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BOOMERANG(6)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음식은 무사히 완성되었다.
힘찬이와 세빈이는 자신들이 이런 음식을 만들어 낸 게 신기했는지 연신 사진을 찍으며 신난 얼굴이었다.
어쩌면 다들 평소에 할법한 일들을 해내서 나에게 타격이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멤버들이 새우튀김을 너무 집어 먹어 상에 올릴 게 없어졌다든가.
찬이와 세빈이가 기어코 형들 몰래 산적의 파를 죄다 빼버렸다든가.
튀김 재료들에 튀김가루를 입혀두랬더니 장난치다 주방 바닥에 가루 천지를 만든다든가.
하는 자잘한 일들이 있었지만 그건 그냥 평소에 애들 모습이니까.
다만, 기름이 튄다고 다치니까 옆에 오지 말랬더니 찬이가 기어코 슬금슬금 옆에 다가와 구경하다 결국 다칠뻔한 일이 있었다.
다행히 살짝 튀어서 화상을 입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자기도 놀랐는지 펄쩍 뛰어서 준이 형한테 끌려가 한참을 혼났다.
자기들 방으로 끌려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한바탕 혼이 나고 나온 찬이는 매우 얌전해졌다.
그 모습에 감탄하자 포잉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물리력을 동원하지 않고도 저 찐빵 놈을 얌전히 만들 수 있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포잉은 안 해봐서 몰라!
그렇게 완성된 음식을 색색의 그릇에 곱게 담아 상 가득 차려놓자 제법 그림이 예뻤다.
평소에 음식을 하는 나나 영빈 형 둘이 끝낸 게 아니라, 정말 멤버들과 다 같이 만든 거라 더 만족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뿌듯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다른 멤버들 얼굴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나도 이제 음식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냐, 그거 아니야.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나도 오늘 일 많이 했는데?”
“잘 생각해봐. 우리는 저 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 게 다야.”
“하하, 난 그냥 조용히 있을래.”
잔뜩 차려진 음식에 들뜬 찬이가 의기양양하게 외쳤지만, 경환 형은 단호한 어투로 찬이 말을 잘라버렸다.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니가 맞네, 내가 맞네 하고 투덜거렸고, 우리는 익숙한 풍경을 웃으며 외면했다.
저러거나 말거나 그냥 사고만 안 쳤으면 좋겠다 싶어서.
세빈이는 예전에 내가 가르친 대로 둘이 뭘 하거나 말거나 갈비찜을 입안 가득 물고 열심히 먹고 있었다.
“그래, 쓸데없는 거로 싸우느니 그 시간에 하나라도 더 먹는 게 이득이지. 우리 세빈이가 똑똑하네.”
“응!”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막둥이 얼굴에 영빈 형이 슬쩍 웃더니, 산적 하나를 집어다 세빈이 밥그릇 위에 얹어주었다.
“왜 나는 안 줘?”
“영빈 형 주세요, 해봐.”
“안 해, 그냥 내가 먹을게.”
세빈이만 편애한다며 찬이가 부루퉁한 얼굴로 영빈 형에게 항의하자, 영빈 형이 딜을 걸었다가 무시당했다.
형, 걔가 그런 말을 들을 인간이면···.
찬이 대꾸에 다들 그러려니 했다.
그저 준이 형만이 영빈 형의 마음을 아는지 밥그릇에 고기를 한 점 얹어주며 위로해 줄 뿐.
“쟤한테 너무 큰 걸 바랬네. 이거나 먹어.”
평소처럼 평화로운 풍경에 한결 마음이 편해진 나는 야무지게 밥을 꼭꼭 씹어먹는 멤버들을 바라보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다 같이 요리하란 소릴 처음 들었을 때 그 막막함을 회사 분들을 모를 거야···.
그나마 몇 번 요리하는 걸 접해본 멤버들은 처음보다야 훨씬 나아졌지만, 여전히 몇 명은 칼을 쥐는 것도 불 앞에 서는 것도 불안해서 보고 있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경환 형이라든가, 최힘찬 이라든가, 강세빈이라든가.
그나마 영빈 형이나 내가 명절 음식을 만들어본 경험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무래도 명절 음식은 기름을 많이 쓰다 보니 혹시라도 사고가 생길까 내내 걱정스럽기도 했고.
전생에는 누나 대신 내가 전을 부치기도 했고, 현생의 지환이도 누나랑 둘이 명절 음식을 만들기도 했었다.
그때의 경험들이 오늘 촬영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상 가득 올라와 있던 그릇들이 깨끗이 비워지고 있었다. 넋을 놓고 있던 내 밥그릇 위로 어느새 멤버들이 하나씩 놓은 반찬들도 쌓여있었다.
장난처럼 쌓여있는 반찬에 피식거리며 웃자 내 눈치를 보고 있던 찬이도 따라 씩 웃었다.
조금 힘들었지만, 역시 멤버들과 함께 무언가 하는 건 즐거운 것 같았다.
카메라도 꺼지고 부른 배를 통통 두들기던 세빈이는 세상을 다 가진 얼굴로 러그 위에 드러누웠다.
“하아, 오늘처럼 맨날 맛있는 거 먹고 놀았으면 좋겠다.”
“그랬다가는 땀 빼느라 러닝머신에서 못 내려올걸?”
“아, 우울한 얘기 벌써부터 하지 말아요···.”
현실을 상기시켜주는 자상한 준이 형의 말 덕분에 오늘 음식을 실컷 먹은 멤버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핼쑥해졌다.
이렇게 한순간에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지. 우리 준이 형은 진짜··· 무서운 사람이야.
우리가 그렇게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솜뭉치들은 우리가 이전에 찍어뒀던 추석 특집 운동회를 보고 있을 터.
그걸 본 솜뭉치들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해졌다.
“왜 또 그렇게 음흉하게 웃어?”
“음흉하게라니, 말이 심하네.”
“너 거울도 안 보냐? 방금 진짜 되게 무슨 흑막 같았어.”
괜히 또 옆에 와서 툭툭 건드리는 찬이에게 상큼하게 웃어주며 대꾸했다.
“송편 팀 벌칙 영상을 솜뭉치들이 보면 어떨까 싶어서.”
“악! 악! 그거 말 안 꺼내기로 했잖아요!”
“찬이가 먼저 꺼냈다?”
“잊어! 잊으라고!”
게임에서 진 후 수행했던 벌칙이 떠올랐는지 영빈 형뿐만 아니라 세빈이 힘찬이 얼굴까지 보기 좋게 달아올랐다.
하하, 그러게 왜 시비를 걸어.
“솜뭉치들이 좋아할 거야. 하하, 잘됐네!”
* * *
추석 특집 운동회 첫 화. 벨크로 달리기부터 물 폭탄 축구까지, 솜뭉치들은 멤버들의 몸부림을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
멤버들이 자기들끼리 뛰고 구르다 엉망이 돼서 억울해하는 모습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웃기기도 하고 짠하기도 한데 저걸 찍는 내내 멤버들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짐작해보는 것도 재밌었다.
그 후 이어진 편에서는 씨름한다고 불러놓고 손가락 씨름을 하질 않나, 양궁을 하면서 장난감 활을 쥐여주고.
하나같이 난해한 경기였으나 솜뭉치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적응했고, 이전 것들에 비하면 손가락 씨름에 양궁쯤은 무난한 경기라는 평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이어진 마지막 화. 밀가루가 든 물풍선으로 진행된 배드민턴은 무슨 방법을 쓴 건지 몇 번 공이 오가기도 전에 펑펑 터졌다.
졸지에 밀가루를 뒤집어쓴 멤버들은 자기들이 겪은 상황에 눈만 껌벅거리다가 물에 흠뻑 젖은 강아지처럼 몸을 탈탈 털기 바빴고.
2:2의 상황이었기에 두 팀 모두 질 수 없다는 듯 투지를 불태워, 경기가 끝난 시점에는 코트에 주저앉은 모두가 하얀 덩어리처럼 보였다.
“이런 거 말고 정상적인 경기를 해주라고요!”
“안 돼요. 돌아가세요.”
경기 끝자락에서 울상이 된 힘찬이가 제작진을 향해 억울함을 가득 담아 외쳤지만, 제작진은 단호했다.
엄숙한 목소리로 대답한 것으로도 모자라 화면에 검고 굵은 궁서체로 한 번 더 자막을 띄워놓을 만큼.
이어진 화면에선 말끔한 얼굴의 하준, 경환, 지환이 온갖 명절 음식을 앞에 두고 평화로운 얼굴로 앉아있었다.
아까는 밀가루 반죽 같던 멤버들이 뽀얀 얼굴로 앉은 걸 보니 그새 씻고 온 것 같았다.
그리고 화면에 셋만 보인 시점에서 솜뭉치들은 직감했다.
‘아, 나머지 셋은 벌칙을 받는구나!’하고.
그런 기대를 알고 있다는 듯 영상에 화려한 배경음이 흐르고 화면에 조명이 켜지더니, 저 뒤에서 색색깔의 한복을 입은 영빈, 힘찬, 세빈이가 나타났다.
“풉! 재롱잔치야?”
“미쳤나 봐, 진짜.”
평소 감정변화가 심하지 않은 지환이까지 등장한 셋을 보며 바닥을 구를 것처럼 웃고 있었다.
셋은 유치원에서 아가들이 재롱 잔치할 때나 입을 법한 알록달록한 색상의 한복을 입고 있었다. 심지어 가운데 있던 세빈이는 남자 한복이 아닌 여자 한복이었다.
연한 분홍색의 한복 치마···.
울기 직전처럼 입술을 꾹 깨문 세빈이의 두 볼은 새빨간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세빈이는 왜 여자 한복이에요?”
“주장이니까요.”
“와씨, 우리 졌으면 제가 저거 입어야 했던 거예요?”
“네. 개인적으로는 지환 씨가 입을 예정이었던 한복이 더 예뻤는데 아쉽게 됐어요.”
“와, 제작진 인성···.”
아차 했으면 자신들이 저 한복을 입어야 했다는 걸 깨달은 세 명이 부르르 떨면서 제작진을 외면했다.
“자, 이제 우승한 보름달 팀은 준비된 식사를 맛있게 하면서 벌칙 받는 세 분의 재롱잔치를 구경해주시면 됩니다. 송편 팀은 지금부터 나오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추시면 됩니다.”
“저희는 밥 없어요?!”
“1절을 무사히 아무도 실수 없이 추면 간단한 식사 상을 차려드릴 겁니다. 단, 틀리면 반찬이 하나씩 사라질 겁니다.”
“먹을 거로 그러는 게 제일 치사한 건데!”
“자, 시작할게요.”
주장인 세빈이가 항의해봤지만, 제작진은 방긋 웃으며 노래를 틀었다. 다행히 흘러나온 노래는 다른 아이돌의 노래가 아닌 언래블의 노래였다.
“어? 우리 노래네. 이걸 틀리면 안 되지.”
“그치. 틀리면 밥 먹을 자격이 없지.”
노래를 들은 보름달 팀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송편 팀의 얼굴은 조금 밝아졌다.
하지만 긴장했던 탓일까 아니면 인원수가 평소랑 달라서였을까.
모두가 함께 만드는 단체 군무는 무리 없이 완성했지만, 중간에 지환과 함께 합을 맞추는 안무에서 힘찬이가 실수를 해버렸다.
“어? 저거 2절인데?”
“그러게. 저거 너랑 같이하는 파트잖아.”
앞에 있는 음식을 여유롭게 집어 먹으며 구경하던 보름달 팀.
그들의 중얼거림을 기민하게 확인한 제작진은 안무 영상을 체크하며 실패를 외쳤다.
그렇게 실패할 때마다 곡의 빠르기는 0.5배씩 빨라졌고, 결국 송편 팀의 세 명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영상은 끝났다.
그리고 이 추석 특집 영상을 확인한 솜뭉치들은 즐거움과 안쓰러움이 공존하는 미묘한 감정이 되었다.
- 얘들아 미아내···. 너희 고생하는 거 싫고 밥 못 먹는 거 안쓰러운데 너무 웃기잖아ㅠㅠㅠㅠㅠ 이런 팬이라 미안햌ㅋㅋㅋㅋㅋ
ㄴ22 나도···. 아 근데 너무 귀엽잖앜ㅋㅋ큐ㅠㅠㅠㅠ이런 솜뭉치라 미안하다!!
ㄴ333...ㅠㅠㅠㅠㅠㅠ내새끼들 밥ㅇ느 줘라ㅠㅠㅠ 우리 최찐빵은 충전식이라 밥 줘야 하는데 ㅠㅠㅠ
ㄴ안돼. 돌아가. 패배자에게 줄 밥은 없다 - 제작진-
ㄴ너어는 정말 나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민족 대명절을 맞아 온갖 방송사에서 특집 예능을 방송했지만, 솜뭉치들에게는 언래블의 채널에서 나오는 언래블 스토리 영상이 더 재밌었다.
지나치게 가학적인 장면들도 없었고, 특정 멤버를 우스꽝스럽게 만들거나 과장된 모습을 담는 것도 아니어서 몇 편을 연달아 보아도 피로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언래블의 공식 채널에 비하인드 스토리라는 제목을 단 짧은 영상이 올라왔다.
영상 속에선 막내 세빈이가 보름달 팀 앞에서 숫자송을 부르며 율동을 하고 있었고, 보름달 팀은 손주를 보는 어르신들처럼 흐뭇한 얼굴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 ※ 양로원 위문 공연 아닙니다.
화면 아래로 제작진들의 마음을 담은 자막이 천천히 떠올랐다.
송편 팀이 보름달 팀과 딜을 했던 건지 함박웃음을 짓던 지환이 반찬을 이것저것 덜어놨던 그릇을 밀어주었다.
- ㅋㅋㅋㅋ뭐야 그럼 그렇지. 작은환이 애들을 굶길 리 없었다.
-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작은환이 애들 밥을 안 챙길 리 없짘ㅋㅋㅋㅋ
ㄴ ㅇㅇ 진짜롴ㅋㅋㅋ작은환이 애들 굶으면 힘 못 쓴다고 아침마다 주스 갈아준다잖아
ㄴㅋㅋㅋ울엄마도 나한테 그렇게 안 해주는데...또륵...
ㄴ저 그릇도 봐봐... 애당초 따로 덜어놓은 거ㅠㅠㅠㅠ울애기들 일케 따숩다ㅠㅠㅠ
늘 먹는 것에 진심인 언래블은 다행히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모양이었다. 물론 막내 얼굴은 수치심에 녹을 것처럼 빨간 물이 들었지만.
그렇게 언래블은 언래블대로, 솜뭉치들은 솜뭉치들대로 행복한 명절을 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