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34)화 (234/456)

234. IDEA(10)

윤지는 살면서 스스로가 운이 좋다고 생각해본 적이 몇 번 없었다. 손에 꼽을 만큼은 될까.

하지만 무대 위 언래블을 보고 있자니, 그 모든 게 오늘 이 순간을 두 눈으로 지켜보기 위해 모아뒀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평소에 그렇게 발랄하던 애들이 잔뜩 얼어서 무대 제일 앞에 서 있었다.

주눅이 든 건지, 걱정이 되는 건지, 그도 아니면 너무 긴장한 건지.

방금 전 무대에서는 그렇게 멋있게, 당당하게 서 있던 언래블 멤버들이 지금은 다들 넋이라도 나간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서로를 붙들고 있는 멤버들의 모습에 괜히 울컥했던 윤지는 안타까움에 발만 동동 굴렀다.

주변의 많은 솜뭉치들도 멤버들만큼이나 초조한 얼굴로 MC의 입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영원 같던 순간이 스쳐 지나가고, 애타게 기다리던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윤지는 자기도 모르게 허공을 움켜잡았다.

늘 상냥한 눈으로 팬들을 바라보던 하준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 되어버렸다.

항상 침착해 보였던 영빈은 그 순간의 감정을 견디기 힘든 것처럼 쓰러지듯 하준의 등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발표와 함께 막내 세빈이는 눈물 버튼이 고장 난 것처럼 엉엉 울면서 자리에 주저앉았고, 찬이가 그런 세빈이를 껴안아 주었다.

평소에는 그렇게나 아웅다웅하던 애들이었는데.

휘청이던 지환이를 경환이가 붙들어주고, 그렇게 서로를 간절히 잡고 있는 멤버들을 보며 윤지는 참았던 감정을 토해냈다.

잠시간 얼어붙은 시간이 수많은 환호성과 언래블을 연호하는 소리로 깨졌고, 그제야 하준이 마이크를 움켜잡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솜뭉치! 너무, 너무 고맙고, 사랑해요….”

하준이 울음이 터지는 걸 억지로 삼키는 게 선명한 목소리로 사랑을 고백해오자, 윤지와 솜뭉치들은 더 큰 환호성으로 답했다.

몇 번이나 울렁이는 감정을 삼키느라 달싹거리던 입술이 힘겹게 고마운 사람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그 순간을 지켜보던 윤지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주변 여기저기서 울음 섞인 목소리와 흘러넘치는 기쁨을 참지 못한 목소리가 뒤섞여 고함쳤다.

사랑한다는 고백과 고맙다는 감사의 인사, 제대로 된 단어가 되지 못한 감정들의 아우성이 무서울 만큼 격렬하게 휘몰아치는 한복판.

그 가운데 서서 자신의 별이 높이 뜨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던 윤지는 오늘을 영영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 * *

“이제 다 울었어?”

“놀리지 마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세빈이가 은근하게 놀려오는 경환 형에게 툴툴거렸다.

겨우 대기실로 돌아온 우리는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대충 수습하면서 솜뭉치들에게 보여줄 영상을 찍어야 했다.

영상을 찍는 동안에도 영빈 형과 세빈이가 좀처럼 눈물을 그치지 못해 울음 섞인 목소리로 고마운 마음을 전해야 했다.

찬이는 무대를 내려오면서부터 이미 감정 과잉으로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고, 경환 형은 그런 찬이를 받아줘야 했다.

다만 경환 형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찬이가 겨우 눈물을 그친 세빈이를 붙잡고 대기실 안을 방방 뛰어다니고 나서야 조금 조용해졌다.

그런 멤버들을 지켜보던 나는 슬그머니 준이 형 옆에 앉아 아직도 넋이 나간 듯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형의 어깨를 다독였다.

“형, 진짜 고생 많았어요. 고마워요.”

“아냐, 너희가 고생했지. 고맙다. 진짜로.”

일렁이는 눈동자가 소리가 되지 못한 많은 말들을 전했고, 나는 마주 웃는 것 외에는 할 수 없었다.

입을 열면, 그 순간 여태 참았던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도저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도! 나도 고생했는데!”

“그래, 우리 찬이도 고생했지. 영빈이도, 경환이도, 세빈이도 전부 다.”

한참 세빈이를 끌고 다니며 서포트 팀분들과 우진 형에게 힘껏 감정을 발산하던 찬이가 이어 하준 형에게 달려들었다.

여전히 우리 찬이는 자기 빼놓고 사이가 좋은 걸 참지 못하는 듯했다.

그런 찬이 꽉 안아준 하준 형은 어느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든 멤버들과 눈을 맞추고 한 명 한 명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멤버들은 모두 마음껏 웃을 수 있었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고마운 사람.

매일 밤, 가장 늦은 시간까지 멤버들을 챙기던 사람.

우리 중 누구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서로 마주하며 바보처럼 웃고 있는 우리와 그런 우리를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던 우진 형, 서포트 팀원분들.

이 몽글몽글한 분위기는 대기실 문이 열리면서 순식간에 바뀌었다.

“우리 병아리들!”

“팀장님!”

“그래, 이놈들아!”

활짝 웃는 얼굴로 대기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팀장님은 오늘도 병아리를 외치며 양팔을 활짝 벌렸고, 기다렸다는 듯 찬이와 세빈이가 달려갔다.

“잘했어, 역시 우리 병아리들이네.”

“저희 1위 해도 병아리인 거예요?”

“그럼. 어림도 없지.”

팀장님 특유의 활기차고 생명력 넘치는 분위기 덕분에 우느라 진을 뺐던 영빈 형도 웃고 있었다.

“대표님은 안 오셨어요?”

“대표님은 바쁘셔서 나만 왔어.”

“아….”

여기까지 이끌어주셨던 대표님께 칭찬을 받고 싶었던 건지, 기대한 것 같았던 준이 형의 얼굴이 살짝 흐려졌다.

그런 준이 형을 놀리기라도 하듯 짓궂은 얼굴을 한 팀장님은 곧이어 말을 덧붙였다.

“아마 정윤 실장님 붙들고 우느라 바쁘실걸?”

“네?”

“대표님이 안 그래 보여도 굉장히 감성적인 분이거든.”

어리둥절한 표정이 된 준이 형 얼굴에 재밌다는 듯 싱글거리던 팀장님은 멤버들 어깨를 일일이 두드려주며 말을 이었다.

대표님은 멤버들 앞에서는 언제나 듬직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신다고.

다 같이 방송을 지켜보다 1위 발표를 보자마자 눈시울을 붉히시곤 급히 정윤 실장님과 함께 회의실을 나섰다는 말도 해주셨다.

아마 지금쯤은 정윤 실장님이 대표님 푸념에 짜증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미리 와서 기다려주고 싶었지만, 미리 잡혔던 미팅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며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던 팀장님.

그나마 방송국과 회사가 가까운 덕분에 팀장님은 간신히 지금 도착할 수 있었다면서 따뜻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셨다.

그 시선 안에 담긴 커다란 애정에 부끄러워진 우리는 괜히 서로를 툭툭 치면서 못 본 척했다.

“고생했다. 내 새끼들, 기특해 죽겠어. 드디어 오늘 이 팀장님 소원을 풀겠네. 우리 한우 먹으러 가자!”

어색해서 쭈뼛거리는 우리 모습에 크게 웃던 팀장님은 대표님께 받았다는 카드를 꺼내 들며 외쳤다.

“한우!”

“소고기!”

“팀장님 최고!”

울다가 웃다가 온갖 감정들 속에서 허덕이던 우리 애들은 본능적으로 고기를 외쳤고, 우진 형은 우리 모습에 한숨을 쉬었던 것 같았다.

* * *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서포트 팀분들과 팀장님, 우진 형, 멤버들 모두 팀장님이 예전부터 점찍어 두었다던 고깃집으로 향했다.

우리 팀을 기획할 때부터 이날을 고대해왔다던 팀장님은 우리보다 더 신나 보였다.

덩달아 신난 멤버들은 내일이 없을 것처럼 먹기 시작했고, 모습에 준이 형은 은근슬쩍 계산서를 훔쳐보고 흠칫하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두 눈 가득 걱정이 담긴 걸 보면 금액이 꽤 많이 나온 모양이었다.

우리 애들, 참 잘 먹어….

중간에 대표님과 통화도 했는데 소현 팀장님의 말이 사실이었던 건지 목소리가 평소보다 촉촉했다.

아마 내일 인사드리러 갈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담담한 얼굴로 우리를 맞아주시겠지.

그렇게 신나는 식사 시간이 끝나고, 얼큰하게 취한 팀장님이 노래방을 외치는 작은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우진 형이 매몰차게 끊어냈다.

내일 일정을 생각하면 빨리 돌아가서 쉬어야 한다면서.

겨우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씻자마자 평소처럼 거실에 널브러졌고, 빵빵하게 차오른 배를 쓰다듬으며 행복을 만끽했다.

“와, 나 한우를 이렇게 배 터지게 먹은 거 처음인 것 같아.”

“너무 많이 먹었나 봐, 배 아파….”

“그만큼 먹었으면 배가 아플 만도 하다.”

사실 평소에도 나누는 이런 일상적인 대화 말고 무언가 서로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아 보였지만,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지금 복잡한 이 마음들을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될 것 같았다.

이게 정말 현실인지 가늠이 안 돼서, 혹시라도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아서.

그저 평소처럼 러그에서 꾸물거리며 괜히 서로를 툭툭 치기도 하고 인형을 꾹꾹 누르기도 하다가, 우리는 어느 순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사전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맏형들을 둘러싸고 앉은 나와 멤버들.

그 모습에 조용히 웃던 준이 형이 먼저 말을 꺼냈다.

“많이 힘들었을 텐데 잘 따라줘서 고맙다.”

힐끔거리며 서로 눈치만 보던 우리가 준이 형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형은 그제야 평소처럼 웃었다.

“너무 많은 분이 도와주셨고, 우리 팬들, 솜뭉치들이 굉장히… 응, 정말 굉장히 애써주셨어. 우리는 그걸 절대로 잊으면 안 돼.”

가장 기쁘고 벅찬 날임에도 하준 형은 자신을 다 놓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더 열심히 하자. 더 열심히 해서 같이 고생해주시는 분들한테 보답도 하고 솜뭉치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언래블이 되자.”

멤버들이 너무 들뜨지 않도록, 혹시라도 너무 풀어져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차분하게 말했다.

그런 준이 형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던 멤버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

“에이, 다른 분들에 비하면 당연히 우린 한참 멀었지.”

“그럼, 그럼. 우리도 이제 좀 컸어!”

“형, 오늘 같은 날은 마음껏 기뻐해도 되요.”

“아까 무대에서 펑펑 울던 애 어디 갔냐?”

“아, 형!”

준이 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기 할 말을 쏟아내기 바쁜 멤버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두 맏형은 결국 피식 웃으며 동생들 머리를 헝클어주었다.

슬쩍 몸을 빼려 했던 나까지 붙들어서는 야무지게 머리를 마구 헝클어대서 괜히 포잉의 눈치가 보일 정도였다.

분명 이 모습을 보고 비웃을 게 뻔했으니까.

‘…뭐! 그냥 말을 해!’

‘뭘? 난 아무 말도 안 했음.’

‘아오, 진짜!’

우리 요정님은 표정과 눈빛으로 비웃어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며 뻔뻔하게 굴었다.

요동치던 심장과 달리 오늘 저녁은 평소보다 차분했다.

다들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를 다잡았다.

비록 준이 형 말이 끝나자마자 멤버들이 바닥에 눌어붙어버려 영 보기에는 흉했지만, 한마디 하기엔 내 꼴도 만만치가 않았다.

배는 부르고 몸은 처지고.

감당하기 힘든 감정 속에서 허우적댄 탓에 잔뜩 지쳐있던 우리는 어느 때보다 빠르게 잠들 수 있었다.

* * *

“여기는…?”

눈을 뜬 곳은 숙소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낯선 공간도 아니었다.

낡은 책상, 그 위에 놓인 어색하게 웃고 있는 나와 활짝 웃고 있는 가족들의 사진.

내가 쥐고 있는, 솜이 조금 가라앉은 낡았지만 깨끗한 이불.

한쪽 벽면에 붙은 포스터와 빼곡한 앨범들.

있을 수 없는 공간에서 눈을 뜬 나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나도 모르게 포잉을 찾았다.

‘포잉, 어디 갔어?’

하지만 다시 눈을 뜬 그 날부터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던 내 요정님은 보이지 않았고,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버릇처럼 머리맡을 더듬자, 핸드폰이 만져졌다.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에 핸드폰을 열려던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잊어본 적 없던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공지환! 아직 안 일어났냐!”

“누나?”

“그럼 누나지, 형이겠니.”

퉁명스러운 목소리와 심술 맞은 표정.

전생의 누나였다.

“누나가 여기 왜 있어…?”

“아직 잠이 덜 깼어? 왜 헛소리야.”

내가 시비를 건다고 생각한 건지 뚱한 얼굴이 된 누나가 다가와 붙들고 있던 이불을 확 치워버렸다.

“뭐해, 빨리 나와. 엄마랑 아빠가 기다리잖아.”

“아…!”

혼란스러웠던 것과는 별개로 부모님을 지칭하는 단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굴러떨어지듯 침대 밖으로 뛰쳐나간 나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와 아버지 모습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두 분은 어디 외출이라도 하시는 건지 곱게 차려입고 계셨다.

‘꿈이야? 이게 뭐야? 어느 쪽이 꿈인 거야?’

꿈이라기엔 가족들 목소리와 표정이 너무 생생했고, 현실이라기엔 아직도 바닥에 내동댕이쳐질 때의 통증이 선명했다.

“아들, 악몽이라도 꿨어?”

“괜찮으냐.”

산만한 아들놈이 바닥에 주저앉아 황망한 얼굴을 하고 있자, 부모님은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바라보다 내 어깨를 다독여주셨다.

“하여튼 너는 손이 너무 많이 가.”

“얘, 동생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엄마, 아빠가 쟤를 너무 오냐오냐 키웠다니까요.”

툴툴거리던 누나는 나를 스쳐 지나가 부모님 곁에 섰다.

딱 한 번이어도 좋으니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전생의 가족들이 나란히 내 눈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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