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42)화 (242/456)

242. REVEAL(3)

한미영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현장에 도착했다.

이구영 감독을 믿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쓴 이야기가 생명력을 가지고 뻗어 나가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다.

개인적으로도 무척이나 애정을 가진 작품이기에 캐스팅 때도 이 감독과 머리를 싸매고 많은 고민을 나누기도 했었다.

그러다 우연히 본 영상과 사진 때문에 충동적으로 감독에게 배우를 추천하기도 했고.

현장에 자주 나가지는 못하지만, 현장 상황은 전해 듣고 있었기에 별문제 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미스 캐스팅인가 싶어 후회와 기대를 번갈아 하며 골치를 썩였던 인물이 의외의 행동을 하고 있다는 데서 흥미가 동했다.

연기해본 적 없다고 본인의 입으로 직접 말했던, 언래블이라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였다.

‘임지웅’은 등장은 굉장히 적은 캐릭터지만, 시나리오를 이끌어가는 데 키 포인트 같은 역할을 했다.

‘임지웅’과의 사건이 주인공 인생의 터닝 포인트이기도 했고, 그와 관련된 기억이 주인공인 ‘박성호’에게는 트리거이기도 했다.

한미영은 한창 촬영 중인 배우들의 모습을 잠시 살피다 분주하게 돌아가는 촬영장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네임 밸류 때문인지 현장 방문 때마다 스태프들이고 배우들이고 난리 치는 데 질린 미영은 어느 순간부터 절대로 촬영 중에는 인사하지 말라고 못을 박아놨다.

인사는 촬영이 중단되는 쉬는 시간에나 하라고.

그때, 미영의 눈에 한쪽 구석에서 너덜너덜해진 대본을 쥐고 배우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누군가가 들어왔다.

“정말 현장에 와있네?”

처음 연기 경험이 없다기에 걱정했지만, 소속사에서 김미연 선생님께 지도받고 있다는 말을 전해왔기에 조금 안심했다.

미영은 그분이 하는 일이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일단은 믿을 생각이니까.

그렇게 합류한 언래블의 멤버.

그는 무슨 근심 걱정이 그리 많은지 손에 쥔 대본과 배우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펜을 든 손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확실히 아이돌이라 그런지 인물은 참 훤하네.’

그동안 많은 아이돌과 배우를 본 그녀였지만, 지환은 느낌이 조금 달랐다.

콕 집어 말할 수 없지만, 시선이 자꾸 가는 그런 분위기.

얼마나 집중했으면 사람들이 다니는지도 모르고 저러고 있나 싶어 슬그머니 장난기가 발동했다.

근처에 다가간 미영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아요?”

“네? 엇? 작가님, 안녕하세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 가까이서 보니까 더 앳돼 보였다.

18살이라고 했던 게 기억 끝에서 간신히 떠올랐다.

“쉿. 목소리 조금만 낮추고 이야기할까요? 촬영에 방해가 되면 안 되니까요.”

“아, 네. 조금 놀라서….”

찌푸린 얼굴에는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었는데, 당황해서 허둥지둥하는 모습은 또 달랐다.

이런 걸 온탕 냉탕을 오간다고 했던가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던 미영은 엉거주춤 서 있던 지환의 옆에 앉았다.

“대본, 잠깐 봐도 될까요?”

“네. 어, 그런데 많이 지저분해서….”

그사이 침착을 되찾은 건지 조용조용 말을 이어가는 지환의 모습이 흥미로웠다.

보통 메인 작가를 마주하면 다들 어떻게든 더 말을 붙여보려고 하거나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기 일쑤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 분량을 늘리고 싶어 했으니까.

하지만 지환은 당황한 기색이 사라지자 되려 말하는 것도, 시선도 굉장히 제한적으로 변했다.

사람과의 대화 자체를 꺼리는 걸까, 경계심이 심한 타입인 걸까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수많은 캐릭터를 만들고 이야기를 꾸려가다 보니 사람을 만나면 상대방을 파악하고 어떤 캐릭터인지를 추측해보는 게 미영의 오랜 버릇이었다.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건네주는 대본을 받은 미영은 대본을 휙휙 넘기며 지환이 남겨둔 메모들을 훑어보았다.

‘임지웅’에 대한 고민이 무수히 많이 남아있는 대본이었다.

자신의 배역에 몰두하는 건 좋은 징조였다.

“지환 군이 생각하는 임지웅은 어떤 인물인가요?”

미영은 인물을 만들어 내고 스토리를 엮어가는 자기 일을 사랑했다.

그만큼 자신이 만들어 내는 캐릭터들을 사랑했고.

하지만 자신이 만든 캐릭터를 무작정 강요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이야기의 흐름이었고, 그 안에서 인물은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배우들에게 종종 자신이 맡은 인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는 했다.

조금 전 질문도 충동적이기는 했지만, 그만큼 궁금했다.

과연 이 신인 배우는 ‘임지웅’을 어떤 인물로 그리고 있는지.

잠시 주저하는 듯, 고민하는 듯 미간을 좁히던 지환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오해가 지웅이를 비틀어버렸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해요. 지웅이는 너무 긴 시간 고통받았고 죽지 않기 위해서 그런 성격이 됐다고, 전 그렇게 느꼈어요.”

처음에는 조금 눈치를 보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부터 목소리의 떨림이 사라졌다.

지환이 그리는 ‘임지웅’은 한미영이 생각한 ‘임지웅’과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 이야기를 듣는 내내 설득당하는 것 같았다.

대본에 적힌 무수한 메모들 때문일까?

메모에는 다른 배우들이 연기할 때 단편적으로 언급되는 ‘임지웅’의 모습과 그가 느낀 점들이 가득했다.

그 와중에 ‘임지웅’을 책하는 듯한 낙서도 있었고, 공감하는 듯한 내용도 있었다.

이후에도 천천히 자신이 생각하는 임지웅을 그려내던 붉은 입술이 어느 순간 멈췄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친 순간, 지환이 숨을 토하는 것처럼 힘겹게 덧붙였다.

“이런 말 하는 게 조금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저는 지웅이가 가여워요.”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한미영은 싱긋 웃으며 지환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충분하네요. 캐릭터 분석을 열심히 한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지환 군의 지웅이를 기대해도 될까요?”

“최대한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부진 목소리에는 희미하지만 열기도 느껴졌다.

다행히 미영의 처음 느낌처럼 지환은 ‘임지웅’역에 잘 맞는 사람인 것 같았다.

* * *

세빈은 최근 지환이 연기를 배우는 모습을 보며 복잡한 마음을 느꼈다.

멤버들 모두가 자신들은 연기에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장난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환은 또 한 걸음 앞서 나가고 있었다.

뿌듯함과 불안함이 자꾸만 뒤엉키자 개인 연습에서도 티가 났다.

“그만! 강세빈, 집중 안 해?”

“죄송합니다, 다시 할게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너도 잠깐 쉬면서 머리 좀 식히고.”

세빈의 눈이 불안한 심정을 대변하듯 깜박이자 트레이너인 제영은 우려 섞인 시선으로 세빈을 바라보다 오늘은 이만 쉬라며 연습실을 나갔다.

멤버들과 함께 연습하던 커다란 연습실이 아닌 조금 더 작은 연습실에 혼자 남은 세빈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꾸 자신만 뒤처지고 있는 듯해서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번 곡은 안무가 단순했지만, 아마도 앞으로 부르게 될 대부분 노래의 안무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뻔했다.

많은 아이돌 그룹의 춤이 그러했듯이.

이전 곡에서 힘찬과 세빈이 만들었던 춤이 최종 안무에 포함되었고, 많은 사람이 잘했다고 칭찬해주었다.

그런 일련의 일들로 세빈은 춤에 더 몰두하게 됐다.

적어도 춤 하나만큼은 다른 멤버들보다 자신이 더 잘해야 겨우 한 사람 몫을 하는 거란 생각에 빠져있었다.

처음으로 1위를 했으니 그만큼 더 높은 곳으로 훨훨 날아가고 싶은데 자신이 팀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고민도 함께.

세빈은 형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욕심이 무척이나 많았다.

힘찬은 춤도 워낙 잘 췄지만, 예능에서 좋은 반응을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세빈은 여전히 멤버들과 함께 있는 게 아니면 지나치게 긴장하는 탓에 자신이 더 잘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몰랐다. 모든 일이 늘 걱정스러웠다.

이대로 홀로 뒤처지면 다른 멤버들에게 짐이 될 수도 있었다.

형들에게 이런 고민을 상담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괜한 걱정을 끼치게 될 것 같아 말도 꺼내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애꿎은 연습실 바닥을 툭툭 건드리던 그때, 연습실 문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빈아, 연습 끝났니?”

“아, 네!”

영빈의 목소리였다.

세빈이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쪼르르 다가가는 사이 영빈은 문을 열고 들어와 세빈의 곁으로 걸어왔다.

시선이 마주치자 차가운 느낌이 드는 무표정한 얼굴에 봄이 온 것처럼 온풍이 불었다.

“잠깐 앉을까?”

“네? 네엡….”

처음 영빈과 마주했던 때, 세빈은 영빈을 무서워했다.

말도 별로 없는 데다 표정도 없었고 얼굴 자체가 날카롭게 생겨서 말 걸기가 힘들었다.

어쩌다 한 번씩 입을 열 때도 핵심만 짧게 말하던 터라 저 말이 나오기까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를 그때는 알지 못했다.

영빈도 처음보다 많이 변했다.

여전히 타고난 인상 때문에 날카로워 보였지만, 이제는 그 얼굴 안에 어떤 표정들이 감춰져 있는지 세빈은 알 수 있었다.

지금 영빈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걱정이었다.

“세빈아, 요새 무리하는 건 아니지?”

“….”

세빈은 자신은 잘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형들의 시선은 피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우물쭈물하며 막냇동생이 말을 잇지 못하자 영빈은 착잡한 마음이 되어 가만히 자그마한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 막둥이, 고민이 있으면 형이랑 이야기해볼까?”

“별다른 일 없어요….”

“그럼 그냥 아무 얘기나 할까?”

말을 감추는 세빈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빈은 굳이 그 속을 캐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같이 이야기를 하는 것을 택했다.

오늘 영빈이 하는 말들은 평소의 그와 조금 달랐다.

하준이나 지환이 평소에 쓰던 말투 같았다.

무언가 고민에 빠진 막내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혼을 내는 것처럼 느끼지 않게 하려고 신경 써서 말하고 있었다.

그 마음이 세빈의 마음에 와닿아 불안하게 뛰던 심장을 천천히 다독여 주었다.

“그냥… 그냥 다 잘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잘하지 못해서 너무 속상해요.”

“그랬어?”

“네…. 제일 자신 있는 게 춤이었는데 이제는 춤도 자신이 없고요.”

안쓰러운 마음에 평소보다 낮게 처져있는 동생의 어깨를 두드려준 영빈은 세빈의 마음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도 비슷한 고민으로 한참 동안 힘들어했으니까.

그때 그 우울에서 하준이 자신을 끄집어내 주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자신이 세빈이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세빈아, 형이 왜 찾아왔는지 알아?”

“아, 그러고 보니까 무슨 일이에요? 저희 모여야 해요?”

“너한테 안무 연습을 조금 도와줄 수 있냐고 물어보려고 왔어.”

“네? 저요?”

영빈은 다행히 평소보다 훨씬 부드럽게 웃을 수 있었다.

언제나 웃는 게 어색하고 힘들었던 영빈이었지만, 언래블 멤버들과 지내면서 참 많은 것이 변했다.

많이 깎여나갔지만, 그만큼 많이 단단해졌다.

“형이 자꾸 안무 때문에 지적받잖아. 내가 안무에 신경 쓰면 노래가 불안정해져서 단독 파트는 안무 최소화로 바꾸기도 했고.”

“그건 다 똑같죠! 아무래도 움직임이 커지면 목소리가 흔들리니까요.”

방금 전까지는 자신이 하는 게 없다고 자책하던 세빈이였지만, 이제는 맏형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형 탓이 아니라고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

영빈은 모든 언래블의 멤버들이 이렇다는 걸 알고 있어서 재밌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다들 너무 자기 자신보다 팀을 크게 생각했고, 그 때문에 누구도 얹어준 적 없는 부담감에 짓눌리고 있었다.

“너무 뻣뻣하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어서 세빈이 너한테 도움을 좀 받고 싶었거든.”

“제가요? 저도 잘 못하는데….”

“우리 세빈이가 얼마나 멋지게 춤추는지 매일 매일 봐왔는데. 형한테는 그런 말 안 통한다.”

뽀얀 세빈의 양 뺨이 발그레해졌다.

부끄러워하고 있었지만,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맏형에게 듣는 칭찬이 세빈이에게는 꽤 귀한 것이었다.

울적했던 마음이 어느새 사라졌고, 약간의 부끄러움만 남았다.

“아, 진짜…. 근데 형, 저 연습할 때는 좀 빡세게 하는데 괜찮아요?”

“형 관절을 조금만 생각해서 해주면 안 될까?”

“우리 관절에 무리 가지 않는 선까지만 해요!”

다가올 고통에 대비하는 영빈의 속마음과 달리 세빈은 형과 함께하는 시간이 마냥 신나 보였다.

영빈은 관절과 동생의 고민을 등가교환 했다고 생각하기로 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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