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네가 남겨둔 말(4)
처음 회사 예상과 다르게 Pluto의 순위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미니 앨범 여로의 판매량이 한동안 주춤했다가 다시 늘어나고 있다고.
그 때문에 요 며칠 사무실은 축제 분위기였다. 드디어 우리가 고생한 일들이 빛을 보는 거라고 기뻐했고, 대표님이 특별 보너스까지 넣어주셨다는 소문도 돌았다.
하지만 정작 멤버들은 평소보다 조금 더 차분한 분위기를 풍겼고, 연습에 더 몰두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리 음악만으로 사랑받은 게 아니라 회사, 방송 등 여러 요소 덕분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들뜨지 말고 더 열심히 연습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
다만 멤버들의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더 차분해진 것은 반복된 인터뷰로 지친 탓도 있었다.
좋지 않은 일들을 여러 번 말해야 하다 보니 나도 멤버들도 정신적인 피로가 상당했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멤버들도 나도 습관적으로 음원 차트를 확인할 정도로 기뻤다.
다들 아닌 척하지만 틈날 때마다 핸드폰으로 순위를 확인해보고 새로고침하는 걸 알고 있었다.
순위를 볼 때마다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는 것도.
전에는 회사에서 보여주는 지표만 확인할 뿐 순위를 확인하지 않았었다. 멤버들이 어떻게 그 유혹을 지금까지 참았던 건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멤버들은 잘 숨긴다고 숨겼지만, 내게는 요정님이 계셨다.
포잉은 숙소와 회사를 본인의 영역으로 여겨서 틈틈이 구석구석 돌며 순찰 비슷한 행동을 했다.
미리 확인을 해둬야 또 이상한 놈들이 나오기 전에 대비할 수 있다면서 하는 행동이라 말릴 수 없었다.
그러면서 멤버들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의 모습을 전해주기도 했다.
예를 들면 사내에서 무섭기로 소문난 홍보전략실 김 과장님이 아내분과 통화할 때는 다른 사람이 된다든가.
배우실 어떤 매니저님이 우리 팀 가희 누나를 짝사랑한다든가….
이렇게 얘길 하니 동네 이장님도 아니고 뭔가 싶지만 포잉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툭툭 튀어나오는 내용이라 반응하기도 애매했다.
춤 연습이 끝나고 열이 올라 후끈거리는 몸을 연습실 바닥에 들러붙어 식히던 우리는 팀장님의 부름에 몸을 일으켰다.
“얘들아, 다 모였니?”
“넵!”
“그래. 정산금은 다들 확인했지?”
“아뇨? 아직이요.”
“앗! 깜박했어요!”
“세상엔 은행 앱이라는 좋은 기능도 있단다….”
소현 팀장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한숨과 시선에 많은 말이 담겨있었지만,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냥 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정신없었으니까 그러려니 하자. 큰 금액은 아니지만 그래도 첫 정산금이니까 가족들이랑 맛있는 거 먹고.”
“한우 먹을 거예요!”
“그래그래, 많이 먹고 사고만 치지 말고.”
황금연휴라 불리는 올해 추석을 며칠이라도 가족과 푹 쉬고 오라는 회사의 배려였다.
정작 추석 당일은 일정이 있었고 그 후에는 바로 팬클럽 창단식이 있었다. 우리 컨디션 회복을 위해 몸도 정신도 숨을 돌릴 필요가 있으니 다시 몰아치기 전에 충전하라는 듯했다.
회사에서 말하길 원래 ‘Pluto’의 음방 출연은 NBS 뮤직타임에서만 할 생각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케이블 중 한 곳에서 추석 특집 프로에 참여 예정이었던 우리에게 분량으로 딜을 걸어왔고 실장님이 직접 협상하고 오셨다.
다음날 실장님은 정말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출근했고, 늘 은은한 향수 냄새가 났던 실장님에게서 술 냄새가 났다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우진이나 나한테 연락하고. ”
“걱정 마세요. 저희 어차피 집에 가도 집 안에만 있을 텐데요, 뭐.”
해맑은 찬이 대답에 우진 형이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이 되었지만 이내 포기한 듯했다.
아마 우리 모두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게 우리는 각자 본가로 흩어졌다.
하준 형이 이번에는 너무 일찍 숙소로 도망 오지 말고 집에서 푹 쉬라고 했지만, 과연.
누나에게 미리 메시지를 보내놓은 나는 대표님이 직접 챙겼다던 한우 선물 세트를 든 채 처음보다는 조금 더 담담한 마음으로 문 앞에 설 수 있었다.
처음 깁스한 다리로 쩔뚝거리면서 걸었던 길을 지나쳐오는 내내 생각보다 잠잠한 내 감정에 안도했다.
그때는 이 길이 너무 버거웠었는데.
“누나, 나왔어.”
“왔어?”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자, 편한 복장의 누나가 앞에 서 있었다.
정확히 몇 시에 간다는 말을 안 했는데 이렇게 지키고 선 걸 보면 계속 기다렸나 싶어서 쑥스러웠다.
“밥은?”
“아직 안 먹었지. 자, 선물이야.”
“회사에서 준거야?”
“응. 우리 잘했다고 대표님이 고르셨대.”
빤딱빤딱한 빛을 내는 촌스러운 금색 보자기에 싸인 한우.
그걸 본 누나 얼굴에도 뿌듯함을 닮은 어떤 표정이 잠깐 떠올랐다 사그라들었다.
참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라니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딱히…. 시간도 늦었고 그냥 반찬 있는 거랑 계란프라이 해서 먹을래.”
연습을 끝마치고 흩어진 거라 집에 도착하고 나니 9시였다.
평소라면 누나는 이미 저녁을 먹었을 시간.
“반찬 없어. 시킨 거 내일 온다. 시켜 먹자.”
“안 먹었어?”
“어. 아까 바빴어.”
우리는 이제 서로에게 하나뿐인 가족이지만 살갑게 다정하게 이야기하지는 못했다. 그러기엔 각자의 성격도 입장도 달랐다.
그랬기에 그저 툭툭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에 차마 말로 다 풀어서 해주지 못한 마음을 조금씩 나눠서 얹는 게 최선이었다.
“나 온다고 신경 안 써도 된다니까?”
“누가 너 온다고 신경 썼대. 그냥 집에 먹을 게 없어서 시킨 거야.”
“평소에는 뭘 먹고 지내는 거야…. 아 참, 나 정산받았어.”
“잘했네, 아껴 써. 잘 모아놓고. 주식은 절대 하지 마라.”
누나는 돈은 함부로 쓰면 어떤 패가망신을 당하게 되는지, 도박하는 인간들은 어떤 인간인지를 무서운 얼굴로 이야기했다.
한바탕 잔소리가 끝나고 배달 앱을 보며 메뉴를 고심하던 나는, 그동안 어떤 연예인들을 만났는지, 얼마나 재밌었는지, 정산받은 금액이 얼마나 되는지 철부지처럼 늘어놓았다.
내가 이렇게 자랑처럼 늘어놓는 이야기를 누나가 어떤 얼굴로 듣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웃음을 참는지 입꼬리가 실룩거리는데도 꿋꿋하게 웃음을 참아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악플 관련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들었다.
분명 방송을 봤을 텐데 먼저 나서서 입에 올리지 않는 누나다운 배려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아, 우리 이번 곡 15위까지 올라간 건 알아?”
“12위야.”
“응?”
“9시 기준 12위였다고, 바보야.”
“….”
설마 시간마다 순위 체크하고 있는 거 아니겠지?
내가 본 건 최종 연습 전 확인한 거라 9시 기준 순위는 모르고 있었다.
관심 없는 척, 나한테 앨범과 포토 카드 모으는 것을 숨겼던 것처럼 그렇게 언래블 덕질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역시 네 누나라는 인간이 더 똑똑한 것 같다, 계약자 놈아.’
‘포잉, 조용히 해….’
‘흥.’
순간 할 말을 잃은 나는 갈 곳을 잃은 시선을 배달 앱에 둘 수밖에 없었다.
“치킨 괜찮지?”
“응. 난 양념으로.”
태연한 얼굴로 배달 앱을 이리저리 넘기고 있는 누나 얼굴을 괜히 원망스레 한번 쳐다보고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원래는 음원 순위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면서 슬쩍 봉투를 누나에게 밀어주려고 했던 건데 일이 이상하게 꼬여버렸다.
빨간 내복을 사주면 집 밖으로 쫓겨날지도 모르는 터라 무언가 다른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이것저것 다양한 선물을 찾아봤지만… 가장 중요한 건, 지환은 누나의 취향을 거의 몰랐다.
그나마 화려한 것보다는 개성 있는 걸 더 선호한다는 것 정도가 다였다.
이전 생의 누나 취향과 지금 누나 취향이 일치한다는 보장도 없었고, 어설프게 사서 안 쓰는 걸 선물하는 건 아쉬웠다.
그래서 고민하고 고민하다 결국은 현찰이 최고라며 봉투만 골랐는데 지금 그걸 꺼내기엔 무언가 기분이 이상했다.
나중에 기회를 봐서 몰래 놔두고 가던가 해야 할 것 같았다.
* * *
우진은 멤버들을 직접 데려다주고 싶었지만, 극구 어서 퇴근하라고 등 떠미는 통에 포기하고 택시를 불러주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동안 꽤 여러 회사를 거치며 로드 경력도 제법 있었던 우진이 ON 엔터에 처음 입사 지원을 했던 건 그나마 ON 엔터가 안정적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로드 매니저들은 언제나 박봉이었고, 월급에 비해 업무는 과도하게 많았다.
수면 시간은 늘 부족했고, 피로가 풀릴 틈이 없었다.
처음에는 우진도 불꽃에 홀린 나방처럼 화려함에 홀려 이쪽 세계에 발을 들였었다.
친한 동기가 괜찮은 직장이라며 취업 걱정을 하던 우진을 꼬드긴 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당시에는 그런 걸 깨달을 눈치가 부족했다.
결국 그 동기는 우진을 꼬드긴 후로 며칠 지나지 않아 출근하지 않았고 우진은 아는 것도 아는 사람도 없는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늘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자신의 삶도 그렇게 흐르게 두었던 우진이었지만 그때만큼은 모든 게 막막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일이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바빴다는 것. 그리고 처음 일을 가르쳐준 사수가 말은 투박하지만 속은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10년째 한 배우의 매니저를 하고 있으면서 틈틈이 다른 후배들의 교육을 돕는다고 했었다.
우진은 매니저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그때 그 선배를 통해 전부 배웠다는 걸 지금에 와서는 알 수 있었다.
연예인과 매니저의 관계는 악어와 악어새 같기도 했고 미술품과 보안장치 같기도 했다.
그만큼 무어라 단정 짓기는 어려웠지만 뗄 수 없는 관계였으니까.
우진은 그동안 직장 운이 없는 편이었다.
우진이 체대를 나온 터라 덩치가 좋아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사람 운이 나쁘지 않았던 건지 대놓고 괴롭히는 사람들은 없었다.
다만, 회사가 자꾸 폐업하는 바람에 재취업하느라 여러 회사를 거쳐야 했을 뿐.
아버지는 일이 너무 고되지 않냐며 차라리 기술을 배우는 걸 원하셨지만, 우진은 무언가 그 뿌리를 알 수 없는 허전함을 해결하고 싶었다.
일 자체도 생각보다 적성에 맞는 듯했다.
원석이 보석이 되어가는 그 가공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즐거웠고 남다른 세상의 한쪽을 보고 있는 것도 흥미로웠다.
우진은 일을 한 시간이 쌓일수록 처음 일을 가르쳐준 선배가 더 자주 떠올랐다.
언젠가는 그렇게 오래도록 함께할 파트너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감.
그러다 만난 게 언래블이었다.
처음에 마주한 건 연습생 시절이었다.
주눅 든 아이들도 있었고 벌써 스타가 된 것처럼 들뜬 애들도 있었다.
그렇게 많았던 연습생들이 추려지고 데뷔 조가 꾸려지면서 소현 팀장님이 우진을 전담으로 추천해 조금 놀랐었다.
소현 팀장이 자신을 믿고 같이 갈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는 건 예상치 못했던 일이니까.
데뷔조가 추려진 후부터는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천성이 진득한 터라 일하면서 불평불만 해본 게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전담 매니저가 되어 애들을 챙기는 건 생각보다 더 고됐다.
몇몇 아이들은 튀어나온 못이 되기도 했고, 또 어떤 애들은 하지 말라는 일은 꼭 기억했다가 반드시 해내곤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런 애들이 사라졌다.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바로 직전에.
한번 고비를 넘기고 나니 남은 멤버들을 챙기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나마 여러 면에서 좋게 평가했던 애들만 남기도 했고, 남은 멤버들은 이제 최종 평가를 받는 본인들의 입장을 이해했으니까.
우진은 나중에서야 그게 소현과 정윤 두 사람이 정리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연습생 애들에게 정을 주는 걸 겁내고 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날 우진은 자기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져 그때 그 사수 선배를 찾아 술을 진탕 마셨다.
“얼굴이 훨씬 좋아졌네.”
“다행이네요.”
자신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머릿속 고민을 털어낸 우진을 보며 소현은 훨씬 좋아졌다고 어깨를 두드렸었다.
우진은 그렇게 언래블이 될 연습생 멤버들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