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13)화 (213/456)

213. 예쁘다(3)

지혜는 처음 팬클럽 창단식 티켓을 거머쥐었을 때의 그 느낌을 잊을 수 없었다.

초심자의 행운 같은 것이었을까?

자신이 무언가를 해낸 게 아니라 그저 흐름대로 손이 갔다고 보는 게 어울릴 법한 느낌이었다.

머릿속으로 수없이 그려보았던 그 순서 그대로 손이 갔을 뿐, 지혜는 마우스를 움직이는 내내 화면에 보이는 내용을 믿을 수 없었다.

비교적 무대와 가까운 자리에 티켓을 손에 쥐고, 덕질을 함께 하는 친구도 없었기에 홀로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움켜쥐며 심호흡을 해야 했다.

PC방에 와본 게 도대체 얼마 만인지 기억도 안날만큼 오래된 지혜였다.

하지만 티켓팅 전 많은 정보를 찾아보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PC방에 갔던 그때의 자신을 칭찬했다.

창단식이 열리는 홀에 왔을 때는 주변에 가득한 솜뭉치들 모습에 괜히 반갑고 축제에 참여한 기분이었다.

아직 공식 슬로건이나 응원봉이 없었던 터라 직접 제작한 물건을 들고 온 팬들이 꽤 많았다.

그저 이 모든 게 신기했고 이상한 나라에 온 앨리스가 된 것 같았다.

매일같이 전공 서적과 실습에 치여 살던 윤지혜라는 사람이 한 장의 티켓을 거머쥐면서 새로운 세상에 연결되는 기분.

떨리는 마음으로 입장하고, 뮤직비디오가 흘러나오는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팬들은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고, 멤버들이 없는데도 흘러나오는 곡에 맞춰 응원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모든 것들이 새롭고 신기한 기분이라 지금 딛고 있는 곳이 공연장 바닥인지 구름 위인지 헷갈릴 지경.

그 긴장감은 뮤직비디오가 끝나고 공연장 내부의 모든 조명이 꺼지면서 극에 달했고, 지혜는 자기도 모르게 다른 팬들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터져 나온 목소리와 함께 가슴을 꾹 누르고 있던 무언가도 같이 사라져버린 것 같아서 다시 한번 손목에 둘려있는 입장 띠를 꽉 움켜쥐었다.

이런 게 행복이 아니면 다른 어느 것도 행복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 같았다.

* * *

한 걸음씩 무대 앞으로 나가는 우리는 휘몰아치는 파도를 타고 넘는 사람들이었고, 가슴을 두드리며 허공을 움켜쥐는 안무는 지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폭풍전야가 유독 단체 안무가 많았던 건, 힘찬이와 세빈이가 던진 한마디 때문이었다.

‘혼자서 폭풍과는 싸울 수 없잖아요. 다 같이 버티든 싸우든 해야죠.’

마냥 어리게만 생각했던 둘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분야를 입에 담았을 때, 우리도 제영 쌤도 눈이 휘둥그레졌었다.

그렇게 완성된 안무는 격렬했지만, 그만큼 절도 있게 모두가 함께 만들어내는 춤이었다.

사실 숨이 차서 죽을 것 같았다.

‘I'm OK’의 안무도 움직임이 크고 무대를 많이 오가야 했던 터라 힘들었지만, 폭풍전야는 파워풀한 느낌을 살려야 해서 체력이 쭉쭉 빨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춤춘다고 노래가 망가지면 요새는 어디 가서 아이돌이라고 명함도 못 내민다는 채찍질을 견딘 덕에 표정도 음정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긴 옷자락의 펄럭임까지 안무에 녹아들어야 했기에 턴 하나도 힘을 주어야 했다.

덕분에 노래가 끝날 때쯤 되니 머리가 띵해질 정도로 숨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우리 중 누구 하나 실수하지 않고 힘낼 수 있었던 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보다 더 커다란 응원 덕분이었다.

노래가 끝나고 모자란 숨을 급히 들이마시며 바라본 무대 아래 모습은 여전히 수많은 별빛의 바다였다.

“후. 여러분 어땠어요? 마음에 들어요?”

- 네에!

- 언래블 최고야!

“후아, ‘I'm OK’와 ‘폭풍전야’ 두 곡을 연달아 보여드렸는데요. 네?”

겨우 숨을 고르고 마이크를 쥔 준이 형이 서글서글한 얼굴로 멘트를 이어가자 사방에서 솜뭉치들의 외침이 들렸다.

무어라 하는지 잘 알아듣지 못한 준이 형이 되묻자, 솜뭉치들이 다시 한번 외쳤다.

- 물 마셔!

- 숨 돌리고 해!

아직도 크게 오르내리는 멤버들의 가슴팍을 본 솜뭉치들은 우리가 걱정됐는지 물도 마시고 쉬라고 외치고 있었다.

우리 팬들은 뭘 먹고 자라서 이렇게 착한 건지.

“하하, 고마워요! 저 그럼 물 한 모금만 마실게요.”

“난 물 마셨어요!”

“나도!”

준이 형이 앞에 준비된 물을 마시는 사이, 먼저 숨을 돌린 찬이와 세빈이는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씩씩하게 외쳤다.

아, 얘들아….

늘 창피함은 다른 사람의 몫이었고, 영빈 형과 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세빈이와 힘찬이는 솜뭉치들이 잘했다고 우쭈쭈 해주는 게 마냥 좋았는지 해맑게 웃고 있었고.

“휴, 여러분 무대는 재밌게 즐겼나요? 어땠어요?”

“우리 멋있었어요?”

“연습 정말 많이 했어요.”

솜뭉치들은 그들 나름의 감상을 큰 목소리로 외쳐주었고, 우리는 잔뜩 들뜬 기분을 숨기지 못하고 마냥 웃었다.

온전히 우리 팬들만 가득하다는 생각 때문일까?

우리 모두 하늘을 날고 있는 것처럼 평소보다 한없이 들떠있었다.

온전히 우리를 향해 쏟아지는 이 커다란 환호성에 익숙해지는 날이 오기는 할까?

잠시 팬들과 대화를 나눈 우리는 다시 한번 무대 중앙으로 모였고, 이번에는 영빈 형이 다음 순서를 설명해주었다.

“솜뭉치들에게는 오늘이 생일인 셈이잖아요. 그래서 저희가 생일 파티를 준비했어요. 재밌게 즐겨줬으면 좋겠어요.”

준비된 대사지만, 평소보다 길게 말하는 영빈 형의 모습에 솜뭉치들은 마냥 좋은 것 같았다.

그사이 경환 형과 찬이가 커다란 케이크를 끌고 나왔다. 케이크 위에는 우리가 직접 구운 아이싱 쿠키가 장식되어 있었다.

“원래는 10월 4일에 하고 싶었거든요. 그러면 1004니까 딱 우리 솜뭉치들하고 잘 어울리고!”

“그런데 하필 그날이 수요일이더라고요. 수요일에 하면 학교 다니고 회사 다니는 솜뭉치들은 오기 힘들잖아요. 그래서 10월 14일이 됐어요.”

케이크를 가운데 두고 날짜가 정해진 비하인드를 말해주면서 직접 만든 쿠키들을 하나씩 설명했다.

“요기에 이거는 구름으로 솜뭉치를 표현한 거예요. 몽글몽글하게!”

- 세빈아!!

- 우리 막내 귀엽다!

세빈이도 평소보다 더 들뜬 목소리로 자기가 만든 쿠키를 설명했고.

“이 하트 보여요? 이게 내 심장이에요! 여기에 이렇게 솜뭉치들이 가득하고!”

- 뭔가 먹으면 죽을 거 같아!

“안 죽어요! 날 믿어!”

힘찬이는 커다란 하트 모양 가득 온갖 문구와 그림을 가득 넣어 정신없는 쿠키를 가리키며 조잘거렸다.

“전 맛이 중요할 것 같아서 심플하게 했어요. 장식에 신경 쓰면 왠지 망칠 것 같았거든요.”

경환 형은 자신의 한계를 담백한 목소리로 인정하며 싱긋 웃었다.

“자, 그럼 케이크에 불붙이고 우리 같이 노래 불러요.”

“생일 축하 노래 알죠? 다 같이 불러요!”

우리가 솜뭉치들에게 같이 노래 부르자고 권하는 사이 우진 형이 스르륵 다가와 케이크에 불을 붙여주고 사라졌고, 그 모습이 제법 웃겼는지 솜뭉치들이 웃고 있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솜뭉치!”

“생일 축하 합니다!”

“와아!”

모두가 함께 신나는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초에 불이 꺼지자, 그와 동시에 무대의 조명도 꺼지고 우리는 무대 중앙에 모였다.

소중한 팬들을 위해 모두 다 같이 만들었던 팬 송을 부를 시간이었다.

따뜻한 빛의 조명이 우리 머리 위에 켜졌다.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머금은 멤버들과 다시 한번, 우리 팬들에게 이 벅찬 마음을 고백했다.

처음에는 너무 무서웠고, 어떻게 해야 당신들과 함께 할 수 있을지 수많은 고민에 빠졌었다고.

하지만 이제는 당신들을 망설임 없이 부를 수 있다고.

우리가 전하는 고백에 솜뭉치들은 우리 이름을 부르며 답해줬고, 우리는 이제는 정말 한 팀이 되었다는 기분에 활짝 웃었다.

언래블에게는 솜뭉치라는 소중한 짝꿍이 생겼다고 이제는 세상에 당당하게 외칠 수 있었다.

중간중간 눈이 마주친 몇 명의 솜뭉치들은 눈가가 촉촉해 보여 속상한 마음도 들었지만, 아주 조금이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그들처럼 노래 한 구절에 마음을 위로받기도 했고, 공연장에 서 있는 동안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기분에 빠지기도 했었다.

사람은 벅차오를 때 눈물이 고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오늘은 조금 더 많이 웃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눈물 고인 솜뭉치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울지 마요’하고 속삭이거나 손가락으로 허공에 호선을 그렸다.

우리 팬들은 이렇게 기쁘게 웃기만 했으면 좋겠다 싶어서.

‘마지막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졸업식’으로 이어졌고, 노래가 끝난 후에는 다 같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입장할 때 나눠준 O.X 표지판으로 멤버들에 대한 퀴즈를 내서 솜뭉치들이 맞추게 하기도 했고, 중간에 무대 아래로 내려가 미리 준비한 선물을 뿌리기도 했다.

선물이라고 하기는 거창했지만, 우리가 머리를 싸매고 디자인한 그림이 들어간 손수건과 직접 향을 고른 샤쉐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모든 솜뭉치들에게 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준비했다.

몇 가지 게임과 무대가 끝나고 이제는 정말 이별을 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엔딩 요정으로 거듭난 막내 세빈이가 마이크를 들었다.

“오늘 함께 즐겨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그 한마디에 마지막을 직감한 솜뭉치들은 아쉬움을 가득 담아 가지 말라고 외쳤고, 세빈이는 방긋 웃으며 솜뭉치들을 달랬다.

“우리도 더 오래 함께하고 싶은데 이러다 쫓겨날 것 같아서요!”

“다음에는 더 오래오래 같이 놀아요!”

“오늘 너무 행복했어요!”

“솜뭉치 사랑해!”

멤버들은 세빈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쉬운 마음을 담아 인사를 하며 마지막 곡을 시작했다.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짧은 세 시간이 흘러가 버렸다.

* * *

“선물이 솜뭉치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그쵸?”

“맛은 괜찮겠지?”

“만들 때 먹은 건 괜찮았는데 ….”

솜뭉치들을 위한 깜짝 선물을 준비했고, 퇴장할 때 모두 하나씩 받아 갈 수 있도록 했다.

준비한 선물은 케이크에 장식했던 아이싱 쿠키와 같은 디자인의 쿠키들이었다.

우리가 직접 만든 것도 있었고, 도와주신 공방에서 만들어주신 것도 섞여 있었다.

원래 생일에는 맛있는 걸 함께 나눠 먹어야 한다는 경환 형의 아이디어가 빛을 발했달까.

손수 쿠키를 굽고 나서 팀장님과 우진 형에게 꼭 포장을 단단히 해달라고 부탁했었다. 혹시라도 받은 쿠키가 깨져있으면 팬들이 너무 마음 아파할 것 같아서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세빈아, 다 지우고 움직여야지.”

“네엥….”

어지간히 들떴는지 모든 무대가 끝나고 메이크업을 지우면서도 세빈이는 꼼지락거림을 멈추지 못했다.

“얼른 치우고 나가야 우리 팬들이 덜 기다릴 텐데.”

“어이구. 얌전히 있어야 더 빨리 지우지!”

소위 퇴근길을 기다리는 팬들이 걱정되었던 건지 무대 의상을 갈아입으면서도 전전긍긍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여기는 마땅히 기다릴 공간도 없을 텐데….”

“아마 주차장 외곽 따라서 서 있지 않을까 싶어요. 위험한데.”

기다릴 팬들에 대한 걱정도 있었지만, 줄곧 기대했던 창단식이 누구 하나 다친 사람 없이 무사히 끝나자 기운이 쪽 빠진 기분이었다.

“쟤 좀 봐, 여기가 집인 줄 아나 봐.”

“놔둬. 환이 치고는 오늘 에너지 넘쳤다.”

메이크업도 대충 지우고 누구보다 빠르게 의상을 갈아입은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서 대기실에 있는 의자에 널브러져 있었다.

지금 맨바닥에라도 누우면 그대로 잠들 수 있을 것처럼 피곤했다.

‘쯧, 너무 초조해한다 했다. 모자란 계약자 놈아.’

‘어쩔 수 없잖아…. 진짜 걱정 많이 했는걸.’

흐느적거리는 내 머리 위에 폴짝 올라온 포잉이 폭신한 핑크 젤리로 내 머리를 톡톡 두드려주었다.

스킬의 힘 덕분에 찬이나 세빈이처럼 전전긍긍해 하진 않았지만, 스킬도 긴장감을 없애는 게 아니라 둔화시키거나 터질 시기를 꾹 누르는 쪽이었다.

덕분에 일이 끝나면 이렇게 온몸에 힘이 안 들어가고 더 피곤해졌다. 그래도 무대에 서는 동안에는 실수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을 수 있으니 다행이긴 한데.

“슬슬 나가자.”

“니엡.”

“집에 가자!”

“가~자!”

눈만 끔뻑거리던 내 머리 위로 툭 하고 얹어진 준이 형 손에 조금 더 힘낼 수 있었다. 마치 그 손이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것 같아서.

준이 형과 영빈 형이 토닥이는 건 알겠는데… 경환 형, 찬이, 세빈이까지 왜 죄다 내 머릴 만지고 가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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