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Guilty(4)
연희는 동생인 연진과 끊임없이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하나씩 차례대로 공개되는 멤버들의 짧은 녹화 영상을 반복해서 보고 있었다.
처음 미궁 탈출을 통해 언래블을 알게 되었을 때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아이돌에 빠지게 될 줄 몰랐다.
그냥 눈이 가는 아이돌이었을 뿐인데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기사가 뜨면 빠짐없이 챙겨보고 노래를 듣고 영상을 보고 있었다.
“이게 다 연진이 때문이야.”
다음 영상을 기다리던 연희는 푸념처럼 애꿎은 동생을 욕했다.
동생이 들었다면 펄쩍 뛰면서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연희에게 욕을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언래블을 몰랐다면, 그들이 이렇게 사랑스럽고 빛나는 애들이라는 걸 몰랐다면 연희 삶은 지금처럼 다양한 색과 감정으로 빛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만큼 이렇게 심장이 아프고 속상해서 마음이 새카맣게 타는 것 같은 기분도 없었겠지.
한순간에 확 시선을 사로잡은 게 아니었다.
동생이 주는 영상들을 하나하나 보다 보니 그저 자연스럽게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영상 너머의 언래블은 언제나 애틋한 눈을 하고 솜뭉치들! 하고 외치곤 했다.
저게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눈이라는 걸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언래블과 솜뭉치는 서로가 애틋하고 귀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마치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툭하면 마음을 고백했다.
이렇게 건전하게 마음을 주고받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이제는 연희도 알고 있었다.
우리 애들을 괴롭히던 망둥이 닮은 그놈들 같은 아이돌이 있는가 하면, 언래블처럼 자기 팬이 너무 귀해서 좋아죽겠다는 얼굴을 한 아이돌도 있었다.
그리고 문득 연희는 자신이 언래블을 자연스럽게 우리 애들이라고 지칭했다는 걸 깨닫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연희는 최근 초록우산 재단을 통해 정기 후원을 신청했다.
후원이라는 건 그동안 연희에게는 조금 먼 이야기 같았다.
다달이 빠듯한 월급으로 홀로 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고, 후원을 시도하려 해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다.
후원단체를 믿을 수 없다는 것도 꽤 큰 이유였지만.
하지만 언래블이 어린 친구들을 돕고 싶어 한다는 인터뷰를 본 후 SNS를 통해 팬들이 후원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마음을 먹었다.
‘선한 영향력’
다른 연예인들의 미담이 기사로 뜰 때는 그렇구나 하고 시큰둥하게 봤던 내용이었지만, 당사자가 되니 마음이 또 달랐다.
한 달에 치킨 한 마리 덜 먹으면 우리 애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연희는 인터넷에 후원을 검색하고 있었다.
유명한 몇 군데의 홍보물을 확인했지만 이왕이면 우리 애들이 함께한 곳을 이용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국내 아동과 해외 아동 사이 잠시 고민했지만, 이왕이면 국내의 아이를 돕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연희의 하루하루가 이전보다 조금 더 활기차졌다.
사회의 부조리함을 실시간으로 겪는 회사 생활 중에는 틈틈이 애들이 세상이 두려웠다고 고백하는 노래를 들으며 마음을 달랬다.
차장 놈이 연희를 이유 없이 갈굴 때는 ‘폭풍전야’를 들으며 분노의 사표를 쓰다 마음을 가라앉혔고.
악질 악플러들에 대한 처음 공지에는 그걸 왜 봐준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화를 냈지만, 이후 강경 대응 공지에는 기쁨의 치맥을 즐겼다.
나이가 들고 따로 살면서 조금 소원했던 여동생과도 언래블이라는 연결고리로 사이가 부쩍 좋아졌다. 동지애라고 해야 할까?
특히 이슈 타임의 기사를 본 순간에는 눈앞이 하얘지는 기분을 느꼈다. 오갈 곳 없는 분노가 터져 나왔고, 눈앞에 그놈들이 있다면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었다.
마찬가지로 분노한 동생 연진과 2시간 동안 통화하면서 그놈들을 어떻게 죽일지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저주를 퍼부었을 정도였다.
결국, 그날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커뮤니티와 SNS에서 자신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미친 듯이 분노를 토해내며 마음을 눌렀지만.
ON 엔터가 제발 시원하게 사이다로 샤워시켜줬으면 좋겠다고 빌었고, 그런 연희를 위로하듯 위캠의 공식 채널에는 경환의 영상이 올라왔다.
그러더니 10분 후 막내 세빈이의 영상이, 그리고 또 10분 후에는 영빈이 영상이 올라왔다.
모든 멤버들의 영상을 수십 번을 반복하며 풀 버전을 기다리던 연희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풀 버전을 안 주는 거야?”
ON 엔터는 팬들을 애타게 하는 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짧게 짧게 들었을 때도 너무 좋았지만, 역시 풀 버전이 듣고 싶었다.
그나마 영상도 경환의 영상만 조금 길었지 나머지 멤버들의 영상은 더 짧아서 애가 탔다.
이런 모습은 비단 예나나 연희, 연진의 일만은 아니었다.
그 시간 많은 솜뭉치들에게서 비슷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 * *
‘포잉, 어디 갔었어?’
‘잠깐 요정계에 다녀옴.’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포잉은 솜뭉치들에 보여줄 짧은 영상을 다 찍고 각자 개인 연습을 위해 흩어졌을 때야 나타났다.
조금 지쳐 보이기도 했고 무언가 짜증 나 있는 것 같았다.
무릎 위로 폴짝 뛰어오른 포잉을 얼른 품에 안고 천천히 머리부터 엉덩이까지 쓰다듬어주었다.
‘계약자 놈아, 인간은 너무 어려운 것 같다.’
‘맞아. 나도 너무 어렵더라. 근데 나한텐 포잉도 어려운걸?’
‘내가 뭘?’
쓰다듬는 대로 축 늘어져서 골골대던 포잉이 어렵다는 말에 고개를 휙 돌려 날 쳐다봤다.
그게 또 귀여워서 포잉의 앞발을 잡고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포잉이 뭘 좋아할지, 어떻게 하면 포잉에게 도움이 될지, 언제쯤 날 좋아해 줄지, 늘 어려워.’
‘…낯부끄러운 얘기를 참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얼굴 가죽이 두꺼운 계약자로다.’
‘가끔 이렇게 할아버지처럼 말할 때는 포잉이 몇 살일까 궁금하기도 하지.’
쳇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휙 돌린다. 뭔가 토라진 아이 같아서 뒤통수에 뽀뽀해주고 싶었지만, 싫어할까 봐 열심히 쓰다듬기만 했다.
요정들의 일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저 내 몫을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지만, 간혹 포잉이 너무 힘든 건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날 위해 고생하는 포잉에게 츄르도 줄 수 없어서 더더욱 속상한 걸지도 모르겠다.
중급 요정 이상이 돼야 사람들이 사는 곳의 음식을 먹어볼 수 있다고 했다. 그때부터는 실체화해서 계약자의 옆에 있어 줄 수도 있다고.
아직 정식 중급 요정이 되지 못한 포잉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어딘가 싶었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만지고 체온도 느낄 수 있으니까.
‘영상, 포잉이 한 거지?’
‘무슨 영상?’
‘모른 척해도 소용없어, 포잉 님.’
‘개미핥기 영상이라면 그 정도는 요정한테는 아무것도 아님.’
‘응, 고마워. 영상이 퍼져서 여러모로 회사에 도움이 됐대.’
고개를 돌려놓고 내 말에 따라 움찔거리는 귀가 귀여웠고, 은근슬쩍 부드럽게 팔을 쓰다듬는 꼬리가 사랑스러웠다.
‘그렇지만 혹시라도 포잉에게 부담이 가거나 위험한 거라면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난 그냥 포잉이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거든.’
‘위험한 거 아니니까 걱정 마라, 계약자놈아.’
‘응. 우리 포잉님 짱이네.’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포잉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부끄러워하고 있지 않을까 하고 상상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포잉의 앞발에 뽀뽀했다.
그러다 한대 얻어맞았지만, 이 정도야 뭐.
* * *
“너 이거 물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나도 모르게 그런 거야!”
“이리 와!”
찬이는 불안했는지 또 손을 입으로 가져갔고, 손톱을 물자마자 영빈 형은 그런 찬이 손을 잡아 빼면서 잔소리와 함께 핸드크림을 치덕치덕 손에 발라줬다.
핸드크림 먹고 싶으면 어디 한번 계속 물어뜯어봐라 이런 마음인 것 같은데 깨갱하는 찬이 얼굴이 재밌었다.
“라이브로 한다고 생각하니까 떨린다….”
“너무 연습 안 된 곡을 그냥 하는 거 아냐, 우리?”
“가사 헷갈린다, 잠깐만.”
그 옆에는 준이 형과 경환 형이 촬영을 앞두고 불안해하며 목을 풀고 있었고, 내 옆에는 찰싹 붙은 세빈이가 있었다.
“세빈아, 너는 안 떨려?”
“포기하면 편해요, 형.”
“…. 아냐 세빈아, 그러면 안 된다!”
“하하,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세빈이는 긴장을 안 했나 싶었더니, 과도하게 긴장해서 정신이 나가버린 것 같았다.
우리는 연습 시간이 충분하지 못했던 탓에 라이브 방송을 걱정했지만, 팀장님은 괜찮다며 밀어붙이셨다.
분위기가 우리에게 우호적일 때, 적절한 행동을 하는 건 여러모로 득이 될 거라는 말을 하면서.
노래가 가진 힘을 무시하려는 건 아니었다.
노래 한 곡이 삶에 지친 나에게도 큰 위로로 다가왔던 날들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잘 부르고 싶었다.
카메라가 세팅되고 무대 위에 우리 인원수만큼의 스탠딩 마이크가 준비되면서 무대 아래서 준비하던 우리는 홀린 것처럼 무대에 올랐다.
나도, 멤버들도 무대에 선다는 게, 팀원들과 화음을 맞추고 함께 하나의 노래를 부른다는 게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일인지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평소처럼 각자의 자리에 선 우리를 바라 보며 소현 팀장님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었다.
“걱정하지 마, 그냥 평소처럼 하면 돼. 처음 시작은 대본 준대로 하고.”
“네. 잘할게요.”
“걱정 마세요!”
우리끼리 불안해질 때도 늘 여유만만한 팀장님의 미소나 푸근하게 웃는 우진 형을 보면 마음이 진정되곤 했다. 이유도 잘 모르지만, 그냥 잘 될 것 같았다.
노래를 부르는 건 우리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부족함 없이 채워주는 건 다른 분들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니까.
팀장님이 카메라에 잡히지 않을 만큼 뒤로 물러났고, 카메라에는 빨간 불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함께 풀어나가는 미래, 언래블입니다!”
바로 전까지 긴장감 가득했던 분위기는 어느새 풀어지고 없었고, 우리 멤버들은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향해 인사했다.
“요새 여러 이야기가 많아서 우리 솜뭉치들이 걱정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저희는 인터넷을 안 봐요! 걱정하지 마세요!”
“세빈아, 천천히 말해야지.”
“열심히 연습하고 공부하느라 인터넷을 볼 틈이 없으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찬이는 공부는 열심히 안 해요, 속지 마세요.”
내가 사랑하는 여러 목소리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시작부터 너무 언래블스러워서 팀장님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세빈이나 찬이가 말한 것처럼, 저희는 아직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아서 다른 곳에는 신경을 잘 못 쓰는 상황이에요. 하지만 우리뿐만 아니라 소중한 우리 팬들이 상처받는 건 더 견디기 힘들거든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기로 했어요. 회사는 회사의 방침대로 일을 진행할 거고 저희도 동의했고요.”
직접적인 고소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회사의 행보에 대해 분명한 목소리로 우리도 지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곡을 만들고 노래를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모든 멤버들이 다 같이 달려들어서 여러분께 드릴 선물을 준비했어요.”
”완벽하게 준비하고 싶었는데 마음이 너무 급했어요. 실수해도 예쁘게 봐주세요!”
카메라를 향해 윙크하는 찬이 모습에 우진 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게 눈에 들어와서 나도 모르게 웃었다.
우진 형은 지금 자기 머리 위에 고양이 요정 한 마리가 올라타 있는 걸 모르겠지?
“Pluto, 시작할게요.”
영빈 형의 목소리를 신호로 우리가 밤새 만들었던 곡의 전주가 흘러나왔다.
우리 마음이 노래를 듣는 모든 사람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며 눈앞의 마이크를 움켜잡았다.