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 같은 곳에서(3)
‘후….’
‘왜 한숨임?’
‘이게 될까 싶어서.’
대본 안의 세상에 반해서 홀린 듯이 읽고, 형광펜으로 칠해진 캐릭터들을 하나하나 살펴본 후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멤버들 몰래 대본을 전부 읽는 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그나마 책을 빨리 읽는 편이라 아주 오래 걸리진 않았지만.
처음 익숙한 제목을 봤을 때는 나도 잘되는 드라마에 살짝 발 걸쳐서 꿀 빨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제일 컸다.
이미 잘 될 드라마를 알고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메리트인지 모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모든 대본을 읽은 후에는 자신이 없어졌다.
이 각양각색의 세상에 무의미한 캐릭터는 없었다.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라도 상황을 돋보이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고, 대사 한 줄 주어지는 단역이라도 의미가 있었다.
내 앞으로 주어진 캐릭터들은 대부분 대사 두세 마디의 단역이지만 그들에게도 각자가 만들어야 할 세상의 조각이 있었고.
큰 흐름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해도, 적어도 안 좋은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될 텐데 그게 가능할지 자신이 없었다.
‘도대체 뭘 믿고 나한테 제의가 들어온 걸까?’
‘드라마에 연기 경력 없는 아이돌을 넣는 건 하나뿐이잖음.’
‘그렇긴 하지.’
인지도에 의한 시청률 상승.
소위 꽃 병풍이라고 불리는 그런 역할을 원하는 것.
대놓고 꽃 병풍인 작품이 세 개, 병아리 눈물만큼이지만 의미가 있는 캐릭터를 제의한 곳이 두 개, 등장 씬 두 번, 대사 세 줄의 차후 복선이 되는 캐릭터 한 개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내가 처음 점찍었던 드라마는 제일 후자의 작품이었다.
사실 마음이 편하려면 꽃 병풍인 작품에 나가는 게 가장 베스트였다.
세 작품 중 하나는 중박 이상이라는 걸 기억을 더듬어 찾아냈으니까.
‘사람은 진짜 욕심 때문에 망하는 것 같아….’
‘그 욕심 때문에 발전하기도 함.’
‘그것도 그런데….’
개인적인 욕심과 편한 길 사이에서 갈등하는 나를 지켜보던 포잉은 앙증맞은 앞발을 들어, 내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계약자야, 너는 늘 생각이 너무 많음. 누군가에게는 기회조차 가지 않는 일들이지만, 너는 어쨌든 아이돌로서의 네 일을 잘해서 기회도 생긴 거잖아?’
‘응.’
이렇게 결정장애인 나에게, 포잉은 늘 적절한 조언을 해주었다.
내 시야가 좁아져서 보지 못한 것들, 생각하지 못했거나 놓치고 있는 부분들을 지적해주는 포잉.
‘회사 사람들 말처럼 제대로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임. 넌 네가 곡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 있었음? 공부하고 연습해서 가능해진 것들이잖아.’
‘그건 그렇지. 노래도 춤도 곡을 만들고 가사를 쓰는 것도 전부 그랬지….’
처음 이 세계에 와서 연습생이라는 말에 얼마나 놀랐던가.
난 음치고 몸친데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었고.
다행히 이놈의 시스템이라는 게 보정역할을 해주어 어떻게 잘 적응해나갔고, 지금은 연습하는 게 숨 쉬는 것만큼 익숙해졌지만.
‘회사에서도 당연히 카메라 테스트를 하고 연기 수업을 넣어주겠지. 너희 회사는 원래 배우로 유명한 회사였잖아. 왜 시작도 안 해보고 도망부터 칠 생각을 함?’
‘네, 우리 요정님 말이 다 맞아요.’
똑바로 부딪혀오는 곧은 시선, 언제나 나를 지지해주는 내 요정님.
포잉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조언을 해주었고, 팔랑귀인 나는 또 부스스하게 웃으며 그런 포잉을 끌어안았다.
‘뭐임? 이거 놓으셈!’
‘좋아서 그러지. 내 고냥 님!’
이번에도 포잉 덕분에 마음을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었다.
정작 당사자는 귀찮다는 듯 내 팔을 찰싹 때렸지만 개의치 않고 포잉의 얼굴에 뺨을 비볐다.
그렇게 들으라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는 포잉을 계속 괴롭히다, 나는 끝내 한방 얻어맞고 나서야 얌전히 포잉을 내려놓았다.
- 똑똑
“네?”
“지환아, 형이야.”
“앗, 네!”
달려가 문을 열었더니 우진 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팀장님이 이야기 좀 하자고 하시는데.”
“넵. 갈게요. 근데, 형.”
“응?”
“요새 잘 못 자요? 너무 피곤해 보이는데.”
다크 서클이 진해진 형의 얼굴에 걱정돼서 이리저리 살피자 괜찮다는 듯 우진 형은 손을 휘저었다.
“별거 아냐. 요새 신경 쓸 일이 많아서.”
“너무 무리하지 마요. 그러다 탈 나면 안 되니까.”
“그럼. 나중에 너희랑 월드 투어 하려면 건강관리 해야지.”
“앗, 부끄러우니까 그건 형만 알고 있어요!”
이전에 우진 형이 걱정되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능글맞은 형의 대꾸에 주변을 휙휙 둘러보고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나는 놀리지 말라며 형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오야, 얼른 팀장님한테 가보고.”
“네, 조금 이따가 봐요!”
가볍게 손을 흔들고 멀어지는 우진 형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결국 걱정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포잉에게 말했다.
‘포잉, 혹시 우진 형이 어디 아프거나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지켜봐 줄 수 있어?’
‘그거 사생활 침해 아님?’
‘아니, 그렇게 막 디테일하게 말고! 그냥 걱정돼서.’
‘쯧, 일단 지켜보고는 있음. 아직까진 별일 없으니까 걱정 말고.’
포잉도 내 발밑에서 물끄러미 우진 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로 전 모습이 심상치 않았는지, 포잉은 이미 챙기고 있던 우진 형을 조금 더 자세히 뜯어보겠다고 했다.
형의 사생활이야 내가 무어라 할 건 아니었지만… 늘 영업 다니랴, 우리 챙기랴 바쁜 터라 몸에 무리가 가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만일 무언가 문제가 있다면 포잉이 말해줄 테니, 조금만 지나면 알 수 있을 거라고 애써 자신을 달랬다.
품에 안은 대본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몸을 돌려 팀장님에게로 향했다.
* * *
“대책 회의를 해보자.”
“한 명씩 자기가 관찰한 걸 이야기해 볼까?”
지환이 빠진 5명의 언래블 멤버들은 하준의 작업실에 모였다.
최근 개인 작업에 몰두하는지 지환이 자신의 작업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멤버들끼리 몰래 모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경환이 목격한 지환의 악몽.
경환은 다음날 바로 맏형인 하준과 영빈에게 자신이 목격한 것들을 말했다.
예상대로 둘은 심각한 표정이 되었고, 경환은 그간 자신이 봐온 것들을 자세히 풀어놓았다.
심각한 일이니만큼 연장자끼리만 알고 있으려던 이 세 명은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힘찬과 세빈이 다가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 후 이야기를 엿들은 둘은 자신들만 빼놓고 이야기하지 말라며 형들에게 분노했고.
결국 이대로 덮어놓고 지나갈 수 없었던 탓에 지환을 제외한 모든 멤버가 모여서 이야기하기로 했다.
멤버들은 지환에게 티 내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요 며칠간 지환의 모습을 관찰해왔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지환 몰래 모여서 의견을 나누기로 했다.
“지환이가 밥을 남겼어요.”
“밥을?”
“응. 어제 점심은 우리 셋이 먹었잖아요. 형들은 먼저 먹었다고 해서.”
“응. 그랬지.”
“밥을 많이 담지도 않았는데 그걸 다 못 먹더라고요.”
“역시 뭔가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
한창 클 때다 보니 멤버들은 언제나 배고파했다.
그건 지환도 다르지 않았고, 늘 자신의 몫으로 담은 음식은 남기지 않고 다 먹는 편이었다.
멤버 중 편식하는 것도 가장 적은 지환이 밥을 남겼다는 말에 영빈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러고 보니까 어젯밤? 새벽에 지환이 방 지나는데 안에서 뭔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처음엔 가사 쓰는 건가 했는데 내용이 조금 이상했어.”
“뭐라고 했길래 그래요.”
“평생 어떻게 될 거야? 라고 했던가? 좀 목소리가 안 좋았던 것 같은데.”
“난 잠들었을 땐가 보네….”
멤버들이 자신이 관찰했던 내용을 하나둘 꺼내놓자 다들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렇게 잘 먹던 애가 밥도 남기고, 가사인지 무엇인지 모를 말을 홀로 중얼거린다?
“그러고 보면 요 며칠은 늦게까지 같이 거실에서 안 놀고 먼저 방으로 들어갔지?”
“맞아. 러그에서 뒹구는 걸 그렇게 좋아하는 애가.”
멤버들 모두의 얼굴에 근심, 걱정이 서리자 하준이 잠시 분위기 전환을 위해 입을 열었다.
“일단 팀장님한테 넌지시 물어보니까 부모님 꿈을 꾼 것 같다고 하더라고. 이제 괜찮다고 했다는데 그 말을 믿을 수 있는지는 조금….”
“환이 형이 괜찮다고 말하는 건 신뢰가 안 가요.”
“그 말 지환이가 들으면 좀 충격받겠다.”
“그치만 사실이잖아요.”
막내 세빈이가 불퉁해진 얼굴로 중얼거리자 하준이 웃으며 막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멤버들은 되도록 지환에게 괜찮냐고 묻지 않는다.
상태를 직접 보고 듣고 파악하거나 구체적으로 상황을 묻는 쪽이 더 제대로 된 답변을 들을 수 있으니까.
‘괜찮냐’는 말에는 ‘괜찮아’라는 답변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고, 그건 지환뿐만 아니라 멤버들 모두에게도 공통된 말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지환은 경우가 조금 더 심했고.
만약 돌아가신 부모님 일로 힘든 것이라면 멤버들이 도와줄 수 없는 문제였기에 작업실 분위기는 한층 가라앉았다.
“오늘 밤에 직접 붙잡고 물어볼까요?”
멤버들의 말을 듣고 있던 힘찬이 입을 열었다.
“물어봐도 괜찮으려나….”
“우리끼리 짐작하고 전전긍긍하는 것보다 그냥 대놓고 물어보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그게 맞을 수도 있어. 형들도 우리한테 늘 같이 이야기하자고 했었잖아.”
데뷔 직후처럼 위험하거나 아슬아슬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최근의 지환은 확실히 고민이 많아 보였다.
자다가 그만큼 울 정도면 머릿속도 굉장히 복잡하지 않을까 싶었고.
“형들이 이제 우리도 가족이랬잖아요. 그러니까 터놓고 이야기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아요.”
세빈이가 형들의 눈치를 잠시 보는 것 같더니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가족이니까, 더 솔직히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고.
팀의 제일 막내 둘이 강하게 주장하는 모습이 낯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기특하기도 했다.
처음 형들 눈치만 보고 입도 잘 안 열던 세빈이가 이제는 이렇게 말을 잘하게 됐다.
늘 남의 의견에 웃기만 하던 힘찬이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해결 방법을 모색하기도 했고.
하준은 동생들이 자라는 모습에 뿌듯하기도 하고 조금은 서운하기도 한 기묘한 감정을 느끼며 피식 웃었다.
“그래, 너희 말이 맞네. 당사자가 제일 중요한 건데 우리가 너무 걱정만 하느라 정작 지환이 말을 안 들어 봤다. 오늘은 조금 일찍 돌아가서 이야기해보자.”
“대신에 감정적으로 다그치면 또 얼버무릴지도 모르니까 질문은 준이가 하자.”
“저는 찬성이요.”
“나도.”
“나도 불만 없음!”
대략적인 상황이 정리되자 그때부터 멤버들은 머리를 하나로 모아 어떻게 말문을 열 것인지를 궁리했다.
우진의 상태를 지켜보고 회사를 돌아다니던 포잉은 우연히 발견한 그 모습에 기가 찼지만, 지환에게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꽤 재밌는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았다.
* * *
“그래, 지환아. 마음은 정했니?”
“네. 대본도 다 확인했고요. 그런데 팀장님, 여쭤볼 게 있어요.”
“말해봐.”
평소처럼 에너지 넘치는 팀장님 특유의 목소리에 걱정스럽고 불안했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저는 연기를 제대로 해본 적도 없고, 예전에 평도 별로 좋지 않았잖아요.”
‘아이돌 창조’ 촬영 초반, 분명 연기력에 대한 테스트도 있었다.
그때 준이 형, 힘찬이가 생각보다 좋은 평을 받았고 그 외의 멤버들은 수많은 연습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것도 아주 좋게 포장해서 말하니까 연습이 필요하다는 거였고.
그때 지환이는 뻣뻣해서 나무토막 같고 카메라를 너무 의식한다는 평을 들었다.
물론 내가 그때의 지환이는 아니지만, 나와 별로 다를 건 없어 보였다.
계속 이야기해보라는 듯 싱글벙글 웃는 팀장님을 힐끔 바라본 나는 긴장 때문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릴 것 같아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렸다.
“연기할 때는 굉장히 많은 부분을 고려해야 한다고, 예전에 성웅 배우님이 말씀하셨던 게 기억나요. 전반적인 스토리는 물론이고 상황, 상대 배우와의 합, 목소리 톤, 발음 이런 것들이요.”
“맞아. 그래서 배우들도 끊임없이 연습하고 공부하는 거고.”
“저는 그 모든 걸 제가 고려하고 공부해서 연기를 할 수 있을까가 걱정이에요. 그게 설령 단 한 컷이라도요.”
대박 날 드라마에 들어간다고 해서 우리까지 대박 날 것이란 보장이 없었다.
처음에는 꿀 빨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금방 현실을 생각할 수 있었다.
다른 배우님들이 엄청난 연기를 펼치는데 거기에 내가 모난 돌처럼 호흡을 끊어버리면 전 국민의 욕받이 인형이 될 수도 있었다.
나만 욕먹는 게 아니라 언래블도 덩달아 욕먹게 될 거고.
그런 나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던 팀장님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진지하게 고민했네. 잘했어, 그렇게 고민하고 답을 찾아가려고 노력해야 다 네 것이 되는 거니까.”
“감사합니다….”
뜬금없는 칭찬에 눈동자만 도로록 굴리는 사이, 팀장님의 말이 이어졌다.
“자, 지금부터 그럼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볼까?”
“네?”
“들어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