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예쁘다(4)
퇴근길에 솜뭉치들과 나눈 짧은 인사, 함께 고생해준 스태프들과의 회식이 끝나고 숙소에 도착했더니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다.
영빈 형은 주변에서 권한 맥주를 조금씩 받아먹더니 눈이 풀려서 누우면 곧장 잘 것 같아 보였고, 우리 막내는 이미 꿈나라였다.
“메이크업 지워서 다행이네. 그냥 재우자.”
“그래야 할 것 같아요. 그냥 옷만 대충 벗기고 침대에 눕혀놓죠.”
경환 형 등에 업혀 들어온 막내는 경환 형이 챙긴다고 방으로 들어갔고, 영빈 형은 그 와중에도 씻겠다고 화장실로 향했다.
“찬아, 안돼. 씻고 자야지.”
“으으…. 걍 자면 안ㄷ….”
“야야, 눈 떠. 안돼!”
나는 거의 바닥을 기고 있던 찬이를 붙잡고 흔들었다.
이놈 시키, 내일 피부 트러블 올라오면 또 얼마나 투덜거리려고.
준이 형은 그런 찬이를 보더니 쟤 먼저 씻고 눕혀야겠다며 화장실에 밀어 넣었다.
“하…. 이 무슨 개고생이야.”
“맨정신인 게 죄라고 해두자.”
준이 형도 술기운이 올랐는지 평소보다 풀린 눈으로 차가운 벽에 머리를 대고 있었다.
“둘은?”
“화장실에요.”
“그래….”
세빈이를 침대까지 배달해준 경환 형은 지친 얼굴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어깨를 주물거렸다.
“우진 형한테 옮겨달라고 할 걸 그랬나 봐. 쟤도 이제 제법 무게가 나가네.”
“그렇게 운동 열심히 하더니 애가 좀 크긴 컸어요.”
“우리 환이는….”
“그만. 거기까지 해요.”
우진 형이 세빈이를 옮겨준다는 걸 시간도 늦었으니 들어가시라고 등 떠밀었던 건데, 삭신이 쑤시는지 경환 형이 중얼거렸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내 키 얘기는 왜 하는 거야?
내 눈꼬리가 사나워지자 알았다는 듯 양손을 휘적여 보이며 항복의 의사를 표해왔다.
반쯤 감은 눈으로 그런 우리를 지켜보던 준이 형도 어느샌가 피식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멤버들 모두 내 키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으…. 씻어도 졸음이 안 깨네.”
“깨지 말고 그냥 자.”
“어어…. 나 잘게요. 다들 잘자.”
후다닥 씻고 나온 찬이는 여전히 비틀거리며 벽에 기대곤 손을 휘적거리며 인사하더니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다 닫히지 못한 방문 틈으로 퍽 하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그대로 침대 위로 뻗어버린 모양이었다.
“나 먼저 씻어도 돼?”
“네. 씻고 와요.”
“그래. 먼저 씻어.”
경환 형이 영 찝찝했는지 먼저 씻고 싶어 해서 보내고 나니 준이 형과 둘이 남았다.
둘 다 멍하니 앉아서 벽만 바라보던 그때, 준이 형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고생 많았다.”
“응?”
“이래저래 환이 네가 제일 다사다난했잖아.”
“뭐….”
술이 들어가서 조금 풀어진 건지 평소보다 늘어진 목소리가 말을 이어갔다.
“다 고생했는데 그래도 네가 제일 고생했지….”
“에이, 또 말이 왜 그렇게 돼요.”
“아냐. 형이 더 잘했어야 하는데….”
한탄이라기엔 좀 더 담백했고, 미련이라기엔 조금 더 묵직했다.
‘그냥 들어주는 게 좋을 것 같음.’
‘그러는 게 좋겠지?’
어느샌가 따라온 포잉이 벽에 기대느라 부스스해진 준이 형 머리 위에 올라 앉아있었다.
포잉은 유난히 준이 형을 마음에 들어 했다.
“형이 리더는 처음이라, 그래서 실수가 많아.”
“저한텐 형보다 더 듬직한 리더 없어요.”
“푸흐…. 고맙다. 더 잘하고 싶었는데.”
앨범은 두 장이나 냈지만, 언래블이라는 그룹은 이제야 출발선에서 뛰기 시작한 셈이라고 우리끼리 이야기했었다.
여러 일이 뒤섞이면서 1위 후보까지 올라봤지만, 회사도 우리도 더욱 긴장의 끈을 조이며 앞으로 달려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팀장님도 우리를 불러서 칭찬해주면서도 다음 앨범은 꼭 1위 해보자고 우리를 다독이셨고.
회사에서 전략을 잘 짜주셨고, 여러모로 타이밍도 좋았다.
팬덤 규모가 다른 탑급 다른 아이돌들이 활동하지 않는 시기, 그 작은 틈에 발자국을 찍고 온 거니까.
게다가 지인들의 도움이 가장 컸다.
새벽 형들도 진우 형도 외부와 소통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우리를 배려한 말들을 많이 남겨주셨다.
그래도 졸업식 때랑은 달랐다.
우리 곡이었고, 우리가 그만큼 많이 뛰어다녔다.
“형이 더 열심히 할게. 너희 다 잘되게 할 거야.”
잠깐 생각에 빠진 사이 준이 형은 계속 중얼거렸다. 앞으로 자신이 더 잘하겠다고 자신에게 새겨넣듯 그렇게.
그런 형의 어깨가 너무 무거워 보였지만, 그건 내가 감히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형의 자존심인 것 같았다.
“전 우리 멤버들 다 믿어요. 당연히 형도 믿고요. 형은 진짜 좋은 형이에요.”
기댄 채로 잠이 든 건지 어느새 눈이 감겨있는 하준 형에게 평소라면 낯부끄러워서 못 할 말을 건넸다.
당사자들은 모르겠지만, 이미 나는 멤버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받았다.
언래블은 나에게 세상을 보여줬고, 힘찬이는 내게 친구 관계란 걸 어떻게 만들어 가는 건지 알려줬다.
이전에도 지금도 내게 제대로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는 사람들인데, 정작 나는 그들에게 해준 것이 없었다.
그렇게 준이 형이 잠든 사이 영빈 형과 경환 형이 말끔해져서 나왔고, 영빈 형은 잠든 준이 형을 보며 혀를 찼다.
“많이 마신다 했다. 얘는 내가 옮길게. 환이 너 씻어.”
“넵.”
“먼저 눕는다. 너도 얼른 자.”
“잘 자요.”
씻느라 조금 잠이 깼는지 그나마 멀쩡한 두 형님이 준이 형을 부축했고, 나는 씻으러 들어갔다.
평소였다면 다 같이 모여앉아 수다를 떨었을 텐데, 오늘은 다들 유난히 금방 뻗어버렸다.
‘뻗을 만했지.’
‘그렇긴 해.’
여론의 시선이 모일 만큼 큰일이 있었고, 그 후 처음으로 팬들과 공식 행사에서 만나는 거라 나뿐만 아니라 멤버들 모두 바짝 긴장했었다.
다른 사람들 없이 우리 팬들과 우리만 만나는 자리라 우리가 어떻게 보일지 걱정하며 멤버들끼리도 수없이 의견을 나눴다.
그동안 GIVE 앱을 할 때나 언래블 스토리 촬영 시에는 대부분 상세 대본 없이 진행했었고, 그만큼 자연스러움을 추구했지만, 이번에는 대본을 만드는 게 어떻냐고 할 정도로.
모두가 자신이 실수할 것을 두려워했고, 그만큼 완벽하게 해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연습에 몰두했다.
오늘 무대에서 그 모든 것들을 다 털어내고 뒤풀이까지 했으니 체력이 남아있는 쪽이 더 신기했을 것 같았다.
‘넌 괜찮음?’
‘졸리긴 한데, 생각할 게 좀 있어.’
씻고 나오자 아무도 없는 텅 빈 거실이 나를 반겼다.
늘 멤버들이 북적거리던 공간에 홀로 앉아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뭐함?’
‘그동안 미룬 걸 오늘 하려고.’
‘?’
혹시라도 멤버들이 나올까 싶어 벽에 기대 생각에 빠진 척하며 상태창을 불러왔다.
[상태창]
이름 : 공지환
직업 :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 아이돌
lv : 35
특성 : 죽기 살기(3), 아낌없이 주는 나무(2)
체력 : 71
민첩 : 52
보컬 : 106
작사 : 84
작곡 : 89
연기 : 21
행운 : 64
스킬 : 너의 목소리가 들려(4), 독종(4), 내적 친분(2)
능력치의 숫자는 처음보다 확연히 늘었지만, 스킬들 쪽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아니, 왜 직업에도 병아리래?’
‘네 수준이 그만큼인 걸 왜 성질임?’
그동안 스킬도 특성도 거의 쓰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열심히 이리저리 써보려고 궁리했을 때와 거의 다를 게 없었다.
그나마 레벨이나 능력치는 그동안 죽어라 연습하고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공부한 게 도움이 됐는지 제법 많은 숫자가 늘었지만.
‘웬일로 상태창을 켰음?’
‘그냥. 이제 그만 외면하려고.’
‘쯧.’
처음에는 왜 주어진 능력을 활용하지 않냐고 나를 타박하던 포잉이지만, 지금은 슬쩍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동안 포잉과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내가 이야기했던 것들이 있으니까.
덜 귀찮기 위해 사람과 관계 맺는 법이 아닌 처세를 익혔던 전생의 기억 때문에, 이번 생도 그렇게 살아갈 줄 알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언래블에 이익이 될까만 생각하며 새벽 형들에게 친한 척했고, 방송 때문에 만난 사람들에게도 서글서글하게 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들은 대부분 얼마 안 가 모두 무의미해졌다.
형들은 진심으로 나를 대하고 아껴주는데 그것들을 모른 척하고 내 필요만 따지며 살만큼 난 모진 놈은 못됐다.
처음 의도는 불순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내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건 한순간이었고, 결국 그 사람들도 지금 우리 멤버들만큼이나 나에게 중요한 사람들이 되었다.
‘앞으로는 더 적극적으로 살려고.’
‘너무 무리하지 마라, 계약자 놈아. 넌 약하니까.’
신체 건강한 남자한테 할법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포잉 눈에는 내가 마냥 부실해 보였는지 툭하면 약하다고 했다.
그 모습이 걱정이라는 걸 알기에 품에 안은 포잉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렇게 작은 우리 요정님이 걱정할 만큼 그동안 내가 참 못났었구나 싶어 웃음이 나왔다.
‘우리 멋진 포잉 님이 지켜줄 텐데, 뭐.’
‘고얀 계약자 같으니라고.’
나는 그 후로 오랜 시간 상태창을 다시 한번 뜯어보며 앞으로 이것들을 잘 써먹을 방법을 궁리했다.
* * *
창단식을 하고도 벌써 일주일이나 흘렀고, 이제 팬클럽 공식 물품이 발송된다는 이야기도 우진 형에게 들었다.
꿈같은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우리에게 남은 건 늘 그랬던 끝나지 않는 연습 시간이었다.
숨을 몰아쉬며 평소처럼 연습실 바닥에 붙어있는 멤버들에 비해 나는 비교적 멀쩡하게 앉아서 몸을 풀었다.
“뭐야, 넌 왜 멀쩡해 보이냐?”
“어제 잠을 푹 자서 그런가 봐.”
“하아. 뭐야, 너 혼자 산삼이라도 씹어먹었냐?”
“한번 앓아눕더니 더 튼튼해졌네.”
다른 멤버들보다 그나마 멀쩡한 경환 형이 이리저리 몸을 주무르는 날 보며 중얼거렸고, 다른 멤버들 시선도 다르지 않았다.
제영 쌤에게 평소보다 더 볶인 찬이가 기진맥진한 얼굴로 나를 툭툭 치면서 물었지만, 피식 웃고 말았다.
이게 스킬 덕이라고 말하면 당장 멤버들이 날 묶어서 팀장님한테 끌고 가지 않을까?
특성인 ‘죽기 살기’가 멘탈을 보호하는 역할이라면 ‘독종’ 스킬은 끈질기게 버틸 수 있게 해줬다.
그게 육체적인 고통이든 정신적인 괴로움이든.
유지 시간이 무한하지 않은 데다 과도하게 사용하면 앓아눕기 딱 좋은 스킬이라 거의 쓰지 않았다.
하지만 초반에 여러모로 궁리하고 사용 방법을 확인해 두었던 덕분에 지금은 비교적 안전하게 쓸 수 있었다.
지금 레벨에서는 한번 쓰면 최대 여섯 시간 정도 유지되는 것 같았지만, 여섯 시간 동안 풀로 다 쓰면 몸살이 나서 앓아눕는다.
마음 다잡은 바로 다음 날 풀로 썼다가 우진 형이 날 둘러매고 응급실로 달려간 거로 직접 확인했달까….
포잉은 길길이 날뛰며 시스템 만든 요정을 찾아서 물어뜯어 버린다는 걸 간신히 뜯어말렸다.
처음부터 설명이 거지 같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이렇게 무식하게 익혀야지 별수 있나.
게다가 이런 시스템을 만든 요정이라면 포잉보다 훨씬 높으신 분일 텐데 괜히 우리 고냥 님이 찍히면 앞으로가 고달플 테니까.
어떻게 이걸 잘 써볼 방법이 없을까 고심하던 나는 안무 연습과 보컬 트레이닝 때 두 시간씩 끊어서 집중력을 높이는 데 사용했다.
조금씩 활용하면서 트레이너 쌤들이 무슨 일이냐고 칭찬할 정도로 효과를 보고 있다.
“지환아, 준비해야 된다.”
“아, 네! 씻고 갈게요.”
우진 형의 목소리 덕에 상념에서 벗어난 나는 으쌰 하는 기합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들러붙어 흐물대던 멤버들도 손을 팔랑거리며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인사를 해줬고.
평소라면 조금 더 요란했을 인사가 방전된 체력 덕분에 간략해져서 웃기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했다.
다들 너무 무리하나 싶어서.
“조심히 다녀와. ”
“우진 형 잘 따라다니고.”
“올 때 맛있는 거 사와.”
“야, 환이가 놀러 가냐.”
“형, 빨리 와요!”
저마다 꼭 자기 같은 인사를 하는 멤버들을 두고 후다닥 준비를 마친 나는 우진 형과 둘이 차에 올랐다.
“준비 잘했지?”
“그럼요. 걱정 마세요.”
전생에 하준 형이 출연했던 ‘beyond the line’이라는 프로그램은 결국 내가 출연하게 됐다.
처음 제의가 왔을 때부터 준이 형을 밀었건만 회사에서는 내가 나가길 바랐고, 하준 형은 경환 형과 함께 다른 프로그램에 출연한다고 했다.
“크, 우리 애들이 이제 각자 출연도 하고. 많이 컸네.”
“어휴, 누가 들으면 오해해요, 형.”
“오해하면 어떻냐. 내 새끼들 이렇게 잘 크고 있는걸!”
우진 형은 빠지는 멤버 없이 모두가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게 기뻤는지 평소보다 얼굴이 더 싱글벙글했다.
영빈 형, 찬이, 세빈이는 전에 한 번 출연했던 요리 프로그램에서 재출연 의사를 물어왔다고 했다.
첫 출연 때 우리 애들 고생시킨 건 기억도 안 나는지, 애들 리액션이 좋았다며 한 번 더 나오라고 팀장님한테 연락이 왔다고.
이게 바로 방송국 놈들의 뻔뻔함인가 싶어 포잉과 함께 방송국을 한참 씹었다.
물론 그렇다고 출연을 고사하진 않았지만, 억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도 컨셉 바꿔놓고 말 안 해주면 포잉의 무서움을 보여주자.’
‘갑자기 나를?’
‘포잉이 나 대신 복수해줄 거잖아.’
‘하아….’
포잉의 시선은 여전히 따가웠지만, 뻔뻔해지기로 작정한 나한테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왜, 아냐?’
‘조용히 해라, 이 모지란 계약자 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