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27)화 (227/456)

227. IDEA(3)

키스는 가영이 집에 작업실을 만들 때 막지 않은 걸 후회했다.

밤낮이 예사로 바뀌고 시간 감각이 이상해지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그건 이 일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달고 있었던 고질적인 직업병 같은 것들이라 대수롭지 않았다.

다만, 짜증이 치솟는 원인의 89% 정도가 한 사람 때문이듯, 이번 일도 동일한 인물 때문이었다.

“하…. 진짜 형은 사람 새끼냐?”

“뭐 임마?!”

“제발, 진짜 제발 부탁이니까 숙소에서는 옷 좀 입고 다닐래? 진짜 눈 뜨자마자 형 새끼 몸뚱이 같은 걸 내가 봐야 하냐고.”

“곡이 안 써지는데 어떡하냐!”

이제 막 깬 키스가 잔뜩 잠긴 저세상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그 와중에도 발음하나 뭉개지는 것 없는 정확한 딕션.

가영은 욕을 퍼부어도 흐트러지지 않을 것 같은 정확한 발음에 신기하다는 눈으로 키스를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말을 흘려듣고 있다는 걸 눈치챈 키스의 시선은 점점 더 흉악해졌지만.

‘진짜 이건 사람 새끼가 아니다.’

키스는 처음 숙소 생활을 시작할 당시, 가영 형 어머님 얼굴이 밝았던 게 이해됐다. 이런 인간을 그 긴 시간 사람처럼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가영은 숙소에서 작업하다 일이 잘 안 풀리면 별짓을 다 했다.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면 안 되는 걸까?’

‘굳이 저렇게 빤스 바람으로 소파 위에서 몸부림쳐야 하는 걸까?’

키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가까스로 어지러운 속을 달랬다.

온갖 비속어가 머리를 채우고 눈앞의 상황을 외면하고자 하는 본능이 요동쳤다.

한가영과 딱 한 달만 살면 신선도 천년 수련을 포기하고 저 인간을 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따위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더불어 저 소파 커버를 벗겨 세탁을 맡기지 않으면 두 번 다시 저 소파에 앉지 않겠다는 다짐도 했다.

“차라리 작업실 가서 해라. 집에서 이러지 말고.”

“스케치만 하고 회사에서 하려고 했는데 안 되잖아….”

“그냥 다 회사 가서 하라고.”

가뜩이나 전날 잠을 설쳐서 피곤했던 키스는 두통까지 치미는 것 같아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지압하면서 조금 맑아진 머리로 그간 독립할까 하는 생각을 백만 번쯤 한 것 같았는데 왜 실행에 옮기지 않았는지를 더듬었다.

답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엄마가 쓸데없이 돈 쓰지 말고, 언제 망할지 모르니 그저 잘 모아두라고 잔소리했던 탓이었다.

차마 엄마를 욕할 수 없었던 키스는 이번에 집에 가면 꼭 독립을 이야기해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반다진이 자유를 외치며 숙소를 뛰쳐나갔을 때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최근에는 점점 더 독립을 생각하는 날이 많아졌다.

반다진도 미친놈이었지만, 한가영은 그보다 두 단계 더 위였다.

“아, 미치겠네.”

“나도 미치겠다. 어떡하지?”

“그냥 내가 꺼질게….”

미친놈은 원래 마주하는 게 아니랬다.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작업실에만 틀어박혀 작업하던 가영이 갑자기 장비를 사들이길래 무슨 일인가 했었다.

작업실에서 할 때는 최소한 사람 같았는데, 숙소에서 하기 시작하자 점점 사람의 몰골이 아니게 되었다.

“무슨 일이야?”

“율아, 윤혁이가 나한테 욕했어!”

세비가 거실에 나오자 세상 불쌍한 척을 하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는 가영.

가영은 표정은 정말로 억울해 보였지만, 그런 표정이 통할 만큼 이들의 관계는 얄팍하지 않았다.

가영의 몰골을 본 세비는 ‘쩡!’하는 소리가 날 것처럼 순식간에 굳었다.

그 후 급격하게 피곤한 얼굴이 되더니 키스를 바라봤다.

“나가자. 이 꼴을 보고 집에 있고 싶지가 않네.”

“동감. 한가영 혼자 마음대로 날뛰라고 하고 우리가 나가자.”

“아, 왜 나한테만 그래!”

과연 세비는 지혜로웠다.

키스는 팀에서 유일하게 사람답고 형다웠던 세비의 의견에 공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러운 몰골을 보았고, 치울 수 없다면 내가 피하면 되는 것.

시선을 교환한 둘은 가영이 뭐라 시끄럽게 떠드는 걸 무시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나갈 땐 나가더라도 좀 씻고 사람 몰골로 나가야지.’

키스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고 혀를 찼다.

최근 잠을 설쳐서 그런지 모자를 눌러쓰더라도 초췌함이 가려질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대충 외출할 수 있는 몰골로 방 밖으로 나왔더니 가영이 세비를 붙잡고 싱글벙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왜! 너 혼자 편하게 작업하라고. 우리는 나간다니까?”

“원래 막힐 때는 새로운 자극을 찾아야지.”

“그러니까 그 자극을 혼자 찾으라고. 우리 내버려 두고.”

둘이 나간다니까 굳이 굳이 같이 나가자고 씻고 나온 가영의 행동에 키스는 속으로 한탄했다.

‘이 형 새끼는 전생에 내가 지은 거대한 업보라도 되는 걸까.’

키스는 자신의 전생까지 의심하며 다시 도지는 두통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세비와 투닥거리는 가영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언래블 멤버들이 생각났다.

형, 형 하면서 잘 따르는 지환이나 세빈이뿐만 아니라 모든 애들이 착해서 지켜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힐링하는 기분이랄까?

처음 만날 때부터 이상하게 친근하고 눈길이 가던 애들이라 그 뒤로 쭉 이리저리 신경을 쓰고 챙기는 편이었다.

편두통을 늘 달고 살던 키스가 유독 언래블과 함께 있을 때, 두통이 사라지는 것도 신기했다.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들 수가 없는 멤버들을 떠올리다, 최근에 멤버들을 만나는 게 조금 뜸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언래블 멤버들과는 평범한 일상뿐만 아니라 일에 대한 이야기도 꽤 잘 통했다.

“애들 보러 갈까?”

“애들? 누구?”

“우리가 애들이라고 부를 만한 게 환이네 애들밖에 더 있어?”

새벽 멤버들은 어쩌다보니 리더인 하준보다 늘 지환을 먼저 언급하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고 연락하고 지내는 사이지만 만나서 노는 거랑은 또 다르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키스가 씩 웃었다.

“저저, 왜 또 그렇게 불길하게 웃냐!”

“내가 뭘?”

키스는 팬들이 흑막 같다고 좋아하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지환이 봤다면 당장 도망갔을 것 같은, 그런 미소였다.

그때, 가영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외쳤다.

“진우는 뭐 한대?”

“몰라, 연락해봐.”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세비는 그냥 둘을 내보내고 본인만 숙소에 남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하는 고민에 빠졌다.

* * *

“정말 괜찮을까요?”

“괜찮다니까. 나만 믿어!”

“여기서 형이 제일 못 미더운 건 알어?”

“야! 넌 꼭 잘생긴 애들만 나오면 나한테 뭐라 하더라!”

이승 탈출은 오수, 김인규, 강서노, 이부온 이 네 명이 고정 멤버였다.

고정멤버에 우리 팀 6명, DCL 4명까지 모두 모이니 정말 대인원이었다.

두 팀으로 나눠도 한 팀당 일곱 명이나 됐다.

눈앞에서 오수, 강서노 선배님들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딜을 넣고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아찔한데 휴이가 TV로만 보던 광경을 직접 보더니 넋이 나갔다.

계를 타서 좋은 건 알겠는데 이제 슬슬 무언가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운동화 안의 발가락이 꼼지락거리는 것 같았다.

두 분이 티격태격하는 게 이 프로그램의 일상이란 건 어느 정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수시로 그럴 줄은 몰랐다.

‘그게 다 짜고 치는 게 아니었구나….’

‘님, 정신 안 차리면 큰일 나겠는데? 저쪽은 벌써 의기투합한 듯.’

‘아, 안돼!’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허우적대던 나는 포잉의 한 마디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벌칙은 어떤 것이든 하고 싶지 않았다.

같은 팀으로 배정받은 멤버들을 둘러봤지만, 기분이 썩 나아지진 않았다.

하필이면 준이 형, 영빈 형, 리우 형, 이렇게 각 팀의 맏형들이 모두 상대 팀에 들어가 버렸다.

레노랑 자인이도 형들 팀에 가서 다행인 것 같기도 했지만, 우리 팀에는 찬이랑 경환 형이 남았다.

팀 뽑기를 했을 때, 내가 뽑은 종이와 찬이 종이가 같은 색인 걸 확인한 우리 애들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하나같이 천만다행이라는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죽하면 메인 MC 격인 오수 선배가 왜 다 그런 표정이냐고 물었다.

“찬이가 좀 천방지축이라 환이가 꼭 붙어 있어야 하거든요.”

“찬이한테는 사고 안 치고 안 다치게 환이가 꼭 붙어 있어야 해요.”

동시에 입을 연 맏형들의 말에 모두가 재밌다는 듯 웃었지만, 당사자인 우리 둘만 웃지 못했다.

“내가 언제 그렇게 사고 쳤다고 그래! 형님들, 저거 다 거짓말이에요!”

“하, 하하….”

찬이는 억울하다는 듯 고정 네 명에게 항변했다.

언제 저렇게 또 친해진 거야….

핼쑥해진 내 표정이 재밌었는지 같은 팀이 된 강서노 선배님이 다가와 자기가 잘 챙겨보겠다며 자신만 믿으라고 했다.

그랬더니 오수 선배님이 슬슬 장난을 걸기 시작했고 지금에 이른 것.

“저, 이제 슬슬 회의도 하고 미션도 수행하러 다녀야 하지 않을까요?”

“아, 그러네. 움직여야지.”

“작전 회의를 하고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쪽은 이미 얘기 중인 것 같거든요.”

내가 슬쩍 눈짓으로 상대 팀을 가리키자, 다들 그쪽을 한 번씩 바라봤다. 서로 멀찍이 떨어져 있지만 제각각인 우리와 달리 그들은 이미 둥글게 모여 쑥덕거리고 있었다.

“제가 가서 염탐하고 올까요?”

“휴이 형이랑 제가 가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겨우 분위기를 정리했다 싶었더니, 이번엔 휴이랑 찬이가 눈을 빛내며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아냐, 그건 아닌 것 같아. 둘 다 손 내려.”

“힝….”

“잘할 수 있는뎅….”

“소름 돋으니까 둘 다 이상한 소리 내지 말고!”

둘은 찰싹 붙어서 이상한 소리를 내며 칭얼거렸고 질색하며 밀어낸 나는 심신의 안정을 위해 세빈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와, 얘네도 얼굴만 멀쩡하지 머리는 안 멀쩡하네.”

“우리랑 비슷한데?”

“헷,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내 귀에는 오수의 감탄도 강서노가 휴이와 찬이 어깨를 두드리며 흡족해하는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혼미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들며 세빈이 머리만 쓰다듬었다.

“형, 괜찮아요?”

“응… 아마….”

“홍삼 챙겨올 걸 그랬나.”

“아냐, 홍삼의 ‘ㅎ’도 꺼내지 마, 세빈아.”

걱정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리던 세빈이가 이상한 소리를 하길래 입을 단단히 틀어막고는, 결국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어쩌다 이런 포지션이 됐는지 모르겠지만, 두 선배님과 두 모지리가 쿵짝이 맞아서 쑥덕거리는 건 조금 불안했다.

“제 생각엔 저쪽은 아마 2명, 3명씩 나눠서 구역을 정하고 미션지를 찾는 방법을 쓸 것 같아요.”

“응? 왜?”

“선배님들 성격은 제가 정확히 모르지만, 저희 형들 성격은 잘 알거든요.”

나도 모르게 너무 뿌듯한 미소를 지었는지, 휴이와 찬이는 나를 손가락질하며 웃기 시작했다.

“와, 지환이가 멤버들을 죄다 손에 쥐고 사는구만.”

“얘가 너네 팀 실세지? 아니, 근데 DCL은 어떻게 된 거야? 너네는 왜 지환이한테 파악 당한 거야?”

“어…. 모르겠어요! 그냥 어쩌다 보니까?”

“환이 형이 저희 팀 실세는 맞아요. 형들도 잘못하면 환이한테 혼나요.”

“여러분, 제발 집중해주세요…. 그리고 너희들, 자꾸 나 몰지 말고.”

한마디 하면 사방에서 열 마디가 쏟아지지만 나는 꿋꿋했다.

“오늘 소고기는 우리 겁니다. 절대로 지지 말자구요.”

오늘 미션의 우승자에게는 한우 세트가 지급된다고 했다.

“오늘 우리 팀 주장은 환이가 하자. 왠지 믿음직스럽네.”

“환이는 저희 팀 행운의 아이템도 맡고 있어요. 얘 말대로 하면 잘되거든요.”

“정작 자기 자신은 뭔가 다사다난하지만….”

“그거 액막이 인형 같은 거 아니냐. 환이 정말 괜찮아? 도망칠 곳이 필요하면 우리한테 와.”

“우리 형 뺏어가면 안 돼요!”

잠깐 틈을 보였더니 온갖 이야기가 쉬지 않고 터져 나왔다.

왜 우리 세빈이가 내 팔에 매달려있는지, 찬이랑 휴이는 왜 세빈이 흉내를 내는지, 두 선배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주장, 그래요. 제가 할게요. 대신 제 말을 잘 따라주셔야 합니다.”

“오오! 듬직하네! 남자다잉!”

“역시 홍삼 파워!”

이렇게 된 이상 세빈이를 제외한 인원 모두를 소고기의 제물로 철저히 써먹어 주리라.

그렇게 속으로 작은 복수를 다짐한 나는 열심히 궁리한 내용을 팀원들에게 속삭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