌍한 애들이라는 꼬리표가 붙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셨던 그 말들.

그렇게 조심하고 최대한 고르고 골라서 대응을 한 지금도 그 이야기가 우리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사실 이진성 배우가 그렇게 대해 준 덕분에 나도 마음 편하게 몇 가지 질문도 할 수 있었다.

선배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것도 후배의 특권이라면 특권이니까?

처음 내가 했던 질문은 이진성 배우가 생각하는 주인공이었고, 두 번째 질문은 임지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였다.

흥미롭다는 듯 눈이 잠시 반짝였지만 금방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는 몇 가지 이야기를 흔쾌히 들려주었다.

그렇게 조금씩 지웅이에 대해 알아서, 오늘 작가님과의 대화 후 겨우 임지웅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오늘 하루를 갈무리하는 동안 자기들끼리 이런저런 장난을 주고받다가 비슷한 자세로 러그 위에 드러누운 멤버들이 말을 걸어왔다.

“환아, 어때?”

“연기는 여전히 모르겠는데 지웅이는 조금 알 것 같아.”

“그래, 역시 우리 화니는 부지런하구만?”

내 대답에 수긍한 찬이가 히죽거리며 내 옆으로 쿠션을 툭 던져주었다.

이놈의 고양이….

어째서인지 팬들 사이에서는 날 상징하는 동물이 고양이가 된 모양이었고 덕분에 자꾸 고양이 인형을 선물 받았다.

점점 선물 받은 인형들이 많아져서 멤버들과 나는 일부만 남기고 보육원에 기부했다.

그 내용도 또 다른 우리 집인 공식 카페에 공지로 남겨 두었고.

“아, 솜뭉치들 보고 싶다….”

“저도요. 같이 무대 하고 싶다….”

무대에 서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최근에 스케줄은 음악방송보다 잠깐잠깐 얼굴을 비추는 예능이 더 많았다.

다행히 찬이나 세빈이는 적응을 잘하고 있었고, 둘 다 서로 다른 매력으로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받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에게 우리를 기억해달라고 하기에는 예능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우진 형이나 팀장님은 우리에게 조급해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게 또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조금 답답했다.

한편, 준이 형이 읽던 책을 내리고 한 덩어리처럼 뭉쳐서 꼼지락거리는 우리를 바라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밖에서는 그럭저럭 아이돌 같은 동생들이 집에서는 슬라임 덩어리 같으니 걱정이 많은 것 같았다.

근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형의 시선에 가장의 어깨가 무겁구나 하는 걸 느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러다 우리 형 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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