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BOOMERANG(4)
창백한 푸른빛 아래 우리 한 명, 한 명은 하나의 별이 되었다.
끝없는 우주 한복판에 있는 것처럼, 발아래 무대뿐만 아니라 별보다 더 빛나는 눈동자를 품은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눈에서 흘러나온 빛이 우리를 온전히 별이 될 수 있도록 해주고 있어서, 아주 작은 실수도 없이 무대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우리를 왜 미워하는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왜 그러냐고 묻는 ‘Pluto’와 에라 모르겠다! 하고 판을 뒤엎고 싸우는 ‘Confusion’은 생각보다 합이 괜찮았다.
두 곡을 처음 편곡해준 회사 엔지니어분의 만족스러워 보이던 미소가 이해될 만큼.
분홍빛 조명과 함께 시리도록 푸른 빛에서 화려하고 펑키한 느낌의 ‘Confusion’으로 넘어가는 부분이 한 곡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조용히 최소한의 안무만 하던 곡에서 무대 위를 뛰어다녀야 하는 곡으로 바뀌는 터라 숨죽이고 기다리던 우리 솜뭉치들은 곡이 넘어가는 순간 행복한 비명을 질렀고.
그렇게 무대가 끝나고 팬들을 향해 환한 얼굴로 웃어준 우리는 바로 이어진 짧은 인터뷰까지 무사히 마치고 겨우 대기실로 돌아왔다.
“에고, 그래도 역시 무대가 좋긴 좋아요. 그쵸?”
“당연하지. 하, 우린 언제 1위 해보냐.”
내부 모니터에는 유력한 1위 후보인 선배 그룹의 무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의 끝나가는 상황이라 땀만 대충 닦아내고 다시 무대로 올라가 봐야 했다.
1위 발표 전, 오늘 출연한 모든 그룹이 무대 위에서 함께 축하해주기 때문에 그 무대에 올라야 했다.
의상과 메이크업을 급하게 정리하고 우진 형을 따라 이동하던 우리는 무대 가까이 갈수록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다.
평소보다 사람들이 더 수군거리는 것 같았고, 그동안 안면을 익혔던 사람들이 축하한다며 툭툭 어깨를 토닥여주고 가는 것.
“우진 형 이게 무슨 일이에요?”
“큼, 너희 놀랄까 봐 말 안 했는데.”
“아니, 뭔데요.”
이상한 기분을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닌지 멤버들도 무언가 기대가 가득한 눈으로 우진 형을 붙잡고 있었다.
그런 우리 반응을 즐기듯 멤버들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며 씩 웃던 우진 형이 입을 열었다.
“너희 오늘 1위 후보야.”
“네?”
“뭐요?”
“몰카야? 이번엔 무슨 프로야?”
조그맣게 속삭이는 우진 형의 말에 우리는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이게 사실일 리 없어. 뭐야, 진짜 몰카야?
한껏 긴장한 멤버들이 어디에 카메라가 숨어있는 것 아니냐며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꼼꼼하게 훑자, 우진 형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얌마, 내가 언제 너희한테 거짓말하디? 그냥 후보야. 당연히 판매량 딸려서 1위는 안 될 거야. 기대하지 말고.”
“아니,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어떻게 우리가….”
우진 형의 한마디에 멤버들 분위기는 초토화됐고 이전까지는 긴장한 기색이 없던 힘찬이나 경환 형까지 손을 달달 떨고 있었다.
그 후로는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빨리 올라가라는 스태프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어? 어? 하다 보니 여러 그룹 사람들이 무대 위에 한가득 서 있었고, 뒤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우리를 앞으로 등 떠밀었다.
넋이 나간 건 우리들만이 아니었는지, 영빈 형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쓰러질 것 같았다.
“언래블 너무 긴장한 것 아니에요? 후보에 오른 소감 한마디 해주세요.”
“저, 저희가 이 자리에 서본 것 자체가 너무 감사해요. 솜뭉치들 너무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정말로요.”
하준 형은 평소의 유려한 말솜씨는 어디 갔는지 잔뜩 잠긴 목소리로 그저 감사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세빈이와 힘찬이는 마치 우리 데뷔 조 무대 평가 날처럼 내 옷자락을 붙들고 옆에 붙어서 덜덜 떨고 있었다.
그래, 그날도 우리 엄청 긴장했었는데.
문득 그날이 떠오르면서 지금, 이 순간이 꿈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 깨어나면 이사하기 전 숙소일 수도 있고, 병원 침대 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다 자연스럽게 호통치던 포잉이 떠올랐다.
처음 현실 도피하고 정신 못 차리던 나를 억지로 끌고 가려 애쓰던 포잉, 전생의 가족을 잊지 못해 매일 밤 베개를 흠뻑 적시던 나를 모른척해 준 다정한 포잉.
늘 그 작은 고양이의 다정함이 나를 품어줬고, 지켜주고 있었다.
바짝 얼어있던 나는 포잉을 떠올리면서 비로소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었고, 굳어있는 세빈이와 찬이의 손을 꽉 잡아줄 수 있었다.
꿈이면 어떻고 현실이면 어때, 이만큼 우리가 같이 열심히 자라고 있는데.
그동안 내내 나를 괴롭혔던 온갖 복잡한 감정들이 그 순간만큼은 모두 녹아 없어진 것처럼,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주변이 온갖 빛으로 환하게 물들어 있었고 나도, 멤버들도, 포잉도 혼자 있지 않았다.
그 후 우진 형이 말했던 대로 1위는 세피엘이라는 그룹 선배님들에게 돌아갔고 우리는 활짝 웃는 얼굴로 아낌없이 박수를 보낼 수 있었다.
늘 무대 뒤나 끝쪽에서 박수 치고 신기해하던 우리이기에 제일 앞줄에 서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멤버들은 기절할 것처럼 굴었다.
덕분에 회사에 돌아와서는 팀장님이 나중에 진짜 1위 하면 그 자리에서 기절하겠다며 어이없어했지만, 우리의 떨림은 그때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잘했어. 생방이라 너희 반응이 리얼한 게 더 잘 살 것 같았는데 진짜 제대로 잘 나왔네.”
“너무해요….”
어쩐지 밖에 잘 못 나가게 하고 계속 스태프분들이 대기실에 다 붙어 있길래 무슨 일 있나 했었다.
혹은 이전처럼 다른 그룹에게 성희롱당할까 봐 걱정해서 그러시나 보다 했지, 이런 걸 감추고 있는 줄은 몰랐다.
방송을 지켜보던 회사 분들은 우리가 보인 생생한 반응을 굉장히 좋게 평가하셨다.
후보라는 말에 너무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에 방송국에서도 짜고 치는 거라는 소문을 조금 무마할 수 있어서 좋아할 거라면서.
게다가 다른 팀이 호명됐을 때도 되려 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손이 터져라 박수를 치기에 대표님이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고.
“영빈아, 세빈아, 괜찮아?”
“네, 이제 괜찮아요….”
“저도요.”
가뜩이나 맘이 여린 세빈이는 1위 후보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을 하더니 무대에서는 내 뒤에 숨어 덜덜 떨었다.
그 와중에도 1위 발표 때는 열심히 박수 치길래 괜찮아졌나 했더니 회사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내 펑펑 울었다.
그 자리에 서본 것만으로도 여한이 없다고 기분이 너무 이상하다고 하면서.
영빈 형은 그런 세빈이 달래다 같이 눈물을 찔끔 흘렸지만 못 본 척해주었다.
“너희 진짜 1위 하면 어떡하려고 그러니.”
“진짜 심장마비 올지도 몰라요…. 다음에는 꼭 숨기지 말아줘요. 팀장님.”
“진짜로요. 저 너무 놀라서 욕할 뻔했어요!”
진이 다 빠진 듯 흐물흐물해진 하준 형이 힘없이 의자에 기대며 중얼거렸고, 그런 준이 형 옆에 들러붙은 찬이가 입술을 쭉 내밀고 투덜거렸다.
“어이고, 아무튼 컨퓨젼 활동은 이걸로 마무리여도 너희 한동안 쉴 틈 없으니까 마음 단단히 먹어.”
“차라리 바쁜 게 나아요.”
회사는 결국 리패키지 앨범이 아닌 싱글 앨범으로 방향을 돌렸다.
어차피 리패키지여도 곡은 3곡에서 많아야 4곡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Confusion’ 리메이크 버전과 전문 엔지니어분들이 손봐준 ‘Pluto’와 오리지널 버전, 이렇게 세곡을 넣어서 판매한다고.
타이틀곡이 ‘Pluto’였다.
기존에 미리 준비했던 것들과 크게 틀어지지 않아 다행히 빠르게 앨범 발매가 가능하게 되었다고 팀장님이 설명해주셨다.
되려 처음보다 더 빠르게 될지도 모르겠다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모습에 우리 모두 불안감을 느끼며 우진 형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고, 다행히 숙소로 도망갈 수 있었다.
숙소에 도착해 평소처럼 거실에 모인 우리는 각자 생각에 빠져 오늘 하루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오늘 하루 동안 내내 머릿속에서 휘몰아치던 모든 생각을 그제야 차분하게 돌아볼 수 있었고.
시간에 쫓기듯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이 삶에 이미 흠뻑 젖어 익숙해져 있었다.
처음의 불안이 아직도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도 있었지만, 점차 그 빈도수가 줄어들고 있었고.
모르는 사막 한복판에 불시착한 사람처럼 위태롭게 서성이던 내가 이제는 포잉이라는 길잡이와 함께 별을 바라보며 잘 걸어 나가고 있었다.
부정할 수도 없게끔, 지금이 내 삶이라는 걸 이제는 완벽하게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이상하게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태까지는 이 삶에서 즐거움을 찾고 행복해지는 것 자체가 내 이전 가족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서 어느 것이든 온전히 누릴 수가 없었다.
상상할 수 없는 커다란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늘 내 몫이 아닌 것을 빼앗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있었고, 행복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 나는 무서웠고 죄책감에 짓눌려 있었다.
갑자기 어느 날 이 현실이 현실이 아니게 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과 가족을 잊어버리게 돼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
아마 그런 내 모습을 전생의 누나가 봤다면 배부른 새끼가 투정한다고 욕을 바가지로 했을지도 모르겠다.
터질 것 같이 복잡했던 머리가 가라앉고 엉망이 되었던 감정이 정리되자 늘 붕 떠 있는 것 같았던 몸에 그제야 제대로 된 무게감이 느껴졌다.
“야, 괜찮아?”
“응?”
감고 있던 눈을 떴더니 눈앞에 찬이 얼굴이 보여서 나도 모르게 밀어버렸다.
“악! 야!”
“아,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너무 진심으로….”
쪼그려 앉아서 나를 바라보던 찬이는 내가 미는 바람에 뒤로 발랑 자빠졌고, 제법 크게 넘어졌는지 둔탁한 소리가 났다.
“아, 근데 저건 밀만 했다.”
“밀린 건 난데 누구 편을 들어요!”
“나 같아도 눈앞에 갑자기 니 얼굴 보이면 밀 거 같은데….”
찬이가 억울하다는 듯 투덜거렸지만, 경환 형의 말에 다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치, 갑자기 눈앞에 최함찬 얼굴이 보이면 무서워서라도 밀어내는 게 정상이지.
“저게 걱정돼서 물어봤더니!”
“걱정? 나 왜?”
“불러도 대답도 없고, 얼굴색도 안 좋았단 말야.”
삐진 건지 툴툴대던 힘찬이를 영빈 형이 토닥이며 말리자, 여태 각자 생각에 빠져있던 멤버들이 하나둘 자세를 고쳐앉았다.
맏형 둘을 둘러싸고 둥글게 모여앉은 우리는 다들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입술만 달싹이고 있었다.
무언가 감정이 치미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준 형이 피식 웃었다.
“내 동생들은 어쩜 이렇게 한결같이 모자란지.”
“오해가 심하신데?”
“모자라다니, 준이 형이라도 이건 좀 너무한데!”
경환 형과 세빈이가 반발하듯 대꾸하자 지친 얼굴을 한 영빈 형은 옆에서 작게 한숨을 내쉬며 경환 형에게 쿠션을 집어 던졌다.
가뿐하게 그 쿠션을 받아낸 경환 형은 쿠션을 세빈이한테 안겨줬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진 동작에 준이 형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기 시작했고, 찬이는 그쯤 되자 아무래도 좋다는 듯 같이 웃으며 바닥에 철푸덕 눌어붙었다.
“다들 생각이 많을 거야. 기분도 이상할 거고.”
준이 형이 입을 열자 다들 다시 하준 형에게 집중했다.
그 시선을 느끼며 무언가 고민하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하준 형이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어떤 이슈가 있었건, 어떤 덕을 봤건 그래도 우리가 만든 노래가 1위 후보에 오른 건 맞잖아. 그렇지?”
“응.”
“맞지. 다 같이 고생한 노래니까….”
‘Confusion’이 1위 후보 딱지를 달아서 준이 형의 기분도 복잡해 보였다. 그 곡을 만든 건 하준 형이니까.
하지만 늘 형은 이 곡은 우리 모두가 만든 곡이라고 말했다. 가사를 쓰면서 다른 멤버들이 한두 마디 거들기도 했고, 곡을 쓰면서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면서.
“그러니까 우리 다음에는 정말 우리 노래로 1위 하자.”
“1위….”
복잡했던 생각을 털어낸 듯 한결 가벼워진 얼굴의 준이 형이 멤버들을 바라보며 따듯하게 웃었다.
여러 마음이 뒤섞인 말이었지만 그 말이 의미하는 건 명확했다.
앞으로 더 멀리 더 오래 우리는 포기하지 말자는 그런 말.
“고생했다, 내 친구, 동생들.”
“뭐야, 왜 갑자기 멋있는 척해요….”
“하여튼 형은 너무 솔직하지 못한 게 문제야.”
“조용해, 울보야.”
준이 형의 다독임을 빙자한 고백에 찬이는 어색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툴툴거렸고, 결국 세빈이랑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경환 형은 모처럼 흐뭇하게 웃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금방 평소처럼 소란스러워진 우리를 포잉은 평소처럼 하찮다는 듯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지만.
정말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