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40)화 (240/456)

240. REVEAL(1)

생에 첫 뮤지컬을 본다는 두근거림은 자리에 앉아 모든 빛이 사라지는 순간 절정에 달했다.

시라곤 학교 다닐 때 억지로 외웠던 것들밖에 모르는 나조차도 이름을 아는 시인.

극이 이어지는 내내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이런 게 연기구나.

화면을 통해서만 보던 그런, 나랑 아주 멀고 먼 것이라 생각했던 연기가 이렇게까지 가까울 수 있구나.

세트장이 화려한 것도 아니었고, 다양한 악기가 화려한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무대 위의 선배님들은 그 사람의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의 목소리만큼 훌륭한 악기가 없다는 게 어떤 건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피아노의 맑은소리와 어우러지는 사람의 목소리가 이토록 깊은 울림을 줄 수 있구나 싶어서 무릎 위에 얹었던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우리 애들 노래를 들을 때랑은 또 다른 종류의 설렘이 심장이 울렁거릴 만큼 거칠게 몰려들었다.

백석과 자야.

그리고 그걸 지켜보며 화자가 되어주는 한 명의 사내.

생의 가장 아름다운 홍안의 시기에 애틋하고 절절하게 사랑한 두 사람이 헤어지고, 소복이 내린 눈처럼 하얗게 바랜 나이에 다시 만난다.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웃기도 하고 울컥한 감정에 입술을 깨물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너무 부러워서 손바닥을 손톱으로 눌러 감정을 억눌렀다.

어떻게 저런 연기와 노래를 같이 할 수 있을까.

나는 하나만 해도 버거워서 새로운 걸 배우면서도 걱정이 이렇게 태산 같은데.

극의 흐름에 따라 발랄하고 귀엽기까지 했던 두 사람.

둘은 어느새 순식간에 노인이 되어 있었다.

화려한 분장으로 그렇게 변하는 게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조금 굽은 어깨와 조금 더 칼칼해지는 목소리, 힘에 부치는 듯 잘게 떠는 몸.

섬세한 연기로 아름다운 자야가 순식간에 슬픔과 쓸쓸함을 안고 나이를 한가득 먹어버렸다.

넋을 놓고 무대를 보다 보니 어느샌가 극은 끝나버렸고, 어떤 정신으로 끌려 나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멍하니 있자 진우 형은 슬쩍 옆에 다가와 웃었다.

“어땠어?”

“기분이 되게 이상해요.”

“왜?”

고개를 돌리니 키스 형까지 옆에 섰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음, 무대를 보는 동안은 배우들의 시간과 제 시간이 같이 흘러간 것 같아요.”

선뜻 답하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힘겹게 감상을 이야기했다.

배우들이 그때 그 시절의 사람이 되는 동안, 나는 그들의 곁을 사는 행인 1, 동네 사람 1이 되어 함께 살며 지켜본 것 같았다.

그런 내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진우 형은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우리 환이 첫 뮤지컬인데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

진우 형은 내 대답이 꽤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았다.

싱글벙글한 얼굴로 폭풍 칭찬을 하다가, 선배님들께 인사하자며 끌고 가기까지 한 걸 보니.

* * *

“환이가 낯을 가리긴 가리는구나.”

“저 진짜 낯 많이 가린다니까요? 왜 안 믿지….”

“우리한테는 그런 게 없었으니까 그렇지.”

커피가 든 유리컵을 한 손에 쥔 세비 형이 신기한 생물을 보듯 바라보더니 씩 웃었다.

상당한 사이즈의 유리잔이 희한하게 형들의 손에선 유난히 작아 보였다.

내 거랑 같은 사이즈인데 왜 이렇게 다른 것 같지…?

그동안 나는 낯가린다고 누누이 말해왔지만, 형들은 믿지 않았다.

방송국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하고도 꽤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신인이 낯가린다고 말해봤자 누가 믿어줘요. 조금이라도 성에 안 차면 한 소리 들을 텐데.”

“하긴. 그거 때문에 초반에 가영이가 욕을 좀 먹었지.”

“저 형은 낯가리는 게 아니잖아. 귀찮아서 그렇게 말한 거지.”

하소연 아닌 하소연에 세비 형은 수긍한 듯 웃었지만, 키스 형은 시큰둥한 얼굴로 세비 형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그거야 안 친하고 싶은데 들이대니까 그렇지.”

“그러면 티를 안 냈어야지. 무책임한 인간아.”

“나만 그랬냐? 너도 신인다운 귀여움이 없다고 했던 인간한테 짜증 냈잖아.”

카페 한복판에서도 투닥거리는 둘을 보고 있자니 아무것도 안 하는데도 기가 쭉쭉 빨리는 기분이었다.

“세비 형, 형은 어떻게 이걸 다 버티고 지내요…?”

“환아, 세비 형은 버티는 게 아니라 그냥 무시하는 거야.”

“맞아. 마치 병풍 같은 거랄까. 주변 풍경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

다정하게 웃으며 그런 말을 하면 더 무섭다는 걸 이 형은 분명히 알고 이러는 것 같았다.

이미 이런 상황에 적응이 끝난 진우 형도 편안해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이 형도 다른 의미로 대단해….

아직 투닥거리는 두 형님을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그냥 하던 말을 이어가기로 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고래 싸움에 플랑크톤은 먼지가 되어 사라질 테니까.

“형들은 처음 만난 장소가 그나마 저한테 익숙한 장소이기도 했고, 제가 워낙 팬이었으니까 덜했죠….”

“나는? 나도 알았어?”

“그럼요. 진우 형 필모도 읊으라고 하면 다 읊을 수 있어요. 제가 배우분들은 진짜 잘 모르는데 형은 알았죠.”

내 이야기에 투닥거리던 두 형도, 지켜보던 세비 형과 진우 형도 무척이나 흡족한 듯한 얼굴이 되었다.

진작 얘기해서 조용히 만들 걸 그랬다.

손님이 없는 2층 구석 자리여서 망정이지, 사람들이 많았다면 진작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지도 모르겠다.

“환이 네가 연기를 무서워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친근하게 느꼈으면 했는데, 다행인 것 같아.”

“걱정이 많다는 말을 들었거든.”

진우 형은 나이 차 많이 나는 막냇동생을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민망해져서 손안에 유리컵을 만지작거리자, 형들은 아까 공연 끝난 후 대기실과 복도에서 있었던 일을 주거니 받거니 하기 시작했다.

공연이 막 끝났을 때, 미리 말을 해두었던 건지 스태프 외에는 출입할 수 없는 구역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대기실까지 들어가는 건 지나치게 실례가 될 것 같아 복도에 얌전히 서 있던 우리.

나는 그때까지도 처음 보는 풍경에 정신을 차리지 못해 넋을 놓고 있었다.

진우 형은 아는 얼굴이 제법 있는지 간간이 지나가는 스태프들과 인사와 한두 마디를 주고받기도 했다.

사실 뮤지컬 프로그램 북을 들고 진우 형한테 끌려갔을 때 무척이나 긴장했던 터라 인사드리고 사인을 요청하는 손이 나도 모르게 떨려서 당황했었다.

분명 바로 전까지 무대를 보며 감동 받아 절절한 마음으로 프로그램 북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러다 어? 하는 사이에 끌려와 아직 일렁이는 마음을 수습할 틈도 없이 배우분들을 마주해서 더 놀랐던 것 같았다.

다들 진우 형과 친해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좋았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프로그램 북을 펼쳐 본인의 프로필 사진란에 사인과 함께 이름을 적어주시는데 그게 왜 그렇게 멋있어 보이던지….

가영 형은 너도 팬 사인회 때 팬들에게 사인해주지 않냐며 의아해했지만.

정말이지 가영 형은 팬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세 분 모두 같이 인증 사진도 찍어주셔서 언래블 단체 채팅방에 자랑하기도 했다. 물론 멤버들은 혼자 나가니까 좋냐고 난리가 났지만.

잠시 그 순간을 떠올리던 나는 비실비실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고, 가영 형을 턱을 괴고 그런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왜요?”

“너는 참 신기하다 싶어서.”

“네? 제가요? 전 완전 평범한 편인데. 신기한 건 형이나 찬이 쪽이….”

“어허, 찬이는 나한테 비하면 아직 멀었지.”

뻔뻔한 얼굴로 자기가 더 이상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가영 형의 얼굴은 마치 만고 불변의 진리를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진지했다.

“진짜 세상 쓸모없다, 한가영.”

“아, 자꾸 형한테 이름 부를 거야?”

“그래, 형 놈아.”

“제 어디가 신기해요?”

둘의 투닥거림 2차전이 시작될 것 같아 빠르게 말을 끊어내자 진우 형이 감탄하듯 눈을 마주쳐 오기에 아주 조금 부담스러웠다.

형, 형도 공공장소에서 부끄러워지고 싶지는 않잖아요….

“작업하고 연습할 때는 세상 진지하게 몰두하면서 그 시간만 끝나면 좀 뭐라고 해야 하냐, 음….”

무언가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듯 가영 형이 끙끙대며 고민하자 세비 형이 한마디 툭 던졌다.

“쟤는 연예인 병이 없는 것 같지.”

“그래, 맞아. 그거!”

“예? 에이, 그 병이 오기에는 제가 너무 쩌리죠.”

“음방 1위 했으면 이제 쩌리는 아니지, 인마. 그리고 그건 잘나가냐 아니냐랑 전혀 상관없더라.”

“맞아. 우리 병아리들 잘 크고 있어. 쩌리 아니다.”

회사에서 처음 매너 교육을 받던 날, 소위 연예인 병이라고 불리는 그 모습에 대해서도 교육을 받았었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꼴불견인지도.

직업이 아이돌일 뿐, 민간인인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잘나가면 어깨에 뽕이 찰 수는 있는데 왜 그런 마인드가 되는지.

물론 지금도 이해는 안 되지만 형들 말에 따르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연예인 병을 앓는다고 했다.

물론 완치되냐 안 되냐는 다 다르지만.

“자기도 연예인이면서 연예인을 너무 신기하게 본다고 해야 하나?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긴 한데 내 주변에는 처음이라 신기해.”

“그러면서 정작 나나 진우한테는 엄청 편하게 대하니까 더 신기하지.”

갑자기 나에 대한 품평회가 열린 것 같았다.

형들은 날 놓고 자기들끼리 신나게 이야기하다, 민망함과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인 나를 보더니 또 낄낄거리며 놀리기 바빴다.

그러더니 각자 핸드폰에 저장한 나와 멤버들의 움짤, 사진을 꺼내 들고는 더 본격적이 되었다.

도대체 그런 건 왜 가지고 있는 건데?!

두 손에 얼굴을 묻으려던 차 진우 형이 보여준 영상.

그걸 본 순간 나도 모르게 형 핸드폰을 던져버릴 뻔했다.

미궁 탈출 때, 찬이가 건드리지 말라고 했던 곳을 건드려 함정이 발동되었던 그 순간의 영상이었다.

영상 속 나는 ‘그거 건드리지 말랬잖아!’하고 외치면서 핼쑥해진 얼굴로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동굴 같은 통로였던 터라 내 외침이 BGM처럼 웅웅 울려 여러모로 힘겹고 슬펐던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굴러오는 커다란 고무 공, 기겁하고 비명을 지르는 찬이, 울 것 같은 세빈이 등… 짧은 시간 안에 참 많은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이 웃고 싶을 때마다 꺼내 보는 짤이라고 순둥한 얼굴을 무기로 웃는 진우 형.

오늘따라 왜 이리 이 형을 때리고 싶어지는지….

내가 세상 무너질 것처럼 한숨을 내쉬자, 형들은 그게 그렇게 웃긴지 자기들끼리 웃느라 바빴다.

내 눈초리가 뾰족해지자 큼, 하고 웃음을 겨우 멈춘 진우 형이 평소의 다정한 모습으로 돌아와 말을 건넸다.

“여튼 오늘 데리고 나오길 잘한 것 같네. 나도 가끔 공부하다 막히면 이렇게 뮤지컬이나 연극 보러 나오거든. 화면으로 배울 수 있는 게 있고 직접 봐야 배울 수 있는 게 또 있으니까.”

“고마워요. 그런데 다음부턴 무슨 일 할 거면 꼭 미리 말 좀 해줘요…. 형들은 행동력이 너무 좋아서 따라가기 힘들다니까요.”

아직도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남아있었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날 생각해서 자리를 마련해 준 형들에게 계속 툴툴대는 건 아무래도 너무 버릇없어 보일 거 같았다.

“최대한 많이 보고 많이 경험하고, 많이 해보고 싶긴 해요. 안 해봤던 거 전부 다요.”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많냐. 다 해보면 되지.”

“맞아. 우리랑 캠핑도 한 번 가야지. 안 그래도 나 요새 캠핑카 알아보고 있다?”

“전 좀 빼줘요….”

다들 바쁜 와중에도 놀 궁리를 착실하게 잘하는 걸 보면 여러모로 우리 형들은 대단한 사람들이구나 싶어서 웃어버렸다.

이전 생에는 집 밖에 나가는 걸 싫어해서 해보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딱히 나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좋은 사람들과 더 많은 걸 해보고 싶고 욕심도 부리고 싶었다.

김미연 선생님과의 연기 수업 횟수가 하나, 둘 쌓여가면서 여러 복잡한 마음이 쉬이 가라앉지 않아 힘들었었다.

과욕부리면 망한다는 불안감과 새로운 영역에 도전해서 무언가 해내고 싶다는 욕심의 싸움이 날 지치게 했다.

선생님이나 팀장님에게도 이걸 말했었지만 두 분 다 빙그레 웃기만 하셨다.

그런 고민 하나하나가 귀하다면서 더 많이 고민하고 생각해보라며 등을 두드려주셨을 뿐.

그렇게 내내 복잡했던 마음을 형들이 마련해준 자리 덕분에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었다.

이러니 이 형님들을 좋아할 수밖에.

“환아, 왜 그렇게 웃어?”

“네? 뭐가요?”

“너 꼭 너희 애들 볼 때처럼 웃고 있어.”

“아, 형들이 좋아서요.”

“뭐야, 뭔가 이상한데?”

그럼, 좋고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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