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 이름에게(1)
하준은 리더라는 자리에 늘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학교에서 반장 한번 안 해본 자신이 이 개성 넘치는 애들을 잘 이끌어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연습생 기간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리더로 하준이 적합하다고 판단한 회사는 숫기가 없는 영빈 대신 하준에게 임시 리더를 맡겼다.
기본 성정이 성실했던 하준은 막막했던 리더라는 자리에 그럭저럭 적응했고, 어느새 데뷔 후에도 리더를 맡게 되었다.
물론 적응해가는 시간 내내 쉬운 일은 없었다.
다들 그렇겠지만, 특히나 하준은 지금 멤버들 뿐만 아니라 거쳐 간 연습생들의 못 볼 꼴들도 봐야 했기에, 거기에 질려 리더를 그만두고 싶다고 회사에 말했던 날도 있었다.
평탄한 길을 가려던 영빈을 억지로 끌어다 자신의 옆에 앉혀두었던 날이 있었다.
자신의 랩 이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어 보였던, 무관심한 경환의 멱살을 잡은 날도 있었고.
고집스러운 눈으로 막막해질 만큼 강한 경계심을 보이던 지환이를 억지로 붙들어 시선을 마주하기도 했었다.
자신을 주체하지 못해 엉엉 울던 힘찬이에게 널 못 믿으면 우리를 믿고 가자고 말했던 것도 하준이었고.
겁에 질려 숙소 밖에 나가기 싫다고 울고불고 난리 치는 세빈이를 질질 끌고 나온 것도 하준이었다.
그랬던 멤버들이 지금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리더라고 부르며 신뢰가 듬뿍 담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준은 이 모든 아이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게 벅찬 만큼 버겁기도 했다.
아무리 잠을 줄이고 궁리를 해도 불안함이 사라지지 않았던 어떤 날에는 한밤중에 몰래 숙소 앞에 나가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발목이 묶인 것처럼 그 순간마저도 숙소를 벗어나지 못하고 계단에 쪼그려 앉아 한참을 서럽게 울었었다.
잘하고 싶었고, 잘 되고 싶었다.
막연히 힘들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힘들 거라는 건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지금이야 비슷한 처지인 박온, 그러니까 지금은 DCL의 리더가 된 리우와 푸념을 나누기도 했고 하겸 형에게 많은 부분 의지하고 있었다.
홀로 아등바등하던 시절과는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리더의 고충은 리더가 가장 잘 아는 법이라 둘의 이야기는 하준에게도 꽤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니, 가끔 하겸 형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골든 아워에 비해 언래블은 굉장히 순하고 얌전한 성격이라는 걸 느껴 팀장님께 감사하기도 했다.
적어도 멤버들은 새벽에 숙소를 탈출해 패스트푸드점을 습격하거나 갑자기 PC방으로 도망가진 않았으니까.
자다 목이 말라 일어났는데 침대들이 비어있어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던 하겸 형의 이야기를 들은 날에는 찬이 어깨를 두드려주며 칭찬하기도 했었다.
물론 당사자인 힘찬은 갑자기 하준이 왜 이러나 싶어서 자신이 잘못한 게 있는지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말썽이라고 해봐야 숙소에서 베개 싸움하느라 난장판을 만드는 일이나 몰래 간식을 먹는 것, 자기들끼리 장난치다 심해져서 좀 삐지는 정도였다.
한참 때의 남자애들만 있는 숙소에서 그 정도면 정말 애들이 착한 거라고 생각하며, 멤버들에게 더 잘해줘야겠다고 다짐하게 됐었다.
언래블의 사건 사고는 대부분 외부 요인이었던 터라 애들이 사고를 칠 틈이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연습생이라는 이름으로 지내는 몇 년, 데뷔하고 이제 네 달.
홀로 있는 작업실에서 과거를 떠올리며, 하준은 하나씩 떠오르는 생각에 흠뻑 잠겼다.
넉 달 사이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데뷔 조라는 이름으로 그 전부터 방송을 탔지만, 어쨌거나 데뷔 날부터 따지자면 이제 넉 달이 되었다는 게 실감이 안 났다.
“보통 이 정도는 일, 이 년 사이에 겪을 일 아닌가?”
헛웃음을 흘리며 모니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준은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자신도 많은 부분이 변했다는 걸 이해했다.
버거웠고, 조급해했고, 답답했던 감정들은 대부분 흩어져버렸다.
억지로 애썼을 때 되는 것이 있고 안되는 것이 있다는 것도 수긍했다.
아집을 내려놓으니 혼자 할 수 있는 일보다 다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많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여전히 리더로서 친구에게, 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싶었다.
잘하고 싶은 마음도, 잘 되고 싶은 마음도 변함없었다.
하지만 늘 어깨를 짓누르던 중압감이 멤버들과 다 같이 플루토를 만들던 그때부터 많이 사라졌다.
그래서 최근, 그런 깨달음 사이에서 떠오른 이야기를 곡으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타닥타닥 손을 움직일 때마다 고개가 함께 까딱거리며 연한 갈색의 머리칼이 같이 팔랑거렸다.
숨길 수 없는 즐거움이 묻어나는 그 모습이 하도 경쾌해,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지금 이 작업이 하준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준은 언래블의 모든 멤버를 아끼는 것처럼 곡을 만지는 것도, 랩을 하는 것도 세상 무엇보다 사랑하고 있었다.
곡에 따라 생각 나는 기분이나 느낌에 음률을 붙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떤 주제를 정해놓고 어울리는 소리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번 곡은 여태까지의 경험과 그동안 자신이 느껴왔던, 그래서 하고 싶어진 이야기를 떠올리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하준도 그저 소리를 만들어낼 뿐, 이 이야기의 이름을 어떻게 붙여야 할지, 어떤 가사를 붙이고 싶은 건지 잘 몰랐었다.
그러나 점점 화면이 가득 차고 하나의 곡이라고 불릴 만큼의 이야기가 만들어지자 그제야 이 이야기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애들한테 좀 도와달라고 해야겠다.”
묘하게 즐거워 보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하준은 파일을 저장하며 질색하고 도망가려 할 동생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 * *
“너무 단기간에 앨범이 많이 나오는 게 아닌가 했는데, 일단 앨범이 나온다니까 좋긴 좋네요.”
“디지털 싱글로 낼까 하는 고민도 좀 있었는데, 이 앨범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제는 익숙한 회의실에 모인 우리는 팀장님과 실장님을 모시고 마무리 단계인 앨범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리팩 앨범을 준비하려던 기존 계획을 최대한 쳐내고 플루토를 넣는 것으로 방향을 틀면서 앨범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처음 우리가 만들었던 어설픈 플루토가 전문가들의 손을 거치니 놀라울 만큼 세련되고 호소력 짙은 노래가 되어 신기해하기도 했고.
앞의 두 앨범과 달리 감성적인 노래로 담겨있는 이 앨범이 낯설었고, 그만큼 설렜다.
대략적인 이야기가 마무리 되어갔고, 회의 후 컨셉 포토 촬영을 위해 이동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정윤 실장님과 소현 팀장님 두 분 모두 우리에게 무언가 할 이야기가 있는 듯한 눈치였고,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저러나 싶어 나도 덩달아 눈치가 보였다.
“이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조금 고민했는데, 일단 너희가 들어보고 선택을 하는 게 옳은 것 같아.”
조금 들떠있던 분위기가 금방 차분히 가라앉았고, 멤버들은 정리했던 메모지를 다시 주섬주섬 챙기려 했다.
소현 팀장님은 그런 우리 모습에 메모할 게 없을 거라며 그저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하고 싶은지 말해달라며 웃으셨다.
멤버들의 눈이 데구루루 구르는 소리가 날 정도로 분위기가 경직되자, 정윤 실장님은 양팔의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얹고 양손을 깍지 껴 앞에 모았다.
“상담이 너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 같니?”
“….”
그동안 회사에서 단 한 번도 상담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기에 멤버들의 몸이 살짝 굳었다.
“너희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어. 상담의 내용은 상담사와 내담자 사이의 비밀이니까. 선생님께서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 우려될 경우에만 소현 팀장님에게 말하겠다고 하셨어.”
정윤 실장님의 말에 옆에 있던 찬이가 나지막이 숨을 뱉었다.
안도의 한숨인 것 같았다.
“상담 선생님이 회사에 너희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으니, 우리는 너희가 괜찮아지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였거든. 하지만 그게 아니라 그냥 선생님과 안 맞는 거라면 다른 선생님을 구할 거야.”
평소만큼이나 단호하게 우리에게 선생님이 맞지 않으면 바꾸겠다고 말하는 실장님의 모습이 어쩐지 평소보다 조금 더 멋있어 보였다.
다른 것보다 우리의 상태나 상황을 우선시하겠단 의사 표현인 것 같아서 괜히 코끝이 조금 시큰해진 것도 같았다.
여전히 어색하게 눈동자만 굴리는 멤버들을 바라보며, 팀장님이 실장님의 말을 이었다.
“상담사와 내담자가 유대를 형성하고 상담에 진전이 있으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들었어. 그러니 선생님께도 너희에게도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해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그런데 혹시라도 너희가 상담 중에 곤란한 일을 겪거나 한 건 없는지 알고 싶은 거야. 우리는 너희를 보호해야 하니까.”
두 분이 어렵게 말을 꺼낸 이유를 알 것 같아 한껏 뻣뻣해졌던 어깨에 힘이 풀렸다.
세빈이는 테이블 아래로 슬며시 팔을 뻗어 내 옷자락을 쥐었고, 그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뭔가 걱정 인형의 역할을 하는 것 같았지만, 싫지 않았다.
우리 애한테 의지가 될 수 있다면 이런 것쯤이야.
“저는 지금 선생님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일단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마음이 진정되는 기분이 들거든요.”
막내가 먼저 입을 열자, 다른 멤버들도 정신을 퍼뜩 차린 얼굴이 되어 하나둘 덧붙였다.
“저도 다른 분으로 바꾸는 것보다 지금 선생님이 나은 것 같아요. 적어도 거북하진 않거든요.”
경환 형의 얼굴에는 걱정과 달리 거부감이나 불편함이 드러나지 않았다. 다행히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처음에는 좀 불편하고 낯설기도 했는데, 지금은 저한테 꽤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찬이까지 분명한 목소리로 자기 의견을 말하자 두 분은 그제야 조금 안도한 얼굴로 나와 맏형들을 바라봤다.
“저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사실 상담이란 것도 아직 잘 모르겠고요.”
상담을 할 때면 진중한 빛을 띠던 짙은 밤색 눈동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상담 시간에도 늘 함께 있었던 포잉은 그 사람이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다른 것보다 내 요정님이 괜찮다고 한 사람이라 나도 그 사람이 괜찮아 보이기도 했고.
준이 형과 영빈 형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뜻을 표하자 실장님의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첫 상담부터 자신과 잘 맞는 선생님을 만나는 게 꽤 힘든 일이라고 들었어. 그런 면에 있어서는 다행이네. 소현 팀장님이 발품을 판 보람이 있는걸?”
“제가 사람은 좀 잘 보는 편이죠.”
“사람이 말이야, 칭찬을 들으면 좀 겸손해지라고.”
언제 우려 섞인 얼굴이었냐는 듯 도도한 얼굴로 말하는 팀장님 모습에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지금 웃었다가는 나중에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모른다.
팀장님은 은근히 소심한 구석이 있으니까.
뒤끝이 길다고 해야 하나?
“언제가 됐든 간에 혹시라도 상담 시간에 본래의 목적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느껴지거나 너희가 거북해지는 일이 생긴다면, 꼭 바로 말해줘.”
“네. 꼭 그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달려갈게요!”
준이 형이 언제나처럼 우리를 대신에 답했고, 분위기가 다시 풀어지자 찬이는 평소만큼이나 씩씩하게 대답을 덧붙였다.
“좋아. 그럼 그 건은 그렇게 알고 있을게. 병아리들, 가서 일 봐.”
“실장님까지…!”
“포기해, 이미 늦었다.”
실장님의 병아리 발언에 배신감으로 파르르 떨리는 세빈이의 눈동자가 실장님을 향했지만, 실장님은 태연했다.
“자자, 너희는 오늘도 할 일이 태산이야. 이제 이동하자~!”
“너무해요….”
“뭐가 너무해. 잘 어울리기만 하는구만.”
싱글벙글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팀장님의 모습과는 반대로 세빈이 어깨는 축 늘어졌다.
그냥, 포기하면 편해지긴 하지….
아무래도 회사에서까지 우리 별명이 병아리로 굳어버린 것 같았다.
우리 미래는 치킨인가, 백숙인가.
갑자기 무척이나 서글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