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28)화 (228/456)

228. IDEA(4)

수빈은 위캠의 수많은 영상을 딸깍거리고 돌려보면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본진이 군백기에 들어서면서 멤버들이 각자 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애타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버텼지만… 가슴 속이 너무 공허했다.

재계약이 제대로 이야기되지 않은 흐지부지한 상태로 군백기에 들어간 탓이 컸다.

그 와중에도 수빈은 군대 관련 앱을 깔아놓고 디데이를 설정하는 등 최대한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그거라도 얘기해주고 가지….”

갑작스럽게 찾아온 군백기는 혼란만큼이나 큰 배신감도 주었다.

하다못해 기사로 먼저 아는 게 아니라, 공식 카페에 편지 하나만 올려줬어도 이렇게까지 속이 상하진 않았을 텐데.

다른 본진을 가진 친구들의 유혹은 끊이지 않았지만, 수빈은 나름대로 지조를 지키며 지내고 있었다.

처음 입덕했을 때의 벅찬 마음이 아직도 가슴속에 뜨겁게 남아있는데, 자신과 달리 멤버들은 변해버린 건 아닌가 하는 서글픔도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들은 수빈의 ‘내 새끼’였기에 꿋꿋하게 버티고 기다릴 생각이었다.

다만, 전체 멤버들의 무대와 노래를 사랑했던 수빈은 홀로 연기나 예능에 나오는 멤버들 모습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렇게 위캠의 영상을 무의미하게 넘기던 중, 영상 하나가 눈에 꽂혔다.

“어?”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작고 낡은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쥐고 노래하는 아이돌 그룹.

“이야, 얘네도 구멍이 없네. 우리 애들도 그랬는데….”

아련한 추억과 함께 낯선 아이돌 그룹의 무대를 감상하던 수빈은 이어진 영상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 전까지 아련아련 열매를 먹은 것처럼 촉촉한 눈망울로 노래하던 애들이었다. 한데, 이번엔 무대를 씹어먹을 것처럼 거친 퍼포먼스를 보였다.

가장 선이 가는 멤버부터 운동 좀 할 것 같은 멤버까지 하나 빼먹을 것 없이 높이 뛰어올라 무대를 내리찍는 안무는 위험해 보이기까지 했다.

“저러다 관절 다 나갈 텐데….”

수빈은 어느새 내 새끼도 아닌 타 그룹의 멤버들 관절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자신은 자각하지 못한 상태였다.

수빈은 바로 이어진 영상에 다시 한번 얼빠진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 애들이 숙소인 듯 보이는 곳에서 죄다 찹쌀떡마냥 퍼져 러그위에서 꾸물거리고 있는 모습.

“아니, 그래도 방송일 텐데 저렇게 있어도 되는 거야?”

어이없음과 호기심이 공허했던 마음속에서 슬며시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곧 찹쌀떡들 위로 자막이 떠 올랐다.

‘흔한 한국 남돌의 다채로운 모습들 (feat. 언래블)’

“아, 얘네가 걔들이구나.”

본적은 없었지만 여기저기 이름이 제법 들리던 그룹이었다.

무대나 일상 등, 여러 모습의 영상이 다 있는 걸 보니, 이 채널의 주인이 제 본진 영상을 짜깁기해 놓은 모양이었다.

자기들끼리 뒤엉켜서 뭉그적대는 모습이 나무늘보 같기도 하고 찹쌀떡 덩어리들 같기도 했다.

그걸 지켜보던 수빈의 굳게 다물렸던 입가도 어느새 허물어져 있었다.

자기들끼리 깡깡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몹시도 무해한 소동물들이 버둥거리는 것 같아 귀여웠던 탓이었다.

“뭐야, 얘들….”

그렇게 흐뭇했던 영상이 끝나고 해당 채널의 추천 영상이 뒤에 이어졌다.

‘이것도 보셈’ 하고 떠오른 멘트와 영상들.

아무 생각 없이 떠오른 영상을 누른 수빈은 어느 순간부터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었다.

그렇게 수빈이 공허했던 마음속에 지갑으로 키우는 또 다른 ‘내 새끼’를 입양하는 순간이었다.

* * *

- 아니, 도대체 얘들은 왜 우리 회사 와서 이러는 거야. 진짜!

“팀장님, 진정하세요. 하하, 새벽 애들이야 워낙 저희 애들을 예뻐하잖아요.”

- 예뻐하고 자시고 간에 이 새ㄲ…

우진은 휴대폰 너머로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소현의 목소리에 사람들과 조금 더 멀리 거리를 벌렸다.

멤버들의 일정을 확인하지 않은 건지 새벽 멤버들이 회사로 쳐들어 왔고, 애들이 스케줄 갔다는 걸 확인하고도 돌아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언제부턴가 툭하면 회사로 놀러 오는 새벽 애들이었다. 이제는 당당히 로비를 통과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기까지 했다.

언제든지 편하게 놀러 오라고 대표님이 허락했다고 했다.

새벽 멤버들 누구 하나 뺄 것 없이 언래블 멤버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전수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가영은 종종 에단과 작업에 대해 논의하느라 찾아오기도 했고.

아무래도 오늘은 퇴근 즉시 최대한 빨리 회사에서 사라져야 할 것 같았다.

휴대폰 너머로 소현의 하소연 외에, 쾌활한 가영의 목소리도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 야! 가영이 데려가! 너희만 가지 말고!

“하하, 팀장님. 일단 전 현장이라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석환을 회사에 두고 왔으니 정 급하거나 필요한 일이 있으면 그를 통해 시킬 거라고 애써 합리화하며, 우진은 전화를 끊었다.

꽤 긴 시간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고, 현장에서 내내 대기하고 있던 우진은 최근 자주 뻣뻣해지는 다리를 주물렀다.

무리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사고 후유증인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 다리가 더 자주 저린 느낌이 들었다.

‘병원에 가보긴 해야 할 것 같은데.’

재활 치료를 꾸준히 받지 않았던 과거의 자신이 잠깐 원망스러웠지만, 아마 또 그때 같은 상황이 생긴다면 다른 선택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우진은 촬영 중인 카메라를 통해 흘러나오는 멤버들 모습을 체크하면서 촬영 중간, 쉬는 시간마다 한 번씩 멤버들을 챙겼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실수한 건 없는지 꼼꼼히 체크하며 멤버들의 표정도 유심히 살폈다.

처음 예능 출연이라고 기뻐했던 ‘무사이’에서 텃세 아닌 텃세와 크고 아름다운 엿을 선물 받았던 애들이었다.

다행히 그 후로는 회사에서도 꼼꼼히 따져가서 프로그램 출연을 추진했고, 함께 출연하는 게스트들도 대부분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앞으로는 마냥 그렇게 좋은 사람들과만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없을 테지만, 적어도 상처에 딱지가 앉기 전까지는 보호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최대한 다른 연예인들과 부딪힐 일이 적은 프로그램을 찾아다니며 작가와 피디들에게 열심히 읍소하고 다녔다.

덕분에 한동안은 몸에 무리가 왔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피곤한 날들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 결과 조금 더 나은 프로그램에 애들을 출연시킬 수 있었으니까.

넓은 공간에서 뛰어다니느라 바빴을 텐데도 멤버들은 촬영 중간 주어지는 그 짧은 휴식 시간에 우진을 찾아 뛰어왔다.

“형, 괜찮아요? 심심하진 않아요?”

“우리 완전 날라다녔는데 봤어요?”

한시도 입을 쉬지 않고 삐약거리는 병아리들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며 일일이 챙기는 우진의 손에는 애정이 듬뿍 묻어났다.

“조심조심 다녀야 된다. 다른 분들께 폐 안 끼치게 조심하고. 무엇보다 찬이랑 세빈이.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누가 들으면 내가 맨날 넘어지는 줄 알겠어요.”

“그럼 아냐?”

“맨날은 아니지!”

자기들끼리 킥킥거리던 애들은 금방 손을 흔들고 촬영장으로 돌아갔다.

자신도 저렇게 생명력이 넘치던 시절이 있었나 하고 추억을 더듬어보았다.

저 아이들은 고통스럽더라도, 좌절이 있더라도 이겨낼 줄 알았다.

심지가 곧고 단단한 아이들인 걸 연습생 시절 내내 지켜봐 온 우진은 알았다. 그래서 더 멤버들과 함께 뛰고 싶었고.

얼마 전 지환은 자신에게 오래오래, 자신들이 해외 무대에 진출할 때도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때야 김칫국 마시지 말라고 핀잔을 주었지만, 그 말을 듣고 우진이라고 가슴이 뛰지 않았을 리가.

자기 손으로 키운 멤버들이 점점 더 커다란 무대로 걸어갈수록 우진의 심장도 이전처럼 세차게 뛰었다.

늘 멤버들 앞에서야 태연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여러 연예인과 연습생들을 거치면서 이렇게까지 정을 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문득 저렸던 다리를 내려다본 우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늘 미뤄왔던 병원의 방문을 더는 미루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신을 바라보며 언제나 투명한 눈동자로 삐약거리는 병아리들과 오래오래 함께하려면 역시 건강을 챙길 필요가 있었다.

* * *

처음 ‘이승 탈출’ 출연을 들었을 때, 나는 ‘이거다!’하는 촉이 왔다.

보통 아이돌이 활동하기 좋은 건 특정 계절이나 예능 특집이 넘쳐나는 시즌이었다.

우리는 초여름에 데뷔했지만 노래가 시즌 송이 아니어서 계절 덕을 보기 힘들었고, 곧이어 출연한 프로그램이 잘 되긴 했지만, 그 역시도 덕을 보기 힘들었다.

그 후 너무 많은 사건 사고에 휘말려서 제대로 활동하기도 전에 쉬어야 했으니까.

추석 특집 격인 힐링 캠프 덕에 그나마 많은 관심을 받았고, ‘알려지지 못한 이야기’가 우리 기대보다 더 큰 인지도를 주었다.

하지만 다른 아이돌들과 비교하면 예능 프로그램 출연 횟수가 적었다.

행사를 다니는 다른 아이돌에 비해 무대 역시 많이 서지 못했고.

회사에서는 우리에게 예능 출연을 강요하기보다는 자체 리얼리티 촬영에 더 집중하는 것 같았다.

회사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생각보다 조회수가 잘 나온다고 했다.

우리 뮤직비디오들도 조회수 백만을 넘겼다.

백만을 넘긴 날 우리끼리 작은 파티를 열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뮤직비디오보다 ‘Pluto’를 처음 불렀던 날의 무대 영상 조회수가 더 높았다.

이 기형적인 조회수나 관심이 종종 무서웠다.

그럴 때마다 나쁜 짓을 해서 사람들 입을 오르내리는 게 아니니 다행이라고, 그렇게 자신을 달랬지만 불편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이승 탈출’에 출연하는 만큼 최대한 우리 애들 분량을 많이 챙기고 싶었다.

DCL에게는 미안했지만, 일단 나에겐 언래블이 가장 중요하니까.

그렇게 마음을 굳히고 출연이 확정된 이후, 나는 내 요정님을 치트키처럼 활용했다.

과거 기억을 뒤져서 비슷한 방송이 있었는지를 생각하고 해당 에피소드를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조금이라도 써먹을 수 있는 게 있기를 바라면서.

물론 회사에서도 여태까지의 방송을 요약해 출연진과 스태프들의 분위기를 최대한 가르쳐 주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포잉의 도움으로 자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 첫 화부터 최근화까지 꼼꼼히 확인하고, 공부하면서 머릿속에 밀어 넣었다.

전생에 학교 다닐 때보다 이번 생에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금 슬펐던 것 같기도 했다.

열성 팬인 척하는 건 어려울 테지만, 평소 관심이 많았었다는 듯 행동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거기에 오늘은 체력을 좀 깎아 먹더라도 스킬을 십분 활용할 생각이었다. 촬영 중에 열이 올라 쓰러지지 않도록 조심할 생각이었지만 담이 작았던 터라 심장이 콩닥거렸다.

“캬, 우리가 주장을 참 잘 뽑았어. 안 그래?”

“아까는 팀장이래 놓고 이제는 또 왜 주장이래.”

“거나, 거나! 알아들었으면 됐지.”

잠시 생각에 빠졌던 나는 다시 모여서 와글와글 떠드는 사람들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제 계획이 통해서 다행이에요.”

“크, 어떻게 그렇게 찰떡같이 숨겨둔 장소를 예측했어?”

은근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두 고정 출연자들의 모습에 정신을 꽉 붙들었다.

“휴이 만큼은 못 돼도, 저도 꽤 팬이거든요. 그래서 이승 탈출 볼 때마다 선배님들 미션 진행하는 걸 유심히 봤어요.”

“그냥 편하게 형이라고 하라니까.”

“하하, 네. 방송 보면서 제작진들이 어떻게 미션을 내는지, 그걸 형님들이 어떻게 풀어갔었는지 열심히 궁리했어요.”

“오호, 그래서 아까 우리한테 열심히 물어봤구나?”

“네. 보통 허를 찌르는 방식을 많이 사용하셨더라고요.”

“이야, 그걸 또 연구하고 나올 줄은 몰랐네.”

시청자들이 보면 짜고 치는 거 아니냐는 의심이 들 정도로 내가 지시를 내렸던 장소 근처에서 미션지가 나왔다.

주작이 없기로 유명했던 프로그램이었기에, 이 둘은 그런 논란 자체를 미연에 방지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나에게 질문하는 척, 시청자들이 수긍할 수 있도록 그림을 만들고 있었다.

난 휴이나 찬이처럼 재밌는 장면을 못 뽑아냈다.

경환 형이나 찬이처럼 엉뚱한 매력으로 흥미를 유발하지도 못했고.

그러니 노력파로라도 보이기 위해 90%의 사실에 약간의 거짓을 섞었다.

요정의 힘을 빌렸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역시 내 요정님이 최고야.’

‘너는 진짜….’

내가 미션지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었던 건, 안락한 수면을 포기한 대가이기도 했지만 포잉의 도움이 정말 컸다.

벽이고 뭐고 포잉 앞에선 전부 무용지물이니까.

하하, 이래서 인생은 실전이라고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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