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네가 남겨둔 말(6)
멤버들이 오랜만에 각자의 집에서 숨을 돌리는 사이에도 솜뭉치들은 쉬지 않았다.
우리 애들이 한 단계 올라갈 기회가 바로 지금이라는 생각에 다들 활활 불타올랐다.
그동안 억눌려있던 분노가 가장 큰 밑거름이 되어줬달까.
그냥 일단 까고 보는 인간들조차도 지금은 쉽게 들러붙지 못했다.
온갖 기사가 언래블에 호의적이었고, ‘알못’의 영향으로 악플러들은 주춤하고 있었다. ON 엔터의 적극적인 고소도 한몫하고 있었고.
영업이라는 게 워낙 조심스러운 일이라 지인들을 통해 알음알음 이어졌던 것이 이제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
솜뭉치들은 서로 의견을 나누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양한 라디오 방송에 정성스럽게 사연을 적어 이번에 큰 호응을 얻고 있는 ‘Confusion’,‘졸업식’,‘Pluto’를 신청했다.
솜뭉치들은 이번 앨범의 ‘폭풍전야’도 굉장히 좋아했지만, 대중적인 곡은 아니라는 걸 늘 아쉬워했다.
흥미를 느끼기만 하면 누구라도 금방 빠져들 수 있는 곡인데 접근성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Confusion’과 ‘Pluto’는 충분히 머글, 그러니까 일반인들도 듣고 즐길 수 있는 곡이었다. 졸업식은 지금도 꾸준히 차트에 남으면서 자신을 증명하고 있었고.
‘Confusion’은 EDM 중에서도 뭄바톤 장르의 곡이었다.
멍하니 듣고 있다 보면 괜히 아이돌에 빙의해 각 잡고 안무를 춰야 할 것 같고,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까딱거리고 싶은 그런 매력이 있었다.
타이밍만 잘 맞았다면 충분히 1위도 했을 법한 곡이라고 솜뭉치들은 자신들끼리 이야기하고는 했었다.
왜 폭풍전야로만 주로 활동하는지 소속사가 원망스럽기도 했고.
서로가 가진 정보를 나누면서 스트리밍을 장려하는 개개인의 이벤트가 SNS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간혹 덕질에 사용되는 앱에서 투표 목록에 언래블이 나오면 당장은 순위에 드는 게 어렵다는 걸 알아도 악착같이 투표를 이어갔다.
눈에 보여야 사람들이 관심이라도 둔다는 걸 다들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한편, 여러 커뮤니티의 언래블 게시판에서는 하나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지하철 광고와 옥외 광고를 위한 모금이 시작된 것.
처음 시작은 한 명의 솜뭉치가 지인들과 마음을 모아 진행한 지하철 광고였다.
광고에는 우주를 배경으로 마이크를 꼭 쥐고 환하게 웃고 있는 언래블 멤버들이 서 있었다.
그 뒤로 명왕성의 하트 무늬가 배경과 녹아들어 은은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웃고 있는 멤버들 아래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우리는 널 싫어하지 않아.
함께 빛나도록 우리가 옆에 있을게]
플루토의 가사를 본떠 만들어진 문구였다.
그 광고 소식을 들은 솜뭉치들은 뜻이 맞는 이들끼리 모금을 시작했고, 총 2가지 버전의 광고를 만들었다.
옥외 광고와 일부 지하철역에 사용될 사진, 그리고 영상으로 재생될 버전.
그리고 이런 솜뭉치들의 행보를 응원하기라도 하듯 언래블이 광고했던 허니비 사측은 새로 판매되는 비타민의 디자인에 한 줄을 추가했다.
‘우리는 널 싫어하지 않아, 언제나 응원하고 있어.’
광고에 나왔던 멤버들의 변장 모습을 뚜껑에 이미지로 넣은 한정판 에디션도 판매되었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사람을 모여들게 했고,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조금씩 언래블이라는 그룹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제 언래블은 사람들에게 무명의 남자 아이돌이 아닌, 이름도 좀 들어봤고 노래도 들어본 것 같은 그런 아이돌 그룹이 되었다.
- 걔네 그 힐링캠프에 나온 애들? 걔네 재밌더라.
- 그 알못에서 악플 때문에 고생했다는 애들 맞지?
그 현상을 주의 깊게 지켜보던 소현과 정윤은 오랜만에 단둘이 편한 술자리를 가지며 이야기를 나눴다.
“진짜 방송 한번 잘 터지면 홍보 백날 한 것보다 낫다더니.”
“그러니까 다들 그렇게 예능에 목매는 거 아니겠어요?”
기존 팬덤이 워낙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애들이 도태되지 않고 계속 치고 올라가려면 계기가 필요했고 힐링캠프는 여러모로 좋은 계기가 되어줬다.
“이번에 새벽이랑 여진우 배우한테 선물 보냈다면서요?”
“덕을 많이 봤잖아. 의도했든 안 했든 도움을 받았으면 셈을 치러야 나중에 안 서운해한다?”
꾸준히 음원 차트를 분석하던 사원의 보고를 떠올린 소현은 이게 좋은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음원 사이트의 순위는, 이상하게 탑급 아이돌들을 제외하면 보통 발라드 음악이 더 강세라는 평이었다.
“제 생각에는 컨퓨전보다 플루토나 졸업식을 더 밀었어야 했다고 봐요.”
“컨퓨전도 충분히 먹힐만한 곡이잖아. 그래서 그렇게 리팩앨범 준비 시작한 거고.”
“보고서 올렸는데 안 보셨어요?”
“…아, 몰라. 일 얘기 그만하자.”
오늘은 분명히 일 얘기하지 말자고 그냥 푹 쉬자고 합의하고 만났건만 둘 다 일 중독이었는지 금방 또 앞으로의 운영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일 중독자들은 정말 어쩔 수 없는 듯했다.
* * *
최종적으로 주어진 휴일은 3박 4일이었지만 결국 난 그 날짜를 다 채우지 않았다.
금요일 밤 그렇게 치킨과 함께 보낸 나는 누나를 꼬드겨 토요일에 같이 외출했다.
차곡차곡 쌓여있던 통장의 돈으로 무언가 해주고 싶었기에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고 꼬드겨 한바탕 쇼핑까지 끝내자 뿌듯해졌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모자를 푹 눌러쓰고 최대한 조심해서 다녀왔고 집에서랑 달리 말도 조심히 썼다.
누나는 벌써부터 연예인 병 걸렸냐고 놀렸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근사하게 스테이크까지 썰고 나니 누나는 지갑을 매만지며 희미하게 웃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선물을 해줄 수 있었다.
조금 더 비싼 것을 사주고 싶었지만, 당사자가 원치 않으니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
식사까지 끝내고 집에 도착한 누나는 자신의 방에 들어가기 전 방문을 잡고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자주 보지 못한다고 해서 너랑 내가 가족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니까 지금은 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 먼저 해.”
“어… 음. 응. 알았어.”
티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또 누나 눈에는 보였던 모양이었다.
좋은 기회가 왔다는 걸 알고 있었고, 포잉을 통해 팬들이 굉장히 힘내고 있다는 내용도 조금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직접 보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그것만 붙들고 있을 것 같아 일부러 직접 커뮤니티나 SNS를 찾아보지 않았다.
그런 내게는 실시간으로 확인해줄 수 있는 요정님이 있었고.
물론 포잉을 통해 한번 걸러진 이야기들이었기에 해가 될만한 내용은 없었다.
포잉도 조금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렇게 아직 낯선 방의 침대에 걸터앉아 생각을 정리한 나는 팀장님에게 바로 연락했다.
내 이야기를 듣고 팀장님은 잠시 고민하다 몇 가지 조건을 걸고 수락해주셨다.
그리고 그날 밤 잠들기 전 나는 누나 방의 방문을 두드렸고, 고민했던 이야기들을 모두 건넬 수 있었다.
사실 힘든 것들을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다 괜찮다고, 그냥 그렇게 알게 하고 싶었지만 언젠가는 누나도 다 알게 될 것 같다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됐을 때 서운해하지는 않을까, 상처를 주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하나둘 떠올랐기에 결국 모두 털어놓기로 마음을 정했다.
상대를 배려한다고 숨기기만 하면 더 큰 상처를 주는 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지금 멤버들을 통해 배웠기에 가능한 결심이었다.
어떤 사건들이 있었고, 어떤 대처를 했고, 그때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이 악플 사건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고 현재는 어떤 갈림길인지 조금 두서없이 생각나는 것들을 모두 늘어놓았다.
그리고 음악을 더 많이 잘하고 싶다는 말도.
누나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얼굴로 내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었고, 내 의사를 충분히 존중하겠다고 했다. 그러니 눈치 보지 말고 하라고.
그렇게 이틀 밤을 본가에서 보낸 나는 다음 날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택시에 올랐다.
포잉이 알려준 2호선 삼성역에 도착한 나는 지하철 한쪽 벽에 걸린 언래블 사진과 문구를 구석에서 멍하니 바라봤다.
예전엔 저 위치에 언래블의 데뷔 4주년 축하 광고가 걸렸던 기억하는데 지금은 우리를 응원하는 광고가 걸려있었다.
간혹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광고판을 바라보는 것도, 솜뭉치들로 보이는 분들이 그 앞에서 인증샷을 찍는 것도 모두 심장을 울렁이게 했다.
일부러 사람이 가장 없을 만한 시간을 골라 방문했건만, 삼성역은 그래도 사람이 제법 많았다.
긴 연휴라 여행 간 사람들도 많다고 했는데….
여행을 떠올리자 멤버들이 언젠가 다 같이 펜션에 놀러 가자고 한 것들과 무인도에서의 추억이 떠올랐다.
아, 무인도는 그냥 넣어둬야지. 떠올리지 말자….
사람이 줄어들 때까지 기다리며 온갖 생각을 하던 나는 한적해진 틈을 타 슬며시 다가가 인증샷을 찍었고, 재빨리 자리를 벗어나 택시에 올랐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나와서 너무 이상하게 웃고 있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익숙한 길이 보이고 숙소 건물이 보이자 그제야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이제는 원래 내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숙소에 먼저 들려 대충 짐을 놔두고 회사로 돌아온 나는 단체 채팅방에 멤버들이 남긴 메시지를 확인했다.
찬이는 누나가 괴롭힌다는 말과 어머님이 자꾸 잔소리한다는 이야기가 절반 이상이라 무시했고.
세빈이는 어머님과 찍은 사진을 올렸다. 세빈이가 어머님을 많이 닮았던 건지 굉장히 선이 고운 미인이셨다.
경환 형은 어머님이 자꾸 음식을 해줘서 곤란하다며 싸갈 테니 같이 먹자는 말을 남겨놨다.
그 메시지가 올라오자마자 다른 멤버들도 가족들이 이것저것 챙겨줬다는 말을 하며 언제 숙소로 복귀할 건지 묻고 있었다.
[간만에 가족들이랑 푹 쉬는 거니까 다들 잘 쉬다 와.]
모지리 [쉬다 와? 말이 이상한데?]
모지리 [님 어디?]
모지리 [야 너 또 내 톡만 씹냐????]
내동생 [형 숙소예요?]
[ㅎㅎ...]
멤버들의 메시지가 계속 오는 것 같았지만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꾸고 GIVE 앱 용 핸드폰을 켰다.
이미 우진 형과 팀장님에게 허락을 받았고, 회사에 있던 직원분이 체크해주기로 했기에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솜뭉치들 안녕하세요? 환이에요.”
혼자 켜는 GIVE 앱이라 손은 떨렸지만, 목소리는 다행히 무사했다.
“갑자기 켠 거라 다른 솜뭉치들이 알림 확인할 수 있도록 우리 잠깐 기다려줄까요?”
메시지 창에는 무수한 물음표와 함께 솜뭉치들이 당황한 듯 남긴 메시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그 모습이 귀여워 웃자, 모니터 아래서 나를 바라보던 포잉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 그러면 전 이거 하나만 올리고….”
솜뭉치들을 기다리는 사이, 카메라 밖에 있는 핸드폰을 들어 SNS에 아까 찍어두었던 사진을 올렸다.
(광고판 앞에서 마스크 내리고 수줍게 웃는 사진)
#항상_내편 #솜뭉치_사랑해
사진이 무사히 업로드된 걸 확인한 나는 라이브 방송의 메시지 창을 확인하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환이에요. 음, 오늘은 그냥 여러분들이 너무 보고 싶어져서 방송을 켰어요.”
자꾸만 손가락이 자기 마음대로 꼼지락거리려는 걸 책상 아래로 감추었다. 그냥 너무 쑥스러워졌다.
핸드폰 화면에 계속 불이 들어오는 걸 보니 멤버들도 GIVE 앱 알림을 확인한 건지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우연히 기회가 닿아서 여러분들이 주신 선물을 확인했는데 너무 고마운 거예요. 그래서 꼭 인사를 하고 싶어서 매니저 형을 졸랐어요.”
조금씩 생각했던 내용을 말하고 있는 그때, 메시지 창에 심상치 않은 내용이 올라왔다.
“네? ltt요? 왜요?”
메시지 창에는 많은 솜뭉치가 나에게 지금 빨리 공식 계정을 확인해보라는 문구가 올라와 당황한 나는 핸드폰을 열었다.
그리고 앱을 켜 게시글을 확인한 나는, 나도 모르게 이마를 부여잡았다.
우진 형, 팀장님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