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네가 남겨둔 말(5)
처음에는 더 많은 인원이었다.
그러다 여러 이유로 몇몇 인원이 추려지고, 남은 아이들은 아쉬워하기도, 안도하기도 했다.
또래보다 더 능숙하게 감정을 눌러놓을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연습생이라는 자신들의 위치 때문이겠지.
우진은 다른 기획사에서의 여러 경험을 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살면서 다양한 군상을 보았고, 거기엔 정말 좋은 사람도 인간 말종도 있었다.
우진은 전담이 아닌 로드로 뛰는 경우가 많았고, 그마저도 고정이 아닌 서포트였지만 그로 인해 다양한 경험을 했으니 잘된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면서 선배가 한 배우와 오래 함께할 수 있었던 건 양쪽 모두가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란 것도 충분히 이해했다.
우진은 이왕이면 이 아이들과 오랜 시간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랐다.
마음속에 남아있던 아주 작은 미련까지 선배와 기울인 술잔에 흘려보낸 우진은 그때부터 데뷔 조 아이들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어떤 부분에 주의를 줘야 할지, 어떤 서포트가 필요한지 상대에 대해 파악하는 게 먼저라는 걸 알았기에 살펴보는 걸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표님이나 실장님, 팀장님이 어떻게 이런 멤버들만 모아놨나 싶을 정도로 아이들은 순했다.
간혹 이질적인 기분이 들 때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이전에 경험한 애들보다 훨씬 순한 건 사실이었다.
음험한 소문을 내거나 왕따를 시키는 애들도 없었고, 경쟁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지만 은연 중 서로를 챙기기도 했다.
“어때, 할만해요?”
“아뇨. 힘들어요.”
소현 팀장이 다가와 어깨를 툭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물었을 때, 우진도 넉살 좋게 대꾸할 수 있을 만큼 이제는 회사에 물들어 있었다.
“아하하, 힘들지. 그럼 그럼. 이 바닥 일이 쉽지 않은 걸 잘 알고 있네.”
“하루 이틀 일한 건 아니니까요.”
“그래도 난 우진 씨가 잘 해낼 거라는 걸 알아.”
신뢰할 수 있는 상사를 만난다는 건 사회생활 중 가장 큰 행운 중 하나였고, 우진은 이번엔 꽤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우진은 멤버들을 하나둘 챙기면서 소현에게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캐스팅부터 기획까지 모두 소현의 손을 거친 탓인지 꼼꼼하게 모든 보고를 체크하고 상황에 알맞은 지시를 내렸다.
처음에는 의아한 지시였어도 조금 지나고 나면 소현의 지시가 알맞은 내용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애들은 어때?”
“하준, 영빈, 경환, 세빈이는 무난해요. 여태까지랑 비슷한데. 음, 힘찬이랑 지환이가 좀 신경 쓰이네요.”
“우빈이는?”
“…잘 모르겠어요. 성격도 좋아 보이고 열심히 하는데 좀.”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고 묻는 소현에, 턱을 긁적이던 우진은 김우빈을 떠올렸다.
적자생존의 정글 같은 게 연예계다 보니 어느 정도의 약삭빠름이나 손익을 파악하는 눈치는 있는 게 나았다.
마냥 사람 좋게 있다가는 뒤통수 맞고 매장되기 딱 좋은 게 이 바닥이다 보니 우진은 아이들이 영리하게 굴길 원했다.
인성을 중시하는 회사의 방침에 부합하기만 한다면 어느 정도 이기적인 건 차라리 다행이니까.
하지만 김우빈은 좀 애매했다.
“뭐, 잘 지켜보면 되겠지. 난 우리 매니저님 눈을 믿어볼 테니까.”
“아이고, 또 무슨 일을 시키려고 이렇게 비행기 태우시는 겁니까?”
늘 사람 좋은 얼굴로 산더미 같은 일을 시켜대는 소현 팀장을 보며 우진은 질색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우진은 그때 소현 팀장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시작부터 참 다사다난하다는 마음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은 무사히 데뷔할 수 있었다.
가장 걱정됐던 힘찬이나 지환이도 굉장히 좋아졌고.
특히나 지환이는 사고 후,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성격이 180도 바뀌었다.
그 후에도 온갖 일이 있었지만, 아이들은 실망도 하고 좌절도 할지언정 포기하지 않고 늘 꿋꿋했다.
정말 기특하게도.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는 멤버들을 보고 있자니, 우진은 그때 포기하지 않은 자신을 칭찬했다.
한동안 매니저 일에만 집중하느라 운동을 게을리해서 그런지 최근에는 피로가 잘 가시지 않았다.
멤버들이 집에서 쉬는 동안 우진도 오랜만에 부모님도 뵙고 푹 쉴 생각을 하며 노래를 틀었다.
팬들처럼 스트리밍을 시간대 맞춰서 늘 하기는 힘들었지만, 우진은 틈이 날 때마다 이렇게 언래블의 노래를 틀었다.
멤버들이 알면 부끄럽다고 난리 칠 모습이 훤해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너무 착하기만 하면 오래 살아남지 못할 텐데 하고 걱정했는데 다행히 일련의 사건들로 멤버들에게는 독기도 생겼다.
정작 자신들은 잘 모르는 것 같았지만, 팀의 일이라고 하면 다들 의욕이 하늘을 찔렀다.
무인도에서도 무사히 버텼으니 이제는 정말 어느 예능에 던져져도 잘 살아남을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는 피곤해서 빨리 눕고만 싶었던 우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멤버들 생각에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지환이 푸근하게 웃는다고 말했던 그 미소였다.
* * *
연희는 동생의 전신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아이돌인지 나발인지 한다고 까불더니 진짜로 아이돌이 되어 돌아온 동생이 늘 걱정돼서 마음 편할 날이 없을 지경이었다.
가뜩이나 나이 차가 많이 나서 어느 순간부터 세대 차이인지 그도 아니면 사춘기였던 건지 거리가 더 멀어진 동생이었다.
가벼운 말다툼이야 늘 있었던 일이지만, 어느 순간 전혀 모르는 타인처럼 낯설어졌던 동생.
잘 대해줘야지, 소중히 해줘야지, 엄마 아빠가 안 계셔도 훌륭하게 키워야지 하고 늘 마음을 다잡았던 연희는 동생이 평범하게 자라길 바랐다.
적당히 친구들이랑 사고도 치고 공부하기 싫다고 징징거리기도 하고 그러다 대학 걱정에 전전긍긍하기도 하고 그냥 그렇게.
가장 보통의 행복한 삶을 꾸리길 바랐지만 역시 마음대로 되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열심히 자기 일을 해내고 있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예쁨 받는다고 은근히 자랑을 늘어놓는 모습이 제법 깜찍하기도 했다.
그런 동생에게 차마 악플 건은 어떻게 된 거냐고 닦달할 수 없었던 연희는 양념이 떨어진 것도 모르고 좋다고 웃는 동생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평범하게 지냈으면, 이런 치킨 같은 건 아무 때나 시켜줄 수 있는데.
그러려고 죽어라 일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그런 감정들은 얼굴 위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옆에 있던 물티슈를 바보 같은 동생 놈 앞으로 쓱 밀어줄 뿐.
“칠칠치 못하긴.”
“인간미 넘친다고 해줄래?”
“제정신이니?”
하늘 같은 누나에게 한마디를 안 지고 따박따박 대꾸하는 것도 도대체 누구를 닮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연희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말해봤자 내가 누굴 보고 자랐냐며 능청스럽게 굴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배도 차고 분위기도 풀어지자 연희는 지환이 좋아하는 골드키위를 꺼내왔다.
과일은 다 잘 먹는 편이었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키위와 딸기를 그렇게 좋아했었다.
새콤달콤한 맛을 좋아하는 것 같아 동생이 주말에 집에 들른다고 연락을 한 날 과일을 잔뜩 사다 냉장고에 챙겨두었다.
가뜩이나 가느다란 몸이 자꾸 살을 빼대더니 더 곯아 보여서 얼마 전 보약을 보낸 참이었다.
한량처럼 소파에 널브러진 몰골은 흉했지만 그래도 집이라고 풀어진 건가 싶어 짠하기도 했다.
방송이나 영상을 통해 본 동생은 늘 긴장한 듯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바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눕는 걸 좋아하는 앤데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걱정스러웠다.
“괜찮아?”
“응? 맛있는데?”
“아니, 키위 말고, 이 모자란 놈아.”
키위가 마음에 들었는지 잘 집어먹는 걸 보며 한참을 망설이던 연희가, 마저 하나 더 깎아서 잘라주며 물었다.
악플 그거 괜찮냐고.
하지만 회사에 눈치도 두고 온 건지 헛소리를 해서 연희는 속이 답답해졌다. 만약 자기 팀 사원들이 저렇게 눈치 없는 애였다면 정신 교육을 다시 해줬을 텐데, 안타깝게도 동생 놈이었다.
그리고 저 동생 놈은 그나마 집에서라도 편히 쉬어야 했다.
연희는 언젠가 날을 잡아서 세상의 쓴맛에 대해 교육을 단단히 해야겠다고, 그래서 정신을 강하게 키워야겠다고 그렇게 다짐을 했다.
“아, 그거.”
재차 묻자 그제야 연희의 말을 이해한 건지 금세 흐려지는 얼굴에 괜히 말을 꺼냈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자기 입으로 말하기 껄끄러웠던 걸까.
잠시 머뭇거리던 지환이 어색하게 웃었다.
“이제 괜찮아. 그리고 진짜 인터넷 안 하거든.”
“진짜?”
“응. 거기에 쏟을 시간도 없고, 차라리 그 시간에 잠을 자는 게 이득이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요즘엔 언제 어디서나 자기가 원하는 정보를 찾아볼 수 있다.
게다가 회사가 관대한 편이라며 데뷔하면서 스마트폰을 최신형으로 바꿔줬다고 자랑을 해대길래 걱정했는데, 정작 그런 주제에 쓰지는 않는 듯했다.
다행이긴 하지만 그만큼 바쁘다는 방증이기에 걱정스러웠다.
“요새는 어떻게 지내는 거야?”
“음….”
장난치듯 키위를 포크로 쿡쿡 찌르던 지환은 무언가를 고민하듯 잠시 말을 아꼈다.
“먹을 거 가지고 장난치지 말고.”
“알았어.”
불쌍한 키위를 괴롭히지 말라고 혼냈더니 씩 웃으며 이미 반 토막이 난 키위 조각을 삼켰다.
키위를 다 삼킨 지환은 천천히 자신의 하루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어떻게 보내는지, 친구들과는 어떤지.
그 후 회사에서는 스케줄이 없을 때 어떤 연습을 하는지, 또 간혹 멤버들이 어떤 장난을 쳤는지, 즐겁다는 얼굴로 이야기했다.
듣기만 해도 피곤해질 만큼 가혹한 스케줄이 이어지는 도중에도 지환은 그 모든 게 기꺼운 듯 행복해 보였다.
연희는 그동안 내내 기사와 커뮤니티의 반응, 그리고 회사에서 전한 이야기와 방송을 모두 꼼꼼하게 체크했다.
회사에서 고소 접수한 상당한 인원 중에는 연희가 직접 제보한 작자들도 있을 것.
그래서 다행이었다.
얼마나 지독한지 꽤 멘탈이 강한 편인 연희가 보기에도 역해서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았던 말들도 많았다.
그런 것들이 동생과 동생의 팀 애들에게 닿지 않았다면 연희는 그걸로 족했다.
“그래. 학교 공부도 너무 놓지 말고.”
“어…. 그건 좀 노력을 해볼게.”
공부 얘기를 꺼내자 그제야 또래 같은 얼굴이 돼서 허둥지둥하는 모습에 연희는 소리 내 웃었다.
* * *
누나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러있었다.
늘 평가된다는 걸 머릿속에 박아놓고 살다가 그나마 다 내려놓을 수 있는 게 이곳이라는 건 조금 우습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다.
익숙한 듯 낯선 침대에 누워 품에서 이미 졸고 있는 포잉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제는 더 많이 뻔뻔해진 건지 아니면 적응이 된 건지 누나를 부르는 것도, 지금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도 제법 편하게 말이 나왔다.
하지만 온전히 이전 지환의 공간이었던 이 방은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누나가 틈날 때마다 청소를 해두는 건지 방은 올 때마다 깨끗했지만, 사람이 사용하지 않는 공간 특유의 한기가 돌았다.
숙소 침대보다 조금 더 작은 침대에 누워 주고받았던 대화들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지환이 기억 속에서도, 그리고 내가 봐온 모습에서도 늘 자신만만하고 당당해 보였던 누나가 힘겹게 꺼낸 괜찮냐는 질문이 ‘쿡’하고 가슴에 깊이 박혔다.
솔직히 지금 누나가 걱정하고 기특해하는 삶은 모두 내가 만들어낸 것들이다.
데뷔하고 방송에 참여하고, 곡을 쓰기도 했고 쇼에 서기도 하고.
그 모든 건 내 노력이었다.
그래서 누나의 서툰 위로도 뿌듯함이 서린 표정도 전부 기꺼워서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품에서 졸던 포잉을 꽉 끌어안자 조는 와중에도 불편했는지 바르작거렸다.
‘미안미안. 포잉, 잘자.’
무어라 갸르릉거리는 울음의 뜻은 알 수 없었지만 어딘가 다정해서, 그 작은 정수리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나는 제법 잘 하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