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이름에게(3)
어둑한 화면 안에 은은한 빛을 뿌리는 작은 전구들이 어지럽게 매달려 있었다.
그 전구들 주변엔 보드라운 느낌의 천들이 다양한 색을 반짝이며 늘어져 있었고, 바닥에는 두툼해 보이는 카펫이 깔려있었다.
어떤 장소로 가는 듯 길게 깔린 카펫의 앞에는 입구를 가리듯 휘장이 드리워 있었다.
배경으로는 은은한 피아노 연주와 플루트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멜로디였다.
새까만 색의 차분한 머리를 한 소년은 그 앞에서 망설이듯 서 있었고, 휘장 너머에선 즐거운 듯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얀 손이 휘장을 움켜쥐는 순간, 안쪽에서 튀어나온 손이 소년의 팔목을 잡아 휘장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렇게 끌려들어 간 안쪽엔 커다란 침대가 있었고, 방안 가득 푹신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새하얀 잠옷을 입은 소년들이 침대 주변에 각양각색의 자세로 앉아있다가 소년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소년들의 앞에는 다양한 색의 텀블러가 놓여 있었다.
누구는 책을 보고 있기도, 또 다른 누군가는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기도 했다.
그 모습에 까만 머리의 소년이 픽 웃더니 침대에 올라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분명 휘장 앞에서는 까만 티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던 소년의 옷도 어느새 하얀 잠옷으로 바뀌어 있었다.
소년이 앉자, 주변에 흩어져 있던 소년들도 하나둘 침대에 올라와 모여 앉았다.
여섯 명의 소년이 모두 침대 위에 올라앉아 품에 하나씩 인형을 끌어안았다.
까만 머리에 조금 작은 듯한 소년이 고양이 인형을 안고, 옆에 있는 연한 갈색 머리를 가진 청년에게 기댔다.
그 모습에 부드럽게 웃던 청년의 품에는 늑대 인형이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이불을 툭툭 두드리던 청년은 양 인형을 안고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금사같은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그런 청년의 무릎에는 애쉬 핑크색의 머리를 가진 소년이 드러누워 있었고, 품에는 자신을 닮은 토끼 인형이 안겨 있었다.
밝은 갈색의 짧은 머리칼을 가진 소년은 곰돌이 인형을 안고 엎드려 있었고, 복슬복슬한 어두운 체리 색 머리를 한 소년은 품에 안은 원숭이 인형을 괴롭히고 있었다.
자신들끼리 어떤 재밌는 얘기를 하는지 연신 즐거운 얼굴로 웃고 있었고, 꼼지락거리는 탓에 밑에 있던 하얀 이불은 이리저리 구겨져 있었다.
희미한 조명 아래서 편안하고 즐겁게 늘어져 있던 소년들이 어느새 하나둘 눈을 감기 시작했다.
장난치고 놀던 모습 그대로 느리게 눈을 깜빡거리다 결국 감기는 눈을 참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 장면을 지켜보던 까만 머리칼의 소년이 있었다.
다른 이들이 모두 잠든 것을 지켜보던 소년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던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하며 입을 열었다.
- 예쁜 꿈 꿔요, 잘 자요.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가 행복한 밤이 되라는 듯 속삭였고, 그 목소리와 함께 화면은 까맣게 물들었다.
까맣게 변한 화면에 ‘괜찮아요’라는 문구가 느리게 깜박거렸다.
언래블의 새 미니 앨범의 홍보 영상이었다.
* * *
“…와, 이게 이렇게 되네요?”
“우리가 저때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지?”
“미래에 대한 이야기?”
“치킨이냐 백숙이냐가 미래야?”
“병아리 미래가 그거밖에 더 있어요?”
“찬이가 이왕이면 양념치킨이 좋겠다고 했어.”
완성된 홍보 영상을 감상하던 우리는 당시 촬영 현장을 떠올리며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목소리는 묵음처리 될 테니 편하게 대화를 나누라고 하셔서 다들 숙소에서 떠들듯이 떠들었다.
솜뭉치들이 들었다면 우리 이미지가 와장창할만한 대화들이었지만, 다행히 알지 못할 이야기들이었다.
우리 미래를 논하며 백숙이니, 양념치킨이니 이야기한 것을 솜뭉치들이 알았다면 뭐라고 할까?
영상은 생각보다 더 따뜻하고 보드라운 분위기로 나왔고, 뮤직비디오가 없어서 아쉬웠던 마음은 깨끗하게 사라졌다.
회사에서는 짧은 기간 뽑아내는 앨범인 탓에 예산상의 문제로 뮤직비디오를 만들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엔 조금 아쉬웠지만 홍보 영상을 찍기로 했었는데, 찍을 때는 몰랐지만 이렇게 보니 꽤 그럴싸했다.
“너희 새 노래 공개할 때 저 영상이랑 몇 가지 짜집기 해서 배경으로 쓸 거야. ”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엄청 타이밍이 좋았죠.”
앨범에 ‘Confusion’과 ‘Pluto’만 넣어선 위로라는 내용이 드러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에단 선생님이 우리에게 새 곡을 주고 싶다고 했던 게 떠올랐던 정윤 실장님이 빠르게 움직였다.
원래는 이전 앨범이었던 여로에 넣을까 했었지만 앨범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아 보류해두었던 곡이라고 하셨다.
에단 선생님 왈 처음에는 졸업식을 듣고 떠올렸다 하셔서 이전 생에 졸업식의 후속곡으로 나왔던 너의 결혼식이 떠올랐었다.
그 곡이라면 이번 앨범에 안 어울릴 텐데, 하고 걱정했지만, 어떤 영향에선지 선생님이 만든 곡은 전혀 다른 곡이었다.
가이드 녹음도 없는 멜로디만 있는 곡을 들은 우리는 이거다 싶었다.
그 길로 선생님에게 달려간 우리는 곡 너무 좋다고 방방 뛰면서 선생님을 껴안고 난리를 쳤다가 시끄럽다고 쫓겨났고.
우리의 주접에 질색하던 에단 쌤은 찬이와 경환 형 등짝을 한 대 때리는 걸로 용서해 주셨다. 그때부터 다시 녹음 지옥에 들어갔다.
새로 주신 곡도 단조로운 멜로디였지만 피아노 연주가 메인이라 굉장히 맑은 느낌을 주었다.
“컨퓨전도 어쿠스틱 버전으로 하니까 분위기가 확 다르긴 하더라.”
“그냥 연주만 들으면 다른 노래 같아.”
“덜 신나긴 하는 데, 난 이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녹음과 촬영을 모두 끝낸 덕에 앨범 제작으로 더는 우리가 할 일은 없었다.
11월 11일 앨범 공개 예정이라 촉박한 시간 속에서 최대한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고, 덕분에 다들 체중이 더 빠졌다.
“이제 슬슬 날 좀 도와주지 않을래?”
“어우, 피곤해…. 우리 이제 숙소 가서 자자.”
“경환아?”
“그럴까요?”
“어허, 이것들이?”
한참 녹음에 바쁘던 때, 준이 형이 멤버들에게 새 곡 작업을 도와달라고 했었다.
평소 준이 형이 쓰던 곡과 다른 무언가 말랑말랑한 느낌이었고, 미완성이라 의견이 필요하다고 말했었다.
나는 곡을 쓸 때 멤버들의 의견을 많이 듣는 편이었지만, 준이 형이나 경환 형은 보통 혼자 작업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아서 신기한 기분이었다.
이런 식으로도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있구나 싶어서.
멤버들도 그날 형에게 다양한 의견과 감상을 내놓았다.
하지만 의견을 말하는 것으로 끝날 리 없었고, 그날 우리는 준이 형에게 꽤 긴 시간 동안 잡혀서 탈탈 털려야 했다.
준이 형 말로는 언래블에서 하고 싶은 음악과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음악이 서로 다르다고 했다.
그래서 팀을 위한 곡은 팀원들의 의견을 담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원래 안 그랬던 사람이면서!
물론 형에게 도움이 되는 건 좋았지만, 춤출 때 찬이나 세빈이가 깐깐해지는 것처럼, 곡을 만들 때의 형들은 매서웠다.
안 그래도 녹음하고 촬영한다고 체력이 쭉쭉 빠지던 차기에 앞으로 되도록 준이 형 작업실에는 들어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할 만큼.
“일단 오늘은 늦었으니까 숙소 가자, 얘들아.”
“쯧…. 아쉽지만 내일 할까.”
우진 형의 중재 덕에 적어도 오늘의 평화를 사수한 우리는 준이 형 몰래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사실 한편으로는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약간이긴 했지만 형의 작업 스타일이 바뀐 것에 내 영향이 있는 건 아닌가 해서.
혹여나 형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준거라면 당장 벼락 맞아 죽어도 나는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준이 형이나 경환 형이 만들어 내는 언래블의 음악을 좋아했던 나에게 그건 씻을 수 없는 커다란 죄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도 아직은 모를 일이기도 했고, 어쩌면 형에게 좋은 영향을 준 걸 수도 있을 테니 지레짐작은 하지 않기로 했다.
평소처럼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지친 얼굴이었다.
“배고파….”
“아직 시간이 조금 있긴 한데. 간단하게 뭐라도 해 먹을까?”
“아니, 그거 말고.”
“그럼?”
배고프다고 바닥을 구르는 찬이와 경환 형의 몰골에 길게 한숨을 내쉰 내가 살살 달래봤지만,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다.
“햄버거 먹고 싶어!”
“햄버거?”
준이 형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지자 찬이가 벌떡 일어나 준이 형 등짝에 매달렸다.
“형, 형, 햄버거 먹고 싶어!”
“나도 햄버거….”
“저도요!”
꽤 오랜 시간 햄버거를 끊고 살아온 멤버들은 찬이의 한마디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피자, 치킨은 가아끔 먹었고, 짜장면이나 탕수육도 회사에서 아주 가끔이지만 시켜줬었다.
하지만 햄버거나 감자튀김은 입에 댄 지 오래라 우리 애들은 순식간에 눈이 번뜩였다.
“이 시간에 배달되는 곳이 있겠어?”
“여기서 쫌만 가면 24시간 하는 데 있는데!”
“그래서 나가서 먹자고? 미쳤어?”
“허엉…. 햄버거 먹고 시퍼요!”
그동안 이날만을 기다려 온 건지 찬이가 평소랑 달리 적극적으로 준이 형에게 매달려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는 경환 형이 불쌍한 눈으로 준이 형을 보고 있었고, 바로 그 옆에선 세빈이가 비 맞은 강아지처럼 준이 형을 바라봤다.
곤란해진 준이 형이 영빈 형을 바라봤지만….
“햄버거….”
“…빈아?”
영빈 형도 햄버거가 참 먹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햄버거를 중얼거리던 영빈 형은 구체적인 버거 세트 이름까지 읊기 시작했고, 그러자 매달려 있던 세 명도 따라서 같이 먹고 싶었던 버거 이름을 읊어댔다.
“그, 준이 형?”
“하아….”
“가위바위보 해서 몇 명이 사러 갔다 오는 건 어때요?”
우리가 단체로 돌아다니는 건 아무래도 많이 걸렸기에 나름의 타협안을 형에게 내밀었다. 준이 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 회사에는… 알지?”
“우와!”
“우리 리다님이 최고시다!”
여론에 밀린 준이 형은 결국 멤버들에게 한 번의 일탈을 허락했다.
가뜩이나 최근에 살이 좀 빠졌던 멤버들이 안쓰러워서였는지, 매달린 동생 놈들이 힘겨워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랑 경환이, 환이가 다녀올 거고 나머지는 씻고 숙소 정리해놔.”
“나도 가야 돼요…?”
“햄버거 안 먹고 싶냐?”
“갈게요….”
숙소에 들어온 이상 밖으로 나가기 싫었던 내가 거부의 뜻을 살짝 내비친 것만으로도 우리 애들의 눈동자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내가 햄버거보다 못하니, 얘들아…?
시무룩해진 나를 질질 끌며 숙소를 나서는 경환 형의 얼굴에 기쁨이 한가득해서 더 우울해졌다.
경환 형은 발걸음만 봐도 신이 났는데, 가만히 있다가 날벼락 맞은 나만 힘없이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어차피 숙소에 있었어도 애들 등쌀에 가만 못 있었을걸?”
“그것도 그렇긴 한데… 그냥 밖에 나가는 것 자체가 싫어요.”
준이 형에게 조금 삐진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애꿎은 바닥만 툭툭 걷어찼다.
따신 물로 씻고 노곤노곤해진 몸으로 푹신한 러그에 늘어질 생각이었던 내 입에서는 평소보다 삐쭉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너무 툴툴거렸나 싶어 슬며시 고개를 들었더니, 준이 형이나 경환 형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흐뭇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얘가 이럴 때가 있네.”
“그러니까요. 맨날 득도한 고승처럼 굴더니.”
“제가요?”
“그래, 인마. 맨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럴 거 같은 얼굴하고 있잖아.”
“저렇게 삐진 얼굴이 되니까 찬이 친구 맞는 거 같네.”
“와, 그건 좀 말넘심.”
둘이 저렇게 웃고 있는데 계속 뾰족하게 굴 수 없었던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찬이와 나를 비교하는 경환 형의 등짝을 어깨로 쿡 들이박았다.
“아, 왜. 내 말 맞구만.”
“우리 최찐빵이는 솔직히 18살 아닌 것 같잖아요.”
“뭐, 그럴 때가 더 많긴 하지.”
방금까지 밖에 다시 나간다는 것에 치솟았던 짜증은 형들과 몇 마디 주고받는 사이 다 사그라들어버렸다.
괜히 더 툴툴거리며 앞장서서 걸었지만, 등 뒤에서 들리는 둘의 웃음소리 때문에 목덜미가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내가 진짜 애가 된 것 같아서 입을 꾹 다물었지만, 형들의 웃음소리도 포잉의 잔소리도 사라지지 않았다.
‘계약자 놈아, 네가 그러면 그렇지.’
‘…쉿. 팩트는 함부로 날리는 거 아냐, 포잉’
‘쯧, 모지리 같은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